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상의 초콜릿
기류 2015-02-15 2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본래의 기원은 기업들의 상품 판매 목적으로 인해 만들어진 기념일이라 하지만, 사람들의 ‘이벤트’라는 군중심리에 의해선지 매년 많은 사람들에게 희비교차를 안겨주는 날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대상인 것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 나름의 상황에 의해 그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든 클로저든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신강고등학교의 학생 중 한 명인 한석봉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차원종이라는 괴물들이 도시 여기저기에 나타나고 클로저라는 인간을 상회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과 대적하는 이 현실에서, 그런 생각은 이상하지 않았다. 바로 옆만 보아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클로저였으니까. 그러나 정작 주변 사람들은 그런 석봉이를 평범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잠을 제외한 대부분을 게임에 소비하며, 그 게임을 위해 잠조차 줄여가며 아르바이트를 뛰는 고등학생은 사람들의 잣대에 맞지 않았으니까.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던 석봉이지만, 그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것보다는 게임을 하는 것을 우선시하던 그였으니까. 기념일 같은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았거니와 그런 것들은 현실이 아닌 게임 속의 이벤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말 그대로 노 게임 노 라이프(No game No life). 그의 그러한 생활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2월 14일, 화창한 오후. 여전히 편의점 앞에서 다크서클을 띤 채 꾸벅이며 졸고 있던 그였지만, 전날 밤만큼은 게임으로 밤을 새우진 않았다. 그보단 다른 생각으로 잠을 설쳤었던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만, 여전히 파리만 날리고 있다. 그에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편의점 앞치마 안에 넣어 두었던 물건을 슬쩍 본다. 포장된 초콜릿 상자였다. 게임이 삶의 낙이던 그가 왜 이런 것을 준비했을까? 어머니께 드리려고? 그렇다면 편의점으로 오기 전에 주었으면 됐다. 자신이 먹으려고? 그럼 그 포장은? 당연히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아직 안 오나….’ 자주는 아니어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얼굴을 보이던 그녀에게 말이다. 게임 매니아 한석봉이 이슬비라는 클로저에게 반했던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부터 그녀를 대할 때의 자신의 반응을 알아채고는 그 사실을 깨달았었다. 용모 단정, 성적 우수, 학급 반장을 맡을 정도의 책임감과 사무 능력에, 도도한 얼굴이 매력적인 소녀. 마치 게임 속의 존재 같은 그 모습에 끌린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겐 평생 인연이 없을 거라 여겼던 기념일을 챙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동안 몇 번인가 눈치를 주었지만, 이 철벽의 소녀는 자신의 그 같은 호의를 전부 착각으로 넘겨버렸다. 이번에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일이 잘 되든 못 되든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기에 애꿎은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내는 그였다. “안녕, 석봉아.” “스, 슬비야! 왔어?!” 언제 왔는지 편의점 앞에 서 있던 슬비. 갑작스런 인사에 화들짝 놀란 석봉이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였다. 그에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슬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그 같은 미소에 흠칫한 석봉이 황홀감에 몸을 배배 꼬고 있을 때, 어느 새 슬비는 계산대 앞으로 와 있었다. “석봉아, 이것 좀 계산해 줄래?” “으, 응! 미안!” 재빨리 달려가서는 계산대 옆의 바코드 입력기를 손에 쥐었다. 어느새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음이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들릴 정도로 거세진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물건을 계산한 후에, 자신이 사 두었던 초콜릿을 건네줄 생각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까지처럼 착각하고 넘길까, 아니면 기뻐할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 같은 오타쿠 폐인이 관심을 보인 것에 대해 화를 낼까. 무슨 결과가 나오든 진정할 수 없었다. 수전증이 걸린 듯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바코드를 입력할 때, 일순 그의 떨림이 멎었다. “근데 석봉아, 오늘 세하는 안 왔어?” “세…세하?”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의아해진 그가 슬비를 마주본다. 그 한 순간ㅡ간결하고도 비중 있게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다른 모습에. 슬쩍 시선을 피하며, 미세한 홍조를 띤 얼굴은 무언가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많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들에 익숙해진 석봉은, 슬비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정확히는 아니어도 어림짐작을 할 수 있었다. 다시금 시선을 내려 슬비가 고른 상품을 본다. 말끔하게 포장된,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한 초콜릿 상자였다. 왜 이것을 샀을까? 왜 세하에 대해 물어본 것일까? 그 같은 의문들은, 별다른 막힘없이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졌다. 