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팩, 잊혀진 어금니 (21)
벨리에나 2018-03-08 0
가산디지털단지역.
구로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치인 가산디지털단지역. 이곳에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차원종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다. 그 차원종을 이끌고 있던 것은 참모장, 자신을 여왕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게 될 더스트였다. 군단에서도 그 잔인함이 돋보인다는 데스워커가 더스트를 따르고 있었다. 데스워커 외에도 더스트의 개조로 변형된 차원종이나 용을 잃어 야생의 동물과 다름 없는 드라군 타입들도 종종 보였다. 더스트는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섬기게 했다.
더스트는 철근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다리를 흔드는 모습과 표정만 보면 아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이곳은 수십 미터 상공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하들을 지상에 내버려둔 채 그녀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쩌적, 콰지직!
더스트가 있는 하늘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차원 균열이 열렸다. 다 열리지도 않은 균열에서 노란색 가시촉수가 균열을 강제로 부쉈다. 더스트는 그 모습을 보고 태연하게 말했다.
"총사령관. 성질 좀 죽여. 그러다가 영혼까지 당하면 어쩌려고?"
더스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균열에서 튀어나와있던 가시촉수들이 하나로 뭉쳐 더스트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네 배신으로 군단을 혼란에 빠뜨렸다."
정신을 통해서 직접 뇌로 향하는 대화 방법. 더스트는 몸을 부르르 떨며 홍조를 띄웠다.
"너무 갑작스러운걸. 아자젤. 우리가 직접 만날 필요가 있을까?"
"네 행동이 나는 물론 너 자신까지 파멸할 테니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인간과의 협력을 멈춰라."
"무슨 소리야? 난 총사령관이 하지 못한 걸 해낼 수 있어. 원반의 회수. 그리고 총사령관은 날 죽일 수 없어. 원반을 제어하기 위해선 내가 필요해. 물론, 나도 혼자서 원반을 제어할 수 없으니 몸을 지키고 있는 것이고."
아자젤은 커다란 가시촉수를 천천히 회수 했다. 더스트의 말이 맞다. 원반에 의해 클로저가 된 인간들이 내뿜는 신호가 원반의 것과 유사하여 원반 자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클로저를 통째로 관리하고 있는 유니온이라면, 그 유니온의 우두머리인 총장과 손을 잡은 더스트라면 원반을 찾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유니온이 가지고 있는 모든 클로저의 신호를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자젤은 인간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더스트. 인간들에겐 맥스가 있다. 원반에게 첫 번째로 선택받은 인간. 그는 이미 원반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다. 너와 협력 관계라던 총장이 최강의 클로저인 맥스를 모를 것 같나?"
아자젤은 더스트가 맥스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녀 개인의 힘으로 맥스를 제압할 수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 또한 버거운 일을 한낱 참모장이 해낼 수 없다. 더스트도 알고 있다. 계획만 있을 뿐, 맥스를 제압할 방법은 그녀가 가진 힘으로도 부족하다. 더스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까, 나랑 총사령관도 할 수 없는 일을 총장이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생각해봐. 유니온은 이미 많은 인간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야. 유지 되고 있는 것도 신기하지. 그러니 아자젤. 우리가 타협점을 보자고."
아자젤이 원하는 것은 원반 회수가 늦어지더라도 인간과의 협력을 끊는 것. 더스트가 원하는 것은 최대한 빠르게 원반을 회수하는 것. 더스트는 아자젤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맥스 말고도 문제가 되는 건 서지수나 트레이너와 같은 울프팩 팀. 그 외에 제3위상력을 몸으로 경험했던 검은양 팀이나 늑대개 팀까지. 그들의 시선을 원반에서 떨어뜨려야해. 이용할 수 있는 게 있어. 총장의 명령을 직접 받는 클로저 집단, 사냥터지기 팀. 그들은 총장의 명령이 최우선이지만, 무조건적인 복종은 아냐. 애쉬가 건드린 아이들이라면 가능하지만 말이야. 문제는 그 책을 다루는 볼프강 슈나이더. 노련해. 아이들이 폭주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존재야."
"책이라. 엘리고스를 가둬둔 그 책 말인가?"
"응. 미약하긴 한데 기초적인 기술은 구현할 수 있어. 추가로 벨리알과 내 부하였던 슈브까지. 총사령관이 생각하는 책의 과부화는 불가능해. 그들이 볼프강의 정신을 다른 차원종에게서 지키고 있거든."
"그들을 어떻게 이용하겠다는 건가? 네가 말한 사냥터지기 팀은 전력이 부족하다. 볼프강이라는 인간도 제대로 된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
볼프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더스트는 아자젤의 물음에 웃음으로 답했다.
