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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류 2015-02-16 8

2월 14일, 발렌타이 데이.

 

서양의 전통일이 유래라고 하는 이 기념일은, 보통 연인 사이에서 자주 이루어지는 행사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인만이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든, 오타쿠든, 게임 폐인이든, 공무원이든, 클로저든, 차원종…은 모르겠고, 하여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ㅡ나이에 상관없이 말이다.

 

 

 

2월 13일 저녁, 강남의 한 술집.

 

“건배!”

 

몇 명의 하나 된 외침과 함께, 높이 올려 진 맥주잔이 깨질 듯이 부딪쳐 소리를 낸다. 요란스럽게 술잔을 맞대었던 여성들은, 질세라 잔속의 내용물을 비우고는 각기 다른 느낌의 한숨을 내쉰다. 외모를 보면 이십 대 후반 이상. 캐주얼한 평상복이 아닌, 각기 다른 직종에 종사함을 나타내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아마 고된 업무를 마치고는 곧바로 모인 것이리라.

 

방에 모인 것은 네 명의 여성이었지만, 그들의 앞에 놓여 진 빈 병들을 보았을 때 상당한 애주가이거나, 아니면 무리를 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양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하나같이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정신이 멀쩡하다고는 빈 말로도 못할 모습들이었다.

 

이내 한 여성이, 자신의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유정아, 넌 요새 좀 어때?”

“으응? 뭐 말야?”

 

친구의 말에, 유정이라 불린 여성이 자신의 긴 장발에 묻은 맥주거품을 털어내며 말했다. 김유정, 30세. ‘노처녀’라 불리는 흔하디흔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뭐긴, 직장 얘기지. 유니온이란 곳에서 클로저들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위험하진 않아? 차원종이랑 만나지는 않았어?”

 

그 말마따나, 유정은 차원종이라 불리는 인외의 존재들을 상대하기 위한 기관인 유니온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정은 검은 양 이라 불리는, 초급 클로저들로 이루어진 팀을 담당하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것이었다.

 

“아아…뭐, 위험하긴 하지만 난 전선에 직접 가진 않으니까. 그건 특경대원이나 클로저들의 일이니까.”

“그렇구나. 거긴 괜찮아? 못살게 구는 사람은 없고?”

“응? 딱히…”

“그건 부럽네. 난 오늘도 선배라는 사람이 자기 일은 다 떠맡기고…”

 

이내 네 명의 여성이, 자신들의 직장에 대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간다. 얼마 후 취기가 올라 다시금 화기애애해질 무렵, 그 흥을 깨듯 요란스런 벨소리가 퍼져나간다. 그에 한 명이 양해를 구하고는 핸드폰을 열었고, 몇 마디 대화하고는 다시금 일행을 돌아보며 말한다.

 

“얘들아, 미안. 나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뭐어, 벌써?”

“남친이랑 약속 잡아놨던 걸 잊었지 뭐야.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여성의 마지막 발언에 몇 명인가의 얼굴이 벌레 씹은 듯 굳어졌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통화를 했던 여성은 짐을 챙겨서는 유유히 나간다. 이내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다른 일행은, 한숨과 함께 저마다의 생각을 표현한다.

 

“뭐니, 때 아닌 염장이나 지르고.”

“계집애, 요새 남친 생겼다고 바쁜 모양이지~.”

 

친구의 말을 그렇게 받은 유정이 다시금 잔을 들어 그 내용물을 들이킨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내상(?)을 입은 상태여서 최대한 의연해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런 유정의 모습에서 힘을 얻은 듯, 여성이 자신의 잔에 맥주를 채우며 말한다.

 

“뭐, 부러울지는 몰라도 사실 애인이 있다고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아니, 나도 사실 있긴 한데.”

 

일순 정적이 흘렀고, 유정과 다른 한 명의 시선이 마지막 발언을 한 여성에게로 향한다. 그에 움찔한 여성이 시선을 피하며, 무안한 듯 말을 이어간다.

 

“이, 이틀 전에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이야. 아직 별 진전은 없지만, 잘해주는 것 같아서…으응….”

 

그 뒤에 이어질 이러쿵저러쿵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본능적으로 뇌에서 감각의 인식을 차단하듯이, 들어봤자 일말의 도움도 안 되는 일이라는 판단 하에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두 명이었다.

 

‘한 병, 두 병, 세 병….’

 

어느새 주량을 넘긴 양에 의해 머리가 어질해진 김유정이 쇼파에 몸을 기댄다. 그것을 본 친구가, 유정의 앞에 놓인 빈 잔에 남은 맥주를 마저 부으며 말한다.

