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별의 이야기-첫사랑의 달(+이벤트 공지)
firsteve 2018-10-01 7
저번 작품(백일몽(세하슬비)):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1&emsearchtype=WriterName&strsearch=firsteve&n4articlesn=13752
좋아하는 사람에게 데이트하자고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루나는 잘 몰랐다.
조금만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꺼내면 되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며 핸드폰을 켜보았지만…..
“소마야…..뭐…뭐라고 말해야 선배가 한 번에 승낙을 하실까? 애…애교를 넣을까? 아니면 조금 시크하게 해볼까? 아니면…아, 정말….어떻게 첫 마디를 써야하는거야….”
그 흔한 문자 첫 줄 조차 못 쓴 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릴 때까지 그녀의 문자는 전송은 커녕 써지지 못한 채 계속 임시
저장 상태로 놓여져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벚꽃구경 가자고 하면 되잖아? 그게 어려워?”
“어…어려워! 이런 건 해본 적이 있어야지….”
“흐음….그럼 내가 보내볼까? 줘 봐, 루나야.”
소마가 루나의 손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순식간에 문자를 치고는 그녀에게 되돌려주었다.
그 내용은….
[선배님. 날씨도 너무너무너무 좋은데 저랑 소마랑 벚꽃구경 가실래요? 꼭 선배랑 가고 싶어요~다음 주에 어떠세요? 답장 기다릴게요~♥ 선배를 기다리는 루나가♥]
“소….소마아아아!!!!!”
루나를 기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에헤헤~작전 성공~이걸로 루나는 세하 쌤과 함께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빠빰!”
소마가 장난스럽게 V자를 만들며 포즈를 취하자, 루나가 당황하며 정정메세지를 보내려고 황급히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세하의 답장이 빨랐다.
[다음 주 좋지. 주말에는 다들 쉴 테니까 그 때 보러 가자. 너희 숙소로 데리러 가면 되지? 다음주 토요일에 보는 게 좋을 것 같
은데 너는 어느 날이 좋아?]
“다….답장이….왔어…..늦었어…..”
“오옷! 답장이라~어디어디….오홋! 데이트가 확정되었습니다~!풍악을 울려라~루나가 데이트를 한다~”
“어…어떻게 할 거야!!문자 정정 못하잖아!!!”
“왜 굳이 정정을 해? 실패했으면 정정해도 괜찮지만 성공했잖아?”
“그…그게 아니라…..이….이런 건…..연인들 사이에서나….쓰는 거….잖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작아져 가는 루나의 모습에 소마가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뭐 어때~루나는 세하 쌤이랑 연인이 되고 싶으니까 미리 해보는 거지~”
“여…연인….세하 선배랑….내가….연인….”
루나의 머리 속에 세하와 연인이 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제는 김이 피어오를 기세로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뭐야뭐야~연인사이에나 하는 거라면서 얌전한 척 해놓고는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루나?”
“사…상상이라니….나…난 딱히 세하 선배랑 연애하는 상상 같은 건…..”
“어라라? 난 세하 쌤이라고는 말 안 했는데~?”
“소마아아!!!!”
짓궂게 놀려대는 그녀의 말에 루나가 버둥거리다가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진동에 황급히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세하였다.
“여…여보세요?! 서…선배님?!무….무슨 일로 전…전화를 하셨나요?”
“어…..바쁜 일 하는 중이었어? 미안해. 나중에 전화할까?”
“아….아니에요! 괜…괜찮아요! 아니, 괜찮습니돠!”
혀까지 깨물어가며 허둥지둥 말하는 모습에 소마가 키득거리면서 루나의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세하에게 폭탄발언을 했다.
“세하 쌤~사실 지금 루나가요~쌤 문자 받고 좋아서 날뛰던 중이었어요~”
“소…소마아아!!!무슨 말을….! 이리 줘!!!”
“꺄하하하~어림없지롱~”
소마가 회피하면서 놀려대자, 세하도 전화기 너머에서 쿡 하고 웃음을 지었다.
“상황정리 되면 다시 전화 줘. 핸드폰 부수진 말고.”
“네엡~그럼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뿅~”
소마가 통화를 끝내고 루나에게 핸드폰을 넘기자, 루나가 고양이마냥 씩씩거리며 소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뭐하는 거야….그런 말 하면 선배에게 내 이미지가….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연애란 마이너스에서 시작해서 플러스로 가는 게 좋은 거랍니다?”
“자기도 모태솔로면서….”
“두둥…..그랬지….나도 모태솔로였지…..”
소마가 과장되게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자 루나가 머리를 감싸 쥐고는 주저앉았다.
“방법이 있을 거야….완전무결하게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방법이….방법이….없잖아!!어떻게 수습할 거야, 소마아아!!!”
“수습은 불가능합니다~그냥 이대로 돌격! 그리고 고백! 근데 안 통하면 냅다 입술을 들이밀어!”
“그게 되겠냐!!!!”
루나가 버둥버둥 팔을 휘저으며 말하자, 소마가 웃음을 머금은 채로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또 기다리려고? 3년 전처럼 기다리다가 또 누군가에게 빼앗기려고?”
“그건……그건……아니지만….그래도…..”
“나는 말이야, 루나야….루나가 조금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 우리 루나는 사랑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니까.”
“소마…..”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가 뺏어갈 수도 있다?”
“너….넌 세하 선배 안 좋아하잖아?!”
“흐흥~그래도 세하 쌤이 나쁜 건 아니라구?얼굴도 그 정도면 잘 생겼고, 집안도 빵빵 하겠다, 능력도 있겠다, 자상하겠다, 빠질 건 없다고 보는데? 그리고 선배는 오는 여자 안 막잖아.”
“윽…..”
그건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세하는 기본적으로 남을 잘 밀쳐내지를 못하니까.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허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무른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뺏기기 전에 네가 잡아. 내가 잡으면 너 나랑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어?”
소마의 날카로운 지적에 루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소마가 다시 웃음을 머금은 채 밝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루나가 세하 쌤이랑 이어지기를 바라니까, 내 차례는 엄청 뒤에나 올 것 같고.”
난 쌤한테 동생 같은 존재니까.
소마의 덧붙임에 루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선배한테….뭘까…..?”
“그건 쌤한테 직접 물어야겠지?”
소마가 루나의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하자, 루나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통화목록 제일 위의 있는 번호를 향해 통
화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통화연결음이 들린 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그녀가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루나야. 좀 진정됬어?핸드폰은 전화 건 걸로 봐서는 무사한 것 같고.”
“네, 선배….그….근데 선배….목소리가 잘 안 들려요. 어디세요?”
“아, 그렇네. 미안해, 잠시만 있어줘. 금방 나갈게.”
어딘가로 이동하는 듯 잔잔한 바람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소리들이 점차 멀어졌다.
“아, 미안해. 유리 녀석이 인형 좀 뽑아달라고 해서.”
“유리 선배가요?왜 굳이 선배한테…..”
자신도 모르게 질투심과 경계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한 것에 루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감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세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 녀석 요령이 없어서 인형뽑기만 하면 돈 날려대서 같이 놀러 나올 일 있으면 한 번씩 뽑아주고 있거든.”
“아….그….그러셨어요….제가 또 오해를….”
“뭐….종종 듣는 소리니까. 이것 때문에 오해도 많이 샀고. 그래서….언제 볼까? 난 토요일이 괜찮을 것 같은데, 네가 원하는 대
로 해. 어차피 요즘엔 많이 한가하거든.”
“그…그러면 토요일에 봐요. 아…아침 일찍은 좀 그렇고 저…점심 때 만나서 가서 꽃구경도 하고 점심도 먹어요…”
“그럼 한 11시 쯤에 너희 집 앞에서 만나야겠네. 자리도 잡아야 하니까. 그럼 토요일 11시에 너희 집 앞에서 보자, 루나야.”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세하가 마무리 인사를 하려고 하자, 루나가 다급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서…선배!끊지 마요! 할 말 있어요!”
자신도 무슨 용기로 그를 불러 세운 건지 그녀조차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물어보고 싶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서…선배….선배한테….저는…..뭔가요?”
“응?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
“대….대답해주세요! 전….선배한테 뭔가요?”
그녀의 물음에 전화기 너머에서 흐음 하고 살짝 고민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평소 같은 말투로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좋은 남자 아니면 보내고 싶지 않은 후배.”
“아…..”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루나가 말 조차 제대로 못한 채 어버버 거리자 세하가 수화기 너머에서 웃었다.
“노….놀리시는 거죠? 전 방금 되게 진지하게 물었는데….”
“아니야. 진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궁금하는 거야?”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궁금했어요….”
“뭐….별 이유 아니면 됐어. 시간이 너무 늦었네. 잘 자고, 좋은 꿈 꿔, 루나야.”
