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파이] 클로저에게 사랑은 어려워 #03
루이벨라 2018-12-22 5
※ 볼프파이 기반
※ 『오타쿠에게 사랑은 어려워』 패러디
※ 중편 예정
※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 多
※ 프롤로그 끝 겸 웹상 마지막 공개본
#03. 행복해져도 되나요?
볼프강은 잠깐 비굴해지기로 했다.
“정말로 날 마음에 둔 적 없어?”
“네.”
“정말, 정말로?”
“네.”
“단 한 번도?”
네. 파이의 대답은 계속 간결 형이었다. 마지막 즈음에 가서는 파이가 이런 말도 했다.
“선배, 계속 비굴하게 굴지 마십시오. 순순히 인정하심이...”
“아, 넌 나를 마음에 둔 적이 없구나, 그럼 나도 그러지 말아야지~ 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겠냐?!”
좋아했던 건 사실이니까. 좋아하는 마음을 어찌 그렇게 간단히 버릴 수가 있냐는 말인가. 게다가 볼프강은 진심이었다. 처음 볼프강 자신이 파이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지금의 파이처럼 부정을 해왔다.
내가? 내가아아아아?! 저 애를!?!
그런데 부정을 한다고 해도 파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미, 너무 흠뻑 젖어버려서,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이 촉감을 잊을 수가 없어서...이 마음을 언젠가는 알려야겠다고 다짐은 했었다.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지만.
파이는 위로랍시고 볼프강에게 어떤 말을 꺼냈다.
“설사, 저 또한 선배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해도 전 선배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시지 말고...”
“도대체 그놈의 무슨 자격이 필요해?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는 것도, 그 감정을 인정하는 것에 무슨 자격이 필요하냔 말이야!”
“선배...화나셨습니까?”
“그래, 나 화났다. 그러니 지금 말 돌리지 말고!”
그놈의 자격, 자격, 자격! 파이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어보았다. 물론 겸손은 사람이 가지면 좋을만한 미덕 중 하나였지만, 파이는 겸손의 정도를 넘어서 거의 자기 비약에 가까웠다. 이런 혹독한 자기 비하를 볼 때마다 볼프강은 생각했다. 자부심이 그렇게 떨어지는 사람은 아닌데, 왜 ‘특정’ 부분에서만 무슨 ‘훈련받은 것’처럼 저렇게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를 하는 걸까.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파이가 고개를 돌렸다. 볼프강의 얼굴을 보고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소리다. 파이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선배는 언제나 대단하시지요. 말로는 그렇지 않지만, 언제나 저를 대등하게 봐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제가 조금씩 성장하는 것도 느껴졌고요.”
“이봐, 말 돌리지 말라고...”
“말 돌리는 거 아닙니다! 본론은 지금부터입니다.”
파이가 답지 않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길래 이렇게 서론을 길게 할까. 게다가 조금이라도 트집을 잡히면 왈칵 울 거 같은 저 표정하고는...
“선배는 방금 전에도 말씀하셨죠. 당연한 것에 무슨 자격 운운을 하느냐고. 하지만 저는 그래야만 합니다. 전 당연해져서는 안돼요.”
“그거...”
네 동생 이야기냐? 볼프강은 이 뒷말은 부러 묻지 않았다. 파이 또한 슈에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어렴풋이 짐작을 했을 뿐이다.
조금의 침묵 후에, 파이가 입을 열었다.
“전 못났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도 제가 아니라 제 동생이었습니다. 제가 그 애의 자리를 뺏었습니다. 모든 것을 뺏었죠. 이 검도, 그 애가 그토록 바랬던 마을을 떠나 여행을 다녀보는 것도, 마을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싸우고...”
“...이봐.”
“전 그 모든 것을 그 애한테서 뺏었습니다! 제가 감당도 하지 못할 것을요! 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감당하는 것조차 버거운데...제 몫까지 챙길 여력은 없습니다.”
