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험담 중 일부인 이야기 2-4
한스덱 2018-09-20 0
이 이야기는 실제 게임 스토리와는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상상도 못해봤을 생김새를 가진 나를 느닷없이 봤는데도, 내 처량한 모습을 동정하거나, 헛구역질을 하며 역겨워하거나, 혹은 결함들이 뭉쳐진 덩어리같은 내 모습을 비웃으면서 조롱하거나 등등의 그 어떤 부정적인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혐오스럽게 생긴 차원종이 준비한 깜짝선물들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녀는 그저 내가 배푼 그 호의들에 훌쩍일 정도로 감동해서, 배풀어준 내가 더 감동스러울 정도로 감사를 표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수 많은, 하지만 그 결말은 모조리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평행세계들을 상상하면서 두려워하던 나를 비웃듯이 말이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접해본 ‘재앙’과 마찬가지인 존재와 느닷없이 만나게 된 뎍분에, 난 내가 그동안 어림짐작했던 그녀에 대한 억측을 약간이나마 수정할 수 있었다.
내가 내 안식처, 나, 그리고 기타 여러가지들을,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녀만을 위해서 최대한 아름답게 설명할 적절한 방법을 찾기 위해 열심히 고민하던 그 무렵에, 그녀가 식사를 모두 마쳤다. 그녀는 구체적인 내용이 여러분께 이미 알려진, 자신의 식습관과 아들에 대한 자랑이 진심과 함께 뒤섞인 시식평을 들려주었다. 난 별 것 아니라는 뉘앙스가 담긴 수신호로 그 진심어린 감사에 대충 대답해 주기 위해, 오른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이것이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이다. 시간상으로는, 그녀가 외부차원에 온 지 6일하고도 약 19시간이 지난 뒤였다.
보통의 소설에서 방금 같은 문장으로 한 사건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그 어떤 차원의 벽보다도 넘기 어려운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서 그 다음 사건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래 계획한 시간표에 기록된 ‘다음 일과’는 바로, 신비하고 아름다운 공간이 숨어있는 동굴 탐방이었다. 이 시간표는 그녀와의 첫 만남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메뉴얼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릿속으로 심각한 고민을 하느라 바빠서 별 생각 없이 대충 저질러버린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난 그 중요한 시간표를 어겨버렸다. 그 사소한 실수는 바로, 내 빌어먹을 오른손이 손바닥을 펼친 채 좌우로 흔들리면서 보내버린 ‘~ 할 것 없다’와 ‘인사’의 의미를 모두 가진 수신호였다. 그녀는 내 수신호를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인 ‘잘 가세요’로 해석한 게 틀림없었다.
“여러가지로 도와준 거 정말로 고마워! 오른손은 다 나을거라고 했지? 음, 여기서 나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해?”
난 작별을 준비하려는 의도가 확실한 그녀의 말을 들은 그제서야 내가 저지른 끔찍한 실수를 깨닫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향해 양 손과 머리를 동시에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그녀는 이불로 사용하던 차원종의 가죽을 어느새 망토로 챙겨입은 채 나머지 소지품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가 머리까지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흔들은 덕분에 그녀는 내 간절한 신호를 작별 인사로 해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아, 저기… 도와준 건 고마운데, 미안하지만 난 급한 사정이 있거든… 그래서 어서 가봐야만 해.”
‘어서 날 여기서 내보내달라’는 재촉을 최대한 정중하게 표현한 말은, 내가 첫 만남부터 얼마 안가서 비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너무 높다고 혼자 착각해서 대충 계획한 시간표가 기적과 같이 이루어질지도 몰랐던 순간, 내 손으로 그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처참하게 느끼던 당혹감을 더욱 더 처참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아마 내 정체를 속세를 떠나 신비한 동굴 속에서 은거하던 약초에 능통한 도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난 친절한 도사처럼 녹초가 된 그녀의 몸과 마음을 내 약초학을 바탕으로 안정시켜줄 생각이었다. 내가 만든 약초 요리들을 돌 그릇의 바닥을 남김없이 드러낼 정도로 싹싹 비워낸 그녀의 몸은 곧 원상태로 회복될 거지만…
내 손으로 저지른 단 하나의 실수 때문에 내가 최대한 뒤로 늦추려던 시간과 더 일찍 마주쳐버린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끙끙대다가 결국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여버렸다.
