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세슬)

firsteve 2019-01-07 10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카운트다운 타종과 더불어서 불꽃놀이를 한다고 합니다. 연인이나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이 기회입니다!

조용한 잔업 환경을 채우는 라디오 방송 소리에 슬비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이게 끝나야 가지…..올해도 홀로 보내야겠네…..

슬비가 노트북을 두드리며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의 그녀였다면 딱히 혼자 지내는 연말이 우울하진 않았을 거였다.

차원종을 없애겠다는 의지와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던 매뉴얼에 맞춘 인생이 그녀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힘을 빼는 법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오늘만큼은 보내기 조금 힘들 것 같았다.

뭐야 아직 집에 안 갔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말끔한 정복을 입은 세하가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왔어?”

“게임기 두고 갔어. 충전하다가 까먹고 안 가져갔거든.”

너답다, 진짜…

슬비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짓자, 세하가 그녀의 옆 의자에 앉으며 노트북을 쳐다봤다.

“아직 많이 남았어?”

“모르겠어. 언제 끝날지. 근데 그건 왜?”

“그럼 이 뒤에 약속 있어?”

“이렇게 될 걸 알고 약속 안 잡았지….근데 아까부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바른대로 말해. 또 무슨 사고쳤어? 설마….속도위반 한 거 아니지?”

“야, 야….누가 들으면 난봉꾼인 줄 알겠다.”

“아니야? 꽤나 많은 사람들이 너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 너한테 내 이미지는 대체 뭔지, 원….”

세하가 툴툴거리자 슬비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딱히 놀리는 취미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어쩐지 세하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놀리게 되는 게 자신의 마음이었다.

“놀리는 건 이쯤하고….용건은?”

“우리 집에서 저녁 먹자. 올해의 마지막 밤이잖아. 같이 저녁 먹자.”

“…..꽤나 신선한 충격인데…..네가 나랑 밥 먹자는 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나도 식사 권유 정도는 하거든?”

“네, 네. 알겠습니다. 근데 나 이거 끝나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그 동안 옆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으면 되니까.”

세하가 게임기를 흔들며 말하자, 슬비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거 금방 끝난다? 빨리 끝나는 게임으로 해.”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알아….”

싱긋 미소를 짓는 세하의 모습에, 슬비가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방금 전까지 하던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일을 마친 그녀가 기지개를 펴며 피로감을 떨쳐냈다.

“후우….드디어 끝났네…..어라? 이세하?”

분명 아까 전까지 옆에 있던 세하의 모습이 없자, 슬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의 물건으로 보이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뭐야…..간 거야?......치이….좀 기다려 주면 어디가 덧나나….

슬비가 툴툴거리면서도 마음에 차오르는 응어리진 느낌에 자신의 가슴을 꼭 쥐었다.

그 때…

나 왔어. 어라? 그 사이에 끝냈어?

세하가 한 손에 봉지를 든 채 놀란 표정으로 들어오자, 슬비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집에 간 거 아니였어?”

“뭔 소리야….편의점 다녀온다고 했잖아. 박x스 먹을 거냐고 했을 때 고맙다고 말했으면서.”

“내….내가 그랬어?”

어쩐지 영혼 없는 대답이다 싶었다…..

세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봉투에서 박x스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수고했어. 이슬비.”

“….갑자기 돈이 아까워서 이걸로 때운다던가 그러는 건 아니겠지?”

“….너 진짜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제대로 전골 해줄 생각이니까 걱정 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요즘 너 툭하면 나 쓰다듬는다?”

“괜찮잖아.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 닳아 없어지고 있는 건가?”

여기 날릴 거 많다?

슬비가 찌릿하고 그를 째려보자, 그가 살며시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정말이지….요즘따라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야? 꼬마 취급하지마. 난 숙녀라고.”

“꼬마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는데.언제나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장난기 없이 툭 하고 내뱉어진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또…..또 장난치고! 자꾸 그러면 나 집에 간다?”

“알았어. 알았어. 옷 입어. 잠깐 들렀다가 가야 할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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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러야 한다고 한 곳은 너무나도 의외의 장소였다.

평범하게 들렀다가 간다고 한다면 보통은 장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간 곳은 수선집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옷 맡긴 건 잘 수선 잘 됐나요?”

“오. 세하 왔구나. 그래. 그래. 수선은 잘 됐어. 어머님께서는 건강하시지?”

“건강한 거랑 변함없이 나이 안 먹는 얼굴을 빼면 그다지 장점도 없으신 분인 거 아시면서.”