"간단해. 볼프강은 선택을 위해서라면 포기할 줄도 알아. 자신을 선택해 아이들을 포기할까, 아니면 아이들을 선택해 자신을 포기할까?"
"그가 인간이라면, 내가 아는 인간이라면 두 가지 모두 선택해 지킬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잃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이다."
유니온 최상층부, 총장실.
더스트가 사라지고 홀로 총장실에 남아있는 유니온 총장, 전(前) 남극 연구소 '유니온'의 부소장. 총장은 가로로 기다란 책상에 앉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더스트의 말대로 차원종과 협력하는 클로저는 처단하라고 사냥터지기 팀에 명령했다. 맥스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에게도 위험한 정보를 퍼뜨리며 서지수를 이용했다. 2분대 아이들의 오류는 없어지게 했으나 코드를 파괴할 수 없게 되었다.
"후, 흐흐흐...... ."
총장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몇 명 죽이는 것으로 차원종을 몰살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난 네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
총장은 의자를 빙글 돌려 일어났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뒤쪽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손으로 벽을 쓸어내리자 벽이 투명해지면서 안쪽의 통로가 생겼다. 총장은 그 통로로 들어갔다.
아이들에게 주었던 차원종의 무기, 서지수의 혈액, 제이의 위상력 응집체, 그 외에 눈으로 볼 수 없이 망가진 클론들. 하얀 머리카락이 실험관 바닥에 뿌려져있는 것을 보아 서지수의 클론으로 추정되었다. 통로 안쪽으로 들어갈 때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클론들이 많아졌다. 상체만 멀쩡한 클론, 하체만 존재하는 클론, 세로로 반 갈라져있는 클론, 머리만 있는 클론 등등.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총장의 발걸음이 깊숙한 곳에서 멈췄다. 그는 왼쪽으로 돌았다.
기다란 은발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온다. 실험체를 나타내는 검은 복장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다. 다른 클론들과 달리 완벽한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총장은 꺼내두고 있던 손으로 실험관을 만졌다.
"서지수의 클론이 성공적으로 제작되었고, 합쳐지기 전의 애쉬와 더스트를 위협 가능한 힘까지. 하지만 이 상태로는 반복될 뿐이야."
총장은 뒤돌았다. 서지수의 클론 맞은편에는 실험관 안에 소형 실험관이 있었다. 총장은 실험관의 메뉴얼을 조작하며 실험관에서 소형 실험관을 꺼냈다. 어떤 액체가 들어있는 소형 실험관. 실험관 표면에 색이 있어 액체라는 것밖에 알 수 없다. 총장은 다시 서지수의 클론을 바라보았다.
"서지수는 각성할수록 그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지. 그녀 개인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곁에 있던 맥스의 영향일까."
총장은 주머니에 있던 손을 꺼내 클론이 들어있는 실험관의 메뉴얼을 건드렸다. 그가 들고 있는 소형 실험관이 들어갈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총장은 소형 실험관의 입구를 조금 열고, 구멍에 집어넣었다.
"순수한 맥스의 혈액을 클론이 견뎌낼 수 있을까?"
청록색 실험관이 짙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액체가 클론의 온 몸을 감싸자 클론이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온 몸에 연결되어 있던 호스를 뿌치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노란색 눈동자가 번쩍였다가, 줄어들었다가, 총장은 옆으로 돌았다.
"캬아아아아아!"
실험관에서 들려오던 비명이 점점 커지자 실험관 바깥에서 보이던 노란빛은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음?"
맥스가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재리의 최면 치료를 받기 위해 침대에 누우려고 망토를 벗던 맥스. 김재리는 맥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착각인 것 같다. 다시 하지."
맥스는 침대에 누웠다. 김재리는 맥스의 기다란 신장을 보고 굉장하다고 감탄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반지가 걸린 목걸이를 꺼내들며 말했다.
"멍한 상태를 유지해주세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좋으니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가능하시겠어요?"
"노력해보도록 하지."
"좋아요. 그럼 시작할게요."
맥스가 최면 치료를 받는 동안 볼프강과 루나, 소마는 사냥터지기 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흑지수는 검사를 받기 위해 연구실로 돌아간 상태다. 빅터는 여전히 루나와 소마 사이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볼프강은 검은책이 반응하지 않는 차원종인 빅터를 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루나와 소마에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빅터."
"뭐지?"
"고맙다."
"진심이군."
"진심이지. 덕분에 내가 편해졌으니까."
빅터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루나와 소마를 보곤 사람처럼 낄낄 웃는 시늉을 했다.