 

“시간이 꽤 된 거 같네. 이제 이거만 마저 마시고 쫑내자, 괜찮겠어?”

“으응….”

 

유정의 힘없는 대답 직후, 세 명의 여성이 마지막 술잔을 비운다. 가장 먼저 비운 것은 마지막을 제안한 여성이었고, 다른 친구가 그 다음을 잇는다. 취기 때문인지 한 번에 잔을 비우지 못한 유정을 보며, 안주를 입에 문 친구가 지나가듯 말한다.

 

“그런데 유정아, 그 사람과는 어때?”

“응? 무슨…”

“그, 제이 씨라고 했던가? 그 사람 말야.”

 

푸웁ㅡ!

 

다시금 잔을 입에 댔을 때,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당황한 유정이 맥주를 뿜어낸다. 마치 분수처럼 흩뿌려진 술이 테이블을 뒤덮지만, 그것을 애써 무시한 유정이 자신의 옆을 돌아본다.

 

“콜록, 콜록…그, 그게 무슨?”

“왜, 전에도 몇 번 말했잖아? 네가 담당하는 클로저들 중에 연상인 사람이 한 명 있다며? 하도 그 사람에 대해 여러 얘기를 해대니까, 관심이 있는 줄 알았지.”

“아, 아니. 그런 건 전혀 없거든? 워낙 능청스러운 사람이라 말했던 것뿐이야. 전ㅡ혀 그런 감정은 없다고? 앞으로도 그럴 거고.”

 

여성의 말에 한 손을 가로저으며 부정한다. 얼굴이 무지하게 화끈거리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만취한 상태이니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어쩐지 신경 쓰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짓는 친구가 못마땅했지만, 여기서 강하게 부정해봐야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여긴 유정이 흘려 넘기기로 한다.

 

“흠, 흠. 하여튼 그런 건 아냐. 그보다 이제 술도 다 마셨는데, 끝낼까?”

“응? 그렇네. 이만 끝낼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유정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친구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계산을 치룬 세 명이 가게를 나오고, 어두워진 밤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잠시 후 한 명이 택시를 타고 돌아갔고, 거리엔 유정과 다른 친구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잠시 달을 보며 걷던 친구가, 음주로 인해 무거워진 머리를 손으로 누르고 있던 유정에게 말한다.

 

“내일이면 발렌타인 데이더라.”

“…그래?”

 

두통으로 인해 적당히 대답하는 유정이었지만, 그대로 끝낼 생각이 없는 듯 친구가 말을 이어간다.

 

“초콜릿 줄 사람 없어?”

“있을 리가….”

“왜, 그 제이라던…”

“아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친구의 말에 움찔한 유정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반론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작게 웃은 친구가, 양 손을 들어 유정의 양 볼을 감싸 쥔다. 화끈거리던 얼굴에 차가운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아지는 유정. 그에 기세가 누그러졌을 때, 여성이 다시금 입을 연다.

 

“뭐, 그건 됐고. 재밌는 거 하나 알려 줄까?”

“…응?”

 

 

 

다음 날, 2월 14일 저녁.

 

검은 양 팀의 소속인 클로저, 파이터 제이는 평소와는 다른 풍경 안에 서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강남의 한 상점가로, 유정을 비롯한 많은 직장인들이 자주 휴식과 유흥을 위해 오는 곳이었다.

 

평소 건강을 입에 달고 살며 기름진 것은 취급하지 않는 제이에게, 이런 곳은 익숙하지 않은 곳이며 상종 하지 못할 곳이었다. 그런 그가 왜 상점가에 서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 약속 때문이었다.

 

살짝 초조해져서 시계를 보고 있을 무렵, 익숙한 구두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제이 씨,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아, 유정 씨. 이제야 왔군.”

 

제이가 속한 검은 양 팀의 담당자인 유정이었다. 제이가 어울리지 않게 상점가에 있던 것은, 유정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기분도 그런데 얘기나 좀 하지 않겠냐는, 흔한 소재였지만 별 탈 없이 승낙한 제이였기에 이렇게 서로 볼일을 마치고 모인 것이었다.

 

처음 유정이 음주를 제안 했을 때, 당연히 제이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렇지만 ‘한 병만’을 극구 고집한 유정이었고, 그 영문 모를 집념에 의아해진 제이가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내 유정이 본인이 단골임을 강조하며 한 가게로 향했고, 제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유정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선지 그녀의 상태를 알지 못하던 제이였지만, 실상 유정은 여러 고뇌를 겪고 있었다.

 

자신은 뒤에 따라오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생각에 의해서.

