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얼음의 동화(세하파이)
firsteve 2018-12-13 14
누구나 한 번쯤은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꾼다고 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일족의 수치, 태어나선 안 되는 둔재, 동생을 잡아먹은 괴물 등 일족에게 모진 소리를 들어가면서, 천재였던 동생의 그림자를 자처해가면서 살아온 그녀였지만 그녀에게도 마음 한 구석에는 소녀 같은 감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쉽게 밖으로 꺼낸다는 건 그녀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누르고 눌러서 스스로의 감정을 베어내는 편이 더 편했다.
그런 그녀의 곁에 한 소년이 찾아왔다.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소년.
한 때 세상을 구한 영웅의 아들이자, 자신과 함께 총장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선 작은 영웅인 소년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솔직히 어떻게 그와 사귀게 된 건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몇 달 전, 그에게 찾아가서 뭐라고 횡설수설 하던 것까지는 기억났지만, 뭐라고 고백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그런 그녀의 엉망진창인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함이 넘쳤다.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복해졌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하 씨. 오늘도 즐거운 데이트였습니다. 역시 도시는 볼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아직 오신 지 얼마 안되셔서 그래요. 아,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아이스크림! 좋습니다! 아이스크림은 좋은 간식이죠! 당장 가도록 하죠!”
눈을 반짝반짝 빛나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왜…왜 웃으시는 건가요?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아니요. 누나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할 때 모습이 왠지 귀여워서요.”
“읏…..저…저한테는 안 어울리는 말입니다….저한테는 늠름하다던가 믿음직스럽다는 말이 더 기분 좋습니다.”
“평소야 그렇긴 하지만 방금 전에는 순전히 귀여움뿐이었는데요?”
“귀….귀엽지 않다니까요! 정말….빨리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갑시다, 세하 씨!”
당황한 듯 눈을 피하며 그를 이끄는 그녀의 손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매장 곳곳에서 아이스크림들의 달콤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역시 아이스크림은 인간이 만든 것 중에 최고인 것 같습니다.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이리 행복해지는 물건이라니….역시 최고입니다.”
녹아 내린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저런 아기자기한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저렇게까지 행복한 표정을 짓는 자신의 연인이 너무나도 좋았다.
“누나. 뭐 먹을까요? 오늘은 신작으로 달려볼까요?”
“신작인가요? 좋습니다! 점원 분! 신작으로 부탁드립니다! 크기는….으…..세하 씨. 이거 뭐라고 읽는다고 했죠?”
“파인트에요. 앞에서부터 파, 인, 트.”
“파,인,트. 네. 파인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주문한 아이스크림들을 기다리고, 파이가 있는 자리로 돌아온 세하가 아이스크림에 눈이 고정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저 보다 아이스크림을 기다린 것 같은데요?”
“그….그런 거 아닙니다! 어떻게 연인을 먹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생각할게요.”
세하가 아이스크림을 내려놓자, 파이가 눈을 반짝이며 아이스크림을 떠먹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이건 또 지금까지 먹어 본 아이스크림과 다른 풍미가 느껴지네요. 역시 세상은 넓은 것 같습니다.”
“많이 먹어요. 아직 많으니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세하 씨. 방금 전에 이 통을 주문할 때 파인트 라고 했죠? 어떻게 쓰나요?”
파이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밀자, 세하가 파인트를 써주다가 문득 옆 장에 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는 웃음을 지었
다.
“수첩에 제 이름은 왜 이렇게 많이 썼어요? 부끄럽게….”
“남자친구의 이름 정도는 세하 씨 나라의 언어로 쓰고 싶었거든요. 그나저나, 한국어는 조금 어렵군요. 나름대로 언어에는 자
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해요. 말은 잘하니까 일상생활에는 크게 불편하지 않잖아요?”
“그래도 아직은 주문할 때나 무언가를 읽고 쓰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까……이제부터 한국에서 오래 살 거니까 못하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오래 살 거 라는 말에 세하가 얼굴을 붉혔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의외로 미래에 자신과 여전히 같이 있을 거라는 뉘앙스를 은연중에 자주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린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 때...테이블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데이트 중에는 무조건 매너모드를 해놓는 그였지만, 딱 2곳만은 어떤 상황이라도 울리게 만들어놓았다.
하필이면 그 중 하나인지 시끄러운 알람음이 울려대자, 세하가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아, 받았다. 세하야, 나 슬비야. 데이트 중에 미안해.”
“괜찮아. 네가 나한테 전화했다는 건 뭔가 일이 났다는 소리일 테니까.”
“맞아. 데이트 중에 미안하지만 일이 생겼어. 테러조직이 최후의 방법으로 건물을 붕괴시켜서 입구를 막았는데 꽤나 두꺼워서
쉽게 뚫을 수가 없어. 도와줄 수 있어?”
“손이 남는 다른 사람들은 없는 거지?”
“응. 파괴력이 있고 단숨에 제압이 가능한 사람은 지금 너뿐이야. 데이트를 우선하겠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부담 갖
지는 말고.”
그녀의 말에 세하가 파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세하 씨. 무슨 일 있나요?”
“누나….정말 미안한데….오늘 데이트는 여기서 마쳐도 될까요? 슬비가 테러조직 때문에 손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런 일이 있다면 가야죠. 의를 보고 행하지 아니함은 용기가 없음이라 했습니다. 다음에 데이트 하면 되죠.”
“아니에요. 싫다면 슬비한테 제가 말할게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말…..”
“괜찮습니다. 다음에 하면 되죠.”
그의 말을 재빨리 자르며 어서 가라는 듯 미소를 짓는 그녀의 표정에, 세하가 미안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누나. 이번 주말에 시간 있죠? 그러면 그 때 우리 영화 봐요. 재미있는 거 찾아놓을게요.”
