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of Striker-이세하 Ep-CUBE 4. 곁에 있던 것

Sehaia 2018-05-28 2

그쯤 됐다. 가서 쉬어.”

 

쉬긴 뭘 쉬어요, 학교가 이 모양인데......벽돌 하나라도 날라야 될 거 아녜요.”

 

이런 막노동은 위상능력자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그리고 어리광이라고 하는 건 기껏해야 청소년까지의 특권이니까, 부릴 수 있을 때 부려둬.”

 

그러는 아저, 아니, 형은 안 쉬어요?”

 

슬슬 그 버릇은 고치는 게 어때. 이젠 그게 말실수인 건지, 의도적인 건지 헷갈려.”

 

한숨을 푹푹 쉬는 아저씨한테 아저씨야말로 한숨 쉬는 버릇 고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나도 요즘 들어 한숨 쉬는 때가 부쩍 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몸을 좀먹는 피곤은 더 이상 떨어져 줄 생각을 하지 않고 깊은 우정을 쌓을 궁리만 하고 있다.

 

승급 심사는 보류되었다. 팀이라고 사이좋게 5명 전원이 쇼크로 인한 강제 로그아웃 처리를 당해버린 후, 우리는 의무실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큐브 내에서 있었던 일은 섬칫 하는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다. 뇌에서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인식한 그 순간부터 통증은 빠르게 사라졌다. 훈련 프로그램 내에서 입은 부상은 자그마한 멍 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큐브라는 훈련 프로그램은 정비에 들어갔다. 구현화된 우리, 아니, 차원종의 정보는 프로그램의 오류라고 판정을 받았다. 듣자하니 나뿐만 아니라 팀원 전원에게서 동일한 현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차원종이 되어버린 자신을 만나 철저하게, 무참하게 때려눕혀졌다. 이번 승급 심사는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싱겁게 임시 중지되었다.

유니온 측에서는 원래 기억에 의존했어야 할 프로그램이 자아를 갖고 주체적인 행동을 한 이유를 밝혀내야 한다고 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그런 거 고치지 말고 그대로 폐기나 해버렸으면 좋겠다. 통각을 그대로 살린 전투 훈련이라니, 불안해서 어디 쓰겠나.

 

우리는 망가진 학교 보수 공사에 복귀했다. 학교에서 시작해서 한강 강변길, 대공원 등등 부숴먹은 곳이 너무 많은지라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다. 애초에 승급 심사를 빌미로 빠지고 있던 일이었다.

그 더러운 마나나폰 놈들은 다시 나타나면 발도 붙이지 못하게 이슬비보고 띄워버리라고 할 테다. 그 놈들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도로가 부서졌던가. 쓸데없이 육중하기나 한 놈들 같으니.

 

나는 위상력을 써서 간단한 용접, 무거운 짐 나르기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아저씨는 단순 막노동 담당. 근데 이 아저씨는 자기 할 일은 다 끝내기라도 한 건가. 갑자기 와서는 가서 쉬라니,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는 뭔가 싶다.

철근을 붙잡고 다시 열을 가하려는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저씨는 팬더도 아니고, 눈에 붙이고 있는 그 다크서클이나 떼고 일하는 게 어때.”라며 핀잔을 주었다. 그리곤 무언가를 하나 툭 던져주었다.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자양강장제였다.

 

이 일, 힘들지.”

 

?”

 

불리면 불리는 대로 부려 먹히고, 일상에서는 위험 인자 취급받아. 앞에서는 클로저라고 부르면서 감사해하는 사람들이, 뒤를 돌면 그 때부터 우리가 주먹을 휘두를까 두려워하면서 욕해. 그러고 보니 지금 클로저의 권한 축소 얘기도 돌고 있던가. 우리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런 모양이지. 인정하긴 싫지만.”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녹즙 팩 하나를 꺼내들더니 봉투를 뜯었다. 한숨에 쭉 들이키고는 으윽, . 배합이 잘못됐나.” 라며 중얼거리는 그 모습은 나이에 맞지 않게 앳돼보여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웃어본 것도 오랜만이란 걸 새삼 자각했다. 사람의 얼굴 근육을 이렇게 움직이면 웃는 얼굴이 된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던 것 같다. 뚜껑을 따고 마신 자양강장제는 약간 달콤하고 조금 비릿하고, 많이 썼다.

