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먼지를 털어내다 - Y의 경우
루이벨라 2018-07-04 7
※ 암광세하 x 암광유리
※ 전편 『먼지를 뒤집어쓰다』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3425/
※ 'S의 경우' 는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거 같으니...!'
작은 여왕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지금 여왕의 앞에 펼쳐진 것은 수많은 수의 조무래기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자신의 뒤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강(江). 강은 제법 큰데다가 급류도 빠른 편이었다. 자칫하다가 그 강에 빠지면 잘못될 게 뻔했다.
앞에는 적군, 뒤에는 강. 지금 더스트가 처한 상황이었다. 인간들은 이걸 '배수진(背水陣)' 이라고 불렀던 거 같다. 왜 이런 긴박한 상황에 쓸데없는 것이 떠오르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딱 봐도 물을 등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참 적합한 말일수가 없었다.
반란군들에게 힘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어! 라고 호기롭게 장담하던 더스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지금 자신이 이 열악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녀는, 언제나 늘 위에서 군림하던 여왕이었으니까. 이런 쬐막한 땅에 진(陣)을 치고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그래서, 참 대단하기도 한 거야."
반란군의 사령관이라는 자가 참 유능한가 보네. 그리고 그 사령관이 누구인지는 여왕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때, 자비를 베풀면 안 되었을까나."
무심히 중얼거리는 더스트의 목소리에서는 과거에 대한 미련이 묻어나왔다. 솔직히 이런 상황까지 내몰릴 줄은 더스트도 몰랐다. 더스트는 가지고 있는 지식이 많았다. 그리고 그 지식을 총합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측마저 가능했다. 더스트가 '예측' 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다 실현이 되었기 때문에, 일부 그녀의 측근들은 더스트의 '예측' 을 반드시 다가오는 '미래' 로 인식해 무조건적으로 신뢰했다.
다만 더스트가 '진짜' 미래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미래를 보았다면 이런 거 바로 알아채고 처음부터 싹을 싹둑 잘랐을 것이다. 그녀는 완벽하게 철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지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예측에는 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그 지식 속에 없는 데이터를 토대로 일어나는 일은 지식의 부족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예측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자신의 힘만을 믿던 더스트에게는 크나큰 실수가 된 부분이었다.
"이걸 인간들은 '기적' 이라고 부른다지?"
기적. 사실 더스트의 입장에서는 이 일이 참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신기했다. 자신은 처음 날 때부터 완벽한 힘을 가진 여왕. 그에 반해 반란군의 주축들은 자신과 계약을 해, 그것도 반(半)쪽짜리 차원종인 이들이었다. 그마저도 하나는 자신이 만든 성에서 두문불출한다는데, 1명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다 가능케 하였다?
"참 대단한 인물이야."
그렇기 때문에 더욱 탐이 났던 것일지도...더스트는 입맛을 다셨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둘을 다 탐나했던 건 아니다. 둘 다 우수한 인재이긴 했지만 그날 더스트가 선택한 인물은 딱 한 명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더스트가 억지로 반차원종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스스로 기어들어온 것. 인간들이 쓸데없이 말하는 감정 때문이었다. 그런 충동적인 결정이었음에도 둘은 서로 의지하면서 제법 잘 살았다. 한쪽은 강제적인 성격이 강해 정신이 온전치 못하는 걸, 자의를 가지고 들어온 이가 케어해주는 식이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을 늘상 지켜보던 더스트였기에 이리 뒤통수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친히 '왕' 이라 칭하면서.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일단 현재 더스트의 입장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쥐의 입장이긴 하다. 그렇지만 곧 그 둘을 구석으로 모는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직, 힘을 다 내보여준 것도 아니었으니까.
더스트는 콧노래를 불렀다. 누가 이기는지는 두고봐야했다.
* * *
"강이 흐르네..."
유리는 작은 탄식을 외쳤다. 외부차원에서도 숲이 형성되어있기에, 강이 흐르는 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일수도 있는데, 유리는 무척이나 놀랐다. 하긴 지금 유리와 세하가 거점을 잡은 곳은 험한 바위산이 높이 솟아있는 곳이었다. 황폐한 이런 곳에서 물기가 있는 것이 있을 줄은 솔직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강 바로 앞에 더스트의 마지막 병력이 즐비해 있었다.