“기대 하고 있겠습니다. 세하 씨.”
세하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 가게를 떠나자,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혼자 먹기 힘들다고요….세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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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파이의 목소리에, 편한 복장을 하고 있던 소마가 힘차게 뛰어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파이 쌤! 오늘 데이트 어땠어요? 두근두근 말랑말랑 쫄깃쫄깃 했어요?”
“아….데이트는 중간에 그만뒀어요. 세하 씨가 갑자기 임무가 생겨서….”
“뭐야, 세하 오빠…우리 예쁜 파이 쌤을 혼자 두고 가다니. 여자의 적으로 지정해야겠는데요?”
“어쩔 수 없잖습니까…..일인데 잡아둘 수도 없는 거고….아, 이거 같이 먹을까요? 아까 데이트 하면서 먹다가 혼자 다 못 먹어
서 가져왔는데.”
“아이스크림이다! 루나야! 볼프 쌤! 빨리 내려와서 아이스크림 먹어요!”
“아이스크림? 왠 아이스크림이래…..혹시 날 위해서…?이것 참….남자친구인 세하한테 미안해지는데….”
“뭐래요. 혼자서 오버하지 마시고 어서 와서 먹기나 하세요.”
싸늘하게 대꾸하는 파이의 모습에, 볼프강이 말없이 자리에 앉자, 소마가 싱글싱글 웃으며 루나와 함께 파이의 옆에 앉았다.
“우와아아! 이거 저번에 봤던 신작들이잖아? 루나야! 빨리 먹자!”
“그래! 완전무결하게 해치우자!”
숟가락을 들고 전투적으로 먹기 시작하는 두 아이들의 모습에, 볼프강이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든 채 무언가 멍하게 있는 파이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걸었다.
“어이, 파트너. 뭘 그렇게 멍하게 있는 거야? 빨리 안 먹으면 애들이 다 먹는다고?”
“아…..죄송합니다. 잠깐 좀….생각을 하느라고….”
파이가 숟가락을 들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하자, 볼프강이 한참을 말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중얼거렸다.
“데이트 제대로 못 끝낸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닙니다. 그런 거…..그런 생각….품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세하 씨는….세하 씨의 일이 있는 거고….저는 제 일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어른스럽게 말하는 것 치고는 표정이 별로인데. 그냥 세하 녀석한테 가지 말라고 했으면 됐잖아? 네가 말하면 안 가고 남을 녀석인데.”
“그래서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저로 인해서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못 구해지는 건 싫으니까요.”
하여간에 피곤하게 산다, 너도…..
볼프강이 질린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는 이내 두 제자들의 아이스크림 전쟁 지역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얼마 후….
겨우 아이스크림 전쟁이 마무리 되고, 사냥터지기 숙소에 평화가 찾아오자, 파이는 곧바로 숙소에 자리하고 있는 수련장에서
검을 꺼내들고는 조용히 자신의 기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가련하게 흔들리는 검은 머리와 신비한 두 색의 눈동자가 흩날리는 얼음가루가 반사한 빛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
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선과 춤이었지만 정작 그 검무를 추고 있는 파이는 슬픔만이 가득했다.
슈에가 나처럼 노력했다면 이것보다 더 아름다웠을 텐데.
슈에가 세하 씨를 만났다면 나보다 더 잘 어울렸을 텐데.
슈에가 나처럼 위상력이 있었다면 나보다 클로저 일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슈에였다면…..
슈에였다면….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한 번 시작된 자기비하는 끝없이 꼬리 물고 그녀의 마음에 달라붙었다.
검 끝이 흔들리고 춤의 선이 슬퍼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검무가 처량하군….무슨 일 있나, 파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사냥터지기 팀의 동료인 빅터가 수련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빅터 씨…..아닙니다. 그냥……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빅터가 그녀의 주변을 몇 번이고 돌며 코를 킁킁거리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누가 널 이렇게 슬프게 만드는 것이냐….이세하라는 그 아이인가.”
“그런 거 아닙니다. 세하 씨는….절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입니다.”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이 왜 한 박자 정도 시간을 두고 나왔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에 빅터가 파이를 빤히 바라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파이. 내가 한국으로 오고 난 뒤로부터 쭉….아니….너를 사냥터지기 성에서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너는 참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 같군. 어째서 그렇게 네 안의 너를 그렇게 죽여대는 거냐?”
“무슨 말 이십니까, 빅터 씨?”
“역시 자각을 못하는 건가…..그럴 수도 있겠지…..너의 과거를 들어보면 너한테는 그게 일상이 되어서 네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테니까.”
제 과거….말입니까?
파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빅터가 꼬리로 땅바닥을 툭툭치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너는 분명 강하다. 나는 너의 동생을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함부러 말하기는 그렇다만….넌 그 아이가 아니다. 그 때 그 아이가 너보다 잘했다고 해서 지금의 너보다 잘 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슈에가 저처럼 기회가 주어졌다면 슈에는 분명….!”
“슈에. 슈에. 슈에. 네가 무언가를 회피할 때 쓸 수 있는 핑계는 네 동생뿐이더냐? 네 동생은 네가 아니다. 너는 파이 윈체스터다. 슈에라는 그 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빅터 씨…..”
“그러니 네 안에 있는 파이라는 아이를 죽이지 마라. 네 안의 그 작은 아이가 더 중요한 거다.”
빅터가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솔직해져라. 가끔은 어리광을 부려라. 네 옆에 있는 사람들은 네 어리광에 무너질 만큼 약하지 않다. 볼프강 그 녀석도, 나도, 루나도, 소마도, 전학생이라는 그 녀석도, 다른 동료들도, 그리고 네 남자친구인 이세하 그 아이도 너의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다. 그러니, 가끔은 기대도록 하거라. 넌 혼자가 아니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수련장을 떠나려는 빅터의 모습에, 파이가 검을 꽉 쥐었다.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할 수 없다 인가….”