 

그런 고로, 좀 쉬엄쉬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지. 쉴 수 있을 때 쉬어두어야 오래 버텨. 몸뿐만 아니라 정신도 휴식하지 않으면 쓰러지는 건 똑같아.”

 

계속해서 쉬라는 독촉에 잠시 철근을 내려놓고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반쯤 굽은 등은 노쇠한 노인의 등과 닮았다. 머리는 새하야니까 얼굴에 주름만 좀 그려 넣으면 팍삭 늙어 보일 것이다. 선글라스를 벗은 눈매는 매섭게 살아있지만 이 아저씨의 신체연령은 절대 동 나이대의 숫자를 표기하진 않을 것이다.

 

아저씨야말로 그쯤하면 많이 하신 거 아닙니까. 이미 은퇴도 하신 분께서 왜 굳이 다시 돌아와선 고생을 하고 계세요. 계속 혹사만 하면 일찍 갑니다?”

 

, 말본새하고는. , 어쩔 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뭐라고 해야 하지? 일단 적금은 다 깨버렸거든.”

 

그거 참 더럽게 현실적인 이유......”

 

가위, 바위

 

말허리를 자르고 난데없이 외친 가위바위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냈다. 아저씨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보를 내곤, 우습다는 듯이 남은 녹즙을 쭈우욱 소리를 내며 들이켰다.

 

바라던, 바라지 않던, 이렇게 선택의 시간은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와. 난 그 때 다시 돌아오는 걸 골랐어. 그것뿐이야.”

 

그 때라고 하는 건 아저씨와 처음 만났던 때를 말하는 것일까. 다 허물어져가는 폐가 안에서 홀로 외롭게 샌드백을 때리고 있던 사람. 무엇이 그를 지탱해주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무엇이 그를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돌아왔다. 다시 싸우고 있다. 언제 봐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몸을 이끌고, 그는 항상 돌아왔다. 필시 나보다 몇 배는 고통을 받았음이 틀림없는 그는 고뇌 속에서 복귀를 택했다.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겠지만.

가만히 날 내려다보던 아저씨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내 선택일 뿐이지.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해왔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원래 어른들의 일이란 건 어른들이 처리해야 하는 법이야. 그걸 멋대로 너희한테 떠넘기고 있을 뿐이지.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가 도망간다고 아무도 뭐라고 할 권리가 없다고.”

 

도망가도 된다. 도망가지 않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가장 싸워야 하는 순간에 강한 힘을 갖고 있었던 아저씨는 도망가지 않았다.

내 힘이 이 아저씨의 전성 기시절에 비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잠재력 자체는 높다고 객관적인 계측 수치가 이미 있다. 큰 힘을 가지고 쓰지 않는다면 그것이 죄가 된다고 누가 그랬던 가. 그러면 싸우지 않는 위상 능력자는 대죄인이겠지요, 아마. 이런 생각에 의미는 없다며 머리를 흔들면서 떨쳐내려 애썼다.

산만하게 흔들리는 내 머리를 아저씨는 가만히 손으로 붙잡으며, 살짝 바닥을 보도록 눌렀다. 머리에 손을 댄다는 기분 나쁠 행동이 묘하게 분탕질을 치는 생각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가 돌아오기를 고른다면 그건 너 자신의 의지가, 꾸준히 싸워오고 지켜온 너 자신이 네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아아, 계속 이런 얘기나 했더니 꼰대가 되가는 거 같아. 쓸데없는 얘기는 이쯤하자고. 놀다와, 동생. 잔업과 다크서클은 언제나 어른의 몫이지, 청소년의 것이 아냐.”

 

이젠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나가라는 의사를 표했다. 이 정도까지 말하면 저쪽도 슬슬 막무가내로 나가라고 할 테니, 그냥 나가는 게 나을 성 싶다. 생각해보니 막노동 안 하고 쉬라는데 왜 그리 거부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싶어서 그대로 학교에서 나왔다.