"넌 참 좋은 스승 같다, 볼프강. 루나는 널 믿고 따르며, 소마에겐 그 어떤 사람보다 편한 존재지. 정말 대단해."
"됐어. 난 아직 아이들을 완전히 책임지지 못해. 스승이라고 해봤자 상부의 명령이면 같은 동료로 따를 수밖에 없어."
"걱정 마라. 나도 도와줄 테니...... ."
소마는 빅터를 툭툭 밀며 말했다.
"뭘 도와줘. 넌 집이나 지키고 있어. 너도 그게 좋다며?"
"에이, 소마. 빅터도 은근 잘 싸워."
"나, 난 이 발등닦이보다, 아니 비교도 안 되게 잘 싸우는데!"
"헤, 예전에 도움 받았다면서? 조금만 사이 좋게 지내봐.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
소마는 입을 쭉 내밀었고, 빅터는 소마의 곁으로 가서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볼프강은 두 아이들을 바라보며 예전에 김재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아이들은 거부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강제로 조종이라도 한다는 거야?"
"...... 네. 볼프. 아이들에게는 코드라는 게 존재해요. 그 코드를 발동할 경우 명령권자의 어떠한 명령이라도 수행해요. 자신의 몸이...... 망가져도 말이에요.'
김재리는 볼프강의 양손을 붙잡았다.
'볼프, 부탁이에요. 부디 이 코드를 발동시키지 말아줘요. 제가, 제가 어떻게든 코드를 해제시킬 방법을 찾아볼게요.'
'...... 그럼, 내가 어디까지 책임져야하지?'
'모르겠어요...... .'
'재리. 나도 사람은 죽일 수 없어. 그것도 클로저는 더더욱. 사람을 구하는 게 클로저라며? 같은 클로저를 죽이는 건, 그게 사람이야? 그래, 양보해서, 몇 번이라도 양보해서 차원종과 협력하는 클로저가 있다고 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들이 정말 사람들을 배신한 건지, 모두 따져보고...... .'
'정말 배신했다면 어쩌죠?'
'...... 난 더 이상 같은 클로저를 잃을 수 없어.'
루나와 소마와 함께 놀던 빅터는 코를 킁킁거리며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호기심이 많은 소마는 얼른 빅터 곁으로 가서 말했다.
"발등닦이. 왜 그래?"
"냄새가 난다. 저번에도 맡았던 냄새야. 그때는 유사한 냄새가 둘이었지만 이번엔 하나다."
볼프강도 느꼈다. 빅터가 바라보고 있는 곳, 사냥터지기 성의 입구로 들어오고 있는 한 존재. 압도적인 위상력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볼프강은 이러한 위상력을 어떤 유명한 사람에게서 느껴본 적 있다. 바로 서지수. 예전에 독일에서 봤던 모습과 동일한 복장이었다. 머리를 뒤로 묶고 있고, 건블레이드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모습. 볼프강은 서지수가 다시 왔다고 생각하며 먼저 달려갔다.
펄럭, 펄럭!
성으로 들어오는 서지수에게 다가갈수록 그의 검은책이 뒤틀리면서 펼쳐졌다. 책에서는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과거, 맥스와 책이공명할 때는 펼쳐지긴 했지만 붉은빛은 나오지 않았다. 볼프강은 더욱 과거로 돌아갔다. 사람에게, 인간에게 검은책이 반응했던 적을 떠올렸다. 메리. 전 오퍼레이터, 메리.
"여전히 건강해보이네. 후배."
서지수는 웃으면서 볼프강을 맞이했다. 볼프강은 뒤틀리는 책을 움켜잡으며 막았지만 빛이 새어나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서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보다 노랗게 빛났다. 볼프강은 애써 웃어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선배? 저번에도 오시지 않았어요?"
"아, 그렇지. 저번에 왔을 때 선배, 교관을 뵙지 못했으니까. 지금 어디 계셔?"
"네, 지금 저쪽 의료실에서...... ."
"피해라, 볼프강!"
볼프강이 몸을 반쯤 돌려 기지를 가리키자, 빅터가 달려들며 볼프강을 보호했다. 서지수는 볼프강의 손까지 날려버릴 생각으로 건블레이드를 움켜잡으며 위상력을 발사했다.
콰콰콰쾅!
볼프강은 빅터의 박치기로 엎어지며 손을 잃지 않았다. 서지수가 발사한 위상력 때문에 볼프강이 가리킨 기지 근처가 박살났다. 베를린지부 바깥에서 발사했다면 막혔겠지만 이미 성에 들어온 그녀가 발사한 위상력은 보호막으로 막을 수 없었다.
볼프강은 고개를 들었다.
서지수의 눈은 무엇보다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