“네…..조언은 감사하지만….제가 쓸 수 없는 조언이군요….”
“아니다. 나도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말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조언을 흘려 듣지는 말아다오. 그렇게 안에 참고 참다 보면……네 안에 있는 무언가가 뒤틀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꺾이지 않습니다, 저는.”
“글쎄…..내가 보아온 너는 그 상태가 계속되면 무너질 거다. 겁 먹지 말고, 네 남자친구에게 어리광이라도 부려보는 게 어떤
가?”
“…..세하 씨한테는….절대 못합니다…..”
꾹 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빅터가 되묻자, 파이가 대답했다.
세하 씨가 반해있는 건…..제가 어른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애처럼 굴면…..아마도 정이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무심결에 튀어나온 본심에 파이가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들어버린 빅터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파이. 나는 인간들의 사랑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연인이란 그 사람의 모든 걸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사
람을 말하는 걸로 알고 있다.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냐? 너는 정말로…..그렇게 마음을 죽이고 티를 내지 않아도 상관 없
는 거냐?”
진지하게 물어오는 그의 말에 파이가 잠시 동안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이 제 어른스러움을 좋아해준다면 끝까지 어른스러운 척 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군…..그게 네 대답인가….
빅터가 한숨을 내쉬며 수련장을 떠났다.
이윽고, 사념으로 대화를 걸어온 볼프강에게 방금 전의 대화를 들려준 빅터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볼프강. 파이를 잘 지켜봐라. 어쩌면 그 녀석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뒤틀려있을지도 모른다.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그 정도는….계속해서 유도해보도록 하지. 너도 힘내달라고.
흥. 쓸데없는 소리다. 나는 너희와 함께 걷기로 한 사냥개이자 동료다. 그 정도는 당연한 소리지.
그럼 잘 부탁한다고. 사냥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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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후.
새롭게 발견된 외부탐사영역의 선발인원으로 뽑힌 파이가 검을 집어넣으며 숨을 골랐다.
넘어오는 순간부터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수치이나 시야에 들어온 것들에 느껴진 것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오싹함과 불길한 감각이었다.
게다가 가지고 온 통신장비 또한 작동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부순 건가 하고 자책을 하던 그녀의 앞으로 처음 보는 차원종들이 나타난 것도 그 때였다.
결국 빠르게 정리한 그녀가 차원종들을 조사하던 중 느낀 것은 차원종이라기 보단 무언가가 뒤틀린 듯하게 보이는 또 다른 무
언가라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차원종은 맞아….그런데….왜 무언가가 덧씌워져서 변했다는 느낌이 드는 거지…..
분명 이곳은 외부차원이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감각은 마치 호프만 같았다.
인간이 차원종화를 이루었을 때 느껴진 뒤틀린 듯한 감각.
그것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차원종들에게 느껴진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나저나….어떻게 돌아가야하나…..통신이 안되니 최보나 팀장님에게 열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사실상 고립에 가까운 그녀였지만, 그녀는 보나의 우수함을 믿기로 했다.
자신과 비교도 안될 만큼 똑똑한 그녀였으니까.
그 때….그녀의 몸이 순간 경고를 울렸다.
경고에 따라 돌아선 그곳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평범한 인간이 여기 있을리가 없지…..그렇다면 클로저인가…..?이곳을 관측하다니…..나름대로 숨어사는 쪽인데 말
이지….”
“차원종이냐?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군.”
“당연하지. 인간의 여자들은 좋은 소리로 울어대니까. 그리고 재미있는 것들도 많아서 상당히 흥미가 있지. 음….? 그건……”
듣기 좋은 미성으로 이야기 하던 차원종이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아아…..이 얼음 같은 친구…..고작 인간의 손에 들려있는 건가? 한심하군….고작 그런 계집에게 힘을 빌려주다니…..그러려고 내부차원에 간 건가? 한심하군.”
“…..너도 이 검에 대해서 아는 거냐?”
“아아….알다마다. 그 녀석은…..흐음….인간의 언어에서는 발음이 불가능하군. 뭐….고쳐서 말하자면 외부세계의 왕 중 한 명이지. 물론, 그 친구는 강하지. 내부차원에 놀러 다니는 녀석들은 대부분 강하지만 그 친구와 그 녀석은 격이 다른 편이지. 나 같은 녀석이랑은 다르게 말이지.”
“네 녀석도…..군단장이라 이거냐?”
“뭐….그렇긴 하지. 내 경우에는 절대로 접근하면 안 되는 군단장들 중 하나지만 말이지.”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하던 그가 그녀를 바라보더니 더욱 그 미소를 크게 지었다.
“아아….너….되게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덕분에….재미있는 게 생각났어……좋은 시나리오와 연출까지….아아….완벽해….하나의 비극이 완성되겠군. 하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쉽게 굴복할 것 같으냐!”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파이의 모습에 차원종이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은 아스모데우스. 네 소원을 들어주마, [파이 윈체스터].”
그의 말이 들리자, 순간 그녀의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쉽지 않을 거다…..나는 전투능력이 그리 월등하지 않은 편이지만 대신에 그렇게까지 사랑을 원하는 상대에게는 나보다 위협적인 녀석은 없을 거다.”
“무슨….헛소리….를……”
“음….생각보다 저항이 심한 걸….그렇다면…..이건 어떤가?”
순식간에 다가온 그가 그녀의 목에 이빨을 꽂았다.
“크읏…..!무…무슨 짓을……흐읏….”