 

그러나 학교를 나오자 할 일이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유니온의 방침을 따라 피난을 갔다. 물론 그중에는 석봉이도 포함되어 있다. 딱히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넷 상에서도 게임 레이드 외에는 친구를 많이 사귀는 편도 아니기에 연락을 취할 상대가 없다. 엄마는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드물게 어딘가 가 버리셨으니, 집에 가서 담소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교문 앞을 서성이는 것 외엔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참 빈곤한 인생을 살았다면서 자조하고 있던 와중, 뒤에서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슬비였다.

 

, 이세하? 너 여기서 뭐해?”

 

아저씨가 쫓아냈어. 가서 놀라 그러시던데.”

 

너도? 나도 이런 귀찮은 일 하지 말고 좀 쉬라고 하셨는데.”

 

나한테 잔소리 한 지도 얼마 안 돼서 바로 이슬비한테 쉬고 오라고 한 건가보다. 분신술이라도 쓰는 건가,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얠 찾아내서 쫓아낸 거야. 쉬라고 하던 사람이 누구보다 더 바쁘게 사는 것 같다. 이 무슨 모순.

 

나 참. 산책하기엔 대공원도 그 모양이 됐겠다, 갈 데도 없네.”

 

난 어디 좀 다녀올게.”

 

어디 갈 건데? 별 상관없음 나도 가도 되냐.”

 

어쩐 일이니? 평소 같으면 이 때다 하고 게임기나 꺼내들 네가?”

 

, 그게, 아 있어, 그런 거.”

 

차마 손이 퇴물이 되었다고는 말을 못하겠다. 차근차근히 연습하면 감각이야 곧 돌아온다. 하지만 지금은 게임이 익숙하지 않다는 감각조차도 받아들이기 싫었다. 지금 갖고 있는 게임기는 손에 꼭 들어오는 그립감이 안정적인 기계였는데 전혀 그립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지금 내 손안에서 쥐었을 때 익숙하다고 느껴질 건 하나뿐이다. 그런 건 인정하기 싫다.

 

내 말에 이슬비는 고민에 빠진 듯 했다.

 

으응, 따라와서 즐거울 건 아닌데......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그래도, 같이 가준다면, 힘이 될 것 같아.”

 

뭔데 그러는 건지. 이슬비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 뒤돌아 걸었다. 그 등이 조금 쓸쓸해 보여서, 가만히 따라나섰다. 사실 별다른 생각을 하고서 따라 나간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죽이고 싶었을 뿐이었을지도.

걸으면서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딱히 목적지를 묻지도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별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처음 들른 곳은 꽃집이었다. 따라 들어가진 않아서 무슨 꽃을 산건지는 몰랐다. 어차피 봐도 꽃 이름 같은 건 모른다. 다만 평소 같으면 염력으로 수납하고 걸었을 종이팩을 굳이 소중하게 들고 가는 이유는 잘 알 수가 없었다.

 

30분 정도를 걸어서 근처 역에 도착했다. 승강장을 비롯해서 출퇴근 때마다 사람들로 미어터지던 무인열차 안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창 밖에는 머리 위를 타 넘어 산을 향해 느긋이 걸어가는 울긋불긋한 해가 하늘을 서서히 적시고 있었다. 그만 쉬라고 말을 하라고 할 만하다. 늦봄인데도 슬슬 해가 저물 정도면 시간이 꽤 지난 편이었나 보다. 자연스럽게 우릴 내보내긴 했지만 그 아저씬 여전히 일하고 있으려나. 아저씨 말마따나 조금 쉬고 있으면 좋으련만.

 

이번 역에서 내려.”

 

그래.”

 

열차 안의 시계를 보니 벌써 1시간이 지났다. 평소 같았으면 지루하다고 생각했을 시간이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버린 것에 내심 놀라면서 열차에서 내렸다.