“아, 네….선….선배도….좋은 꿈….꾸세요…..”
루나가 살며시 통화를 종료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소마가 히죽히죽 웃으며 루나에게 다가왔다.
“어라라라~?세하 쌤한테 무슨 말을 들었길래 루나 얼굴이 이렇게 빨갛게 됬을까?궁금하네~?”
연신 소마가 옆에서 싱글싱글 놀리기 시작했지만 루나에겐 그 놀리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잘 자고, 좋은 꿈 꿔. 루나야.
다정하면서도 달콤하게 들려온 세하의 마지막 말이 멈출 줄 모르고 그녀의 귓가에 반복되고 있었으니까.
“루~나~야!”
“꺅! 까…깜짝이야….왜 소리를 질러….”
“그야 거기에 멍 때리고 있는 루나가 있으니까?”
“네가 무슨 등산가야….?”
“자, 자. 사소한 건 제쳐두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데이트 잡혔잖아?”
“아….그….그렇네…..?!데이트 잡힌 거지?! 어떻게 하지?!”
“워워….진정해, 루나야. 일단 차근차근 그 날 뭐 입고 갈지, 어떤 음식을 가지고 갈 지, 꽃구경 다음에는 어떻게 움직일 건가
등등 생각해보자고.”
“그…그렇겠지?역시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준비해야겠지? 들떠서 준비 못 하면 안되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첩에 연신 이것저것을 써가며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에 소마가 루나의 팔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는 질질
끌고 침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뭐…뭐하는 거야? 아직 나 계획 다 안 세웠는데?”
“계획은 좀 있다가 세워. 팩 합시다, 팩. 세하 쌤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잖아? 루나는 인형 같이 작고 귀엽고 예쁘지만, 피부까지 좋으면 좋잖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너 요즘 말하는 거 아줌마 같아지고 있는 거 알아?”
“두둥….나 아직 낭랑 18세인데 아줌마 소리를 듣고 있어….일생일대의 충격….”
과장스러운 것 보니까 소마네.
루나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답하자, 소마도 배시시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응,응! 루나의 친구이자 행복전도사 소마라구~. 자, 자. 그래서, 팩 할 거지?”
“효과 증명 된 것 맞지? 피부 안 좋아지면 안된다고….”
“피부가 안 좋아지면 내 능력으로 핥아줄게. 금방 회복될 거야”
“제발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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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그 동안 두 사람이 뭐했냐고 물어본다면….루나의 옷을 사기 위해, 매일 같이 인터넷쇼핑과 주변에 있는 백화점 탐방에 주력했
다고 말하겠다.
그것은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루나도 별 말 없이 넘어갔지만….문제는 그것보다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수첩이었다.
“정말 이 계획대로 할 수 있을까…..이건 정말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한다고….”
“그렇게까지 타이밍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점심 먹고, 꽃구경 하고, 영화 보러 가자고 하고, 데려다 달라고 하고, 고백하면 되는데.”
“그 계획을 네가 지켜보고 있다는 게 문제잖아!”
“그럼 중간에 난 핑계를 대고 빠질게. 그리고 집에서 문을 잠그고 기다리고 있을게.”
“문은 왜 잠그는데?”
“외박하라고. 세하 쌤 집에서 흐흐….말랑말랑 쫀득쫀득한 관계를 만들고 와~”
“그…그럴 것 같으면 따라와! 나…난 절대 그렇게 못해!”
“이상하게 방어벽이 높단 말이야….너무 높은 방어벽은 남자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고?”
“넌 그런 걸 대체 어디서 보는 거야?”
“볼프 쌤 서재에서?”
도대체 무슨 책을 사두는 거에요, 볼프 쌤!!!
순수한 소마를 물들인 볼프의 만행에 루나가 속으로 욕을 퍼붓다가 자신의 손에서 울리는 핸드폰에 정신을 차렸다.
“여…여보세요?”
“아, 루나야. 지금 집 앞인데 준비 다 됐어? 안됐으면 조금 더 기다려도 되는데.”
“준비 다 됐어요! 내려갈게요!”
루나가 황급히 전화를 끊고 집을 나서려 하자 소마가 그녀를 말리며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팔찌였다.
“은근히 덜렁이야 루나도?세하 쌤이 준 거라서 중요하다고 매일 같이 닦고 있으면서?”
“끼…끼기에는 좀 아까운데….”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팔에 끼고는 배시시 웃는 루나의 모습에 소마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여간에 읽기 쉽다니까….
그런 중얼거림을 뒤로 한 채, 루나와 소마가 집 밖으로 나오자, 차에 기댄 채 세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 루나야. 소마도 잘 지냈어?”
“헤헤~세하 쌤, 헬로헬로~우와~뭐 이리 꾸미고 오셨어요?”
“별로 안 꾸몄는데. 그래도 예쁜 루나랑 소마를 데리고 가는 건데 어느 정도는 꾸며봤지만.”
“오오~선수의 기운이 느껴지는데요~?진짜 세하 쌤 선수 아니에요?”
소마가 넉살 좋게 말을 붙이며 대화를 이끌어가지만, 옆에 있던 루나는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다.
며칠 동안 머리 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했던 말은 나오지 못했다.
기껏 준비해둔 인사말이나 옷에 대한 칭찬 또한 눈에 들어온 세하의 모습에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소마야. 루나, 어디 아파? 어째 아까부터 말이 없는데….”
“오늘 세하 쌤 본다고 긴장해서 그래요~조금만 봐주세요~”
“기…긴장하긴 누가 긴장했다고 그래! 나 긴장 안 했어!”
소마의 놀림에 정신을 차린 루나가 입을 열자, 세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안 잡아먹어. 잡아먹었다가 볼프 형한테 무슨 말 들을려고….”
“오~그 뜻은~?볼프 쌤만 아니면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20살 될 때까지는 너희 안 건드려. 너희 건드리면 잡혀가, 나.”
세하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차문을 열어주자, 소마가 루나의 손에서 피크닉 가방을 낚아채서 그대로 들어가 앉고는 루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어라라? 세하 쌤이 준비한 물건들이랑 우리 피크닉 가방이 합쳐지니까 자리가 없네~?루나는 앞에 앉아 가야겠네? 세하 쌤이
랑 같.이.”
소마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루나가 후다닥 소마에게 다가가서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소…소마! 뭐하는 거야…!자리 있잖아!”
“이럴 때 팍팍 거리를 줄이는 거야. 어서 가서 앉아.”
“못해, 못해, 못해! 지금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터지면 복구 시켜줄게. 조수석에 앉아서 가~”
루나가 열심히 그녀를 설득해보려고 하지만 소마가 그렇게 쉽게 설득 될 소녀도 아니었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칠 때는 더더욱 용서가 없었다.
“루나야? 소마랑 같이 앉아서 가고 싶은 거야?”
“네? 아니…그게…..그게 말이죠, 선배님….”
“자리가 모자라면 조수석에 짐을 옮겨놓으면 되니까 상관없는데, 소마랑 같이 앉아서 갈래?”
“아니요, 괜찮아요! 저 앞좌석 좋아해요!”
루나가 다급하게 대답을 하자, 세하가 그녀를 조수석에 태워주고는 자신도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서…선배님?!왜 다…다가오시는 거에요?”
“안전벨트 매어주려고.”
별 거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 다가와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그의 모습에 루나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가까워어…!!!’
“좋아. 소마는…벌써 했구나.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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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막히지 않는 도로를 지내서 도착한 공원에는 막히지 않은 도로의 인원 수랑 달리 꽤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미 꽃구경
이 한창이었다.
그런 공원의 입구로 세 사람이 들어오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하는 3년 동안 알파퀸의 아들보다 자신의 이름으로도 유명하게 되버렸고, 루나와 소마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외모의 미인이기까지 하니, 어디서 깨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세하 쌤…어째 시선이 이쪽에 몰린 것 같은데요….?”
“너희가 미인이라서 그래. 잘 생기거나 예쁜 사람 보면 다들 시선을 한 번씩 돌리잖아?그런 이유지.”
별 것 아닌 듯 말하면서 자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살피는 세하의 모습에 소마가 루나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응?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미인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 좋아서요. 근데 시선의 원인은 저희보단 세하 쌤한테 있는 거 아니에요? 여자 분들 시선이 모인 것 같은데?”
“저 못난이는 어떤 사람이길래 저렇게 미인을 둘이나 데리고 다닐까 하는 것 아닐까? 나 수수하게 생겼잖아.”
“수수하지 않아요! 선배님은 되게 잘생기고 멋지세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루나의 말에 세하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조금 색다른데? 잠깐 두근거렸어. 주책 맞게.”
“주책 아닌데….진짠데….”
진심을 부딪혀도 장난으로 돌아왔다.