“안심해라…..잠들면 되는 거다. 그리고 솔직해지는 거다. 너의 소원은 이루어질 테니까.”
“내가…..잠들….것….같냐….”
스스로를 얼리는 것으로 잠에서 깨어나려는 그녀였지만, 그 모습을 그는 비웃었다.
“소용없어. 그 친구의 작은 조각 밖에 끌어올 수 없는 그런 조잡한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어.”
안돼….의식이 멀어져…..잠들면 안 되는데…..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 무언가가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하거라. 너는 그 사람과 무엇을 하고 싶지?
..........데이트가 하고 싶어….누구에게도 방해 안 받는 그런 데이트를 하고 싶어.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지?
………….일 때문에 날 놔두고 가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더 많이 사랑 받고 싶어.
그렇다면 네가 도와주마….너의 사랑을 이루게 해주마. 마음껏 그를 사랑하거라. 나의 장난감이여.
…….어떻게 사랑하라는 거야?
너의 모든 것을, 너의 사랑을, 너의 감정을 모두 그에게 쏟아 붓는 거다.
………사랑을….그에게…..
그래. 사랑을 그에게 주는 거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래 사랑을 그에게…..나의 사랑을 그에게….나의 이 마음을 그에게…..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건 뭐지?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그렇다면 그에게 말해줘라. 그에게 표현해줘라. 너의 사랑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그에게 사랑을! 그에게 나의 사랑을! 그에게 영원한 사랑을! 영원히 그와 함께! 아무도 방해 받지 못해! 그는 내 사랑이야. 이
세하는 내 사랑이야! 아무도 가져갈 수 없어. 그의 모든 건 내 꺼야. 그의 마음도, 몸도, 영혼도, 모두 나에 대한 사랑으로 채울 거야. 아무데도 못 가게 만들 거야. 아무도 못 보게 만들 거야. 오직 나만이. 오직 나만이 그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니까!”
광기 어린 말과 함께 그의 머리가 서서히 백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에 검은 왕관이 씌워지더니, 이내 그녀의 눈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 사랑의 화신!눈보라 치는 산에서 사랑을 하는 소녀!”
광기 어린 표정으로 주변에 얼음의 성을 만들기 시작하는 파이의 모습에, 아스모데우스가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사라져갔다.
“자, 막이 열린다. 사랑에 목말라 미쳐버린 여자의 광기 어린 비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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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잔잔한 호수에 뜬 연꽃 같다고 생각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고고하고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그녀에게서 보았다.
세간에서 미인이라고 불리는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크게 움직이지 않던 감정이 크게 요동쳤다.
아픔을 품은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행복을 모르는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그녀가 고백해왔다.
솔직히 뭐라고 말했는지는 그의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기억 나는 거라고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것을 받아드렸다는 것뿐이었다.
그 후로 그녀와 함께 데이트를 했다.
그녀가 모르는 바깥의 세계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녀의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지내온 그에게 있어서 파이의 실종은 그의 마음을 크게 흔들기에 충분했다.
당장이라도 외부차원으로 달려가 그녀가 있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외부차원에 있는 모든 곳을 찾아보고 싶은 그였지만 함부로
행동해 그녀를 잃게 될까 두려운 이성이 간신히 그를 억눌러주고 있었다.
“그래서....날 불렀다는 건 무언가를 찾았다는 거지?”
“응. 게이트는 2시간에 한 번 단위로 열었다가 닫았다가 할 수 있어서 파이 씨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일단 정보는 얻었
어. 이 쪽을 주목해줘.”
보나가 버튼을 누르자, 대형화면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솔직히 저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부서진 거라서 정보량이 부족하긴 하지만….알아낸 바로는 저 건축물은 파이 씨의 마을의 건축물이랑 동일한 건축양식으로 추정돼.”
“그렇다면 누나가 저기 있을 확률이 높겠네.”
“맞아. 하지만 저게 함정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아.”
보나의 말에 세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장 가야겠어. 게이트를 열어줘. 갔다 올게.”
“안돼. 절대 안돼. 저곳은 미지의 영역이야. 환경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진 절대로 안 보낼 거야. 너까지 당하면 어떻게 하려는 거야?”
“안 당해. 신서울에서도, 뉴욕에서도, 독일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바득바득 살아서 돌아왔어. 절대 안 죽어. 아직 누나한테 못
보여준 게 많아서 죽을 수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네가 아무리 강해도 저긴 사실상 적진 한복판이라고! 지금까지의 차원종들과는 달라. 저기 외부차원의 심
부에 가까운 지역이라고!”
“그러면 손 놓고 있을까? 도달 할 수 있는 곳에 내가 구할 수 있는데도 참고 있으라고? 못 해. 더 이상 그렇게 못 해. 도와주지 않겠다면 게이트만 열어줘. 내가 알아서 구해올 테니까.”
세하의 말에 보나가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어지간하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존중해주는 그이지만 한 번씩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갈 때가 있었다.
힘이 없었다면 힘으로라도 제압 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축복 받았다고 불리는 천재.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그를 불러 세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보나가 졌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좋아. 대신에 조건이 있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오기.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파이 씨를 못 구하면 그 때는 군말 없이 퇴각 할 것. 이 정도만 지켜줘.”
“알았어. 꽤나 무리한 부탁이었으니까 그 정도는 양보할 게…..고마워, 보나야.”
“하아…..일단 김가면 씨한테 가봐. 무기나 방어장비를 점검 받고 충분히 대비해서 가야하니까.”
보나를 뒤로 한 채, 김가면이 있는 곳으로 세하가 나타나자, 김가면이 그를 진지한 표정을 맞이했다.
“오셨군요, 선배님. 이야기는 최보나 팀장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외부차원으로 가신다고요?”
“네. 최심부에 가깝다 보니 고도의 차원압력을 버틸 장비가 필요해요.”
