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현기증
면원단 2019-01-15 4
"오늘 밤에는 슈퍼 블러드문이 뜰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일본에서는 달이 아름답다는 말이 고백과 같은 맥락으로 쓰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달이 뜨는 오늘, 당신의 진심을 전달하는 건 어떨까요?"
고요한 방에서는 텔레비전의 소리만 드문히 들려왔다. 서유리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잡다한 지식을 듣는 척도 않고 입을 벙긋거렸다.
"……."
입 속에서 맴돌던 목소리는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흩어졌다. 여름의 바다처럼 일렁이던 푸른 눈동자는 광채를 잃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 물에 젖은 솜이라도 된 마냥 온 몸이 무거웠다. 며칠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더니, 아무래도 몸살이 도졌나 보다.
컨디션이 안 좋은 서유리에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채 이리저리 뒤척였다.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 눈을 감았다. 짧은 간극 끝에 갈라진 목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온다.
"……이세하."
힘 없는 서유리의 부름에 이세하는 천천히 눈을 슴벅였다. 평소같지 않은 유리의 모습이 어색했으나,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감기에 걸린 채 나를 부르는 지금의 네 모습이 너무나도 어색하지만 익숙했다. 그랬기에 안쓰러웠다. 어릴 적의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 어머니를 애타게 찾았던 그 시절의 자신과 서유리가 겹쳐 보였다.
'엄마……? 엄마 어디있어요?'
'엄마? 서지수 씨 말이니? 뭘 그리 애타게 찾니?'
.
.
.
'어차피 서지수 씨에게 넌 아무것도 아닐 텐데.'
"……**."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이세하 인상 찌푸리고 욕지거리 뱉어낸다. 가벼운 현기증이 세상을 흔들었다. 어지럽다. 고개를 가로젓고 애써 웃으며 대답한다.
"…어, 왜? 뭐야. TV 안 끄냐? 그렇게 돈, 돈~ 노래를 부르더니. 누진세 어쩌려고 그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세하는 무심한 척 질문을 건네며 서유리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조차,
"……서유리, 무슨 일 있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심장이 아렸다.
가벼운 질문 두 마디를 할 때마저도 떨려오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평소보다 다정해진 말투 또한 감출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붉어진 귀도, 메말라가는 목도, 요동치는 심장도. 전부 감출 수 없었다. 또한……. 감출 생각도 없었다.
처음부터, 넌 언제나 따뜻하고 상냥했다. 어느 순간부터 너는 나를 그렸고, 난 그 위에서만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순간을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왔었다. 그저 꿈이었을 뿐인데. 그 사실을 지금이 돼서야 안 나는 아팠다. 그리고 안락하고 사랑스러운 꿈에서 벗어나기 싫었다. 혹시라도 네가 내 손을 놓아버릴까 봐 두려웠다.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네가 날 떠나갈까 두려웠다.
그러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친구를 잃는다는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뿐이고, 여태까지의 네 은혜에 보답하는 것뿐이며, 평소와 다른 네 모습에 심장이 놀란 것뿐이다. 심장이 요동치는 건 결코 이 순간이 설레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래야만 된다.
왜냐하면…….
"……아니야, 괜찮아."
"뭐야, 싱겁긴."
네게 난 그저 친구일 뿐이니까.
실소를 뱉으며 괜찮다고 하는 서유리를 본 이세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세하가 아무런 말없이 서유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이 아프면 온갖 걱정을 다 하더니, 꼭 자기가 아플 땐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라. 작은 질책이 머릿 속에서 맴돈다.
"걱정되게."
"응? 세하야,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응? 세하야,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서유리가 바람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웃는다. 이내 눈을 스르르 감는다. 이세하 역시 무거운 눈꺼풀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피곤했다. 며칠 째 지속되는 야간 근무로 인해 뇌리에 있는 선이 모두 엉킨 느낌이었다. 이세하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연다.
"누워도 돼?"
서유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피곤한가 봐? 가볍게 질문 던지고선 작게 고개 끄덕였다. 이세하는 쓰러지듯 서유리의 곁에 누웠다. 코 끝으로 엷은 체취가 밀려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 서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밀려오는 민망함에 멋쩍게 웃어보였다.
서유리도 경미하게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이세하를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일그러진 미소는 잿빛이었다. 고운 미간에 엷은 굴곡이 생겼다. 하얗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푸른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서유리가 조심스레 이세하의 옷 소매를 잡았다.
이세하 시선 굴린다. 소리라도 날 듯 뻣뻣한 움직임이다. 갈 곳 잃은 동공은 힘 없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서유리가 너무 안타까웠고, 지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한다. 장난스레 대처하기엔 심각한 분위기였고, 진지하게 위로를 하기엔 너무나도 낯간지러웠다. 내가 너였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자신도 모르게 서유리의 생각을 한 이세하는 이 상황이 마냥 웃기기만 했다. 이세하 소리 죽여 낮게 웃는다. 떨리는 듯 심호흡하더니 조심스레 서유리를 끌어안는다. 서유리가 여지껏 자신을 보듬어준 것처럼 따스하게 감싼다. 공기가 후덥지근했다.