잠깐 동안 다시 걸어서 도착한 곳은 왠 산이었다. 설마 등산이라도 할 생각인가 싶었는데, 이슬비가 향한 건 산이 아니라 그 옆의 언덕이었다. 누가 찾아올까 싶은 이 언덕은 의외로 주변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더군다나 빤하게 놓여있는 돌계단은 이 위에 무언가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온 건지 돌계단은 꽤 많이 닳아있었다.

그와 별개로 올라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는 이슬비의 표정을 봤을 땐 누구한테 혼이 나러 가나 싶을 정도였는데, 언덕 위에 즐비하게 서 있는 것들을 봤을 때서야 납득이 갔다.

 

공동묘지였다.

용건이 무엇인지는 대강 감이 잡히지만 이제 와서 돌아가겠다고 말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얼떨떨하게 따라가던 와중,

 

다녀왔어요.”

 

자그마한 묘비 2개가 함께 늘어서 있는 곳에서 이슬비는 걸음을 멈췄다.

 

여긴.......”

 

아마 부모님의 무덤인 듯 했다.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묘비들의 사망일자는 전부 똑같은 날이었다. 아마 거대한 차원문이 열렸을 때 돌아가신 분들의 묘일 것이다. 차원 전쟁 이후로 민간인이 많이 죽는 사건이 생기면 이렇게 공동묘지를 만드는 관습이 생겼다. 그 주변의 참상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항의에 가까운 행동을 분명 여러 번 했을 텐데도 참사가 어째서 자꾸 벌어지는 건지는 씁쓸한 얘기가 된다.

 

미안......남을 데려올 만한 장소는......아니었지? 그냥, 누군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런 말을 해도 곤란하다. 이대로 내뺄 수도 없다. 그렇다고 남이 성묘하는 걸 관찰하는 취미도 없는데. 그리고 그 미안하다는 얼굴은 언제나 반칙이다. 평소에 잘 짓지 않는 표정이니만큼 반박하기가 힘들다.

하아. 아무래도 상관없나. 조금 불편한 정도일 거다.

 

아냐, 됐어. 따라오겠다고 한 건 나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

 

희미하게 웃고는 이슬비는 묘비로 고개를 돌렸다. 가방에서 꽃을 꺼내 바치면서 무릎을 꿇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울고 싶어 하는 것같이도 보였지만, 기나긴 묵념 속에서도 절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염없이 묘비에 있는 이름을 바라보는 그는, 더는 돌아오지 못할 나날을 추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던 도중이었다.

 

강하게......게요......”

 

흐느끼듯 꺼 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는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결연히 앞으로의 다짐을 읊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같았다. 언제나 꿋꿋하게 차원종과 싸워온 그가 거의 보이지 않던 자그만 균열. 이따금 겉으로 감싼 외피가 무너질 때 보였던 연약함을 지금은 굳이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절대로......휘둘리지......테니까......잘 해낼 테니까......지금만은......싶어요......”

 

같이 가면 힘이 될 거라고 했던 건 무슨 의미였는지. 내가 여기 멍하니 서있는 게 도움이 되어주었다면 차라리 펭귄 인형을 데려다 놓는 게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둘 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기는 피차일반 아니냐.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처하다. 무엇보다 난처한 건,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올라오는 그것이다. 언제나 억누르고 있었던 질문은 이럴 때마다 스멀스멀 심장 위로 기어 올라온다. 부디 입을 다물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합장하고 있던 손을 풀고는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로, 이슬비는 내가 있는 쪽을 올려다봤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별로. 그냥.......”

 

?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그렇게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다짐을 보면 항상 떠오른다. 언제까지고 내가 계속 짊어졌던 시답잖은 질문이.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알면서도, 요즘 들어서 계속 겹친 일들이 떠올라버린 나는 무심코 털어놓고 말았다.

 

넌 괴물이라도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말하고 나서 바로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꺼낼 얘기는 아니었다고 격하게 후회했다. 분위기에 초를 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남의 부모님 무덤 앞에서 이따위 말을. 5초 전의 자신에게 달려가 머리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시답잖은 물음을, 이슬비는,

 

사람들을 지킬 거야.”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내 연약한 말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가족이 위험하다고 하면 군말 없이 달려갈 거고, 내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두말없이 도울 거야.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전력을 다할 거야.”