지인인 것 같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던 슬비가 그를 보며 물었다.

“지인이야?”

“뭐….우리 엄마의 고무줄 같은 몸에 맞게 옷을 수선해주시는 분이지.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온 거고.”

세하가 종이가방을 흔들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거? 되게 나풀나풀 한 것 같은데 드레스야?”

“한복이야. 엄마 한복. 우리 엄마는 꼭 해를 넘길 때 한복을 입거든. 살 빠지신 덕에 결국에 수선을 맡긴 거고.”

“조금 의외네. 요즘에 새해에 한복 입는 사람은 좀 드문데.”

“뭐….나랑 엄마한테는 이 한복이 좀 특별하니까.”

세하가 종이가방에 든 한복을 보더니 어딘가 모르게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사실 우리 가족끼리 다 같이 맞춘 거야. 그것도 내가 떼를 쓰니까, 거기에 엄마가 동참해서 가족끼리 한복을 맞췄거든.”

“가족끼리 한복을 맞췄구나….되게 소중한 추억이네.”

“응. 뭐….그 때 맞춘 내 옷은 이제 작아져서 못 입지만 디자인만은 그대로 해서 다시 맞췄어. 우리한테 한복을 입고 새해를 지낸다는 건….아빠와 함께 한다는 의미니까.”

어딘가 모르게 울 것만 같은 그의 표정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척 말하는 그의 모습일수록 더욱 마음을 숨기는 걸 아는 그녀이기에, 그녀는 그의 손을 더욱 꼭 잡았
다.

“…..멋지네, 이세하. 선배님을 배려할 줄도 알고.”

“나한테도 소중한 추억이니까….이제는….만나서 이야기조차 못하지만….”

세하가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그녀 앞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슬비야…..미안해.”

“응? 뭐가?”

“….네 앞에서 가족 이야기 꺼낸 거…..미안해. 네 앞에서만큼은 조심했어야 했는데….미안해….”

그의 말에 그녀가 풋 하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가족을 잃어버린 자신 앞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사과해오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다.

너무나도 순수해서, 너무나도 따뜻해서,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아버리면 그를 안고 그의 온기에 취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괜찮아. 이제 와서 그런 걸로 일일이 마음 아프지는 않으니까. 대신에….오늘 맛있는 걸로 해줘? 알았지? 맛 없으면 선배님한
테 세하가 내 앞에서 가족이야기로 슬프게 만들었다고 할 거야?”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줄게.”

미안하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그의 등을 툭툭 치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너희 집은 새해에 주로 뭐하고 지내?”

“아침에 안 일어나는 엄마를 깨워서 근처 절에서 새해 모든 일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와서는 뭐…언제나처럼 엄마는 쇼파에서 드라마 보면서 뒹굴 거리고 나는 방에서 게임 하거나 엄마 옆에서 같이 드라마 보는데. 너는?”

“나는 집에 혼자서 지내. 친구도 없었고. 그래서 그냥 방에 앉아서 드라마 재방송이나 보면서 지냈어.”

“그럼 내년에도 우리 집에 와. 엄마는 네가 온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할 테니까.”

“그럼 내년에도 너희 집에 놀러 갈게.”

배시시 웃는 그녀의 표정에 세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깝고 말투 또한 그다지 호감이 가는 말투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녀의 웃음이란 그에게는 조금 당혹스러움과 의도치 않은 심장박동의 증가를 일으켰다.

“어라? 얼굴이 빨개졌는데? 혹시 두근거렸어?”

“우…웃는다고 해서 남자가 다 두근거리지는 않는다고….”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빨갛게 물들었는데? 신호등 빨간불 대신에 써도 될 만큼 빨갛게 됐는데?”

평소보다 더 장난기 있는 말투에 그의 심장박동이 내려갈 줄 모르고 힘차게 올라갔다.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그녀와 함께 집에 도착한 그가 문을 열자, 방금 샤워라도 하고 나왔는지 물기가 촉촉한 서지수가 그들을 반겼다.

“아들~늦었잖아. 뭐하다가 이제 오는…..어머나? 슬비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세하가 저녁 먹고 가라고 해서 왔는데 실례해도 될까요?”

“괜찮아! 마음껏 실례해! 우리 슬비라면 얼마든지 실례해도 돼~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 됐다~”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에, 세하가 어이 없다는 듯이 그녀의 한복이 든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역시 수선은 이 집에 맡겨야 한다니까~일처리도 빠르고 얼마나 좋아~”

“입고 나오세요. 그 동안 저는 저녁 준비 할 테니까요.”