"강으로 밀어넣어도 될거 같은데...?"
유리의 이 우스갯소리 같은 말은 사실이었다. 체스 말 따위를 손가락으로 팅겨 넘어뜨리는 느낌으로 해도 곧장 물로 빠질 거 같은 이 상황. 생각보다 지형적인 위치가 유리해보였다. 그만큼 더스트도 많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겠지.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유리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군단에 있는 차원종들은 지금 자신의 우두머리를 무한 신뢰를 하고 있었다. 하는 전투마다 승리로 이끄는 이 재능 넘치는 참모를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지금까지 잘 해왔지? 지금이 제일 중요해. 그때만큼 나를 따라주기 바란다."
우오오오오---!!! 고함 소리가 참으로 우렁차다.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가 따로 필요 없다. 어느새 상대편의 진영의 인원들이 하나 둘씩 머리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무슨 소란인가, 하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으나, 그것이 적군의 사기의 정도임을 깨닫자마자 저쪽도 서둘러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우렁찬 기합 소리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의 서막이었다.
* * *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유리는 곧장 더스트에게 향했다. 더스트 또한 유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생각보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유리 앞에 나타났다.
두 여자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긴장을 느슨하게 풀은 건 더스트 쪽이었다. 늘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 그대로.
"여기까지 왔느라, 수고했어. 꽤나 고된 여정이었을텐데?"
"그거, 지금 네 상황을 알고 하는 말이야?"
유리의 갑작스러운 도발에 더스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와 적대하는 거 그렇게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네 의견을 듣고 결정할 사안은 아니야."
이것이...! 더스트는 분에 겨웠다. 죽어가는 걸 살려주었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게다가 반쪽짜리 힘인 주제에. 그 때, 세하를 제3의 존재로 만들 때 유리가 끼어든 덕에 10으로 가져야할 힘을 각각 5로 나눠가졌다. 둘이 같이 있지 않으면 온전한 10의 힘을 발휘할 수 없기에 둘은 늘 항상 같이 다녀야했다. 그런데 웬걸. 이들이 진화와 같은 비스무리한 걸 할거라는 걸 더스트는 예상하지 못했다. 5라는 힘을 가진 주제에, 혼자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게다가 이제는 더스트는 자칫 방심하다가는 결국 패배할 수도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참 대단하게 생각해. 그 점은 높이 사주겠어."
"..."
"그 굉장한 힘을, 이런 식으로 소모하는 것보단 비축해두는 편이 낫지 않아?"
달콤한 회유. 유리는 그걸 단칼에 잘라버렸다. 꿀을 건네려는 여왕에게 감히 도(刀)를 휘두른 것이다. 더스트는 그 검기를 가볍게 피했지만, 협상이 결렬이 났다는 것에 분에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왜! 나를 못 쓰러뜨려서 난리야?! 게다가 서유리, 넌 네 발 스스로 들어왔잖아! 그 강력한 힘을 얻은 게 누구 덕분인 줄 아는데!?"
"네 입장에서 보면 얻은 것만 보이겠지. 우리 입장에선 잃은 것도 많아."
그 날 이후, 왕좌에서 움직이지 않는 세하를 생각하며 꺼낸 말이었다. 세하만 그 시간에 멈춰있는 거 같았다. 인간의 감정이 무뎌가는 건 유리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유독 세하는 심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때,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동적이고 활기찬 삶이 앞에 펼쳐지지 않았을까.
지금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이렇게 검을 목에 겨누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복수라는 사실에 더스트는 치를 떨었다.
"그래! 좋아! 나를 만약에 쓰러뜨렸어! 그렇다고 너희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줄 알아?! 이미 늦었다고!"
"적어도 화풀이 정도는 되겠지."
'내가 화풀이 인형 같은 줄 알아?'
복수의 대상, 한 발 더 나아가 이제는 인형 같은 취급을 받자 더스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너희들이 가지고 놀기 좋은 인형이라고! 분수를 알고 덤벼야지!