마음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것이긴 했지만, 꽤나 진심이었다.
그럼에도 대답은 어쩐지 동생에게 두근거린 오빠 같은 대답이었다.
괜스레 시야가 흐려졌다.
그 때….
“그래도 되게 기분 좋네.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아…..”
“뭐야, 그 표정은…..나도 남자야. 미인한테 잘생겼다고 들으면 설렌다고.”
세하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는 모습에 루나가 멍하게 바라보자, 소마가 키득거리며 세하를 놀렸다.
“뭘까요~세하 쌤 갑자기 우리 루나를 꼬시려고 하나요?이거이거 볼프 쌤에게 보고해야겠는걸요……세하 쌤과 루나의 분위기가 수상하다. 여기도 왠지 젤리와 케롤 선생님의 관계처럼 말랑말랑 쫀득쫀득한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이것은 확실하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어디서 꺼냈는지 알 수 없는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모습에 세하가 루나를 보며 말했다.
“혹시 기분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지?기분 나쁘다면 취소 할….”
“취소하지 마세요! 아까 하신 말이 사실이시면….취소하지 마세요….”
예상외의 강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무언가 감이 온 세하였지만 스스로의 직감을 무시했다.
그건 아니길 바란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그 감정이 아니길 바랬다.
그런 수다를 떨며 세하가 봐 둔 괜찮은 자리에 도착한 세 사람은 준비해 온 돗자리를 펼치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와….대박이에요! 세하 쌤! 여기를 어떻게 찾으신 거에요?”
“예전에 와 봤거든.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찾은 장소이기도 했고.”
세하의 눈에 순간 슬픔이 스치자, 루나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예전에 와 본 이 장소가 ‘누구’와 왔었는지, 벚꽃이 잘 보이는 이 장소를 좋아했을 벚꽃을 닮은 자신의 연적을 그녀는 눈치챘다.
슬비 선배겠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분명 자신에게도 다정한 선배인데, 자기 보다 어린 클로저인 자신을 위로해주던 상냥한 선배인데, 그럼에도….그녀에게 질투가 났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남겨진 흔적이 마음을 괜히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한테 선배는 미움 받을까봐 말도 골라서 해야 하는 사람인데.
나한테 선배는 한없이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지게 만드는 사람인데.
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사람인데.
그런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저런 슬픔을 준 그녀가 너무나도 미웠다.
그와 동시에 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으차차차…..분위기가 이상한데 우리 분위기 전환이라도 할 겸 점심이나 먹을까요, 쌤?”
소마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밝은 목소리를 내며 피크닉 가방에서 가져온 점심을 꺼내자, 그제서야 한없이 내려만 가던 분위기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거 너희가 만든 거야?”
“정확히는 루.나.가. 만들었어요~. 전 옆에서 열심히 재료 조달과 응원을 담당했죠!”
소마가 콧김을 뿜을 기세로 콧바람을 내쉬며 말하자, 세하가 빙그레 웃으며 소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소마야.”
“에헤헤~수고했다는 말은 저보다 루나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요?기분은 좋지만.”
“마…맞아요! 수고했다는 말 하실거면 저한테 해주세요!”
어딘가 모르게 한 꺼풀 벗어 던진 듯 조금은 적극적으로 나오는 루나의 모습에 세하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무슨 생각을 하냐
는 듯 웃음을 지으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어, 루나야. 만드는 데 고생 좀 했겠는데?”
“그….그렇게까지 고생 안 했어요….”
거짓말이었다.
이 도시락을 만들기 위해 그녀의 용돈이 얼마나 날아갔던가.
맛을 내기 위해 안 사던 요리책까지 사고 재료를 사며 요리에 투자한 돈이 용돈의 절반을 넘어버린 시점에서 말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만들어진 실험작들을 몽땅 먹어 치운 소마에게도 박수를 보내줘야겠지만……
“근데, 세하 쌤. 세하 쌤은 왜 가방을 가지고 오셨어요? 돗자리 넣는 가방은 따로 있는데?”
“난 너희가 준비해올 지 몰랐지. 그래서 내가 점심을 준비해왔는데 너희도 점심을 만들어와서 이거 애매하게 됐네.”
“에헤헤~다 먹으면 되죠. 사실 루나랑 저랑 만든 것만으로는 양이 부족했거든요~”
소마가 넉살 좋게 말하며 세하의 가방에서 나올 점심에 대해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자, 기대하지 말라는 말과 세하가 점심 도시
락을 내려놨다.
“허억….이….이걸 다 만드신 거에요?거의 이 정도면 뷔페인데…”
“뭘 좋아하는 지 몰라서 일단 꽃구경에 걸맞는 음식으로 만들어 봤는데 좀 안 어울리나?”
“전혀요!”
“그나저나 선배 예전에도 느꼈지만 요리도 잘 하시네요….”
“나는 먹고 살려고 배운 거야. 엄마가 요리치니까.”
“우와….아무렇지 않게 알파퀸 님의 의외의 일면을 밝혔어….”
“너네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대정화작전 할 때 기억 안 나? 우리 엄마가 늘 그랬잖아.”
우리 집에 놀러오면 맛있는 거 해줄게~세하가….
대정화작전 때의 지수의 입버릇에 가까운 멘트를 떠올린 루나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한테 시집가면 밥 굶을 일은 없겠네요.”
“시집 오겠다는 여자도 없다….아 또 슬퍼지려 하네….”
소마의 말에 세하가 장난처럼 받아치자, 루나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선배….진짜로 좋아하는 사람 없으세요?”
“좋아하는 사람이야 늘 있지. 이루어지지 않는 점만 빼면.”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주는 그의 모습에, 소마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오옷~!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누군가요?!혹시 설마설마~헉! 저인가요?!”
“소마도 괜찮은 사람이지만 아쉽게도 아니야. 편안하게 해주는 건 내 취향이지만.”
“우와….조곤조곤 좋게 말하면서 비수를 꽂고 있어….두둥….이것이 실연인가….”
과장된 소마의 행동에 세하가 웃으며 소마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그러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요? 혹시 연상이신가요?”
“그걸 알려주면 다 알려주는 거 아닐까?”
웬일로 짓궂게 장난치는 세하의 모습에 루나가 볼을 부풀리자, 세하가 귀엽다는 듯 루나의 볼을 꼬집었다.
“….역시 아까워…”
“네? 뭐가 아깝다는 거에요, 선배?”
“아니야. 아무것도….자, 자. 점심이나 먹자.”
세하가 아무렇지 않은 듯 도시락 뚜껑을 열자, 두 사람도 어딘가 묘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세하를 따라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우와아아아…아까 전에 나온 도시락 개수만 해도 대단했는데, 안은 더 대단하네요! 이제 맛만 있으면 되는데…과연과연……
음?!마…맛있다! 맛있어요, 쌤!”
“정말이에요….선배 정말로 요리를 잘하시는군요…..”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 많이 가져왔으니까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
“헉….이걸 다 먹으면 저희 돼지 되는데요?”
“여자들이 몸매에 민감한 건 잘 알지만 너희는 더 먹어야 해. 볼 때마다 마르냐….”
“헐….세하 쌤. 우리가 살 빼고 싶어서 빼나요….빠지는 거지…”
“그러니까 더 먹으라고. 난 잘 먹는 여자가 좋더라.”
“자…잘 먹는 여자를 좋아하세요?”
“뭐….어렸을 때부터 내가 요리를 하다 보니까, 뭐랄까, 내가 만든 요리를 잘 먹어주는 사람이 좋더라고. 생활력은 없어도 돼. 내가 생활력 있으니까.”
“외…외모 같은 건….”
“나보다 키 작은 여자? 뭐….어지간한 여자애들은 나보다 작겠지만 난 내가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거든. 근데 나 왜 이
걸 줄줄이 말하고 있지?”
“가…가끔씩은 괜찮잖아요…선배는 은근히 저희한테 말 안 해주시니까요….개인적인 부분은 더더욱…
“말 안 하는게 아니라 티가 너무 나서 말을 안 하는 건데….뭐….어찌됬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먹으면서 하자. 자, 루나야.”
세하가 싱겁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루나에게 가져온 김밥을 내밀자, 루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서…선배님…이게 뭐에요…?”
“뭐긴 뭐야. 소마는 열심히 먹고 있는데 넌 나 빤히 보고만 있었잖아. 먹어. 안 먹으면 개인적인 질문에 더는 대답 안 해준다?”
“머…먹을게요!당장 먹을게요!”
루나가 눈을 질끈 감고 김밥을 먹자, 세하가 귀엽다는 듯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행위에 루나는….
“후에에……”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만.
김이 폴폴 내뿜으면서 김밥을 먹는데 집중하는 루나의 모습에, 세하도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오. 이거 맛있네. 이것도 루나가 만든 거야?”
