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절망

설현은바이올렛 2018-08-27 2





1
세하는 슬비네 집안으로 들어갔다. 슬비 입장에선 원하지 않은 방문이었다.
세하는 쇼파에 앉아 슬비가 타준 커피를 마신다. 따듯하고 맛있다.
부엌에서 과일을 깎는 슬비의 뒷모습은 말라 보였다. 살이 좀 더 쪄도 좋을 텐데.
세하는 자연스럽게 뒤로 가서 슬비를 안았다.

"....뭐하는 짓이야?" 슬비
"뒤에서 안고 있는데?" 세하
"놔." 슬비는 염동력으로 잡고 있던 칼을 띄우며 위협했다.

세하가 이상해졌다. 갑자기 능글맞아졌어.
세하는 움찔해서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이거 먹고 나가." 사과가 담긴 그릇을 세하 앞에 내려놓는 슬비
"내가 싫어?" 세하
"싫고 좋고 문제가 아니잖아." 슬비

세하는 유리와 사귀고 있었다. 근데 지금 세하는 슬비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굴고 있다. 최악이었다.

"너 변했어 하루만에.. 이상해." 슬비
"몇 번 죽었어." 세하

농담하는 거지? 그러나 세하는 진지했다.

"사실 이번에 일어난 참사를 막아보려고 했어. 실패하고 말았지만." 세하
"잠깐.. 진심이야?" 슬비
"그래서 결근한 거야. 자포기자기 상태라서.." 세하

허무맹랑한 말이다. 하지만 세하가 굳이 거짓말할 이유도 없다. 진짜일까?
세하는 처음에 유리와 출동했다가 죽었던 것, 다음에는 슬비와 함께 막아보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은발머리 소년에게 참패한 것까지 다 얘기했다.
밖의 비소리가 추적추적 들려왔다.

"유리와는.. 한 번 잔 것뿐이야." 세하
"그래서?" 슬비는 심장이 시큰하게 아파왔다.
"나도 모르겠어. 네가 필요해." 세하

슬비가 망설이는 사이, 세하는 다가가 슬비에게 키스했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조금도 없다. 슬비를 안고 싶다. 벗은 몸을 보고 싶다. 그녀의 처음이 나이고 싶다.
찰싹-!
경쾌한 타격음이었다. 슬비는 세하의 뺨을 때렸다.

".....?" 세하
"이런 애인 줄 몰랐어." 슬비는 울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 힘들다구." 세하
"네 얘기가 다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뭐? 유리를 배신하고 나랑 바람필 이유가 돼?" 슬비

세하는 인상이 확 구겨졌다. 반박할 논리가 부족했다.

"그때 네가 죽었을 때 분명히.. 나한테 고맙다고 했어. 챙겨주고 잘해줘서.. 그게 계속 생각나." 세하
"다 꿈이야. 죽으면 과거로 돌아가는 일 따위 일어날 리가 없어." 슬비

세하는 절망했다. 결코 여색을 밝혀서 슬비에게 이러는 게 아니었다. 죽기 직전, 그녀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위로가 또 미소가 너무 따듯하고 아름다워서 반한 것이다.
절망에 빠진 세하는 저벅저벅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뭘 하려고..?" 슬비
"진짜인지 아닌지 증명할게." 세하

슬비가 뭐라 말릴 사이도 없이 세하는 밖으로 뛰어내렸다.

"꺄아아아!!" 슬비

5층 높이의 건물이다. 머리부터 떨어지면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 게다가 일부러 죽으려는 자살임에야.
슬비가 창문에 다가가 내려다봤을 땐.. 머리가 깨진 세하가 엎어져 있었다. 피가 가득 고여 점점 주위로 퍼져나갔다.

"말도.. 안 돼." 슬비

슬비는 뒷걸음칠 치다 엉덩방아를 찌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세하의 의식의 흐름은 고요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 이제는 덤덤했다. 한 번이 어렵지 반복된다는 걸 알면 두려움도 익숙해진다.
만약 코인 같은 게 있어서 다 써버린 거라면? 이번엔 죽어도 부활 같은 것은 없고 그냥 끝나는 거라면?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인생. 차라리 그편이 편했다. 슬비한테 거부당해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3
천장이 보인다. 이번에도 무사히 과거회귀를 한 것 같다. 또 8월 24일의 아침인 걸까.
일어나려고 했더니 팔에 무언가 가위가 눌린 듯 불편했다. 뭐지..?

"우웅.." 유리

다 벗고 있는 유리였다. 그녀가 옆에서 세하의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다.
8월 24일이 아니다! 그 이후의 어느날이다. 세이브 포인트가 바뀌고 말았다.
즉.. 서유리와 사귀기 전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가 없다.
2024-10-24 23:20:1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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