 

강하다. 나로서는 도저히 내놓기 힘들 것만 같은 답이었다. 내가 혼자서 계속 고민한다고 했던들, 저런 답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별로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질문을 이런 곳에서 내뱉는 것 자체가 나약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을 지리멸렬하게 잘 나타내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면서 쓰게 웃었다.

그 때였다.

 

, 근데 이건 네 질문의 대답은 되지 않을 것 같네.”

 

이슬비는 무덤 앞에서 꿇은 무릎을 펴고 등을 곧게 세웠다. 조금 더 묘비를 눈에 새겨놓으려는 듯 고개는 숙인 채였지만,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망설임은커녕 점점 힘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검은 코트와 묶은 머리. 무엇보다 곧고 빳빳한 등이 내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하게만 보였다. 당신께서 분명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종종 입는 검은색 코트와 어울리는 은보랏빛 머리카락을 한순간 본 것만 같았다.

난 그때 머나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시커멓게 덧칠해버리고 싶었던 날의 기억. ‘라는 존재의 무게가 먼지만큼 하찮게 여겨졌을 때, 현실에서 붕 뜬 나를 땅바닥에 설 수 있게 조심스레 무게가 되어 눌러준 말. 여지껏 곁에서 가슴에 크게 새겨진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지켜주고 있던 말을 나는 어째선지 듣고 있었다.

이슬비가 아직 하지 않은 한 마디 한 마디를, 나는 한 발짝 앞서서 듣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세상에서 괴물이라고 부르진 않는단다.’

 

그도 그럴게, 다른 사람을 구해주는 게 괴물일 리가 없잖아? 그런 건,”

 

영웅인거야.

괴물 같은 게 아니라.

 

위상 능력자의 동체 시력으로도 흔들림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또렷한 두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저녁노을을 받아 노르스름하게 물든 푸른 눈이 일체의 반론을 거부했다. 잠시 옛날로 돌아갔던 시간은 빠르게 뛰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렸다. 힘들 때 언제나 곁에 있어주었던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니 나는 괴물이 되지 않아. 그런 나약함에 지지 않을 거야.”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자신에게 확신을 불어넣듯, 나를 향한 건지 자신을 향한 건지 모를 다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럴수록 유니온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엄마가 울면서 안아주었을 때, 내가 바랐던 것이 어떤 건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건 영웅 같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난 믿어.”

 

힘든 사람의 곁을 지켜줄 수 있는, 단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간단하고 명료한 답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었는데.

바라는 건 언제나 가장 간단하고, 단순하고, 명료했다.

고민은 계속 했다. 허송세월도 꽤 오래 해 왔다. 하지만 아직 내 앞에서 누군가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 아직 다시 할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은 몇 년의 시간 정도인가. 생각보다는 싼 비용인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렸는데도 그거면 충분했는지 이슬비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묘비를 향해 돌아섰다. “모두 끝난다면, 다시 올게요.” 아직 산더미같이 쌓여있을 하고 싶은 말들을 가슴에 품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다시금 뒤를 쫓아 함께 내려간 돌계단이 더더욱 닳아보였다.

돌계단이 닳고 닳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덤을 찾아오는 이유는 무얼까. 냉정히 따진다면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을 위해서다. 현대의 무덤은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금 같이 걸어간다고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장소. 그것이 무덤인 거겠지.

 

하지만 난 아직 이별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나에게 어울리는 장소는 무덤은 아니다.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은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공동묘지에서 많이 떨어져 승강장에 가까워졌다 싶을 때 즈음에 이슬비한테 말을 걸었다. 아직 여운에 잠겨 있을 동안에, 이 말만은 해두고 싶었다.

내 자신의 대담함에 의외로 놀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슬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살짝 기대하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말할 거야.”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끝을 올린다.

오른쪽 주먹을 하늘을 향해 높게 든다. 다행히도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별로 화재라던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눈을 감으며 몸 안을 도는 피가 오른쪽 주먹에 쏠리고 있다고 상상했다. 살짝 흘겨본 주먹에는 푸른 불꽃이 조금씩 응축되어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살짝 웃으며 하늘을 향해 휘두른 주먹에서 불꽃이 날아갔다. 굉음과 함께 어둑어둑해져가는 저녁 하늘을 다시금 푸르게 물들인 불꽃이 펑 하고 산산이 흩어졌다.

