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볼프] Vampirism (1)
밤하늘론도 2018-08-11 9
눈앞을 가리는 건 검은 폭력.
폭력의 칼날 앞에, 생명이 차례차례 바스러져 간다.
의미 없는 생명 하나,
의미 없는 생명 둘.
폭력이 내 앞에 다가오고, 그 검을 높이 들었을 때,
내가 아닌 다른 생명이 꺾여 나갔다.
내 품에 안긴 건 식어가는 한 송이 장미.
여리고도 강인한 한 송이 장미.
짙은 향기가 공간을 메워 간다.
잊을 수 없는 향과 맛과 촉감.
이 두 손에 담긴 건,
숨 막힐 듯 아찔한
진홍.
-
언제부터였을까.
나에게 세상은 색을 잃어버렸다. 오직 보이는 색은 짙은 붉은색 뿐. 붉은 색만이 이 세상에서 살아있음을 절박하게 알리고 있다. 이런 세상은 따분하기만 하다. 나를 충족하기에는 너무나도 결핍되어 있다. 관능적인 살결과 온도. 숨막힐 듯한 피로. 아무리 몸을 밀어붙이고 밀어붙여도, 절대로 만족할 일이 없다. 이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 점점 미쳐간다는 감각조차 잊혀질 때, 내 눈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 또한 처음에는 무채색의 인간에 불과했다. 그저 내 눈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인간중의 하나. 아무런 흥미도 관심도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일어나 주십시오! 선배, 그만 일어나 주십시오!”
누군가의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일어나자, 내 앞에는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소녀가 서 있었다. 얼핏 보면 남자아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의 가녀린 선이 틀림없는 여자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녀는 파이 윈체스터. 나와 한 팀이 된 후배 클로저이다.
“잘 자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깨운 거야? 중요한 일 아니면 다시 잘래. 아니, 중요한 일이여도 잘래.”
내가 다시 자리에 드러누우려 하자, 파이는 나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아파 버둥거리며 일어나자, 파이는 손을 털며 질책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하는 겁니까! 게을러 터져선! 재리가 부르고 있으니 빨리 가보십시오!”
파이와 함께 가보니, 김도윤과 재리가 서로 태블릿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뭐야? 뭔가 좀 심각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아 볼프, 마침 잘 왔어요. 파이한테서 생긴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어요.”
파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묻자, 김도윤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흑지수를 구출하고 나서부터 그녀에게 생긴 의문의 증세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과연... 코피라. 사소한 증상 같지만 위상능력자들에겐 이런 건 큰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지.”
“코피 외엔 별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파이는 이제 혼자 작전구역에 나가긴 위험할 수 있어요. 볼프, 당신이 옆에서 파이를 잘 봐주세요.”
“그래, 뭐. 여차하면 내가 바로 데려오지.”
귀찮은 일이었지만 그녀는 전력 측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게다가 내가 선배이니 후배를 잘 봐줘야 하기도 하니깐 말이다.
며칠 뒤, 총장의 명령으로 성 주변의 차원종을 퇴치하러 갔다. 나의 일은 그녀를 옆에서 잘 봐주는 것 뿐, 이 임무는 파이의 것이기에 나는 뒤에서 그녀를 쫓아갔다. 그녀는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며 차원종들을 정리해갔다. 당찬 성격과는 다른 냉정하고 유려한 솜씨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갑자기 파이가 휘청하더니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 또 코피가 나는군요. 이놈의 코피... 언제쯤 그치려나.”
파이는 손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불평했다, 하지만 흘러나온 코피가 떨어져 그녀의 턱 선을 따라 목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이 얼마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무채색의 세상에, 선명한 붉은색이 물들었다. 새하얀 목을 타고 내리는 붉은 핏줄기가 고혹적이기 그지없었다.
세상이 흐릿해져갔고, 붉디붉은 선혈만이 내 눈앞에 다가왔다. 심장이 고동쳤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선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무 일도 아냐. 자, 이거 써.”
파이가 걱정스레 묻자, 나는 감정을 숨기고 태연하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파이는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잘 쓰겠습니다.”
파이는 받아든 손수건으로 흘러내린 피를 닦았다. 그렇게 복귀하자, 나는 파이를 서둘러 재리에게 보냈다.
“너 빨리 재리한테 가 봐. 아, 피는 멎은거 같으니 그 손수건은 돌려주고.”
“에? 이 손수건, 저 때문에 더러워져서, 제가 씻어서 돌려주려했는데…….”
“됐으니까 주고 빨리 가 봐. 재리가 걱정하겠다.”
파이는 미안하다는 듯이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그 길로 재리에게 뛰어갔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붉은색이 퍼진 천은, 그 자체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듯이 맥동치는 것 같았다.
이 선명한 색깔, 이 축축한 감촉, 이 향기, 모든 것이 나의 오감을 관능적으로 끌어안았다. 수년간 공허했던 나의 갈망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손수건을 코에 가져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찔할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내 뇌리에 스쳤다. 그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아아, 이 얼마나 덧없고도 아름다운가. 나의 마음에서 불길한 욕망이 꿈틀댄다. 세상은 아직 아무런 색이 없었지만, 내 시야에서 그녀는 점차 색을 가지기 시작했다.
밤하늘 같은 칠흑의 머리칼. 새하얀 눈 같은 피부, 붉고 푸른 그녀의 양 눈, 그리고, 오감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선명한 붉은색의 입술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나의 검은 감정을 간지럽힌다. 마치 자신을 먹어달라는 듯이…….
손가락을 보니, 희미하게 붉은 것이 손수건에서 새어나온 피가 묻은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져갔다.
앞선 감각을 모두 날려버릴 만큼의 농밀하고 아찔한 달콤함. 나의 몸은 순식간에 황홀감과 만족감에 젖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 압도적인 욕망이 나의 몸을 지배했다.
나는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를 지배한 욕망이 나에게 속삭였다. 어서 그녀를 느끼고, 맛보고, 탐하고, 정복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녀의 올곧음, 순수함, 아름다움, 기쁨, 눈물, 웃음, 온갖 감정을... 탐닉하라고.
아아, 걱정 말라고. 너를 반드시 만족시켜줄 테니. 지금은 잠시만 기다려 줘.
드디어,
드디어, 찾았어.
끝없는 욕망을 채워줄…….
나의 장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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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소게에서 많이 활동하실 분들이라면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10년 전] 이라는 작품을 썼던 필자입니다. 오랫동안 쉬기도 했고, 닉네임도 바꾸긴 했지만 그래도 알아보시는 분이 계시긴 하더군요. 일년만의 공백을 깨고 드디어 다시 소설을 써보네요! 그동안 기다리신 분들께 사죄의 말을 전합니다ㅠㅠ
이번 소설은 제가 파이를 키우면서 이번 챕터 3에서 파이가 코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떠올린 것이 시작이 되었습니다ㅋㅋ 오랜만에 그렇고 그런(...) 소설을 써보고 싶기도 하고 해서 써보기도 했구요. (솔직히 말해봐... 너네 이런거 원했잖아.)
파이 볼프, 생각하면 할수록 좋은 커플같더군요. 앞으로 파이 볼프 많이 사랑해주세요! 전 이만 다음 편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