아직 덜 풀린 것 같지만 그래도 파이의 입에서 파이를 옭아매고 있던 응어리 중 일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더 한 고독이다. 스스로 그 안에 집어던지고 다가오는 손을 일부러 거부하고 있다. 자신의 손바닥에 담겨진 계속 빠져나가는 모래알조차 버겁다고 하고 있다.
당연한 것을. 모래알은 스스로 빠져나간다. 그 모래알을 전부 잡고 있으려고 하니 버겁다고 느껴질 수밖에. 그리고 모래알은 세게 잡으려고 할수록 잘 빠져나간다.
볼프강이 말했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파이가 반문했다.
“아뇨, 제 탓입니다.”
그러자 볼프강이 다시 말했다.
“아냐, 네 탓 아니야.”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파이는 눈을 깜빡였다. 처음 듣는 볼프강의 상냥한 목소리 탓이었다. 지금까지는 조금 덜 퉁명스러움의 정도 차이가 있었을 뿐이지, 볼프강은 항상 파이에게 까칠했다. 한 꺼풀 벗겨진 볼프강의 진심에 파이는 순간 벙쪄버렸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볼프강은 파이에게 고백했다.
“네가 버겁다고 생각한다면 난 기다려줄 수 있어. 일종의 유예 기간처럼.”
“유예...”
내가 이 죄를 속죄할 만큼의 시간. 볼프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첨언했다.
“뭐, 그 유예 기간에 내 마음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차라리 그러는 게 나을 수도요. 전 동생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사람이니까.”
“도대체 어느 점이?”
볼프강의 반박에 파이는 기다렸다는 듯이(아마 볼프강이 마음을 접게 하려고) 하나를 먼저 꼽았다.
“일단 슈에는 저보다 훨씬 예쁩니다.”
“너희 쌍둥이라며? 얼굴은 똑같은 거 아니야?”
1차 방어 성공. 이어지는 2차 공격.
“슈에는 저랑 달리 검술이 뛰어납니다!”
“난 검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그런 거 이상형 항목에서 안 따지는데.”
2차 방어도 성공. 낙담하는 파이와 달리 볼프강은 여유롭게 웃었다. 파이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전 손재주가 없어서 모든지 다 망가뜨립니다.”
“그건 차근차근 배우면 될 거 아니야.”
“전 지나치게 성실합니다!”
“그건 좋은 점 아니었냐?”
“선배와 정반대 성향이라, 무슨 일이든지 다 대립하게 될 겁니다!”
“그걸 이미 다 충분히 고려해보고 정한 마음이다. 책임질 자신 있다.”
파이가 아무리 뭐라 한들, 볼프강은 한 수 위였다. 역시 인생 경험의 차이가 여기서 나는 건가. 사실 볼프강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저런 말로 포장을 하고 있지만 파이가 저 안에 담은 진심은 딱 하나로 통일되어졌다.
기다란 줄다리기 끝에 그 말이 드디어 나왔다.
“제가...과연 행복해져도 되나요?”
말 끝부분에는 물기마저 잔뜩 서려 있었다. 볼프강은 순간 어렸을 때의 자신이 겹쳐 보여서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파이의 인생의 선배답게,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아서 성심을 담아 대답했다.
“물론이지.”
“...”
그 말을 끝으로 파이는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슈에의 대용품으로 보았고, 그 안에 파이의 개인적인 행복이 담겨져서는 안 된다고 여기던 사람들이었다. 파이 또한 죄책감에 그 말을 믿고 묵묵히 따라왔다. 그리고 마을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과 달랐다. 하지만 파이의 사정을 깊게 알지는 않았다. 파이가 말하기도 꺼려했고, 사람들도 파이가 말하지 않는 것을 일부러 물어** 않았다.
그리고 파이가 제일 듣고 싶어 했던 말을 처음으로 해준 이는 볼프강이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해졌다. 볼프강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실컷 울었어?”