“아….네….지…집에 재료가 좀 있길래 만들어봤어요….입맛에 맞으셨다니까 다행이네요. 무…물론 완전무결한 저한테는 쉬운 일이지만요.”
루나가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모습에, 세하가 들고 온 커피를 마시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너 같이 좋은 애를 누가 데려갈 지 벌써부터 부러워지는데…”
“……네?!그게 무…무슨…말…말이신가요?”
“응? 말 그대로인데. 요리도 잘해, 똑똑해, 예쁘지, 마음씨 곱지, 매사에 자신감이 있지, 모든 면에서 좋은 점 투성이니까.”
“노….놀리지 마세요….!”
“진심인데….왜 여자애들한테는 내 말의 의미가 전달이 잘 안 되는 거지…?”
세하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하자, 소마가 뒤에서 웃는 얼굴로 폭탄을 던졌다.
“그래서 쌤은 루나가 여자로서 괜찮다는 건가요?”
“소…소마! 시…실례잖아…! 선배님, 이런 거에는 대답할 필요는….”
“응. 이성으로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폭탄을 받은 세하가 다시 폭탄을 투하하자 중간에 끼어있던 루나는 사실상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파묻혔다.
“아우우…..”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이성으로서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에 대해서 좋은 점을 많이 말해줬다.
그것만으로도 루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목까지 올라오고 있는 그 [한 마디]를 내기에 더더욱 무서워졌다.
차라리 이대로 바라보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괜히 그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하면…..상냥한 세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미안한 얼굴을 할 테니까.
그것만큼 싫은 것은 없어.
그렇기에 목까지 올라온 마음을 루나는 억지로 눌렀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 있다가 나와줘…아직은….내가 무서워….
억지로 감정을 누르는 루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마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답답하다니까….
어쩌면 그게 루나와 자신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고.
계속 잃어버리고 잃어 버리고 잃어버려서 무언가를 바랄 때에도 최악부터 생각하기에 그다지 상처받지 않는 자신과, 사랑 받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
그것이 큰 차이일거라고.
한숨을 쉬며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던 소마의 눈에 익숙한 그림자가 잡혔다.
어라….?방금 그건….?
“어라….방금 저쪽으로 간 사람들….볼프 형이랑 파이 누나 아니야?”
“쌤도 그렇게 보였죠?! 그렇죠?!”
“응. 그렇게 보였는데….역시 며칠 전에 벚꽃 장소를 물어본 건 이러려고 한 건가…형도 아닌 척 하면서 선수라니까….”
피식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보던 세하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선배님 어디 가세요?”
“두 사람 구경 하려고. 전부터 궁금했거든. 저 두 사람의 관계. 선배와 후배의 관계인 것 같으면서도 남녀관계 같기도 한 저 애
매모호한 관계가 조금 궁금해졌어.”
마치 흥미로운 공략법이라도 찾았을 때처럼 장난끼 가득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만연히 띄운 그의 모습에 루나가 멀어져 가는
세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소…소마! 여기서 자리 좀 지키고 있어줘. 나…나는 선배 따라갔다 올게.”
“걱정 하지 말고 데이트 하고 와~”
소마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루나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세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편 세하와 루나가 따라오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걸어가고 있던 두 사람은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서…선배. 이거 보세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관인가요! 벚꽃이 흩날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향긋한 향기까지! 이곳이야말로 가히 무릉도원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 장소군요!”
“이봐, 파이. 너 오늘따라 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렇게 좋은 거야?”
“저희 마을에도 이런 꽃이 피는 나무들은 있었습니다만….이렇게 꽃으로 둘러싸인 적은 실로 오랜만이라서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것 같네요. 혹시 선배의 감상에 방해가 되었나요?”
“아니, 그 뜻은 아니야. 네가 환하게 웃는 걸 보니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볼프강이 의외의 말을 하자, 파이가 작게 웃기 시작했다.
“야, 파이. 갑자기 왜 웃는 거야?웃지 마. 사람이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후훗….죄송합니다, 선배. 그냥 선배도 많이 둥글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습니다. 예전엔 그런 말 안 하셨으니까요.”
“그러게 말이다….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
볼프가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자, 파이가 웃음을 지으며 줄곧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그것도 그 위험한 걸 들고.”
“후훗….선배께서 제 기분을 너무 좋게 해주셔서 그 기분을 춤에 담아 한 번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전 말로는 잘 전달하지 못하
니까요.”
파이가 검과 볼프강을 번갈아 한 번씩 보고는 미소를 머금은 채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꽃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 주변의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검은 차원종을 벨 때보다 섬세하면서도 왠지 모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선배. 저는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려고 하면 괜히 말이 안 나옵니다. 그렇기에….제 지금의 감정을 당신에게 이렇게 춤으로 표현합니다.’
검 끝에 시선이 머물면서도 그 춤사위는 명백히 누군가를 향해 피어나고 있었다.
‘보고 있나요, 선배. 이게 제 마음입니다. 3년이나 말 못하고 숨겨왔던 당신에 대한 제 감정입니다. 말로 하기엔 너무나 부족하고 제 미숙한 춤 실력으로는 이렇게 밖에 표현 못하지만 그럼에도….당신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자, 파이가 검의 결계를 펼쳤다.
그것은 꽃이였다.
차갑지만 온기가 있는 그를 향한 변함없이 피어나는 온기가 있는 얼음의 꽃이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주변으로 꽃들이 휘날리며 그녀에 춤사위에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이윽고, 파이가 검을 집어넣자 주변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어떠셨나요, 선배. 제 감정이 전해졌나요?’
벚꽃이 흩날리는 사이로 파이가 미소를 짓자, 볼프강이 한숨을 쉬며 걸어왔다.
“…파이. 하나만 물을게. 그 춤…그 때 네가 말해준….사랑을 위한 춤 아닌가?”
“기억하고 계셨습니까……그러면 다 전해졌겠군요.”
파이가 후우 하고 한 번 숨을 내쉬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볼프강 슈나이더. 당신을 좋아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옆자리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분홍과 푸른 눈동자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파이. 정말…진심이야? 내가 거절하면…..너 내 얼굴 볼 수 있어?”
“네, 선배. 대답 해주세요. 전 승낙도 거절도 모두 각오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한동안은 괴롭겠지만 괜찮습니다. 선배가 싫다면 싫다고 말해주세요. 이도 저도 아닌 것보단 확실하게 차이는 게 나으니까요.”
그래….이런 녀석이었지….요령은 없고 언제나 매사에 진지하게 진심으로 부딪혀오는 그런 녀석이었지….
그렇다면 진심으로 대해줘야 한다.
평소처럼 감정을 감출 필요는 없었다.
“파이. 한 가지만 말할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녀석이 아니야. 그래도….좋은 거야?”
“두 번은 말 안 합니다, 선배. 저는 선배를 좋아합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파이의 모습에 볼프강이 한숨을 쉬었다.
“대답은….이걸로 대신할게….파이.”
“읏….”
볼프강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하자, 주변의 사람들이 환호성과 부러움에 찬 야유를 보냈다.
“서….선배….”
“파이 윈체스터. 볼프강 슈나이더는 이 책이 나의 영혼을 데려가는 그 날까지 널 사랑하겠다고 맹세할게. 이 정도 대답이면….
네 취향에 맞을까?”
조금 오글거립니다….선배…
파이가 신랄한 말투를 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 저한테 잘하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선배의 연인이니까요.”
“그런 말은 결혼 후에나 하는 말 아니야?”
“겨…결혼이라니…!이제 겨우 사귀기 시작했는데 결혼은 너무 이릅니다!”
“결혼 할 생각은 있는 거였어?”
“그럼 제가 왜 고백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무 남자한테나 고백하는 여자가 아닙니다! 이 맹세는 수백번의 고민과 자기
성찰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할 겁니다.”
예상외로 강하게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볼프강이 쩔쩔매며 어떻게든 올라가버린 파이의 화를 무마시키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
다가, 나무 뒤에 숨어서 보고 있는 자신의 제자와 존경하는 선배의 아들의 모습에 그녀를 급하게 말렸다.
자신들의 존재를 들켰다는 걸 깨달은 세하가 루나를 데리고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형, 누나. 잘 봤어요. 두 사람의 데이트.”
“보…보셨습니까, 소협?!어…언제부터?!”
“음….벚꽃을 보고 무릉도원이라고 하실때부터?”
그러면 다 본 거잖습니까…..아아….부끄럽습니다….
파이가 급격하게 쪼그라들자, 세하가 재밌다는 듯 볼프강을 바라봤다.
“형.”
“왜 그러지, 세하?”
“누나를 잘 부탁해요. 좋은 사람이니까.”
“이세하…..”