“그렇다면 이걸 쓰시죠. 저번 사태 이후, 쭉 준비해온 물건입니다.”
김가면이 뒤에서 케이스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지금까지 선배님이 쓰시던 건블레이드는 범용형이면서 선배님의 위상력에 버틸 수 있는 내구도를 가진 상태였지요.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선배님에게 맞춰진 무기입니다. 총알 또한 기존의 개조탄이 아닌 전용탄으로 전면 교체
했습니다.”
“이거….가격을 묻기가 무서워지는데요…..도대체 얼마나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마음이 꺾일 만한 상황을 그렇게 겪고도 계속해서 클로저를 계속해주시는 선배님에게 이런 지원
밖에 할 수 없는 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이걸로 충분하니까요.”
세하가 건블레이드를 받아 들고 곧바로 장비를 착용하자, 보나에게서 콜 사인이 들어왔다.
“이세하. 이제 곧 파이 씨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게이트를 열 거야. 게이트가 열리고 다음 게이트 생성까지는 적어도 2시간은 걸린다는 거 알고 있지? 그 안에 찾아오는 거야. 알았어?”
“알고 있어. 딱 좋은 타이밍이었어. 준비 만전이야.”
세하가 마지막으로 장비들을 점검하다가 자신의 가슴 주변에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누나. 내가 곧 갈 테니까….”
장비들의 점검을 마친 그가 게이트 앞에 서자, 보나가 다시금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알겠어? 반드시 돌아올 것. 그리고 게이트가 다시 열릴 때까지 못 찾으면 돌아올 것. 알았지?”
“알고 있어. 걱정 마. 반드시 데려올 테니까.”
평소보다 차가운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보나가 말 없이 게이트를 열었다.
이윽고, 게이트 안으로 발을 딛은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건축물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지난 2년 동안, 날카롭게 단련된 그의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 안에 발을 디디면 죽는다고.
저건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게 있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에게 이제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건축물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존재가 그를 건물 안으로 발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자, 안쪽의 마당에서 손님을 맞이하듯 차가운 한기가 몰려왔다.
한 발 내디딜 때 마다 한기가 거세져 갔다.
가장 안쪽의 방에 도달할 때 쯤에 와서는 복도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윽고, 세하가 가장 안쪽 방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그녀와 마주했다.
하얀 눈 같은 그녀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나의 사랑. 드디어 왔나요? 기다렸어요. 당신을 기다렸다고요.”
파이가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다가왔다.
“아아….나의 사랑….내가 사랑하는 사람…..”
다가오는 그 모습은 거침없었다.
그 모습을 본 세하가 조용히 건블레이드를 그녀에게 겨누었다.
“내 사랑…..왜….저에게 검을 겨누는 건가요? 나는 당신의 사랑. 당신은 나의 사랑인데?”
“……넌….누나가 아니야. 누나의 몸으로, 누나의 목소리로, 누나의 얼굴로! 나를 흔들려고 하지마. 넌 파이 누나가 아니야. 내
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아….내 사랑….어쩜 그리도 정열적인 눈일까요…..가지고 싶어요. 당신의 몸, 마음, 영혼까지 모두 가지고 싶어요. 나의 사랑.”
비틀린 듯한 그녀의 말투에 세하가 건블레이드를 겨눈 채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너는…..누구야? 왜 누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나의 사랑….나에요….당신의 사랑. 파이 윈체스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기서.”
자신의 가슴 앞에 손을 모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보라색의 눈과 눈과 같은 머리 창백하기 짝이 없는 피부 그리고 더욱 더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그녀의 사검까지 조금 바뀌기 했
지만, 그녀였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녀였다.
“어째서…..어째서 누나가 차원종이 된 거에요! 누나는 클로저 잖아요! 대체 왜!”
“아아….나를 걱정해주고 있어….나를 사랑해주고 있어…..아아….그의 마음에 내가 차오르는 게 느껴져….”
“대답해요! 대체 왜!”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목소리에 담겨 그녀에게 날아갔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요, 누나. 나랑 같이 돌아가요. 돌아가면 누나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있을 거에요.”
“돌아가면…..또 저를 두고 갈 거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누나를 두고 간다니?”
“늘 그랬잖아요. 임무다 뭐다 하면서 데이트 중에 떠났어요. 혼자 있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혼자 두고 떠났어요. 나보다 다
른 여자애들과 이야기를 더 많이 했잖아요.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그 애들은 알잖아요. 내가 당신의 연인인데. 내가 당신의 여자인데.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더 친절해요. 더 사랑받고 싶어요. 더 사랑 받고 싶어요. 사랑해줘요, 사랑해줘요, 사랑해줘요!”
광기처럼 퍼져나가는 한기에 세하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한순간 폐가 얼어붙는 느낌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제 됐어요….여기는 우리 둘만의 공간.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어요. 다른 아이들한테 빼앗기지 않아요. 슈에가 깨어나서 당신과 잘 될 거라는 생각도 안 해도 되고, 당신은 나만, 나는 당신만 보며 평생 함께 할 수 있다고요. 세상을 지키는 것? 그런 게 뭐가 중요하죠? 나한테는 당신이 전부에요. 사랑 해줘요. 사랑 해줘요. 사랑해달라고요!”
검을 들고 달려오는 파이의 모습에 세하가 급하게 건블레이드로 그녀의 공격을 흘렸지만, 그 뒤로 뻗어지는 얼음들의 향연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 내 사랑을 거부하는 거에요? 나를 사랑하잖아요? 왜 나를 버리려고 해요? 왜 나를 좋아해주지 않느냐고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공격에 이어 이제는 어검술로 조종하는 검들까지 합세해 그를 몰아세웠다.