“알았어, 아들~. 아, 맞다. 슬비야. 잠깐 이리 오렴.”

지수가 웃으며 슬비를 그녀의 방으로 데리고 오더니, 이내 문을 닫고는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짜잔~우리 슬비 선물~내가 네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골라온 너를 위한 한복이야. 입어봐.”

“아….안돼, 선배님!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마음만으로 충분해요!”

“나는 충분하지 않아. 받아줘. 우리 아들이랑 같이 있어주는 보답이라고 생각해줘.”

살짝 아련한 감정이 담긴 지수의 눈에 슬비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이 꼼지락거렸다.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 해주시는 이유가….뭔가요, 선배님?”

“간단한 이유야. 떠넘기는 거야. 우리 아들을.”

그녀답지 않은 이유에 슬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수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들은 늘 외톨이였어.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세하에게 계속 주었지만 결국에는 마음을 다 채워주진 못했어.”

“선배님….”

“맛있는 요리 한 번 제대로 해준 적 없었고, 아들이 애써 괜찮은 척 들어와서 울 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어. 내가 할 줄 아는 건…..아들을 사랑해주는 거랑, 차원종과 싸우는 것 정도뿐이니까. 엄마로서는 실격이지, 뭐…”

지수가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세하가 널 만난 이후로 되게 많이 바뀌었어. 툴툴거린 적 없던 애가, 첫 날 임무를 갔다오더니, 정말 안 맞는 애가 있다
면서 나한테 툴툴거리질 않나, 어느 날부터는 갑자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에 대해서 물어오질 않나, 신경 안 쓰던 헤
어스타일에 신경을 쓴다던가 그랬어.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슬비, 네가 있었어.

지수의 말에 슬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집 근처를 나갈 때에는 트레이닝 복에 머리도 대충 묶은 채 나간 적도 많았고, 화장에는 일절 관심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 있던 감정이라는 게 뛰기 시작했다.

괜히 더 향이 좋은 샴푸를 쓴다던가, 눈에 띄지 않게 화장을 한다던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
견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마음에 그가 들어온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그는 서투르기 짝이 없는 상대였다.

누군가를 좋아한 적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는, 자신의 인생에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겨버렸다.

전달하기에 무서워지는 마음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당당한 그녀였지만, 그를 향한 이 감정만은 도저히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와 관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고마워, 슬비야. 우리 아들에게…..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게 해줘서….그리고…그게 너라서 너무 기쁘단다.”

“선배님…..”

기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지수가 그녀의 품으로 한복이 담긴 선물상자를 밀었다.

“자, 빨리 꺼내서 입어보자. 그리고, 세하한테 보여주는 거야.”

그녀의 말에 슬비가 이제는 결심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건넨 선물상자에서 한복을 꺼냈다.

그 모습은 정말로 그녀와 닮아있었다.

따뜻한 분홍색 꽃을 닮은 듯한 한복에 슬비가 아까까지 망설이던 태도는 어디에 버리고 왔는지 곧바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
다.

어렸을 때 입었던 기억이 나네….후훗…..그 때는 손이 작아서 내 손으로 제대로 입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혼자 입을 수 
있게 됐네.

어딘가 모르게 자랑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아련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지수가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잡고 비녀를 꽂아주었다.

“역시 우리 슬비는 뭘 해도 예쁘네. 후훗….우리 아들 녀석이 반응을 잘 해줘야 할텐데.”

“새…새삼스럽게 반응 같은 거 안 바래요. 어차피 세하는 저한테는 괜찮네 라는 말 밖에 안 하니까요.”

“많이 좋아하는 거네~우리 아들의 솔직하지 못한 최고의 감탄사가 그거인데~”

지수가 짓궂게 슬비를 놀려대자, 슬비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 자. 이제 나가볼까? 우리 아들도 이쯤 되면 준비 다 했을 것 같고.”

지수가 슬비를 데리고 나오자, 보이는 것은 어느새 전골을 비롯한 음식을 준비해둔 것도 모자라서 한복까지 깔끔하게 입고 있는 모습의 세하였다.

“우리 아들 멋있다~역시 우리 아들은 뭘 입어도 어울려.”

“적어도 엄마한테 들을 말은 아니거든요? 저보다 더 잘 어울리시는 분이.”

세하가 피식 웃음을 짓다가 지수 앞에 있는 슬비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어…어때? 선배님이 선물로 주신 거라서 입어봤는데 어울려?”