“뭐….나중에 애들한테는 내기에서 졌으니까 한 턱 쏴야겠네요. 전 형이 엘리스 누나랑 사귄다 에 걸었는데.”
“…너희 도대체 뭘 한 거야….”
“형이 엘리스 누나랑 사귈지 아니면 파이 누나랑 사귈 지 아니면 2분대 아이들 중 한 명일지 아니면 세린이 누나일지, 뭐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대체적으로 파이 누나 아니면 엘리스 누나였으니까요. 그거에 관련된 내기에요.”
세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볼프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리지마.”
“비밀연애는 추천하지 않는데요, 저는.”
“그게 아니야. 내가 내 입으로 밝힐 거니까, 말하지 말라는 거야. 괜히 남의 입에서 그런 말 나오는 것보단 내 입으로 말하는 게 나으니까.”
“선배….”
파이가 감동한 듯 그에게 다가오자, 왜 이리 덥냐면서 볼프강이 연신 손 부채질을 했다.
“그나저나, 소협과 루나 양은 어쩐 일로 여기에 온 겁니까? 소풍이라도 나온 겁니까?”
“아, 네!그….그렇죠….소풍…나왔죠….”
루나가 어딘가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하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루나랑 소마랑 데이트 나온 거에요. 소풍은 덤이고요.”
“서…선배?!”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루나가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자, 볼프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그렇게 된 거였군.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됐어. 말썽꾸러기 1호의 생각이, 그리고 세하 네 생각이.”
“아아….정말이지 형처럼 눈치 빠른 사람은 싫다니까요. 나처럼 얼굴에 감정 다 들어나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지, 원….”
세하가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볼프강이 루나를 보며 말했다.
“루나. 내가 오늘 재밌는 운세를 봤는데, 들어볼래?”
“우…운세요?”
“그래. 오늘은 별을 품은 아이가 우주와 아주 가까워지는 날이래. 오늘이 지나면 또다시 멀어져서 결국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한데.”
“네?그게 무슨…..”
“잘 생각해봐. 후회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하잖아? 알겠지? 별을 품은 아이와 우주가 아주 가까워지는 날이다, 오늘은.”
어딘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볼프강이 파이를 데리고 걸어가자, 루나가 한참을 그가 남긴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 순간…..그녀의 머리 속에 무언가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별을 품은 아이. 그리고 우주.
별을 품은 아이는 세하 선배….우주는…..나…..그렇다면 가장 가까워지는 날이라는 건….서…설마….
루나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루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주저앉았다.
아, 창피해….선생님한테 다 들켰어…..
들켜버렸다는 것에 대한 창피함과 동시에 볼프강이 말한 가장 가까워지는 날에 대한 힌트가 주는 희망에 찬 두근거림에 루나가 터질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응? 루나야, 왜 그래?”
“선…선배….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선생님들의 연애를 훔쳐본 게 조금 부끄러워서요….”
“좋잖아. 남 연애하는 거 보는 거. 내가 이루지 못하니까 남이 이루는 거라도 봐야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루나가 주먹을 꼭 쥐었다.
말하는 거야, 루나. 소풍 말고 단 둘이서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서…선배! 저…저와 오늘 여…영화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영화? 소풍은…..”
“그…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꼬…꽃구경은 충분히 했어요. 그러니까 여…영화 봐요….단 둘이…”
“으음….나야 상관없지만 소마가 아쉬워하지 않을까? 너랑 붙어다니는 걸 좋아하잖아.”
“도…돌아가서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단 둘이 영화 보실래요?”
“그래. 그러자. 그럼 돌아가자. 소마 걱정할라……”
볼프강과 파이가 남긴 달짝지근한 공간을 뒤로 한 채,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자리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남자들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소마를 보고는 동시에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응? 세하 쌤 어서 오세요~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옆에 쌓여있는 그 남자들은?”
“아~혼자 앉아있었더니 계속 헌팅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싫다고 했더니 덤벼서 자기방위 형태로 눕혀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아….음….볼프강적 사고에 입각했습니다! 나한테 덤비는 놈은 박살낸다 라는 사고에 입각했죠!”
볼프강 형…..도대체 애들한테 뭘 보여준 거에요…..
지금쯤이면 한창 분홍빛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을 볼프강을 향해, 세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무튼….소…소마야….나…나 세하 선배랑 단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가고 싶은데….호…혹시 따라올 거야?”
“응?영화관?”
“응. 루나가 영화를 보러가자고 하던데 너만 집에 놔두는 건 좀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괜찮아용~저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답니다~이건 루나적 사고에 입각한 생각입니다~”
“루나적 사고면 완전무결한 사고인건가…그건 좀 멋있을 수도….”
“뭐…뭘 태연하게 평가하고 계신 거에요?!평가 그만하시고 우리 자리 정리하고 영화 보러가요.”
“그러면 계속해서 루나적 사고에 입각한 정리가 있겠습니다! 세하 쌤은 돗자리를 챙겨주세요. 저희는 도시락과 쓰레기를 들고 빠르게 차에 돌아가겠습니다~”
말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속도로 정리한 채로 짐들을 들고 달려가는 두 소녀를 보고는 세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보는 내가 힘이 나게 만든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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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소마를 무사히 집에 데려준 두 사람은 백화점 안에 있는 영화관에 도착해서 오늘의 영화들을 살펴봤다.
생각보다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가 많네.
루나가 볼 수 있는 영화 포스터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울상을 지었다.
근데 뭐 보자고 해야 좋은 거야….로맨스 영화 보자고 티 너무 나나? 그러면 액션 영화? 아니야, 그건 좀 나중에….아, 정말….
뭘 봐야 하는 거야…..!
한참의 고민 끝에 고른 로맨스 영화 포스터를 들고 루나가 세하에게 다가가지만 멍하게 어딘가를 응시할 뿐 다가오는 그녀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 왜 그러세요?”
“아….미안….잠깐 멍하게 있었어.”
“괜찮으세요? 몸이 안 좋으시면 다음에…..”
“아니야.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그냥 조금….조금 옛날 생각이 났던 것 뿐이야….”
세하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이미 루나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뭐가 괜찮다는 건데요…대체 어딜 봐서 지금 선배의 모습이 괜찮다는 건데요!”
“루나야….”
“나한테 매번 솔직해져라, 감정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해주고서는, 왜 선배는 매번 그렇게 슬프게 괜찮다고 말하는 건
데요? 선배한테 나는 감정을 꾸며야 하는 상대인건가요? 나는 선배한테 의지가 안 되는 존재인가요?”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향해 부딪혀오는 그녀의 진심에 세하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루나야. 그런 의도가 아니었….”
“미안하다고 하지마요….”
“…….”
“미안하다고….하지 말라고요…..”
“루나야….”
“매번 똑같아. 선배는 나한테 솔직하게 이야기 해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매번 대충 얼버무리고, 아까 전에 영화 보러 가자고 할 때도 괜히 핑계 대서 도망가려고 하고. 선배는…나한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마주해준 적 없어요…그러면서….나한테 매번 미안하다고만 하잖아….그게….얼마나 속상한데….”
결국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을 닦을 마음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흘러내려가는 눈물처럼 주체할 수 없이 커져버린 마음도 씻겨 내려가버리길.
딱 상처 안 받을 만큼만 좋아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물이 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때, 그녀의 눈가에 푸른 손수건이 다가왔다.
“…..울지마, 루나야.”
“흐윽…내가…누구 때문에 우는데….그런 말….하지 마요…”
“…진심으로 못 대해 준 건 정말로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울지 마.”
“그러면….왜….멍하게 있었는지….그것만 알려줘요….더는 안 물을게요……딱 그것만….그것만 솔직하게 이야기 해줘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루나의 모습에 세하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다시 폈다.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슬비 생각했어. 영화관에 와 본 것도, 이렇게 영화 볼 것을 고르는 것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모든 게 다 슬비랑 함께 했었던 거였으니까. 그래서….그래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어.”
“그럼….왜 나한테….말 안 해줬어요….?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해줬으면 됐는데….”
“말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는 끝난 일이니까. 이건….잠깐씩 생각나는 내 미련 같은 거니까. 들떠있는 네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어.”
“이미….반 이상 망쳤어요….”
“그런 것 같네….내가 잘못 선택했나봐….처음부터 솔직히 말해줄 걸 그랬어….”
매번 나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니까….
세하가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리자, 루나가 눈물을 닦아내고는 세하를 올려다보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요…..저, 방금 전에 진짜로 상처 받을 뻔 했으니까.”
“미안해.....”
“미안하면…..영화 끝나고 저녁 사주세요. 맛있는 걸로.”