“왜, 왜, 왜, 왜, 왜! 나를 봐주지 않는 거에요? 왜 나를 두고 가는 거에요? 사랑 받고 싶어요. 사랑 받고 싶어요. 내 사랑을 왜 봐 주지 않는 거에요? 대체 왜!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나쁜 거야. 날 두고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 하는 당신이 나쁜거야! 나는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봐. 당신의 사랑은 나야, 나!”
들려오는 말에 세하의 의식이 점점 몰리기 시작했다.
어른스럽게 자신을 보내주던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이해가 됐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라 생각해 자신도 모르게 기대어왔다.
사실은 여리고 사랑을 원하는 소녀였는데.
고작 자신보다 2살 위의 그녀에게 자신의 어리광으로 얼마나 상처를 주었는지 알아버렸다.
그 생각에 그녀의 공격이 연이어 그의 몸에 상처를 냈다.
“아하하하하!!!!사랑이 넘치고 있어요. 당신의 피가, 나와 함께 하고 있어요! 지금 당신의 눈엔 내가 보이는 거죠? 당신의 머리 속에는 내 생각만 가득하겠죠? 당신의 영혼은 오직 나만의 것이겠죠?”
뒤틀린 애정의 광기가 그녀에게서 퍼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그 광기가 너무나도 가여웠다.
자신 때문에 망가져버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펐다.
그 때 내가 미안하다고 거절했다면.
그 때 내가 누나 곁에 있었다면.
그 때 누나에게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나갔다.
“나의 사랑! 나의 사랑! 이제 당신과 나. 여기서 영원히 함께 하는 거에요! 자, 제 사랑이에요! 저의 사랑을 느껴주세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달려오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강대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빨리 그의 손이, 그의 오의, 초신성이, 먼저 그녀를 향해 뻗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달려오는 그녀의 모습 위로 그녀의 얼굴이 겹쳤다.
세하 씨.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역시 데이트라면 영화관일까요?
세하 씨! 이 아이스크림은 가히 절품이라고 할 만하네요! 너무 맛있습니다!
세하 씨! 지금 저는 엄청나게 행복합니다. 당신을 만나 행복합니다.
세하 씨!으….제대로 된 단어가 없어서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네요…..
“으아아아아!!!!!!!!!!!!!!”
당신을 연모합니다. 세하 씨.
살갗을 파고 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그녀의 검과 그의 몸에서 나는 소리.
승패를 결정하는 증거였다.
“왜…..왜 저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지 않는 거죠?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사랑을 꽂았는데 왜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지 않는건가요?”
검이 더 깊게 그의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공격이 아닌 그녀를 다정하게 쓰다듬기 위한 행동이었다.
“….미안해요….누나…..혼자 둬서….미안해요…..”
“………”
“누나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기대고 의지했나 봐요…..누나도 사실은 더 많이 있고 싶었을텐데….더 많이 사랑 받고 싶었을텐데….”
검에 찔린 부위에서 서서히 얼음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안에….있는 거죠? 듣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누나…..내 말….잘 들어줘요….”
세하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자신감을 가져요. 누나는 미인이니까. 밤늦게 다니지 마요. 남자들이 누나 노릴 지 몰라요. 감정 표현 좀 해요. 안 그러면 누나
만 상처받으니까. 함부러 웃지 마요. 웃으면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가만히 안 둘 거니까…”
자신의 몸이 얼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호흡이 서서히 느려지고 말하기 힘들어졌다.
손에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해야 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말을, 그녀를 위해.
그는 담아왔던 말을 했다.
“할 말….되게 많았는데….생각도 안 나네요….그냥….누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 밖에 안 드네요.”
“…….”
“그리고….누나…..만약에….다시 정신이 돌아오면….그 때는….절대로 누나를 탓하지 마요. 이건 누나 탓이 아니에요. 그러니까….웃어요…행복해줘요. 내가 사랑해주지 못한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줘요. 누나는 사랑 받기 충분한 사람이니까.”
이제는 시야조차 희미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눈동자 너머의 그녀에게 말했다.
“안녕….내 사랑 파이. 많이 사랑해요.”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몸은 얼음 기둥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얼음기둥 밑으로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반지가 떨어졌다.
얼음기둥 밑에 떨어진 반지와 그를 번갈아 보던 파이가 이내 기둥에서 검을 뽑으며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아하하하하!!!!드디어….드디어 당신과 제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게 됐어요!!이제 우리는 영원히 함께에요! 하
하하!!!!”
아니야….
“나의 사랑! 나의 행복!”
아니야……
“이제 당신은 영원히 내 옆에 있을 수 있어요. 당신과 영원히…”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야…!
“…영원히…….영원히…..?같이….?”
그녀의 검은 왕관이 크게 요동쳤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리에 있던 왕관이 깨지며 그녀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가 좋아하던 신비한 색깔의 눈동자들이 돌아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가 검을 내팽개치고 그가 들어있는 얼음기둥을 껴안았다.
“안돼…안돼,안돼,안돼!!!!제발…제발 부탁이야….이런 건 싫단 말이야…!!”
차가웠다.
잃어버리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신에게 언제나 따뜻함을 주던 그가 차가웠다.
데이트를 못 하는 날이라도 하루 한 번은 꼭 찾아와 몇 분이라도 그녀에게 좋아한다며 온기를 주었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위해 더 많이 좋아한다고 말해준 그였다.
그런 그가 차가운 얼음기둥에 갇혔다.
또다시 질투에 눈이 멀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동생을 잃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
나 때문이야…..나 때문이야…..내가….내가…..
얼음기둥 앞에 그녀가 주저앉았다.