슬비는, 자신이 연심을 품었던 소녀는…자신의 친구인 세하를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런 반응을 보인 것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자신에겐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그런 모습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며 바코드를 입력했다. 손은 떨렸지만 얼굴은 차분했다. 모니터에 입력된 가격표를 보며, 툭 던지듯 뱉어냈다. “누…누구 줄 건가봐?” “어, 으응. 그, 그거 있잖아? 우정 초콜릿. 다른 동료들한테 주려고 말이야. 아, 내 정신 좀 봐. 사려면 사람 수대로 사야 했는데.” 석봉의 물음에 흠칫한 슬비가, 이내 그렇게 둘러대고는 다른 초콜릿들을 가져온다. 같은 상품이었지만, 그녀의 그 같은 말과 행동이 와 닿지는 않았다. 현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받아들이지 않아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힘없이 초콜릿들을 봉투에 담는다. “여, 여기….” “으, 응. 고마워 석봉아. 자, 이거 먹어.” “응, 고마워….” 옅은 미소와 함께 초콜릿을 내미는 슬비.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지만, 그 기분을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이미 알고 있다, 이 초콜릿의 무게를. 자신의 친구인 세하에게 돌아갈 초콜릿과 그 무게가 얼마나 다른지를. “그럼 안녕, 석봉아. 나중에 또…” “자, 잠깐, 슬비야!!” 인사를 하며 편의점을 나서려던 슬비였지만, 석봉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 의아해진 슬비가 다시금 석봉이를 돌아본다. 어째선지, 그는 슬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다시금 심장이 터질 듯 쿵쾅대었다.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몸이 나무인형처럼 부자연스레 움직였다. 입 안이 바싹 말라갔다.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안면 근육이 마비되어갔다. 그럼에도 그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거절하든, 타박하든 뭐든…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 그걸로 족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마음에 둔 이성에게. 설령 그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ㅡ!! “이, 이거 줄게!” 소리치며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초콜릿을 꺼낸다. 그러나 너무 급히 꺼낸 탓일까, 땀에 흠뻑 젖은 손에서 미끄러진 초콜릿이 그대로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콰직,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아….” 외마디 소리와 함께 재빨리 초콜릿을 주웠지만, 손에 느껴지는 감각과 소리로 인해 초콜릿에 문제가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초콜릿을 하나 주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책망과, 좋아하는 이성 앞에서 보인 추태에 대한 창피함의 눈물이었다. 이런 자신을 보며 어떻게 생각할까? 그에 대한 오만가지 생각을 곱씹고 있을 때, 초콜릿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감을 느꼈다. 고개를 드니, 어느새 초콜릿은 슬비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 나에게 주는 거야?” 그렇게 되묻는 슬비. 쑥스러운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멋쩍은 듯 옆머리를 뒤로 넘기는 그녀였다. 그에 움찔한 석봉이 다시금 머릿속에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어쩌면 잘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자신의 마음을 어필한다면… ㅡ그런데, 무의식적으로 그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으, 응. 그게…평소에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이거라도 먹고 힘이 좀 되라고…무, 물론 다른 사람들도 오면 줄 거야! 하하….” “그, 그렇구나. 고마워.” 석봉이의 말에 밝게 웃고는, 슬쩍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현하는 슬비. 이내 다음에 보자는, 평범한 인사와 함께 편의점을 나섰다. 그때까지 부자연스런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던 석봉이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뭐야, 이게. 바보같이….’ 땅이 꺼질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거기서 말을 못한 것일까, 만약 여기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상대가 누구든 간에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지는 않으니까. 자신이 골문을 향해 공을 날렸으면 말이다. 멍청하다고 자신을 책망해본들 이미 버스는 떠났고, 다시 돌아올 일은 없었다. 그저…종점에서 다시 돌아오길 바랄 수밖에. 어째서 마음이 홀가분한지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꼭 쥐고 있던 빗자루를 벽에 기대고는, 다시금 게임기를 꺼내 두드리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지만, 어쩐지 후회는 없었다. 구로역의 한 벤치에 앉아 있던 슬비가, 나른한 햇살에 기지개를 켰다. 약 십분 뒤에, 자신이 리더를 맡고 있는 검은 양 팀의 멤버가 모일 것이다. 물론 동시에 올 리는 없을 것이다. 특히 어느 때던 간에 게임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 '그 바보‘만은 분명히. 옆에 둔 봉투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안에 들어있는, 같은 종류의 초콜릿은 모든 멤버에게 하나씩 돌아갈 것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차이는 둘째 치고. 옅은 한숨과 함께, 한 상자를 다시금 손에 쥐었다. 방금 전 석봉이가 주었던, 소박하지만 여성스러워 보이는 포장의 초콜릿 상자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준다고 한 것을 보면 분명 우정 초콜릿일 것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옆으로 흘려내어 다시금 철벽의 방어를 선보였겠지. 그렇지만 어째선지, 그 상자를 연신 만지작대는 소녀의 눈엔 이유 모를 막연함이 담겨 있었다. - 끝 |
---------------------------
발렌타인 데이는 이미 지났지만, 그냥 써본 이야기.
덧글을 먹고 삽니다. 굽신굽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