루나가 종종걸음으로 표를 사러 가자, 세하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안 되는데….이러면….안 된다고……이대로 가면…난…..또 다시…믿어버리게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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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중간중간에 섞여있는 유머는 두 사람을 같이 웃게 만들어주었고, 로맨스 장면이 나올 때는 자신의 머리색 보다 더 붉게 루나의 얼굴을 불태워주기도 했다.
이윽고 영화가 끝난 뒤, 영화에 대한 여운으로 멀리 가기 싫었던 두 사람은 백화점 내부에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서…선배….여기….비싼 곳 같은데….자….잘못 온 거….아니에요?”
“제대로 온 거 맞아. 저녁 먹자고 할 때, 여기 와서 먹자고 생각했어. 앉자, 루나.”
세하가 살짝 의자를 빼주자, 루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맞은 편에 앉아, 같이 메뉴를 주문하고는 자신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세하의 모습에 굳게 닫혀있던 루나의 입이 열렸다.
“서…선배….진짜 개인적인 질문해도 돼요?”
“극비사항만 아니면.”
“이…이거 극비사항일 것 같긴 한데……스…슬비 선배한테….아직….미련이 남아있나요?”
생각보다 강한 직구에 세하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저돌적인 질문인데…..”
“아…그…..대…대답하기 힘드시면 괜찮아요…!다른 질문 할 테니까….”
“….아니. 괜찮아. 이번에는 진심으로 괜찮으니까, 말해줄게.”
미련은 없어.
단호하게 내뱉어진 세하의 한 마디에 루나의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미련….없으세요? 그….그런 것 있잖아요….아까처럼 멍하게 있게 된다던가, 그런 것들 있잖아요.”
“그런 걸 미련이라고 부르자고 하면 미련은 많겠지. 하지만, 내가 말한 미련은 다시 사귀고 싶다는 미련이 없다는 거야. 깨끗하게 헤어졌고, 이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슬비도 미련이 없을 거야. 남은 건…..그래…..정확하게 후회라고 해야겠지.”
“후회….요?”
루나가 조금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을 짓자, 세하가 입가에 살짝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해줬으면 더 좋아해줬을까, 이렇게 했다면 우리가 좀 더 길게 만났을까, 이렇게 했다면 우리가 싸우지 않을까....같은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인거지. 잘 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그게 지금 나한테 남은 거야. 말하자면….얼룩인 거지. 지워지지 않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알려주는 세하의 모습에 루나가 자신의 치마자락을 꾹 잡았다.
연적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인지, 아니면 그의 마음에 남아버린 그녀의 얼룩에 대한 질투인지, 알 수 없는 감정
의 격류에 그녀는 말없이 애꿎은 옷자락만 계속 잡았다가 놓았다.
잠시 뒤, 요리가 나오자 두 사람은 대화를 중단하고는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거 꽤 맛있네요. 원래 여기 자주 오세요?”
“요리하기 귀찮고 엄마의 고기 투정이 최고조에 달할 때 데리고 오는 곳이니까. 맛은 원래부터 있었지만 분위기가 다르니까 맛도 더 좋아지네.”
“….여기….슬비 선배랑도 왔어요?”
“….많이 신경 쓰이나 보네, 루나야.”
“막상 들으니까 조금은 신경이 쓰이네요.”
루나가 침착한 척 말을 하면서 고기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자, 세하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슬비랑은 안 왔어. 여기 엄마랑 말고 여자랑 온 건 네가 처음이야.”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인 발언에 루나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비 선배랑….안 왔어요?”
“응….아….이런 건 너한테 부담 주는 건가?”
“저…전혀요. 오…오히려 기쁜데요? 제가 선배랑 이곳에서 같이 먹는 첫 여자라는 게.”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마운데….아, 양 좀 부족하지? 난 더 먹을 건데, 넌?”
“괘….괜찮아요…이 정도면 충분해요….”
루나가 괜찮다는 듯 말을 했지만, 그 말 뒤에 곧이어 귀여운 꼬르륵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아우우우…..”
“역시 부족했구나….2개 정도 더 시키자.”
“괘…괜찮아요! 서…선배 돈 많이 들잖아요!”
“요즘 게임 팩 많이 안 사서 모아둔 돈 많아. 걱정 하지 말고 먹어.”
걱정하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하가 다정하게 말하자, 루나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건 반칙이라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등장한 요리에 루나가 눈을 반짝이며 먹기 시작하다가, 문득, 생각 난 것에 대해 세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선배. 아까 전에는 미처 못 물어봤는데, 선배 어머님, 그러니까 알파퀸님이 그렇게 요리를 못해요?”
“응.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어. 우리 엄마의 요리는 내가 안 챙기면 냉동식품 아니면 라면으로 끝나거든. 밥이 제대로 될 확률이 25프로고.”
“저기….밥은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주지 않나요? 그런데 어째서 25프로에요?”
“물을 많이 넣어서 질어지거나, 아니면 물을 좀 적게 넣어서 밥이 바싹 말랐거나, 아니면 아예 보온버튼을 눌러서 괴상하게 만들거나 하거든. 그때그때 달라.”
정말로 요리를 못하시는 구나….
루나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아, 선배도 저한테 질문해도 돼요. 지금까지 저만 질문했잖아요.”
“음…개인적인 것도 괜찮으려나?”
“엄청 기밀만 아니면 대답해드릴게요.”
“그럼 질문…..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푸흡…!”
물을 마시다 들려온 강력한 직구에 루나가 앞으로 물을 뿜을 뻔 했지만 간신히 버텨 삼키고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서서서서서선배?!”
“아, 미안. 이건 너무 깊은 부분인가….다른 질문 할까?”
“그…그…그건 아닌데….아우….그…..그….대…대답해드릴게요…”
루나가 더듬거리며 손을 쥐었다폈다를 몇 번 정도 반복하고는 대답을 했다.
“이…있어요. 좋아하는 사람….”
“있….어?”
“….네…있어요….”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돼?”
“…..엄청 좋은 사람이에요. 사실은 자신도 무서울 텐데 자신보다 남이 먼저인 사람이고, 또 이리저리 사회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준 사람이에요. 제가….평생 좋아할 만큼….그런 멋진 사람이에요.”
“….연상이야?”
“네. 연상이에요.”
루나의 대답에 세하가 그렇구나 하며 중얼거리더니 웃음을 지었다.
“아아….이제야 좀 후련하네.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거든.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보였는데 그걸 내가 모르니까, 좀 궁금했어.어
떤 녀석인지 부럽네. 루나한테 사랑 받다니. 그 녀석 만나면 한 대 때려줘야겠네.”
어딘가 모르게 아까와 다르게 가벼워진 말투와 그와 정반대로 어딘가 달라 보이는 그의 모습에 루나가 걱정을 하면서도 동시에 세하라서 눈치 못 채고 저렇게 이야기하는 구나 라는 생각에 이내 느려지고 있던 저녁에 다시금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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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사냥터지기가 사는 아파트로 세하의 차가 들어왔다.
“선배, 오늘 꽃구경부터 저녁까지 정말 감사했어요.”
“별 걸 다 감사한다. 나야말로 고마워, 오랜만에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어.”
차에서 내려, 입구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이내 눈 앞에 나타난 유리문에 발걸음을 멈췄다.
“벌써….다 왔네요.”
“그러게…분명히 방금 주차장에서 출발한 것 같은데….”
“저도…그래요….시간이 너무 빨라요….”
루나가 애꿎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세하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빨리 들어가서 씻고 자. 씻고 나면 그 신경 쓰이는 사람한테 고백해보고.”
“….네?”
“아까 형이 그랬잖아. 그 뜻은….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한테 고백하기 좋다는 뜻이겠지. 그러니까….고백해. 그 녀석한테.”
“선배…..”
“아….그리고….아, 정말…..방금 내가 그 녀석한테 고백하라고 해놓고는 이런 말 해서 좀 그렇긴 한데….”
세하가 한참을 무언가를 말하려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결심을 했는지,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야. 웃기는 말이지만…..난 널 좋아해. 아니….이제는 과거형으로 말해야겠지. 넌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아니야.
“그래도….오늘 하루 종일 너랑 같이 있으면서 느꼈거든. 아, 나 진짜 루나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선….배….”
“근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이런 비겁한 방법 말고는 생각이 안 나더라고.”
세하가 주먹을 꽉 쥐며 자신을 다독였다.
끝까지 말해….후회조차 남지 않게….진심을 다해서.
“루나야. 좋아해. 다음에 만날 때, 그 녀석이랑 잘됐다는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네. 네가 행복하면 나도 좋으니까.”
“세하….선배….”
“이게 마지막으로 말하는 진심으로 하는 인사말이 되겠네…..좋은 꿈 꿔, 루나야. 난 갈게. 소마한테도 안부 전해줘.”
가지마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세하의 뒷모습에 루나가 속으로 외쳤다.
가지마.