 

솔직히 잘 몰랐다. 그저 일로 만난 사무적인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학생들로만 이루어진 팀에서 유일하게 어른스런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료였으며, 능청스런 발언과 행동은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뿐이고, 길게 생각지는 않았었다. 그저 한순간의 정일지도 모른다. 그 점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확신은 어느 쪽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렇게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본 것이었다.

 

어쩌면 마음이 잘 맞는다는 것은 이런 걸지도 모른다, 부담 없이 함께할 수 있는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엔 가벼운 안주와 맥주 두 병이 놓여졌다. 어째선지 유정은 누가 뺏어먹을 세라 맥주를 신나게 들이켰고, 가만히 있기엔 뭣한 제이는 유정의 속도에 맞추어 조금씩 마시기만 했다.

 

그렇게 서로의 직장의 업무와 상황, 토론 등 여러 얘기들을 주고받던 남녀였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유정의 취기는 높아졌고, 점차 대화가 끊기게 되었다.

 

제이의 몫으로 있던 맥주병까지 비워버린 유정이, 한껏 취기가 올라선지 한 팔로 이마를 받치고는 테이블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모습을 본 제이가 이대로 자 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유정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 손을 내뻗었다.

 

그 순간, 세차게 고개를 든 유정이 제이에게로 얼굴을 바짝 들이댄다.

 

‘헉?!’

 

클로저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속도에 흠칫한 제이가, 그 상태로 굳어진다.

 

홍조를 띤 채 그런 제이를 빤히 주시하던 유정이, 입만을 움직여 다시금 말을 꺼낸다.

 

“제이 씨, 그거 아세요?”

“응? 뭘?”

“오늘 발렌타인 데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아, 그랬지.”

 

유정의 말에, 금일의 날짜를 떠올리고는 대답한다. 그 밋밋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 손으로 턱을 괸 유정이 시선은 옆을 향하며 말한다.

 

“제이 씨도 오늘 슬비한테 초콜릿 받았죠?”

“그렇지.”

“좋았겠네요~인기 많아서. 삼십대에 고등학생한테 초콜릿도 받고~.”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유정씨도 알잖아? 다 같이 받았고 말이지.”

 

비꼬는 듯 방긋 웃으며 말하는 유정이었지만, 그에 휩쓸리지 않고 적당히 받아치는 제이. 그런 그를 마주보며, 유정이 말을 이어간다.

 

“그렇지만 좋았잖아요? 호의를 베푼 거니까.”

“…뭐, 싫진 않았지만…초콜릿은 몸에 그리 좋진 않으니까. 차라리 보약 같은 걸 줬다면 좋았겠지만 말이야.”

“후후, 그게 뭐에요.”

 

유머러스한 발언이었지만, 이 사람이라면 진심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리 내어 웃는 유정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웃던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이 없어진다. 시선은 술이 들어 있지도 않은 빈 술잔을 향하고 있었다.

 

“…제이 씨는…슬비 말고 초콜릿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었나요?”

 

의도한 발언이었을까, 일순 정적이 흘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적막함이 느껴졌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한 제이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변화를 찾기 힘들었지만, 어째선지 유정의 목소리는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잠시 후, 슬슬 일어나는 게 어떻겠냐는 제이의 말에 술집을 나서는 두 명. 제이는 애초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유정은 평소보단 양이 적었기에 서로 걷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취한 여성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는지 바래다준다는 말과 함께 유정과 동행하는 제이였다. 그에 유정은 별 내색 않고 승낙했고, 다시금 남녀가 밤길을 걸어간다.

 

얼마쯤 걸었을까, 불쑥 유정이 말을 꺼냈다.

 

“거의 다 왔네요. 저기가 제가 살고 있는 집이에요, 제이 씨.”

“좋은 곳에 살고 있군, 부러울 정도야.”

장난스런 제이의 말에, 유정이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어간다.

 

“제이 씨, 초콜릿은 몸에 안 좋아서 싫다고 했죠? 그럼 슬비가 준 그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뭐,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먹기는 해야겠지.”

“후후…그래요. 성의를 생각해야죠.”

 

제이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유정. 이내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는, 어깨에 메고 있던 손가방을 뒤적인다. 제이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뭘 하는지는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응?”

“…사실 저도 준비했어요, 초콜릿.”

 

유정의 뜻밖에 발언에 흠칫했지만, 별 문제는 없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유정을 돌아보는 제이. 그런데, 그 평정심은 잠시뿐이었다. 이후에 벌어진 일에 의해서.

 

“…유정 씨?”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유정이 내민 것은 평범해 보이는 하트형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갑작스레 총을 들이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제이가 놀랄 일은 없었다.