“어….응. 잘 어울리네.”

세하가 얼굴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얼버무리자, 지수가 싱글싱글 웃으며 세하 앞으로 슬비를 밀었다.

“아들. 그런 말은 눈을 마주하고 하는 거야~자. 여기 슬비가 있네? 다시 한 번 제대로 말해줘~”

“노…놀리지 말고 먹기나 해요, 우리.”

세하가 황급히 자리에 앉으며 말을 하자, 슬비가 그의 옆에 앉으면서 중얼거렸다.

“바보야.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칭찬하면서 호감을 유도하는 거야.”

“치…칭찬했잖아. 어울린다고.”

“말 뿐인 걸로는 제대로 닿지 않습니다~”

슬비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하자, 세하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와 마주했다.

“잘 어울려. 진심…이야.”

“…..어?”

가까운 거리에서 설탕이 쏟아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의 모습에, 지수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림 좋다~역시, 슬비야. 우리 집에 시집 안 올래? 우리 아들 줄게.”

“어…엄마! 무슨 말을 하는 거야…..그만하고 전골이나 먹어요.”

세하가 전골그릇에 전골을 담아서 각자의 자리에 놓아두자, 지수가 이만하면 됐다는 듯이 놀리는 걸 그만두고는 숟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라는 그녀의 우렁찬 말과 함께 식사가 시작되자, 지수가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국물이 되게 맛있네. 네가 끓인 육수야?”

“뭐….이것저것 섞어가면서 만든 거야.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다음에 레시피 적어줄게.”

“그 때는 우리 집에 와서 시식하고 가는 거다? 아. 나, 마음에 준비하고 있어야 하나?”

“여…여자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부끄러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분 좋아 보이는 세하의 모습과 놀려대면서도 마냥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는 슬비의 모습에 지수는 괜히 마음이 찡해졌다.

처음 보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아들의 모습이.

오랜만에 보는 환하게 웃는 아들의 모습이.

그리고 그 모든 변화를 이끌어 준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좋았어!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는 술이 빠질 수 있나! 아들! 저번에 엄마 여행 다녀올 때 사온 거 데워줘!”

“하아….알았어요. 대신에, 오늘은 슬비도 있으니까 많이 마시지는 말자고요, 엄마.”

세하가 자리를 뜨자, 지수가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슬비를 바라보았다.

“우리 슬비 좋겠다~우리 아들이 눈을 보고 어울린다고 해줬잖아.”

“네….되게…기분이 좋네요….어울린다는 말이….이렇게 기분 좋게 들린 건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기 하지만….아....!기분 나쁘
다는 소리 아니에요! 그…그저 뭐랄까….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라서 그런 거에요! 기분 좋아요! 오히려 행복해요!”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수의 입에 걸린 미소가 커져만 갔다.

어쩜 이리도 순수할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세상이 가진 온갖 기준을 통해서가 아닌 정말 마음이 가는 대로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이 지수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아껴왔던 술을 데워달라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와 한 잔을 마셔보고 싶었다.

세상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아들을 맡길 수 있는 이 아이와 좀 더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자, 여기요. 엄마. 그나저나 엄마는 이런 술 진짜 좋아하네요.”

“후훗….누군가와 마시기에는 아주 좋거든~자. 우리 슬비. 술잔 들어. 나랑 마시자!”

“엄마…..애한테 뭘 권하는 거에요….슬비야. 굳이 안 마셔도 돼.”

“아니야. 나, 마시고 싶었어. 향이 너무 좋은 걸?”

“하아….진짜….취하게 먹으면 안 된다?”

“괜찮아, 슬비야! 취하면 우리 아들 옆에서 자면 돼!이 참에, 역사를 쓰고 가도 된단다?”

“엄마! 대체 무슨 말을…..!”

세하가 얼굴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말하자, 슬비는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안절부절하는 저 표정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혹시 기분 나쁘지 않을까 하고 배려하는 저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렇기에 만약 술에 취해, 정말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그녀는 받아주기로 했다.

그녀는 그를 좋아하니까.

비록 먼저 고백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자신이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세하야. 너도 술잔 들어. 너만 빠지려고?”

“아니, 그래도…..”

“같이 마시자.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슬비가 조용히 술잔을 내밀자, 세하가 말없이 술잔을 받아들고는 한숨을 쉬었다.

“진짜 조절해서 마셔줘….나, 진짜 너 취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감도 안 오니까.”

“본능에 맡겨. 그 후의 일은, 고소를 하든, 결혼을 하든, 내가 처리해줄 테니까.”

