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먼지를 뒤집어쓰다

루이벨라 2018-05-30 7

※ 암광세하 x 암광유리





 차원종들의 왕은 인간처럼 생겼다. 유니온 내에서 제일 유명한 소문 중 하나였다.

 차원종들도 차원이 이어지기 전에 아주 긴 시간을 공들여 인간들처럼 아주 교양 높은 수준의 문명을 재건했다카더라, 어쩌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지구의 인간들의 문명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인지도 모른다카더라 같은 이야기는 꽤나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저들을 가장 흥미롭게 만드는 건 '인간의 모습' 을 지닌 고위급 차원종이었다. 실제로 본 클로저는 얼마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형 차원종들과는 완벽한 수준의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것과, 말이 잘 통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적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인간형 차원종은 고위급 차원종들에게만 보여지는 현상이었으므로 그들과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차원종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건 '더스트' 였다. 불사의 존재인 이 귀여운 소녀의 외형을 한 작은 여왕은 꽤나 건방지고, 사람을 잘 가지고 놀 줄 알았다. 앞에 이런 점만 놓고 보면 딱 미움 받기 십상이었지만, 여왕에게는 힘이 있었다. 힘 앞에서는 무조건적으로 굴복하는 것이, 약육강식의 법칙이 철저한 외부 차원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 중에는 이 여왕에게 모든 것을 받친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는 반면, 불순론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힘이 있는 몇몇은 여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거대한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 있던 자들은 하나 둘씩 일어서 여왕에게 맞서 싸웠다. 여왕은 이 반란의 무리들을 전혀 탐탁치 못하게 보았다. 반란군 토벌대가 만들어지는 데는 아주 적은 시간이 들었다.

 작은 여왕은 자신을 향한 배신으로 인해 치가 떨릴 정도였다. 그 반란군 무리들 중에는, 그녀가 친히 힘을 나누어주고, 복종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준 자들이 '2명' 이나 있었다. 이 배은망덕한 것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힘을 빼앗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들은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친히 준 힘 외의, 자기들만의 힘을 키워 놓은 상태였다. 이제 그들에게 여왕의 힘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최측근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주었다고 생각한 자들이 자신에게 반(反)하는 것이 참 모욕스러웠다. 그리고 그 2명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다. 쉽사리 꺾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왕은 입에서 잘근잘근 씹던 손톱을 빼냈다. 이리 초조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그들은 얼마 전까지 자신의 밑에 있었던 자들이다. 즉, 여왕보다는 약할 게 뻔했다. 그러니 저런 아우성 쯤은 새로운 군단을 위해 쌓아올라가야하는 초석쯤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뭐, 어때. 그런 녀석들쯤...내가 이 손으로 친히 무너뜨려주면 될텐데!"

 여왕은 교만했다. 그녀가 가진 강력한 힘은 이런 여왕의 태도에 충분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아무도 그녀의 이런 태도에 반론을 내세우지 않았다.

 여왕은 불사의 존재. 그녀의 밑에 있는 것들은 그녀의...장난감. 여왕은 그 얄밉지만 참 귀여운 장난감인 '2명' 에게 말하는 듯한 뉘앙스를 취한다.

 "그래, 아주 재미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

 이세하, 그리고 서유리?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은연중으로 퍼져 나갔다.



* * *



 차원종들의 왕은 인간처럼 생겼다. 여왕이 최종 목표로 삼는 이 반란군의 지도자 또한 이런 논증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반란군에 소속된 자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2명의 지도자들만큼 인간과 유사하게 생긴 차원종을 한 번도 ** 못했다. 겉모습만 나약한 인간일 뿐, 실상은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 하는 강력한 자들이었다. 심지어 불사의 능력을 가진 건너편의 먼지 여왕도 이 둘에게는 쩔쩔 매지 않는가! 그들은 강했다. 새로운 1인자가 되어도 충분한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었다.

 이 둘은 언제나 붙어다녔다. 둘이서 하나이고, 하나가 둘인 듯한 차원종이었다. 한 쪽은 남성형, 다른 한 쪽은 여성형. 이목구비가 다른 걸 보면 본래부터 2명인 자들인 게 분명한데, 먼지를 뒤집어 쓴 듯한 백발과 차갑게 가라앉은 자안(紫眼), 그리고 검은용의 비늘을 겹겹이 쌓아올린 갑주가 공통적인 걸 보면 그들이 참으로 닮았다는 착각을 들게 만들었다.

 남자는 과묵하고, 여자는 시끄럽진 않았지만 과묵하지도 않았다.

 둘의 힘은 막상막하였지만, 굳이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냐고 따지자면 남자 쪽에 있는 듯 했다. 여자는 자신과 같은 힘을 지녔고, 공은 적음에도 신망은 자신보다 높이 받는 남자가 질투가 날 법한데도 그런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앞장 서서 남자에게 자신이 개척한 개간지를 보여주는 걸 취미로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젊고 강한 '왕(王)', 여자는 '참모(臣)' 같았다.

 여기까지가 반란군들이 알고 있는 자신들의 지도자에 대한 공적인 모습이다. 앞면을 뒤집어 뒷면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다. 왕에게 깍듯했던 참모의 태도와 표정이 여기서부터 누그러진다. 다짜고짜 왕에게 다가가 끌어안기기까지 한다. 어딜 봐도 이건 사랑에 제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뭘로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왕과 신하일까, 아니면 연인일까. 유리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로 보였으면 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세하는 웃질 않아."

