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하 & 볼프강] 회색빛

루이벨라 2018-03-07 10

* 키라프리 47화를 보다가 생각나버린 소재
* 제목에 [이세하 & 볼프강] 이라 쓴 이유는 두 사람이 중심인물이기 때문(이 소설의 주인공이 둘 중 한 사람이라는 무조건적인 법은 없습니다. 그건 독자님들 생각에 따라 편히 생각하시면 됩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건 회색빛의 하늘과 그에 걸맞게 먼지로 뒤덮인 도시였던 장소뿐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니 진즉에 그러기 위해 철저히 파괴된 도시이다.

 검끝을 바닥에 끌리게 한 다음 작은 원을 그린다. 그건 그렇고, 다음 타자는 어디로 할까나...



* * *



 "휴, 얼마만에 오는 신서울인지..."
 "날씨가 아주 맑네요."

 리버스 휠에서 내린 볼프강과 루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고 있었다. 소마는 그 둘보다 먼저 내려서 해맑게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소마를 루나가 핀잔한다.

 "소마, 우리는 임무로 왔다는 거 몰라? 놀러온 게 아니라고."
 "그치만, 그치만! 이렇~게 좋은 날씨를 보는 건 되게 오랜만이라고!"
 "그야 그렇지만..."

 루나는 힐끗 볼프강 쪽으로 시선을 겨누어 반응을 살피었다. 볼프강이 서운하다라는 기색을 엿보일까 심히 눈치스러운 표정이다. 다행히도 볼프강은 소마의 말에 약간 동의했다.

 "소마 말이 맞은걸. 이리 푸른 색의 하늘을 보는 건 오랜만이지. 일 때문이 아니라 휴가로 왔으면 더 좋았을걸..."
 "선생님..."
 "루나, 그렇지 않니? 유럽의 그 우중충한 하늘보다 훨씬 보기 좋잖니?"
 "그건...그러네요."

 루나도 수긍하고 있었다. 리버스 휠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것은 푸른 초여름의 한국 하늘이었다. 재리의 말대로라면 한국의 하늘이 가장 예쁜 건 가을이라는데, 지금 이 세 사람에게 지금 한국의 하늘은 그 어떤 하늘보다도 참 아름다웠다.

 볼프강의 말처럼 이곳을 '일' 때문에 온 것이 참 아쉬울 따름이었다.

 볼프강은 리버스 휠이 정착한, 공원으로 추정되는 잔디밭 위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한치의 그을림이 없다. 티없이 맑고 깨끗하다. 자신들이 휠을 타고 여러 곳을 전전했던 유럽의 아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볼프강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신서울은 한창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한창 전쟁터나 다름 없는 곳을 다니다 이 곳에 온 자신들이 이질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늘어져 있는 도시였다.

 "사냥터지기 팀 맞으시죠?"

 딱딱한 의무적인 느낌의 어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기억 속에서 들어본 목소리였다. 볼프강은 자신들을 부르는 그 여성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분홍색의 머리를 단정히 묶은 여성이 깔끔한 사복 차림으로 자신들 앞에 서 있었다. 요원복을 입지 않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기억 때문에 볼프강은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볼프강은 그녀 또한 자신들을 알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앞서 물은 질문의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내었다.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 요원이시군."
 "그 호칭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사냥터지기 팀의 볼프강 슈나이더 요원님."

 그리고 이상한 침묵. 그리 좋은 첫만남으로 만난 사이는 아니기에 이런 인사치레는 참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의가 아닌 타의라는 점을 알고는 있지만, 그런 강렬한 첫인상은 잊혀지기 어려운 것이리라.

 "오랜만, 이라...그 뜻은..."
 "모르셨군요. 검은양 팀은 이미 오래전에 해산되었습니다."

 아아...'그 사건' 때문이로군. 검은양을 발음하는 이슬비의 목소리에서는 침통함까지 느껴졌다. 그로 인해 볼프강과 루나는 이슬비를 비롯한 검은양 팀원들이 유니온에게 매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놈의 유니온은, 언제나 그렇지...이슬비가 유니온의 일인데도 깔끔한 사복으로 나온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난 이슬비 요원이 우리의 안내를 맡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도 의외에요. 유니온 상부에 그렇게 고운 눈으로 비추어본 기억은 없는데 말이죠."
 "언제나,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군."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오히려 이슬비는 볼프강이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굳세진 느낌이었다. 마냥 좌절만은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슬비의 그런 점을 볼프강은 후하게 점수를 매기기도 했다.