놀리지 마, 제발….

짓궂은 말에 세하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윽고, 술잔이 몇 번 돌았을까…..저녁상을 치운 그가 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집 밖으로 향했다.

“어라…?세하야? 어디 가?”

“옥상에. 조금 시간 걸리니까 밑에서 엄마랑 같이 있어.”

세하가 문을 닫고 올라가자, 슬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쇼파에 앉아 입을 삐죽거렸다.

치이….뭐 하러 가는지는 알려줘도 되잖아….바보.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지수가 웃음을 지으며 슬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슬비, 밥 잘 먹고, 술도 잘 먹고, 왜 기분이 나빠졌어?우리 아들 때문에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적어도 뭐 하러 가는지 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나 싶어서요. 이렇게까지 티를 내는데….”

그녀의 말에 지수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마주했다.

“아마 우리 아들 지금 옥상에 텐트 준비하러 갔을 걸? 예전에 우리 남편이랑 나랑 세하랑 세 명이서 자주 올라갔거든. 지금은 안 올라간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지만….”

“아버님이랑 올라간 옥상…..”

그제서야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그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행복할수록 마음에 있던 응어리를 정리해가는 버릇이 있는 그였으니까.

10년씩이나 그의 마음 속에 있던 응어리가 풀린다면 그의 얼굴은 아마도 물기가 묻어있겠지.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상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만약 그가 그렇다면 힘껏 그를 안아줄 생각이었다.

10년 동안 고생했다고. 마음 속 응어리가 사라져서 기쁘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후우…춥다…역시 이대로 올라가는 건 좀 춥네….”

세하가 팔을 비비며 집으로 돌아오자, 지수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아들~텐트 설치는 끝난 거야? 정리 깨끗하게 다 했어?”

“내가 엄마에요? 정리 다 하고 내려왔어요. 뭐….오랜만에 올라가도 여전하긴 하네요. 우리 집 옥상.”

세하가 피식 웃음을 짓더니, 슬비를 흘긋 보았다.

“슬비야. 혹시….오늘 집에 늦게 가도 되면…..조금만 더 있다가 갈래? 우리 집 옥상….새해맞이 불꽃놀이 잘 보이거든.”

“능숙하네, 이세하? 그렇게 해서 몇 명이나 되는 여자애들을 자기 손에 넣은 거야?”

“다…다른 애들한테는 한 적 없어! 우리 집 옥상에 온 사람은 우리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

“그래? 영광이네. 내가 첫 손님이라니까 괜히 긴장되네….선배님. 만약 저와 세하가 내려오지 않는다면 재빨리 대처해주시길 바랄게요.”

“신속하게 잠자는 척 할게.”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둘 다 그런 소리 하지 마!”

놀림 받은 세하가 버둥거리자, 슬비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올 때 입었던 따뜻한 옷을 걸쳐 입었다.

“그래서? 올라가면 되는 거야?뭐, 내가 준비해야 하는 건 없어? 마음에 준비라던가, 위험방지도구라던가?”

“애초에 너한테 그런 짓을 할 배짱도 없거든?”

“어머? 나는 그저 불꽃놀이 소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였는데, 무슨 상상을 한 걸까?”

“야, 이슬비….나는….그런 뜻으로…그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슬비가 작게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안내해줘. 네 비밀의 장소에.”

그녀의 말에, 세하가 얼굴에서 김을 뿜어낼 것 같은 붉게 물든 얼굴로 그녀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올라온 옥상은 의외로 넓었다.

집이 넓은 시점에서 깨달았어야 했지만 옥상도 꽤나 넓어서 만약에 물건을 둔다면 꽤나 많이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옥상의 중앙에 나무로 된 앉을 수 있는 거대한 테이블 같은 곳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거대한 텐트가 놓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 슬비가 작게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저게 네 아지트야?”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의 아지트. 한 해의 마지막과 한 해의 시작을 우린 여기서 보냈거든. 지금은 한 명이 빠져버렸지만….”

세하가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표정을 짓자, 슬비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껴안으며 말했다.

“오늘은 나랑 같이 보니까 그런 우울한 표정 짓지 마. 오늘은 내가 네 옆에 있으니까.”

“진짜….오늘따라 왜 이렇게 겁이 없는 거야….남자애랑 단둘이 있는데 긴장도 안 해? 네가 좋아하는 드라마로 따지면 지금이 
로맨스 장면이잖아?”