나라는 바보는 잃고 나서야 깨달아…..세하가 얼마나 나를 좋아해주는지 잘 알면서….얼마나 나에게 사랑을 줬는지 잘 알면
서….그랬는데….그랬는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있는 힘껏 소리지르며 울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마음이 부서져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서져 떨어졌다.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
그녀가 검을 껴안았다.
“부탁드립니다….돌려주세요…..제 목숨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평생 얼어붙어도 상관없습니다. 평생 위상력을 못 쓴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 기억을 몽땅 잃어도 좋고, 제 감정을 모두 잃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세하 씨와 우리 슈에를 돌려주세요….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을 위해서는 위상력을 잃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설령 모두와의 기억을 잃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막 자각하기 시작한 자신의 감정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돌려만 주세요…..부탁이에요….뭐든 할 게요……평생 당신을 따르라고 한다면 따를게요. 그에게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죽을게요. 그러니까, 제발…..제게서 두 사람을 빼앗아가지 말아주세요.
그녀의 눈물이 검의 흠집 사이로 흘렀다.
그 순간, 검에서 고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검이 자신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쥘 때마다 차가웠고 자신도 차갑게 대했던 검인데, 지금 자신의 품에 있는 검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손 같았다.
선배가 내미는 손 같았다.
제자들이 내미는 손 같았다.
동료들이 내미는 손 같았다.
그리고 가족이 내미는 손 같았다.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 변화가 생겨났다.
눈 같던 머리가 금빛으로 변하더니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의 원래 색깔인 파란색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변화에 개의치 않고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검이여…..나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그러니까….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돌려줘.”
그녀의 말에 검이 응답하듯 일렁였다.
“얼음이여, 녹아라.”
그 순간, 세하를 감싸고 있던 얼음에서 강력한 한기가 그녀에게로 빨려 들어왔다.
크읏….손 끝부터…얼고 있어…..이대로 가다간 내가 먼저…..
시시각각으로 얼어붙는 몸과 검을 잡은 이후로 처음으로 느끼는 혹한의 추위에 파이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그 때….그녀의 머리 속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오늘 데이트 어땠어요? 미안해요. 제가 좀 더 익숙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불편하지 않았어요?
…..세하 씨…..
누나. 오늘 저녁 괜찮았어요? 누나가 맛있게 먹는 거 보니까 저도 기분이 좋네요.
….그래….포기 하지마….
누나. 부담 가지지 마요. 우리 아직 할 것 많아요. 불안해 하지 않아도 돼요. 누나는 저랑 이렇게 같이 있어주기만 해줘요.
아직…..세하 씨랑 못 해 본 거 많단 말이야.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해봤단 말이야!
검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추위에 떠는 몸과 달리 그 눈과 손은 또렷했다.
“녹아라, 얼음! 세하를 돌려달란 말이야!!!!!!”
그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얼음기둥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세하야!!!”
황급히 그에게 달려가 그를 안아 올린 그녀가 그의 얼굴과 손을 꼭 잡았다.
맥박이 느껴지고 따뜻했다.
특유의 따뜻한 향기도 은은하게 느껴졌다.
살아있어…..세하가 살아있어….
파이가 울컥하는 마음에 그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 때 그의 입에서 작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세하야…..!정신이 들어? 내가 보여? 내가 누군지 알겠어?”
두서없이 말을 걸던 파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아니야….지금은 그런 거 상관없어…..돌아와줘서….고마워…..”
하염없이 그의 손을 잡고 우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울지 마라니까…..예쁜 얼굴 망가지잖아….”
“너라는 애는 지금 이런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나한테 죽을 뻔 해놓고는…..어째서….그렇게 평온한 거야…..원망스러워 해야
지…..미워해야 하잖아….그런데…..왜…..그렇게……”
그녀의 손이 떨려오는 게 그에게 느껴졌다.
얼음에 갇힌 자신을 보며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떨리는 손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에게 미운 감정 같은 건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도망가지 않고 자신과 마주해주고, 또 다시 자신의 곁으로 와 준 것에 대해 너무나도 고마웠다.
“얼음에 갇히기 전에 내가 말했잖아. 누나 탓 아니라고….그러니까 울지 마. 난 괜찮아. 멀쩡하게 누나가 탈출 시켜줬잖아.”
“그래도….내가 널 공격한 건 변하지 않잖아.”
“본의 아니게 공격한 거잖아. 죽지 않았으면 된 거야, 누나. 알잖아. 나, 누나한테 무른 거.”
진짜 너란 애는….
파이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세하야. 앞으로는 나….마냥 어른스럽게는 못 있을 것 같아….떼쓰기도 할 거고, 질투도 하고, 가지 말라고 붙잡기도 할 거야…..그래도…..내 곁에 있어줄래?”
조심스럽게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내려왔다.
어른스러운 모습이 아닌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연인에게 던진 진심 어린 물음에, 세하가 웃음을 지었다.
“나도 어리광 부리고 질투하고 그럴 거니까 상관없거든?”
바보 같아…..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몸은 좀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허세는 못 부릴 것 같아. 급속냉각 당해서 장기가 조금 상한 것 같아….힘이 좀 안 들어가는데....부축 좀 해줄래?”
그의 말에 그녀가 말 없이 그를 부축하고 걸어가자, 세하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그냥….누나는 금발도 잘 어울리는구나 해서.”
“아….그러고 보니까 나 지금 금발이지….으….눈에 띄는 색깔은 싫은데…..이거 검은 색으로 염색 되려나….”
파이가 손으로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자 세하가 미소를 띄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떤 색이라도 내 눈에는 예쁘니까 걱정 하지 마.”
“그런 거 반칙이야…..”
파이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리자, 그게 귀엽다는 듯 세하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그건 그렇고! 왜 반말 해? 나 너한테 반말 하라고 한 적 없는데?”