주변의 공기가 후텁지근해졌다. 이제 둘 다 서로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에, 준비 운동을 급하게 마쳤다. 도를 가볍게 휘두르는 유리와, 자신만만함과 독기를 품은 미소를 지은 더스트.
끝장을 보자. 아마도 둘의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 * *
"으, 삭신이야..."
목을 이리저리 돌리는 유리의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소리였다. 무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이기긴 했다. 이기긴 했지만 유리의 현재 몰골도 말이 아니기에 곧장 세하에게 가기는 꺼렸지만, 그래도 시간이 꽤 걸렸기에 걱정했을까봐 - 얼굴에 표시는 안 나지만 - 세하에게 가는 길이었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자 바로 앞에 세하가 서 있어서 유리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다행히 비명 같은 건 지르지 않았지만 장난 아니게 놀랐다. 금방 마음을 진정시킨 유리가 이제는 세하만 보면 습관처럼 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야? 웬일로 왕좌에서 내려왔대?"
"..."
"게다가 방 꼴은...이게 뭐야?"
물음표로 끝맺음 맺으면서 보여진 방 풍경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반 옥타브 올라가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가 나가기 전에는 아무런 장신구 없이 그냥 휑하기만 했던 방이...바닥부터 시작해서 벽을 타고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하가 만들어낸 난장판을 보던 유리는 유리답게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흠...방 치우려면 좀 힘들겠네."
"..."
"얼마나 부순 거야! 가만히 잘 있는 것이 취미가 된 거 같던 사람이."
"가만히...있었는데..."
흡사 꾸중을 하는 엄마와 그걸 듣는 아들 풍경. 세하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땅이며 벽이며 다 갈라졌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라는 생각이 유리의 얼굴에 확 드러났다. 근데 그도 그럴 수 있는게, 세하는 클로저가 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위상력을 다루는 것에 대해 서툴었다. 힘 조절을 못해서 다 검댕이로 만들어버린 적도 몇 번 없지 않았다. 특히 세하의 감정이 불안정할수록 힘은 여과없이 바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유리만 그동안 선봉에 나선 것이다! 안 그러면 적 처리하기도 전에, 우리 편부터 먼저 전멸을 할 수가 있으니까...더스트는 아마 이것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거 같았다. 그러든 말든 이번 승패의 결과는 상관이 없지만.
"뭐야, 머리에도 먼지가..."
"..."
까치발을 들어 세하의 머리 위에 얹어진 먼지를 털어내며 유리가 말했다.
"먼지 다 털었어."
"그래?"
"응, 이제 아무도 없어."
네 앞에 걸리적거리는 먼지는 다 없애버렸다. 치운 것도 아니다. 거의 소각 수준이지만. 다시는 안 나타나게끔.
유리의 담담한 보고에 세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유리가 자신의 머리 위로 올린 손을 내리자, 이번엔 자신이 유리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 것이 전부.
"내 머리 걱정할 때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응...?"
"네가 더, 먼지투성이잖아."
진짜인지 아니면 비유인지는 모르지만, 후자를 말한 거면 사실이기에 유리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세하가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부드럽다 못해 그리움까지 느껴져서 그냥 기분이 좋았다.
"이제 우리 뭘 할까?"
"일단 넌 쉬어야지."
"에이, 괜찮아. 이 정도면 금방 낫는다고."
"거짓말."
세하의 말투가 살짝 누그러졌다. 긴장이 풀린 걸까. 세하의 손은 더스트의 싸움할 때 격하게 해서인지 어느 새 풀어진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지금 유리의 머리카락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백발이었다.
그 모습이 마음이 아픈 세하와 달리 유리는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승전했으니 연회라도 열까? 광대도 불러보자!"
"일단 넌 쉬어**다고."
"예이예이. 세하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래야지."
한숨 자고 나면 뭐부터 할까? 아, 맞다. 약속부터 지키게 해줘야지. 웃어준다고 했으니까! 그 얼굴을 오랜만에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유리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아, 행복한 꿈을 꿀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