“내가 아는 이세하는 이럴 때 손을 못 대는 사람이거든. 아, 혹시 취향이 이런 쪽 플레이야?”

슬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세하가 황급히 말꼬리를 돌리며 그녀를 텐트 안으로 안내했다.

“오~. 되게 아늑한데? 핫팩을 왜 들고 갔는가 했는데 텐트 안에 붙여뒀구나….”

“콘센트도 있으니까 충전할 거면 충전해. 여기서 불꽃놀이 볼 거니까.”

세하가 텐트 안에 있는 그녀에게 말을 하고 돌아서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놔두고 온 거 있어?”

“따뜻한 마실 것 좀 가져올게. 잠깐만 있어.”

“얼마든지 기다려줄게~마음에 준비 하고 있으니까, 위험방지기구 가져와도 되고~”

놀리지 마라는 그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그녀가 조용히 텐트 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더 많은 별들이 떠있는 것 같았다.

아마 사람들은 저 멀리에 보이는 빛이 많은 곳에 모여있을 것이었다.

그래서일까….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밤하늘을 만끽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장소에,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밤하늘이 펼쳐진 넓은 옥상과, 따뜻한 온기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부모님과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까지 행복한 마음이 가득한 적도 없었다.

언제나 조마조마했고 마음이 불안했다.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신경질적으로 사람을 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마음에, 그 어떤 사람보다도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

세상 어떤 것과 바꿔준다고 해도 바꾸기 싫은 첫사랑이 생겼다.

세상 어떤 사람보다 서투른, 그렇기에 너무나도 뜨거운, 동갑내기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

미안. 늦었지. 엄마가 이상한 말을 해서 말리고 온다고 늦었어.

세하가 양 손에 김이 나는 따뜻해 보이는 컵 두 개를 든 채 올라와,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그녀에게 컵을 건넸다.

“코코아네? 코코아 좋아해?”

“뭐….예전부터 코코아는 좋아했으니까.”

세하가 느긋한 표정으로 코코아를 마시자, 슬비가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코코아를 마시기 시작했다.

달콤한 감각이 그녀의 몸에 퍼져나갔다.

“하아….따뜻하다…..살짝 추웠는데 마시니까 괜찮아졌어.”

“텐트 바닥에 전기 장판 깔아뒀어. 담요도 있으니까 덮고 있어.”

세하가 안쪽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걸쳐주자, 그녀가 한 손으로 담요를 쥐며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재미있는 거라도 떠올랐어?”

“아니. 그냥 네가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구나 해서. 의외로 여자한테 점수 따는 법을 아는 구나 라는 생각을 좀 했을 뿐이야.”

“점수 따는 법이라니….이거 그냥 따라 하는 거야.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하던 거.”

세하의 눈에 순간 아련한 감정이 스쳐가는 걸 본 슬비가 바닥에 놓여진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버님이랑….여기 많이 올라왔어?”

“응. 뭐….그것도 10년 좀 넘었나? 그 전까지는 매년 올라왔어. 이 텐트도 아빠랑 나랑 처음으로 조립했던 거랑 비슷한 모델이야. 어렸을 때 쓴 건 낡아서 이제 못 쓰거든. 그래도….이 텐트를 볼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나더라. 웃기지? 벌써 10년이나 지난 추억 가지고 이렇게 질척거리는 거….”

세하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코코아를 마셨다.

“그래도….10년만에 올라오니까….뭔가 좋기도 하고…..느낌이 좀 묘하네….그 때는 세상에 우리 가족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가족이 아닌 사람과 텐트에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게….더 이상….아빠랑 같이 옥상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게….”

그 순간, 슬비가 자신이 들고 있던 컵과 그가 들고 있던 컵을 텐트 안에 놓아두고는 그대로 그를 자신의 품으로 껴안았다.

“…..뭐야 이슬비….갑자기 왜 껴안는 거야?”

“…..네가 울 것 같았으니까….너무….아파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말에 세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야….내가 어디서 우는 거 봤어?”

“응. 못 봤어. 늘 넌….우리 앞에서 운 적이 없으니까. 늘….혼자 참고 울고 오잖아.”

그를 껴안은 그녀의 힘이 강해졌다.

“울어도 돼, 세하야. 여기선 울어도 돼. 아무도 네가 우는 걸 모를 거야.”

제일 들키고 싶지 않은 네가 있잖아.

세하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대답을 했다.

조금만….조금만 이렇게 있어줄래?

그의 말에 그녀가 그의 머리를 토닥이자, 그가 그녀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감정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사라지는 아픔을.