그 틈에, 입을 움직여서 한동안은 다시는 입에 담지 않을 말을 은밀하게 꺼냈다.

 

어안이 벙벙한 듯 이슬비는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봤다. 혹시나 들렸을까 괜스레 머리에 열이 올라와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것처럼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갔다. 등 뒤로 짜증 섞인 누군가의 고함이 쫓아왔다.

 

, 이 성격 꼬인 놈아! 한 번만 말한다더니 그게 뭐야!”

 

그럼, 내가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줄 알았냐. 아니꼽다면 독순술이라도 배우는 걸 추천한다. 내가 한 행동이 새삼 유치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 행동에 저렇게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여주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러니 무심코 던져버린 질문보다 더 말하기 힘든 본심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숨기기로 했다.

내가 구해낼 수 있었던 게 너라서, 정말로 다행이었어.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은 꽤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열차에 타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 미뤄둬도 될 얘기. 지금은 게임이나 하자. 역시 두 손 놀리면서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지루한 거리다. 코트 안주머니에 있는 게임기를 꺼내자 또 한심하다는 눈치를 받아버렸다.

 

게임 안 한다더니?”

 

그냥 하고 싶어졌어. 집중해야 되니깐 방해는 마.”

 

이 중독자를 진짜......”

 

말은 그렇게 해도 뜯어말리진 않는 게 다행일 따름. 사실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라 열차의 의자에 앉자마자 바로 새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1시간 정도는 푹 자는 것도 좋겠지, 아무렴.

 

돌아간 학교에는 아저씨가 교실 책상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런. 내가 누워 있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상당히 꼴불견이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식으로 책상 위에 드러누워 있진 않을 테다.

 

여어, 동생, 리더. 돌아왔네.”

 

. 검은양 팀 리더 이슬비, 지금 복귀했습니다.”

 

, . , 어쩌다보니.”

 

, 보아하니 괜찮겠네. 할 일이 생겼다.”

 

? 뭐죠? 설마 차원종이 침공이라도 한 건가요?”

 

워워, 열은 잠깐 내리라고. 맞는 말은 아닌데, 틀린 말도 아니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큐브가 폭주를 시작했다. 우리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차원종 AI가 유니온의 과학 기기 일부를 해킹하고선 물질화를 시도했어. 이 이후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하아. 그러니까, 그런 건 진즉에 폐기했어야 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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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Closenea입니다. 어떠셨는지요.

개인적인 얘기입니다만, 오버랩 기법을 좋아합니다. 이 글은 그런 취향이 좀 많이 들어간 편이네요. 나쁘게 말하면 우려먹기라고도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여태까지 써온 글들의 총집편? 같은 느낌으로 썼기에 그렇게 됐네요. 제 글을 죽 읽어보신 분이라면 '아, 이거! 전에 이거 가지고 뭔 말 했던 거 같은데?' 싶은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에피는 사실 VoS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왠지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에피입니다. 사실상 이번과 다음 에피를 위해 VoS - EP CUBE를 쓴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오랫동안 구상한 것 치고는 작위적인 파트라던가, 약간씩 걸리는 장면들이 없는 편은 아닙니다만 여태까지 에피 구상하면서 이보다 오랫동안 숙고한 에피는 없었던 것 같네요(정확히는 이름없는 괴물 에피와 함께 구상한 거지만요). 실력이 좀 더 좋았으면 더 매끄럽게 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과 이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일지 몰라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에피였습니다(필력에 대한 아쉬움은 언제나 남는 것이 함정).

제이와 슬비 비중은 이렇게 큰데 왜 유리랑 미스틸테인은 없어요!라고 따지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네요. 이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후기를 쓰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재미있으셨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아, 그리고 VoS 이름없는 괴물(2)가 조회수를 800을 넘었더군요;;;;많이 놀랐습니다. 모자란 글을 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4-10-24 23:19:3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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