“먼저 말 놓아놓고는. 그리고 난 이게 더 좋아. 싫으면 다시 존댓말 할까?”
“짓궂어….말 놓자. 나도 이게 좋아.”
그 때, 그의 귀에 꽂아놓은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이세하, 들려? 시간 다 됐어. 파이 씨는 찾았어?”
“누나 찾았어. 지금 귀환 중이야 게이트 열어줘.”
“우리 쌤 찾았어요?! 같이 있어요?”
보나와 다른 높은 목소리에 세하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소마구나? 응. 같이 있어. 내가 좀 다쳐서 누나가 부축해주고 있어. 있다가 가면 치료 좀 부탁할게.”
“네~소마에게 맡겨주세요~”
명랑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세하가 미소를 짓고, 이어폰을 파이에게 넘기자, 파이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소마 양. 저는 무사합니다. 걱정 해줘서 고마워요.”
“우아아아~파이 쌤 목소리다~!파이 쌤~얼른 오세요~다들 기다리고 있다고요.”
“그래, 이 바보야. 빨리 넘어와. 감히 선배를 걱정시키다니…..돌아오면 혼날 줄 알아.”
“제가 애 입니까?한동안 제 잔소리 그리우셨을 테니 돌아가자마자 바로 잔소리 해드리겠습니다.”
투닥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그녀 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돌아왔다.
답답하고 고지식하지만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리고도 강한 자신의 사랑이.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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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후,
급속냉각으로 상해버린 장기의 치료를 위해 입원중이던 그의 병실로, 파이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세하야. 나 왔어. 몸은 좀 어때?”
“매번 묻는 것 같은데 멀쩡해. 이제는 걷는 것도 괜찮고 활동해도 된다고 하니까 금방 퇴원할 거야.”
그럼 이제 데이트 할 수 있는 거네? 다행이다.
파이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데이트 가고 싶은 곳 알아봤어. 물론, 소마랑 루나가 도와줬지만…그래도 검색은 내가 했어.”
“많이 발전했네. 가고 싶은 곳도 찾고.”
나도 켜져 있으면 검색 정도는 할 수 있거든?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오늘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티 많이 나? 으으….암살자가 감정도 못 숨겨…..암살자로서 실격이야…”
파이가 고개를 숙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 그녀의 버릇이었다.
“좀 진지한 이야기인데 괜찮아?”
“새삼스럽게….그런 말 안 해도 돼. 헤어지자는 이야기만 아니면 뭐든 들어줄 테니까.”
“그러면 이야기 한다? 후우….이거 떨리네….”
파이가 좀처럼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세하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걱정 안 해도 돼. 도망 안 가. 뭐든 정면으로 받아낼 생각이니까.”
“….우리 사귀는 거…..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러 왔어.”
그녀의 말에 세하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파이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미…미안! 내 설명이 부족했어! 그….그러니까….내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 건…..나는 우리 연애를 연** 끝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
파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어리고, 너는 나보다 더 어리고…..그래서 이렇게 무거운 생각으로 사귀면 네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은데….그래
도….난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떨려오는 목소리로, 그럼에도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셨다.
“나는….날 위해 목숨을 걸어주는 남자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많이 미숙하고 완성되지 못한 나지만…..너랑 함께 행복하게 평생
을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누나…..”
“이게….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세하야…..우리…..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걸로 하지 않을래?”
신비한 두 눈동자가 빛났다.
잡고 있는 손은 제어 불능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두 눈만은 또렷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렷하게 그의 귀에 안착했다.
들려온 말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홀로 고민했을까…..
이 말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서 한 걸까……
떨려오는 그녀의 팔로 그녀의 마음이 전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얼음의 마음이 그에게 흘러 들어왔다.
“…..하아…..정말…..누나 그 말 하려고 며칠 걸린 거야? 누나가 안 더듬고 말하는 걸로 봐서 최소 돌아온 날부터인 것 같은데.”
“그….그렇게까지 오랫동안 참아온 말 아니야!.....10일 정도는 생각했지만….”
“하아…..못 살겠다, 진짜….이게 뭐라고 10일씩이나 마음고생 한 거야? 그것도 이런 걸 가지고.”
세하가 그녀를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이 바보 누나야. 그건 당연하잖아. 평생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없으면 목숨 같은 거 안 걸어. 나도 내 목숨 되게 소중한 사
람이야.”
“세하야…..”
그녀를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나랑 평생 같이 살자, 누나. 내 옆에 평생 있어줘.”
“…..그래도….돼? 네 주변엔 나보다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누가 그러더라. 배부른데 산해진미가 무슨 소용이냐고. 난 충분히 배불러.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마. 내 옆에 있어.”
그의 따뜻한 말에 결국 파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뭐야, 진짜아…..사람 감동 주고…..나 평생 받을 감동 다 받은 거 같아…..”
“이걸로 평생 받을 거 다 받았다고 하면 안되지. 아직 받을 거 많아. 그러니까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줘, 누나.”
끝나지 않는 동화를 넘기듯 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의 말에 그녀도 그의 몸을 껴안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겨우 동화의 첫 장이 넘어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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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firsteve입니다!
으아아…..처음 시도해보는 세하파이 소설! 어떠셨나요?
얀데레는 처음 써봐서 어색하지 않을 지 걱정되네요….
다음 소설은 파이의 고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마도 짧을 거에요. 아마도….?
그 다음은 모르겠네요 히히….머리님과 손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아니면 애교만땅의 세하파이의 아이들을 쓸까요?
뭐 그건 파이 고향편을 쓰고나서 생각해보겠습니다 ㅋㅋㅋㅋ
다음 편에서도 여러분들을 만족시켜드릴 고품격의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firsteve였습니다.
p.s 후기와 댓글은 작가에게 큰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