그리고 추억이 깊을수록 더 아파진다는 걸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안고 있는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강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안에 아픔을 담아둘 테니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그녀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일이었으니까.

괜찮아, 세하야. 많이 힘들었지? 고생했어….정말로 마음고생 많이 했어….이제…내려놓아도 돼…

왜 말하는 자신이 눈물이 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그의 감정에 물들어 자신도 슬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에게 물들어가는 이 시간이.

그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의 색깔을 자신에게 퍼트려준다는 것이.

그것은 달콤하면서 쌉쌀한 맛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그녀의 품에서 몸을 떼었다.

“이제 좀 개운해졌어?”

“응….미안해. 나 때문에.”

“이런 거라도 해줘야지. 도움은 내가 제일 많이 받는데.”

 슬비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손이 의외로 크고 딱딱하네…..기억 속에 있는 아빠 손 같아.”

“영광인데. 아버님 생각을 나게 했다는 게.”

“그래. 영광인 줄 알아.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였으니까.”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슬비야. 나….하나만 물어도 돼?”

“응. 뭔데? 뭐든 물어봐.”

“…..다음에도 우리 집에 와 줄 수 있어?”

그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년에도 온다고 했잖아. 그리고, 선배님이 초대해주시면 자주 올 건데?”

“그 뜻이 아니라…..하아….”

세하가 남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년 뿐만 아니라….앞으로….쭉 우리 집에 와 줄 수 있냐는 말이야.”

“무슨….말이야?”

슬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알면서도 되묻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모든 걸 밝혀주고 있었다.

확실히 하고 싶었다.

감정에 앞서 먼저 앞질러 갔다가 상처 받을 것이 두려운, 이미 옆까지 와서는 무서워서 말 못하는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네가 앞으로…..계속 우리 집에 오는 사람이……가족이….되어줬으면 해.”

세하가 떨리면서도 또렷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을까.

이 말 한 번을 위해서 얼마나 마음 속으로 연습을 했을까.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떠오른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래….세하는 이런 애였지…..세상 그 누구보다 서툴고,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그게 세하였지….

내려놓은 그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슬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거 고백이야? 나참….진짜 분위기 없다, 너….”

“알아….되게 분위기도 뭐도 없는 거….하지만….꼭 말하고 싶었어. 아빠와 함께 있었던 이 장소에서.”

가족이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었어.

진지하게 다시금 말하는 그의 모습에 슬비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진심이야? 가족이 되어달라는 말….그 말 나한테는 되게 위험한 말인데? 평생 함께 하자는 약속으로 들어도 돼?”

애써 평온한 척 말하는 그녀였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에는 감정이 너무 너울치고 있었다.

부정하지 말아달라는 마음과 더 확실하게 말해달라는 마음이, 그녀 안에서 파도 쳤다.

“앞으로 우리한테 남은 시간 엄청나게 길다? 그 중간에 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길 지도 모른다? 나한테 그런 말 해버리면 나 공증 받고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서 되돌릴 수 없게 만들고 싶어진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네가 불안해하는 거 알아. 긴 시간 동안 내 감정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일도 언젠가는 사그라질지도 몰라. 친구처럼, 어쩌면 의리로 결혼을 지켜갈지도 몰라. 하지만….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내가 있어줬으면 좋겠어. 내가 진심을 다해서 내 마음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는 내 가족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공예품처럼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어안은 세하의 포옹에 슬비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이 말을 얼마나 듣고 싶었는데.

이 말을 누군가에게 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얼마나 불안해하면서 너를 만나러 갔는데.

슬비가 그를 꼭 껴안았다.

“내가 할 말이야. 이세하. 나의 가족이 되어줘. 잃어버린 가족을 대신할, 그것보다 더 행복해질 가족이 되어줘.”

그녀의 말에 그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강하게 품에 안았다.

때마침 저 멀리서 새해를 알리는 타종소리와 함께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슬비야.”

“새해 복 많이 받아, 세하야.”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새해를 맞이하는 두 사람을 축복하듯 불꽃은 더욱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겨울을 지나 찾아오는 봄을 맞이하는 별들처럼.

겨울을 지나 별을 찾아온 봄의 꽃들처럼.

불꽃이 두 사람의 새해를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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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돌아가지 않고 세하의 방에서 함께 잠을 자게 된 슬비가 세하의 품에 안긴 채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아니…생각해보니까 나도 참 바보 같은 여자구나 싶어서…..말뿐인 약속에 뭘 그렇게 기뻐한 건지 좀 웃겨서.”

