[세하루나] 루나는 오늘도 고백을 연습한다. - 1
루시터 2019-02-08 7
이른 점심을 마치고 회의실에 돌아온 지 한 시간이 지났다. 근래에 들어 줄어든 임무 탓에 오늘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중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고 있었고, 나른한 오후의 기운이 졸음을 몰아온다. 평소였다면 긴장을 풀고 소파에서 잠이라도 청했을 터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평소와 달랐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심적인 상황이 말이다.
“하아, 오늘도 한가하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게임기를 테이블에 놓고는 중얼거렸다. 딱히 아무런 의미도 없는 혼잣말. 그저 신경 쓰지 않고 넘기면 될 혼잣말이었다. ···다만,
“그, 그렇네요.”
다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그의 혼잣말을 나는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아, 루나 너도 심심한 모양이네.”
혼잣말에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에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순히 그가 바라보는 것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됐다.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됐다. 당장이라도 긴장감에 혀를 깨물 것만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거였다.
“···최근에는 임무도 많이 줄었으니까요. 계속 대기만 하는 것도 질려버렸어요.”
다행이다. 나름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 정도면 그도 내가 자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확실히, 난 게임을 하면 되지만 루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니까. 심심하면 나타처럼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때?”
“아뇨, 괜찮아요. 언제 임무가 생길지 모르잖아요.”
거짓말이다. 사실은 임무보다도 그와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물론 그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런 내 생각을 그가 알게 된다면 그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리고 두렵기도 했다. 행여 거부라도 당할까 봐. 그리고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내가 평소처럼 흘러보낼 수 없을 거 같아서.
“···이세하 요원이야말로 게임은 그만두고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때요? 가끔은 가벼운 운동도 필요한 법이에요.”
원치 않은 상상을 했기 때문일까. 조금은 가시 섞인 말투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이건 나의 안 좋은 버릇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의 가시 섞인 말투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준다는 점이었다.
“운동이라면 차원종들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사실 이세하 요원의 게임 문제에는 운동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지만요.”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아. ···그보다 말이야. 언제까지 그런 호칭으로 날 부를 생각이야?”
“그런 호칭이라뇨?”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세하 요원이라니, 너무 딱딱하잖아. 같은 팀이 된 지도 꽤 지났는데 조금은 편하게 불러도 괜찮잖아.”
“제.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든지 상관없잖아요. ···아니면, 원하는 호칭이라도 있는 거예요?”
나는 내심 기대를 하며 물었다. 사실 내 쪽이야말로 그를 부르는 호칭을 바꾸고 싶었다. 물론 솔직하지 못한 내 성격상 먼저 제안을 하는 건 무리였지만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처럼의 권유에 굳이 싫을 척을 하지 않고 그저 알겠다고만 하면 될 상황이었다.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솔직하지 못한 내 성격은 이러한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럴 때는 그에게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나에게 다가와 주길 간절히 바랐다.
“딱히 원하는 호칭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네가 나를 편하게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지.”
“편하게 부르라고 해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걸요.”
“말 그대로 편하게 부르면 되잖아. 내가 오세린 선배에게 하는 것처럼 선배라던가, 아니면 소마가 나한테 하는 것처럼 오빠라던가.”
“오, 오빠라니! 제가 이세하 요원을 오빠라고 부를 리가 없잖아요!”
아, 또다시 속마음을 숨기고 말았다. 사실은 정말 그렇게 불러도 되냐고 묻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열 낼 일도 아니잖아. 나이 차이를 보면 이상한 것도 아니라고?”
“그, 그건 저도 알아요! 단지···.”
단지 부끄러울 뿐이다. 소마처럼 별다른 의식 없이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도, 하다못해 같은 위치의 선후배 사이가 되는 것조차도, 나에게는 부끄럽고 겁이 나기만 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반대로 가까워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째서냐고 물으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어라 딱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배회하는 기분이다.
“단지 뭐?”
그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다. 항상 완전무결을 외치던 나는 이렇게 많은 결점이 존재했다. 지금처럼, 좋아하게 된 사람에게 진심을 보일 수도 없는 결점이 말이다.
“···루나, 네가 싫다면 억지로 바꾸지 않아도 돼. 강요처럼 들렸다면 미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가 나에게 사과를 했다. 그의 사과는 오히려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또다시 오해가 쌓여간다. 그리고 그 오해는 언제까지고 풀리지 않겠지.
“···그게 아니에요.”
하지만, ···사실은 정말로 싫다. 완전무결하지 않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 저 사람에게만큼은 오해가 생기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속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결코 내 모든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저 지금만큼은 그에게로 한 걸음, 그저 한 걸음만을 다가가고 싶었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파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내가 그만큼 그를 좋아하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실은 조금 부끄러웠어요. 저는 솔직하지 못하거든요···. 만약 괜찮다고 한다면, ···저도 바꾸고는것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나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침착했다. 두려움에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 또한 나를 정면에서 바라봐주었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할 뿐이었다.
“···그러냐. 아··· 저, 그러니까, ···미안.”
“···어째서 사과하는 거예요.”
“아니··· 뭐랄까, 내가 섬세하지 못했다고 할까···.”
“그쪽은 항상 섬세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괜찮은 거예요? 호칭···.”
난감한 얼굴을 하는 그의 모습에 조금 두려움을 느꼈지만, 다행히 그는 “네가 괜찮다면···.”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다행이다. 아마 그대로 나를 보고 있었다면 다른 감정 또한 들켜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어색한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지는 못한 채로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방안의 유일한 소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여전히 무어라 콕 집어서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감정이 기분 좋은 감정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다. 비록 내가 말하는 용기는 단순히 그를 부르는 것뿐이었지만, 이는 나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조금 지나치게 의욕적이었던 내가 실수를 하게 된 것은.
“단순한 인사치레일 뿐이지만··· 뭐,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세하··· 오빠···.”
···앞서 나가버린 기분이다. 그것도 꽤 많이. 뭐랄까, 순간적으로 내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모양이다. 어째서 곧바로 호칭을 바꿔버린 거지? 아니, 호칭을 바꾼 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목적이었고 그 또한 허락했으니 말이다. 다만, ···다만 어째서 오빠라는 호칭을 써버린 걸까. 물론 가장 원하고 있던 호칭이 오빠이기는 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들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호칭도 아니었고, 애초에 소마 또한 그를 오빠라고 부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건 시기상의 문제다. 우선은 선배라는 호칭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봐라, 지금 나의 모습을. 곧바로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아아, 큰일 났다. 마치 심장이 날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행여 그에게 소리가 들릴까 봐 옆으로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소리를 감추어도 나의 동작 하나하나가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아··· 네 말대로 조금··· 부끄럽네···. 그··· 소마때는 별로 안 부끄러웠는데···.”
틀렸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나의 노력은 단 한마디로 하여금 모두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나지막한 한마디가 기껏 압축시켜 봉인해 놓은 내 마음속의 용수철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탄력을 받은 용수철처럼 나의 마음은 말 그대로 폭주하고 만다. 나는 어째서 내 손에 방패가 들려있는지도, 그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소파가 왜 두 동강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름 모를 거리의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방패를 바닥에 내려치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 뭐랄까,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크게 저질러버린 느낌이었다. 이로써 그를, 아니, 세하 오빠··· 에 대한 나의 마음이 한 걸음 전진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에 반에 잃어버린 것도 많은 하루라고 생각했다.
루나가 고백에 성공하는 날까지 우리 모두 응원합시다...
우선은 호칭 바꾸기 클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