“그런 거 같습니다. 머리가 아파오네요.”
“가끔은 그렇게 울어도 돼.”
“그런 말을 해준 사람...선배가 처음입니다.”
조금 뜸을 들여 파이가 볼프강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별 거 아니야.”
“하지만 선배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역시 선배는 좋은 사람이군요!”
“이 바보. 그걸 이제 알았냐?”
왠지 모르게 평소의 볼프강 말투로 돌아왔다. 파이가 피식 웃었다. 아직 눈가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훨씬 홀가분해져 있었다.
“선배가 해준 말, 전부 다 믿어보겠습니다.”
“응?”
“행복해져도 된다...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전부 다 믿겠습니다!”
“사, 사모라니...!”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어쩐지 그런 단어로 들으니 조금 더 진중하고 무거운 감정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파이가 그건 거짓말이었냐는 뾰족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볼프강은 부끄러워하며(얼굴이 잔뜩 빨개져 있었다) 대답했다.
“맞, 맞아...사모...하지.”
“선배가 또 이런 말도 하셨죠? 기다려줄 수 있다고.”
“어, 그랬지...”
“그것도 진심입니까?”
장난기 가득 어울려진 색이 다른 눈동자 한 쌍이 저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던 이 눈동자 또한, 저마다의 예쁜 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부터...사실 볼프강의 완패이지 않았을까.
볼프강은 파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목소리다.
“물론이지.”
볼프강의 대답에 파이가 미소를 지었다. 덩달아 볼프강도 같이 웃었다.
* * *
“그래서...결국 두 분이 사귀기로 하셨다고요?”
“아, 뭐...그렇게 되었어.”
뻘줌한 볼프강이 그렇게 대답했다.
2분대 아이들이 자러 간 그날 밤, 볼프강과 파이는 재리와 앨리스에게만 고했다. 앨리스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에 파이가 갑자기 90도 직각 인사를 했다. 옆에 있는 볼프강과는 확연히 다른 씩씩한 목소리다.
“고로 오늘부터 선배의 연인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파, 파트너? 그런 거 일일이 선언 안 해도 되니까...”
“하지만! 그런 썩어빠진 태도면 무엇이든지 못하게 될 태도입니다!”
티격태격. 평소와 같아진 모습. 게다가 아까보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가벼워진 걸 보며 앨리스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어찌 되나 했는데 이렇게 좋게 끝나게 되어서 다행이군요.”
“앨리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파이 요원님, 한 가지 사실 알려드릴게요. 볼프강 요원님은 요원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요원님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 앨리스! 그게 무슨!!!!!”
아까의 넋두리 타령 들어준 값이라고 치세요~ 앨리스는 손 인사를 하며 먼저 회의실에서 빠져나갔다. 볼프강은 그런 앨리스에게 마저 투덜거리려는지 앨리스를 따라갔다. 이제 회의실에 남겨진 건 재리와 파이 뿐. 볼프강이 사라지자마자 긴장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은 파이에게 재리가 물었다.
“파이, 괜찮나요?”
“솔직히 지금도 많이 죄를 범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특히 슈에한테는 몹쓸 짓을 한 거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볼프강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난 기다려줄 수 있어.
“선배가, 기다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거 좋은 일이군요. 재리가 축하해주었다. 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생 생각이 났다.
슈에, 미안하다. 그리고 내가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하는 거 같구나. 그래도 선배는 그 시간마저도 기다려준다고 나와 약조를 했다. 그러니 나 또한 선배의 마음을 받아들여야할 거 같구나. 네가 있었다면 축하해주었겠지? 보고 싶구나, 내 동생...
독일 사냥터지기 성의 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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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프롤로그가 끝났습니다.
그와 더불어 웹상 공개본 마지막편이기도 합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클로저에게 사랑은 어려워』 회지가 나올 때 공지드리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