“야…..사람이 진심을 다해서 이야기 한 걸 말뿐인 약속이라고 하지마.”

입을 삐죽거리는 그의 모습에 슬비가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세하야. 나랑….약속 하나만 해줄래?”

“뭐든지.”

진지하게 대답하는 그의 말에 그녀가 조용히 그를 올려다봤다.

“…..날 공예품 취급 안 하기로 약속해.”

“공예품?”

생각 외의 답변에 세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슬비가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응. 공예품처럼 너무 아끼지 말아달라는 말이야. 나는 그렇게 쉽게 깨지는 공예품이 아니야. 너랑 싸우기도 할 거고, 너에게 화도 낼 거고, 때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질투도 하는 너의 가족이야. 그러니까 이러면 슬비가 화낼 거야, 이런 건 슬비가 힘드니까 하고 너 자신을 죽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란 말이야.”

“그러다가….네가 상처 받을까 걱정 되는데….”

“걱정 마. 집에 돌아가면 내가 이슬비 취급설명서를 발행해줄게. 정독하고 날 대하면 돼. 내용은….나에 대한 모든 거야. 이러면 화냅니다. 이러면 좋아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이렇게 해주세요. 같은 나에 대한 모든 것.”

그녀의 말에 세하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 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같이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앞으로 얼마나 더 행복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설명서 잘 읽을게. 아, 그러면 나도 하나 만들까? 이세하 취급설명서.”

혹시 모르니까 만들어봐. 내가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 솔직하게.

웃음을 지으며 입맞춤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고개를 돌리자, 슬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라? 왜 고개를 돌리는 걸까? 우리 세하, 무슨 엉큼한 생각을 하는 거야?”

“아…안 했어! 안 했어!”

“흐음….그렇단 말이지….여자친구랑 같은 침대에서, 이렇게 누워있는데 그런 생각을 안 하셨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슬비가 힘을 줘서 그에게 올라타더니,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며 그를 내려다봤다.

“네가 그런 생각이 없다면 이쪽에서 공격해야겠지?”

“야. 슬비야. 자…잠깐만?! 이….이런 건 말이야….좀 더 교제기간을 가진 뒤에……좀 더 절차를 거쳐서…”

“싫.은.데?”

슬비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며 웃음을 지었다.

“선배님…아니지….이제는 어머님이지….어머님한테 허락 받았어. 오늘 밤 귀마개 하고 주무시겠데.”

이 철딱서니 없는 엄마가….!

지금쯤 침대에서 웃고 있을 지수를 생각하며 감정을 표현하던 그가 자신을 보며 요염하게 웃는 연인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세하야. 어떻게 할까? 여기서 그만 둘까? 아니면…..진짜로 선 넘어줄까?”

왠지 그녀의 뒤에 여우꼬리 같은 게 흔들리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이는 그였지만, 이내 자신의 마음에 솟구치는 본능을 이기지 못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선 넘자.”

“후훗….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그녀가 싱긋 웃음을 지으며 그와 함께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 날 일을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 날 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이 내려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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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firsteve입니다!

네! 왔어요! 신년맞이 말랑말랑한 이야기! 세슬! 오예!

하지만 이게 올라갈 때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대체 며칠이 지난 거죠 ㅋㅋㅋㅋ

다음 이야기는 아마도 black knights 2부 5화가 될 것 같네요.

최근 들어 stardust이세하님과 포트거스D이세하님 덕분에 무한한 의욕을 공급받고 있는 중입니다.

기대하세요 탄탄할 겁니다(아마도? 손 님, 머리 님, 부탁드릴게요.)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이번 글에서 저는 가족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세하가 늘 품고 있었던 가족에 대한 부재를 가족이란 부재를 겪고 극복한 슬비가 그를 위로하게 되는 게 아마도 이 글에 하이라이트이지 않을까 하네요.

저한테도 가족이란 건 뭔가 의미가 특별하네요.

20살 이후로부터 해외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가고, 또 다시 외국으로 떠나고,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나가있는 시간보다 극단적으로 적어지면서 저한테 가족은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물론 돌아가면 매번 어머니랑 감정에 치우쳐서 싸우기도 하고 이해 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게 가족이란 세상에게 원 투 잽에 풀 파워 스트레이트를 받고 돌아와도 그들 앞에서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말할 수 있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요?

신년맞이 소설 겸 새로운 시도인 후기를 쓰는 글쟁이 firsteve였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4-10-24 23:21:4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