서유리는 당황한 듯 멀뚱히 이세하를 쳐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그제서야 지금은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세하는 민망한 듯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린 얼굴은 붉게 익어있었다. 이내 변명이라도 하는 것마냥 입을 연다.
"아니, 그게……. 그러게 왜 울 것 같은 얼굴을 해서 그러냐. 걱정되게."
"……바보."
"……바보."
서유리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려온다. 불규칙한 숨소리가 이세하의 귓가를 맴돈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세하 가벼운 농담과 함께 느릿하게 서유리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댄다.
"야, 왜 울어. 내가 방금 화내서 그래?"
"손 치워."
"어?"
"손 치워."
"어?"
서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엷은 숨이 새어나왔다. 눈물은 턱을 타고 굴러내린다. 흐르는 방울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유리는 주먹을 꾹 쥔 채 언어를 뱉었다.
"……미안해. 실수였어."
"방금부터 대체 왜……. 무슨 일인데?"
"미안하다고 했잖아!"
"방금부터 대체 왜……. 무슨 일인데?"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세하 적잖이 당황한다. 서유리가 저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막힌 말문을 억지로 뚫고 꾸역꾸역 대답을 던진다.
"괜찮……."
이세하의 형식적인 말을 서유리가 가로지른다.
"……세하야, 방금은 내가 미안해. 너무 흥분했네. 결론부터 말할게. 나 너 좋아해. 근데……. 근데 너는 나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일부러 떨어지려고 했던 건데, 자꾸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 주면 나는 어떻게 해야 돼? 네가 그렇게 대하면 나는 착각할 수밖에 없잖아! 나는 바보라서 착각한단 말이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한단 말이야.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난 뭘 더 어떡해야……."
서유리의 말투가 점점 격양되어 갔다. 텔레비전의 잡음조차 고요하게 느껴졌다.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거친 숨을 뱉는다. 빠르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니 눈물이 조각조각 흐른다.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물 훔쳤다. 미안, 나 먼저 갈게. 내일 보자. 부서진 서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세하가 입을 열었다.
"……야."
"……."
"……."
묘한 기류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이세하가 열심히 말을 고른다. 기나긴 간극은 끊이지 않는다. 서유리는 실소를 뱉는다. 미안, 지금은 얘기가 안 될 거 같아서……. 목소리는 여전히 하염없이 떨려온다. 서유리 깊은 숨 뱉더니 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세하 멀어져가는 서유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본다. 금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역시 여기서 널 잃을 순 없다. 영겁의 시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너를 붙잡아야 한다. 이내 결심한 듯 서유리의 발걸음을 좇았다.
금세 서유리를 따라잡은 이세하는 입술을 꾹 깨문다. 붉은 입술에 작은 핏방울이 맺힐 때쯤 무언갈 결심한 듯 깊게 숨을 내쉰다. 짧은 간격 끝에 조심스레 서유리를 끌어안는다. 아찔한 체향이, 눈물의 비린내가, 심장의 떨림이, 서유리의 따스함이, 서유리의 모든 것이 이세하를 감돈다. 넓은 창틀 사이로 달빛이 아스라이 번져온다. 흔들리는 숨을 참으며 서유리의 목에 얼굴을 묻는다. 달빛의 향이 마치 너와 같았다. 번져버린 감정 위에 붓칠을 한다. 서유리, 좋아해.
이세하는 작은 결심을 한다. 여태껏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이제서라도 전하자고 결심한다. 밀려오는 감정에 숨이 막혀 죽어도 괜찮다. 내게 중요한 건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지금의 너니까. 고요함을 뚫고 느릿히 입 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너는 끝까지……."
"너는 끝까지……."
서유리 엷은 한숨 뱉으며 인상 찌푸린다. 이세하가 너무나도 미웠고, 이 순간마저도 터질 듯 뛰는 심장이 너무나도 미웠다. 그렇기에 이제 그만해야 된다. 번져오는 감정에 물을 부어야 될 때가 왔다. 그 물이 넘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만해야 된다. 내게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아닌 미래의 행복할 너니까.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느릿히 고개를 돌려 이세하를 바라본다. 이어질 이세하의 말을 채근한다.
"그렇게 뉴스에서 난리를 치더니. 괜한 건 아니었나 보네. 달이 예쁘다. 그치?"
"그런 게 지금 뭐가 중요……. 어?"
"……우리, 달 보러 갈까?"
"그런 게 지금 뭐가 중요……. 어?"
"……우리, 달 보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