 

단지…유정이 초콜릿을 손이 아닌 입에 물고 있었기에 그 점이 뜻밖일 뿐이었다.

 

초콜릿을 입에 문채 몸을 쭉 내밀고는, 눈을 감고 양 손을 내린 채 가늘게 떨고 있는 유정. 평소 자신이 담당하는 검은양 팀에게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던 김유정 요원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행동이었다.

 

‘괘, 괜찮으려나…이거, 너무 창피한데.’

 

전날 밤에 친구가 알려줬던, 본인이 남자친구한테 고백할 때 썼던 것이라 언급했던 방법. 사실 그냥 듣고 한 귀로 흘렸던 얘기였지만,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저도 모르게 시도했던 것이었다.

처음엔 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지만 이미 제이에게 보여주고 나니, 어쩐지 물리기에도 애매해져서 설렘 반, 불안함 반으로 몸을 떨고 있던 유정.

 

사실 아직도 확신하진 못했다, 그녀가 제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도박을 시도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마치 자신이 제이를 어떻게 생각 하냐보다는, 제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어선지.

 

1초가 하루처럼 느껴지던 그 갈등과 무안함의 영역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유정. 눈을 질끈 감고 있어서 제이의 행동은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할까?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무언가 말을 해서 제지할까? 그것도 아니면 얼굴을 내밀어서 초콜릿을…

 

그 뒤의 생각은 차마 잇지 못할 때, 그녀가 눈을 뜬 것은 입에서 초콜릿이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뭐 하는 거야, 유정 씨.”

 

손가락으로 초콜릿을 집고는, 슬쩍 유정의 입가에서 빼낸 제이. 그에 아차 싶은 유정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을 때, 어느새 초콜릿은 제이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성의를 봐서 먹겠지만, 다음엔 좀 제대로 된 방법으로 달라고. 무안하게시리.”

“그, 그렇네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취했나 보네요, 평소엔 안 이랬는데. 하, 하하….”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마치 도화선이 다 타버린 폭탄처럼. 자신이 왜 그랬을까? 너무나 창피해서 먹먹해진 유정이 현실도피를 시도하려 할 때,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어째선지 얼굴을 가까이 대는 제이에 의해.

 

“제, 제이 씨…?”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은 경직되어갔고, 눈이 거세게 떨렸다.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이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 다시금 눈을 감았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보던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설렘이 다시금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그러나 그 기대와는 달리, 그녀의 입에 들어온 것은 달콤한 향을 간직한 다른 무언가였다.

 

“……?”

 

초콜릿이었다. 그에 영문을 모른 채 가만히 있던 유정에게, 오독 하고 소리 나게 입 안의 초콜릿을 씹은 제이가 한 손을 들어 유정의 뒤편에 있던 집을 가리킨다.

 

“저기가 유정 씨네 집이라고 했던가?”

“네? 네.”

“그래, 뭐…이제 가볼 테니 조심해서 가도록 해. 그리고 아까 입에 넣은 거 말인데…오해는 하지 마, 유정 씨가 줬던 초콜릿의 반쪽이니까. 난 준비한 게 없어서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서며 왔던 길로 다시금 돌아가는 제이. 어안이 벙벙해진 유정에게, 인사의 표시로 한 손을 들어 보이는 그였다.

 

“초콜릿 잘 먹었어, 내일 또 보자고. 많이 취한 것 같으니 푹 쉬고.”

“네…안녕히 가세요, 제이 씨.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의 모습은 골목 뒤편으로 사라지고, 그때까지 뒤 한 번 돌아** 않던 그의 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정이 그제야 자신의 집 쪽으로 돌아선다.

 

이내 그녀가, 마라톤 선수마냥 전력을 다해 뛰어간다. 창피함과 무안함으로 점철된 기억을 껴안고, 후회 가득한 심정으로써.

 

‘내가 미쳤지, 괜히 술을 마셔갖고…내일 어떻게 저 사람을 대한다?’

 

병가라도 내야 하나, 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김유정 30세, 노처녀였다.

 

클로저 제이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신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밤이 깊어선지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있어봤자 평소에 그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보일지를 알 수 없기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선글라스를 벗고는, 그 자리에 손바닥을 갖다 댄다. 차가운 느낌이 얼굴의 열기를 한층 누그러뜨린다.

 

어째선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유정은 끝내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제이가 먹었던 초콜릿의 반쪽이, 자신이 물고 있던 부분인 것을 말이다.

 

‘…그런 모습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유정 씨….’

 

방금 전 유정의 모습을 떠올리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까지 초콜릿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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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발렌타인 데이는 지났지만, 잘 봐주길 바랍니다.
2024-10-24 22:23:2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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