입 밖으로 내기 위해 계속해서 반복한다.
가지마.
진실을 알아버린 지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가지마!!!!”
입 밖으로 내뱉어진 가지마 라는 단어에 세하가 돌아보자, 루나가 자신의 원피스 자락을 꼭 잡으며 말했다.
“선배는 비겁해요! 좋아하는 거였으면….날 좋아하는 거였으면 처음부터 말해주면 됐잖아요! 내가 좋다고 말해줬으면 됐잖아요!”
“…..비겁하다는 거…잘 알아. 하지만….그것보단 너랑 더 이상 이야기 못하는 게 싫었어.”
세하의 말에 루나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바보! 멍청이! 선배는….바보멍청이야…..나도…..나도 그랬다고…..나도….!선배랑 더 이상 이야기 못한다는 게 두려웠어….내가 좋아한다고 말해버리면….!이 얄팍한 관계조차도 깨져버릴까 두려워서….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랑 사귀고 헤어지고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 침대에서 매일 같이 울었어! 선배 하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고!”
“루나…야….”
“책임 져! 날 이렇게 울게 만들었잖아….선배가 좋다고! 내 유일한 입버릇인 완전무결함까지 다 내던져도 좋을 만큼 선배가 좋
다고!”
눈물범벅이 된 채로 자수정 같은 눈의 소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연 채 그에게 진심으로 부딪혀왔다.
“좋아한다고! 이세하, 당신이 너무나도 좋다고! 그러니까, 그런 비겁한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와서 안아달란 말이야!!!!!”
진심을 담은 그녀의 외침은 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리고….아파트 입구에서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한 소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150m.
그는 생각했다. 후회 하지 않겠냐고.
앞으로 149m.
머리가 이별의 아픔을 상기시켰다.
앞으로 147m.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앞으로 144m.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140m.
다음 발자국을 내딛고 싶어졌다.
앞으로 135m.
그녀를 웃게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앞으로 130m
그녀의 곁에 있고 싶어졌다.
앞으로 120m
그녀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앞으로 110m
앞으로의 그녀의 삶에, 그리고 나의 삶에…..우리가 있기를.
앞으로 100m
그걸 위해서….난…루나를 선택하겠어.
거리가 좁혀질수록 발걸음이 빨라졌다.
심장의 고동이 멈출 줄 모르고 빨라져만 갔다.
그럼에도 눈은 오직 단 한 명을.
달빛 아래에서 울음범벅인 된 예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는 저 아름다운 여신만을 눈에 담은 채.
세하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좋아해…..선배….세상 누구보다 더….좋아해요, 선배….”
“이 바보 멍청이가….좋은 일인데….왜 우냐….바보 같이….”
“선배도…울면서….”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해, 루나야. 나랑…..같이 있어줄래?”
“응…..좋아….선배랑 같이 있을래….계속…계속….선배의 곁에 있고 싶어.”
“바보 같긴….너라면 더 좋은 애를 만날 수 있을텐데…..”
“그대로 돌려줄게, 선배….”
루나의 대답에 세하가 웃음을 짓자, 루나도 같이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우리 바보 같아. 울다가 소리쳤다가 웃었다가….몇 분만에 감정이란 감정은 다 쏟은 것 같아.”
“그러게….저녁 먹은 거 다 소화된 기분이야….”
“그럼 우리 야식 먹을래요, 선배?”
“우리 집에서 먹자. 야식할 재료 많아.”
“알파퀸 선배님 집에 계시죠?”
“걱정 마. 졸업 할 때까지 안 건드릴 거야.”
“스….스킨쉽도….안 해줄 거에요?”
“그…그건 천…천천히 진도를 나가면서 하자. 마지막은 무조건 금지고.”
“마…마지막….”
루나도 들은 게 있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김을 뿜어내다가, 옆에 있는 세하의 손을 잽싸게 잡았다.
“그…그거 빼고는 우리 다 해요. 조…졸업까지 앞으로 2년이나 남았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요.”
“그….그래. 근데 너 아까 전부터 왜 그렇게 존칭을 써?”
“어…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서 그래요! 여…연애를 한 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또 어떤 식으로 해나가야 하는 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상한 말투가…..”
루나가 통통 튀며 이야기를 하자, 세하가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반말 해도 돼. 긴장 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날 좋아하는 한, 난 널 계속해서 좋아할 거야.”
“서….선배…..”
눈물에 젖어서 살짝 빨갛게 부어있는 예쁜 눈을 보며 세하가 웃음을 지었다.
“말 편하게 해. 그게 더 좋으니까.”
“그….그럼 그렇게 한다, 선배?나…나중에 무례하다고 하면 안돼? 알파퀸 선배님이 왜 반말 하냐고 할 때 잘 도와줘야 해, 알았
지?”
“응. 그렇게 해줄게.”
“그거면 됬어….그거면…충분해, 선배….”
루나가 세하의 품에 안기며 중얼거렸다.
“겨우 보상받았어. 내 3년의 짝사랑이….”
“마음 고생 시킨 만큼 더 잘해줄게.”
“나도 잘할게. 서로….오래오래 좋아할 수 있게.”
서로에게 하는 약속에 두 사람은 바보 같이 웃으며 서로를 몇 번이고 껴안았다.
그것이 마치 고생시킨 서로의 마음을 치유하듯 그렇게 출발하기 전 몇 번이나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야식을 먹기 위해, 세하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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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집으로 들어간 세하가 쇼파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 지수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또 화석화 진행중이에요? 이번엔 몇 시간째에요?”
“5시간~베로니카가 돌아간 이후로부터는 꼼짝도 안 했어. 아들이 언제 오나 기다렸지~”
배시시 웃으며 쇼파에 앉은 지수가 세하의 뒤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에 손을 흔들었다.
“루나야, 안녕. 무슨 일로 우리 집까지 왔어?”
“아….안녕하세요, 알파퀸 님…..오늘 온 건…..선배의 클로저 후배로서 온 게 아니라….여…여자친구로서 왔습니다. 오…오늘부터 정식으로 세하 선배랑 사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루나가 기합이 들어간 말로 포문을 열자, 지수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세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아~들!어떻게 저렇게 예쁘고 괜찮은 걸 물어 온 거야~?혹시 취향이 저런 인형 같은 아이였어? 아~엄마는 이제 손주들만 보면 되는 건가~?어느 쪽을 닮더라도 예쁠 거야~”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올라가는 지수의 텐션에 세하가 한숨을 쉬었다.
“애한테 너무 부담 주지 마. 사귄 지 몇 시간도 안됐으니까.”
“오호라~몇 시간도 안된 따끈따끈한 커플이구나. 좋겠다, 청춘~”
“왜 세상 오래 산 할머니 같은 말을 하는 거야. 엄마도 어디 나가면 나랑 남매로 오해 받는 일이 다반사면서.”
“그래도 부럽다고~청춘은 짧아!”
아이처럼 투정부리는 지수의 모습에 졌다는 듯 세하가 두 손을 들자, 루나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근데, 선배. 야식 뭐 먹을 거야?”
“집에 있는 걸로는 간단하게 해먹을 수 있는 게 분식 계열 이려나….떡볶이 같은 거.”
“떡볶이? 그거라면 학교에서 한 번씩 나오는 아니야?그건 좀 맛 없던데…맵기만 하고.”
“걱정할 필요 없어~우리 아들의 솜씨는 일류 주방장 버금가니까.”
“기대치를 멋대로 상승시키지 말아줘요, 엄마.”
툴툴거리면서도 곧바로 익숙하다는 듯 냉장고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준비하기 시작하는 세하의 모습에 지수가 흐뭇하게 바라보
다가 루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다리 아프겠다.”
“네…실…실례하겠습니다.”
루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쇼파에 앉자, 지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루나야. 우리 아들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네? 그….그건……”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못하는 루나의 모습에, 지수가 못 참겠다는 듯 재촉하자,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처….처음에는 손이였고….그 뒤에는 등이였고….그 뒤에는….모두 다….에요….”
“호오?”
“제…제일 마음에 드는 건….저한테 사…상냥하게 웃어줄 때랑 머리 쓰다듬어줄 때고요….두…두근두근 거릴 때는 제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에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루나의 모습에 지수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아이네….그 아이도 좋은 아이였지만 이 아이는…..역시….
“정말로 루나는 세하를 좋아하는구나?후훗….”
“마…말하고 나니까 부끄럽네요…”
루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자 지수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해, 루나.”
“선배님…..”
“우리 아들….너한테는 완벽한 남자처럼 보여도 때로는 울고 짜증도 내고 상처는 제일 많이 받아왔으면서 티를 안 내려고 애를 쓰거든. 자기가 힘든 건 참아내면서 살아가면서 남이 힘든 건 못 봐주고.”