사실 그녀가 자신의 급한 사정을 나에게 알려주기 전이었던 그 당시에, 난 그녀가 이 곳을 어서 떠나야만 한다는 걸 깨달은지 오래였다. 그래서 난 그녀가 이 동굴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아무리 우여곡절 많은 인생 중에서도 처음 볼 정도로 신기한 차원종과 만나게 되었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다음 일과 어쩌구는, 지금의 사태를 파악하는게 불가능할 그녀에게 순순히 따라달라고 부탁하기가 정말로 어려운 요청이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이 동굴의 매력을 더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보다는 자신의 급한 용무를 더 우선시할게 뻔했다. 그렇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그녀가 자초한 거야.
그래, 절대로 내 실수가 아니야.
이건 그녀가 자초해서 벌어진 일이야.
그녀가 여기에 온 것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때문이잖아?
나는 애써 스스로를 납득 시키면서, 두 무릎 속에 파묻어버린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댔다. 그녀는 내가 혼자서 끙끙대던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정체는 알 수 없고, 자신을 상당히 많이 도와줬지만, 정신 상태는 살짝 의심이 가는, 눈을 검은색 안대 같은 걸로 전부 가리고 있던 차원종 몰래 조용히 그 자리를 뜨려고 내 옆에 세워진 건 블레이드를 슬그머니 챙기려다가 애꿎은 내 목발을 실수로 건드려 버렸다.
둔탁한 소리가 동굴 속 이라는 특수한 환경 덕분에 메아리치며 울려퍼졌고, 나와 그녀 모두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녀는 아마 나 몰래 나가려던 게 들켜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나는, 내 목발이 큰 소리로 꾸짖어 준 덕분에 내가 애꿎은 그녀에게 없는 잘못을 뒤집어 씌우고 있었다는 추악한 진실을 깨달았다.
“하…하하하…”
그 조금의 즐거움도 담기지 않은 웃음소리 덕분에 난 확실히 정신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한시라도 더 빨리 돌아가야만 한다.
그녀는 결국 언젠가는 이걸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나는 머쓱해하던 그녀를 향해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의미로 오른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계속 웅크린 채 앉아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그와 동시에, 그녀 덕분에 돌 바닥에 부딫혀 버린 내 목발을 오른손으로 주워서 오른쪽 어깨 밑에 받쳤다.
내 몸무게를 왼쪽 다리와 오른쪽 목발로 지탱한 채로 완전히 일어난 나는, 얌전히 앉아만있던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 영문을 알지 못해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향해 검지 손가락을 뻗었다.
이 수신호가 뭘 뜻하는 것인지 몰라서 더욱 어리둥절하던 그녀를 위해, 난 그녀의 소지품을 건틀릿에 가려진 내 검지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내 신호를 잘못 해석한 게 분명했다. 그녀는 아마도 헐벗은 내가 자신과 영원히 작별해버리기 전에 간절한 소원을 전하고 싶어서 끙끙대며 고민했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친절한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한 별난 차원종에게 답례를 주기 위해 자신의 망토를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난 그녀가 그 가죽을 잘 챙겼는지 확인한 뒤, 생전에 제법 강한 힘을 가졌을 병사가 남긴 유품을 공물로 바치기 전에, 목발에 의존하는 절름발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내가 대충 계획했던 방향의 정 반대편을 향해 절뚝였다. 반상 뒤로 순식간에 넘어간 나는 아직까지도 멍하니 서 있던 그녀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는 수신호를 왼손으로 보냈다.
그 수신호 덕분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렸을 그녀는 반쯤 벗은 망토를 다시 후다닥 챙겨입고, 주인이 버젓이 있는 방 안에서 또다시 푹 쉬고 있던 게으른 무기도 다급하게 챙긴 다음, 몸에 단단히 묶어놓을 정도로 소중하게 챙겨온 석판은 깜박 잊어먹은 채 동굴의 출구를 향해 서둘러 움직였다.
그녀가 그 석판을 챙기지 않은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