 단둘이 있을 때면, 그 시절의 이름이 무조건적으로 튀어나온다. 세하의 얼굴을 쓰다듬는 유리의 손길은 부드럽기까지 했다. 얼굴 부분은 갑주가 덮혀있지 않아 서늘한 체온이라도 느껴질텐데도 세하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미소 본 지 오래인데. 유리가 중얼거렸다. 본능에 이끌려 잘 익은 사과를 베어물 것처럼, 유리는 세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세하는 아무 반응 없었다.

 "어떻게 해야 웃을 수 있을까."
 "..."
 "광대라도 불러야 하나."
 "...재밌지도 않아."

 유리가 세 마디 말하면, 겨우 한 마디 짧게 대꾸해주는 정도이다. 하지만 유리는 별 대수롭지 않았다. 본래부터 세하는 자기와 단둘만 있을 때에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짧지만 그 안에 많은 감정들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게 세하의 대화법이었다. 누가 들어도 무뚝뚝한 툴툴거림임에도 유리는 그 안에서 세하가 내뱉은 희미한 감정을 잘 캐치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부르면 재밌게 보면서, 뭘."
 "재미 없어."
 "이런 곳이 재밌을 리가 없지."

 유리는 힐끗 천장을 쳐다보았다. 먹구름이 낀 것도 아닌데, 어두운 하늘에 쓸쓸한 바람만 분다.

 유리는 대범하게도 왕좌에 앉아있는 세하의 무릎 위에 착! 올라가 앉았다. 늘상 당하는 일이라 그런지 세하는 담담해했다. 이러면 세하의 얼굴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유리는 이 자세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이렇게 내려다보면 가끔씩 유리의 앞에서만 나오는 세하의 어리광도 받아줄 수 있었다.

 품에 살짝 안기니 아직도 가시지 않은 희미한 먼지 냄새에 유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짜증나는 얼굴이 뇌리 속에 스쳐지나간다.

 "아직도 화난 거야?"
 "..."
 "아니면 자책하고 있는 거야?"

 둘 다였지만 세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전자는 유리에게, 후자는 세하 자신에게.

 본래는 인간이었던 이 두 사람이 차원종의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 건 더스트 때문이었다. 아스타로트를 무찌를 힘이 필요하다며, 처음에는 세하만을 이용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게 급박한 시간이 흘러, 아스타로트는 쓰러지고 세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죽음을 택해 인간으로 남는가, 아니면 차원종으로 살아가는가.

 세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선택해라' 라는 것도 명분일 뿐, 어차피 더스트는 세하를 반인반차원종으로 살려 자신과 같은 동업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유리는 그 순간, 같이 끼어들어 세하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 거고.

 차원종, 아니 적어도 더스트를 믿은 그 때의 자신은 참 멍청했다. 따지고 보면 유리에게 화가 났다는 것도 본래라면 자신에게 내야 할 화이고, 유리가 세하에게 화를 내는 게 더 그럴 듯 했다. 세하가 유리에게 드는 '진짜' 감정이라곤 미안함 밖에 없다. 같이 있어준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 그건 너무 이기적이다. 하지만 강하고 씩씩했던 유리는 너무 탓하지 말라고 했다. 좋게 생각하라며 늘 복돋아주는 건 기본이었다.

 귀로 달콤한 유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후회 안 해."
 "..."
 "이렇게라도 같이 있잖아. 뭐가 더 필요하겠어?"

 대신...

 "더스트는 죽이고 싶어."
 "..."

 섬뜩한 유리의 말. 목소리도 그에 맞게 착- 가라앉았다. 세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세하에게 더 깊숙히 안겼다. 둘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 후에, 유리는 다시 상기시켰다.

 "그리고 곧 그 순간이 다가와."
 "응..."

 더스트는, 지금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더스트는 강하다. 하지만 이 싸움이 길어질 거라는 것과, 세하와 유리가 생각보다 강했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변수에 맞부딪힌 더스트는 초조했다. 틈은 더스트의 약점을 남김없이 보여주었고, 이 틈을 유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 아니 반 걸음? 그것만큼 가까운 고지이다. 유리를 안은 세하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유리에게 실(實) 따위 없을 텐데. 그러면 유리는 티없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
 "제3위상력을 얻은 것도, 먼지든 피든 뒤집어쓰려고 하는 것도...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유리는 언제나 곧고 강했다. 그 점은 이 어두운 곳에서도 여과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세하는 그런 점이 참 사랑스러웠다. 이런 감정이 드는 것도,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세하는 참 이기적이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

 고맙다, 는 말에 유리는 쑥스럽게 또 하나의 고백을 꺼냈다.

 "나 부탁이 있어."
 "뭔데?"
 "내가, 더스트를 쓰러뜨리고 온다면..."

 한 번쯤 크게 웃어주기. 미소도 괜찮아. 안 그러면 세하 얼굴 근육 다 굳어버릴까 봐. 저 장난치는 모양새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응, 그럴게."
 "곧 출전식이지만, 우리...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포근포근하니 기분이 좋아...세하의 감겨지는 눈 사이로 보인 유리가 귀엽게 소곤거린 말이었다.





[작가의 말]

'몽진(蒙塵)' 이라는 말을 듣고 참고해보았습니다.

2024-10-24 23:19:3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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