담담하게 나오는 그의 다른 면에 루나가 한참을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부분까지도 좋아할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세하 선배는 제가 끝까지 좋아해줄거에요. 그게 제가 선택한 선배를 좋아하겠다는 약속이에요.”
우물쭈물하던 아까와 다르게 말투가 당당했다.
자수정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는 고요하면서 누구보다도 열렬히 빛나는 달 같았다.
“아아….우리 아들이 여자친구를 너무 잘 골라 왔는걸? 이대로 결혼까지 생각해도 되려나? 역시 그건 좀 이른 이야기인가?”
지수의 대답에 루나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세하 선배한테 고백할 때부터 그걸 염두해두고 고백한 거에요. 이르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경솔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저는….적어도 저는…..세하 선배랑 평생 살고 싶어요. 그럴 마음으로 고백했어요….”
도망치지 않는다. 당당하게 맞선다.
그것이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방법이니까.
“후훗….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잘 부탁해, 루나야.”
“네…평생 잘 부탁드릴게요, 선배님.”
두 사람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자, 요리를 다 끝낸 세하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 자. 야식 준비 다 됐으니까 와서 먹어. 둘 다.”
세하의 알림에 두 사람에 식탁에 앉아 준비해놓은 분식을 먹고는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역시 우리 아들~음! 역시 우리 아들이 만든 게 최고야~”
“이거 되게 맛있….매…매워….근데 맛있어…..아, 또…매워….”
루나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도 열심히 먹는 모습에 세하가 웃음을 지으며 우유를 담아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선배. 여기 앉아. 왜 서 있어.”
“앉을 거야. 걱정 하지 말고 먹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옆에 우유와 함께 자신의 몫만큼의 분식을 들고 온 세하를 보고는 루나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그냥 웃음이 나네. 행복해서 그런가?”
“벌써부터 행복하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래도 행복해, 난.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사랑 하고 이렇게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지금껏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야.”
루나가 조심스럽게 세하의 손을 잡으며 잔잔한 미소를 짓자, 세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내가 뭐가 되냐….”
“뭐가 되긴 내 남자친구지.”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달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던 세하가 반대편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지수의 표정에 어딘가 불안함을 느꼈다.
“음~좋았어! 오늘 엄마는 일찍 잔다! 아들 방에도 안 갈 테니, 루나야. 너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네? 서….선배님?!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응! 오늘 진도를 맥시멈으로 뽑아보란 말이야! 괜찮아! 이제 배상금 지불도 끝났고 아들도 돈 잘 벌고 내 연금도 팍팍 나오고 있으니까 나처럼 사고 치고 애를 가져도 상관없어! 난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어!”
콧김을 뿜으며 말하는 지수의 모습에 루나가 어버버거리며 버둥거렸다.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그녀도 연인들의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
“애한테 쓸데없이 부담 주지 마라니까…내가 알아서 할게.”
“어머어머?우리 아들, 그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던거야?과감한데?”
“엄마가 바라는 일은 안 일어날 거야. 난 루나의 생각을 존중할거야. 원한다면 마지막까지 가줄 거고 아니라면 손 대지 않을 거야.”
잔잔하지만 심지 굳은 세하의 말에 지수가 입가에 미소를 만연한 채로 중얼거렸다.
“멋지네, 우리 아들. 이제는 엄마보다 더 멋져. 후훗….”
“무슨 말이야?”
“아니야~그래도 자고 갈 거지, 루나야?”
지수의 짓궂은 말에 세하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말리려다가 옆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선배…..괜찮아….자고 갈 거야.”
“어?”
“아…알파퀸 선배님이 원하는 상황은 안되겠지만…..그래도….선배랑 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은 있으니까….그러니까…..자고 가도….돼?”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나의 표정에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 세하가 고개를 휙 돌리자, 지수가 재밌다는 듯 그릇을 들고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오늘 엄마 귀마개하고 잘게~내일 경과 보고 잘 해줘~설거지도~”
“포…폭탄 떨어뜨려 놓고 도망가지 마!”
“잘 자~”
지수가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사라지자, 세하가 어찌 할 지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루나야….미안한데….오늘 여기서 자고 가는 건….”
“…안돼?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돼?”
“윽….”
올려다보는 루나의 눈빛에 세하가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자고 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된다.
사이즈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수의 옷도 있고, 정 안되면 오늘 입고 있었던 옷을 입고 자도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세하였다.
안 그래도 루나를 여자친구로 인식하는 상황에 단 둘이 같이 잔다는 것은 사실상 자제력과의 싸싸움일 테니까.
손 안 댈 수 있을까….
세하가 스스로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그런 상황에 마주했을 때, 루나에게 미움 받을까봐 두려웠다.
“선배…..괜찮아. 나….선배가 원하면 응해줄 수 있어. 선배가 끝까지 나랑 함께 해준다고 했으니까….그러니까….같이 자면 안될까?”
진심으로 부딪혀오는 그녀의 마음에 세하가 결국 두 손을 들며 항복을 표시하자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 가련하게 피어나는 꽃과 같아서 세하가 한 번 더 자고 가는 것에 대해 속으로 고려했다는 것은 그녀는 알지못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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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부스럭거리는 이불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한 방에서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었다.
루나였다.
‘어….어떡해….자…잠이 안 와…..잠을 못 자겠어…..’
잠이 안 오는 이유에는 세하랑 같은 방에 단 둘이 있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그리고 선배….괜찮으려나….바닥에서 자기엔….아직 차가울텐데….’
루나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침대 밑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들어있는 세하의 모습도 있었다.
‘아 진짜….심장 떨려….내…내가 자고 간다고 했지만 이거 생각보다….떠…떨리잖아….’
정작 이성과의 싸움을 하던 세하는 잠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두근거림에 루나가 결국 조심스럽게 밑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서….선배….자요?”
조심스럽게 세하를 불러보는 루나였지만, 생각 외로 깊게 잠든 듯 대답은 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루나가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한쪽으로 돌아누워서 자고 있는 그의 품 사이로 파고 들어간 루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선배의 고동소리가 들려….헤헤….선배는 심장소리 마저 멋있네….’
전해져오는 온기와 더불어 그에게 꼭 안겨있는 것 같은 자세에 루나가 행복에 젖은 표정으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선배….자는 거죠?”
다시 한 번 더 그에게 말을 걸어**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루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품에 안긴 채 입을 열었다.
“선배가 일어나 있을 때는 부끄러워서 말 못한 것들…지금 선배 품에서 다 말하고 나도 잘까 봐요….”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난 완전무결한 아이가 아니에요. 선배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에 괜히 질투하기도 하고, 잘 삐지고, 키도 되게 작고, 또 몸매
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런 주제에 선배가 나를 제일 먼저로 생각해줬으면 좋겠고, 또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애정표현도 하고 더 많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해요.”
얼굴을 마주하고는 하지 못할 그녀의 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들이 잠들어있는 그를 향했다.
“이렇게나 어리광 피우고 싶고, 선배가 원하는 어른스러운 아이가 아니지만 그래도…난 선배가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말해줘
서 너무 고마웠어. 내게 좋아한다고 해줘서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기뻤어. 그리고….그건 지금도 변함없어. 선배를 좋아했고, 좋
아하고, 좋아할 거야.”
비단결 같은 그의 머리 결을 정리해주던 그녀가 살짝 들러난 그의 볼에 입맞춤을 하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내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줘서. 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별을 가진 우주로 만들어줘서. 나라는 사람을 사랑해줘서 고마워, 선배.”
그녀의 눈이 연인의 모습을 담았다.
눈, 코, 입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행복을 증명해주었다.
그녀의 행복이 그녀 앞에 있었다.
그의 행복이 그의 앞에 있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사랑에 빠진 우주는 곤히 잠들어 있는 멋진 유성 하나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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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firsteve입니다!
팬소설 게시판 최초!(맞나?맞겠지, 뭐.)세하루나 소설입니다!
조금은 빡센 작업이었네요….이걸 위해 루나를 키우고 못 키운 부분은 영상으로 확인하면서 이리저리 보충해서 작업을 마쳤습니다.
이번 글은 어떠셨나요?
이번에도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남을 달달한 글이었을까요?
언제나 고민하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모습을 그리며 글을 씁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firsteve 였습니다.
(이벤트 공지: 이 다음 에필로그는 세하와 루나가 결혼한 후의 이야기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생략된 루나가 수능 친 날에 벌어진 달과 별의 이야기를 댓글로 메일을 남겨주신 분들에게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그것도 재미있게 써볼게요. 관심 있으신 분들은 메일을 남겨주세요. 어떻게든 보내드릴게요 ㅎㅎㅎ.( 지금 캐나다에 있기에 아마 강력한 시차를 넘어 도착할 예정이라는 것을 양해부탁드릴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