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Paradox(16)
건삼군 2019-01-01 0
두 걸음, 세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이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열기가 한층 더 강해진다.
위상력 특성 덕분에 열기에 내성이 왠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강한 나조차도 발걸음을 주춤할 정도로 강력한 열기가 나를 더욱 강하게 밀어낸다.
어쨰서 세리가 저렇게 길거리에서 모든걸 녹여버릴 열기를 내뿜으며 서있는지는 모른다. 어제만 했어도 위상력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조차 모르던 세리가, 어떻게 저정도의 위상력을 방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그저 눈앞에 있는 소녀를, 미래에서 온 내 딸에게 다가가는게 우선순위다.
몇걸음을 앞으로 걸었을까, 어느새 세리의 모습이 코앞에 있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며 열기에 저항하며 또 다른 한걸음을 내딛은 그 순간, 갑자기 충격과 함께 부유감이 내 몸을 덮쳤다.
세상이, 흔들리며 고막이 찢어질 듯한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한걸음을 더 앞으로 내딛으려고 했지만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느껴지던 열기도, 눈앞에 서있던 소녀의 모습도 느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시야가 칠흑으로 물드며 온 몸의 감각이 내게서 멀어져갔다.
칠흑으로 물드는 시야 가운데 푸른 머리의 소년과 소녀가 날 향해 흐릿한 모습으로 무어라 외쳤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 무엇보다 검은 어둠이 완전하게 내 시야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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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노는 것을 좋아하고, 편식을 자주하며,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어디에나 있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즐겁게 웃으며 미소짓는 소녀의 모습은, 그 어느것 보다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소녀의 곁에서 가족이 사라지고, 소녀는 혼자 남게 되었다.
혼자남은 소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가족이 돌아오길 바랬다.
시간이 흘러, 어렸던 소녀는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소녀에게는, 예전의 활발하고, 즐겁고 행복해 보이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야, 비켜. 부모만 잘난게 나대지 마.
-너, 진짜 재수없다.
-죽어버리는게 어때?
소녀는 늘 혼자였다. 소녀의 얼굴에는 공허한 표정만이 비춰졌고 소녀는 그렇게 주변에서 쏫아지는 괴롭힘, 비난, 욕설을 담담하게 받아내고는 그저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소녀는 울지도, 웃지도, 저항하지도, 소리치지도 않았다.
모두는 소녀를 감정없는 인형이라 욕했고 그런 소녀를 감싸주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겉으로는 공허함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녀가 그 모든 상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있는 곳에서는 불평도, 저항도 하지 않는 소녀였지만...
-흐... 흐으....흑...
아무도 없는 곳. 가령하여 빈 교실, 늦은 밤의 공원, 혹은 화장실에서, 소녀는 서럽게 울며 감정을 누구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며 억누른 채로 흘려보냈다.
문을 잠그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렇게 조용히 우는 소녀의 모습을, 난 그저 지켜볼 수 밖에는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소녀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내 손은 소녀에게 닿지 않는다.
-...흑, 어, 엄마... 아빠...
“...”
어린아이 같이 울며 부모님을 찾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주먹을 무의식적으로 세게 쥐며 벽을 내리쳤다. 그러나 아픔도, 충격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와.”
아픔도 뭣도 느껴지지 않는 주먹을 풀며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한 남자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흑발에 빛나는 금안. 나보다 인상이 조금 더 날카롭고 키가 조금 크긴 하지만, 그건 틀림없는 나였다.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
분노가 조용히 서려있는 목소리로 남자에게 묻는다. 하지만 남자는 침묵을 지킨 채 대답하지 않는다.
“후회되니까 지금이라도 나보고 미래를 바꾸라고?”
“...”
“한가지만 물어보자.”
터질것만 같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입을 열어 묻는다.
“대체, 애를 내버려두고 떠난 이유가 뭐야?”
“...”
남자는, 또 다른 미래의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한계에 가까히 도달했던 분노가 선을 넘어서며 역류한다.
“이렇게 될걸 알면서! 애가 저런 일들을 겪게 될 걸 알면서, 대체 왜!! 부모가 애한테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몸이 감정에 휘둘려 움직여 또 다른 나의 멱살을 붙잡는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나지막히 대답했다.
“부모니까.”
“뭐?”
“부모니까. 딸... 세리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으니까.”
“뭐?”
그게 대체 무슨...
또 다른 내가 한 대답을 이해하지 못해 의문을 표하며 잠시 말을 멈춘 그 순간, 세상이 깨어지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흩어지는 주변 사이에서, 한가지 장면이 스치듯 내게 보였다.
분홍색 머리를 지닌 여성, 그리고 흑발을 지닌 남성이 서로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내 대화를 나누던 여성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으며 남성은 그런 여성을 끌어안으며 달래주었다.
그리고 이내 여성을 달래주던 남성은 위를 올려다 바라보며 자그맣게 말했다.
-...세리를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모든것이 흩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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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누구였고, 여기는 어디고, 지금은 몇 시인지 그 어느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는 답답한 가운에 눈을 뜨자 모든게 일렁거리며 열을 내고있는 길거리가 눈에 비춰졌다.
꿈인가 싶어 눈을 감자, 섬뜩하고도 달콤한 목소리가 내게 들려왔다.
-잊으면 안되지. 떠올려 봐. 네가 증오하던게 무엇인지, 원망하던 인간이 누구인지.
“!!”
목소리가 하는 말이 머리속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눈을 뜬다.
그러자 아까 보았던 녹아내리고 있는 길거리에 다른 이들이 눈에 비춰졌다.
푸른머리의 소년 소녀, 그리고 그 사이에 엉망진창으로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흑발의 소년.
그 모습을 보자, 순식간에 기억들이 돌아왔다.
-자, 손을 뻗어봐. 내가 도와줄게.
“...나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던 나는 흐려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을 멈추었다.
-왜 주저하는거야? 손만 내민다면, 난 네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데.
“...아니.... 야....
내가 원하던건 저런게...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쓰러져있는 소년, 아빠를 본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거부하였다.
-이제 와서 거부하는거야?
그러자 목소리는 가소롭다는 듯이 날 비웃으며 그렇게 말하였다.
-네가 항상 혼자였던게 누구 탓이지? 괴롭힘을 당했던게 누구 탓이지? 원망, 증오의 근원이 누구지?
“...그건....”
여러가지 기억들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괴롭히는 또래 아이들, 혼자 괴롭힘 당하는 나, 항상 홀로 있는 나.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나는 항상 혼자였다. 도와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고 신경쓰는 사람은 가끔 눈길만을 준 채 방관한다.
Hainsman님의 작품을 허락을 맡고 대신 업로드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