 이슬비는 헛기침을 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갔군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냥터지기 팀 여러분이 이 신서울에 머무는 동안 제가 임시 관리요원이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몇 가지 사항들을 알려드리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뭐...한강에서 맥주 하나 마시는 것도 금지시키려는 건가?"
 "그건 당연히 금지할 일이죠. 여러분들은 어디까지나 지금 '임무' 를 위해 신서울에 오신거니까요."

 이슬비가 단단히 못을 박았다. 아아 그럼 그렇지...좀 상쾌한 기분이 나는 곳으로 와봐도 유니온은 언제나 일을 막대하게 시킨다.

 빨리 이 직장을 집어치워야하는데...볼프강은 중얼거렸다.



* * *



 점은 생각보다 느리게 쳐졌다. 평소라면 바로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곤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애꿎은 검만 땅에 툭툭 건드려본다.

 "이 근처에 있는 곳들은 이미 다, 부숴버려서 그럴걸?"
 "..."
 "그래, 어쩔 수 없지. 이제 '그곳' 으로 가는 수 밖에!"

 옆에 있는 자의 희롱에도 무시할 뿐. 계속 가늠해**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저 말대로였다. 이 근처에 있는 건 이미 다 부수어서, 흔적도 없이 부수어서 좀 더 먼 곳을 봐야했다.

 '그곳' 으로 가야하나. 그런 마음이 살짝 들었을 뿐인데 온몸이 거부를 하듯, 그렇기 싫다며 반항을 하듯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한숨 섞인 목소리가 옆에서 다시 들린다.

 "망설이는 거야?"

 망설임...잘 모르겠다.



* * *



 "저곳이 한강입니다. 한강에서 바라보는 저녁놀은 참 아름답습니다. 언젠가 꼭 한번 보셨으면 싶으네요."
 "그럼 적어도 쉬는 시간을 주던가."
 "노력은 해볼게요."
 "결국은 안 주려나보군..."

 신서울에서 2일차. 제대로 된 바깥 구경은 해** 못했다. 볼프강의 투덜거림에도 이슬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역시 대단한 인재이다. 유니온에 반(反)했다는 명목으로 이곳에서 가만히만 있기에는 아까운 클로저였다. 볼프강은 자신은 사람 보는 눈썰미 하나는 있다고 자신하고 있고, 그가 내리는 사람됨 평가는 거의 쪽집게 수준이었으니 이런 자부심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볼프강의 불평이 계속 듣기에는 언짢았는지 이슬비는 결국 최선의 타협선을 내놓았다.

 "정 그렇다면 저녁 시간 내의 잠깐의 산책 정도는 허락해드리죠."
 "1시간?"
 "그 1시간 내에 모든 걸 다 끝내신다면요."

 1시간. 그 정도면 기분 전환 정도는 가능하겠다. 이슬비의 말처럼 한강에서 지는 노을이나 볼까나. 사실 신서울에 온 이틀 동안 볼프강은 태양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먼지투성이의 유럽 전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것 같네."
 "겉보기에는요."

 지옥 같은 유럽과 전혀 반대되는 느긋한 평화라 다들 긴장이 풀리다 못해 현재 차원종들과 인류가 팽팽한 대치 상황임을 여기 사람들은 잊고 지내는 듯 했다. 위험? 지금 신서울에는 그따위것 없었다. 그저 행복한 라이프를 즐기는 사람들만이 있었다.

 "이슬비 요원."
 "왜 그러시죠."
 "당신 말고도...일 하고 있는거야? 그...검은양 팀이었던 사람들은."
 "...다 알고 오셨을텐데요. 요원님의 오퍼레이터가 간단한 상황 설명은 했을텐데요."

 그래, 들었다. 하지만 제3자의 눈과 당사자의 입장은 다른 법이었다.

 앨리스가 신서울에서의 임무 수행에는 대체적으로 임시로 임명된 관리요원의 명(命)이 최우선적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 사건' 에 대해서도 간단한 코멘트를 했다.

 몇년 전, 검은양 팀과 그 산하의 늑대개 팀은 어느 작전에 투입되었다. 어느 차원종인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고위급 차원종의 섬멸 작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실종자는 있었다.

 이슬비가 그 이후로 클로저를 그만둔 이유도 유니온의 압박도 있었지만, 그 사고로 인해 오른쪽 다리를 다쳤고 그 후유증에 고생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볼프강은 다리를 약간 절며 걸었던 이슬비를 생각하며 쓴 웃음을 보였다.

 "그럼 굳이 돌려말하지 않겠어. 실종된 클로저는 누구지?"

 목적은 저것이었나. 이슬비는 잠시 볼프강 쪽을 째려보았다.

 "누가 시킨건가요?"
 "오해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그냥 이건 내 순수한 호기심이라서."
 "..."
 "내가 한 가지 더 추리해**. 그 섬멸하라고 했던 차원종...더스트였지?"

 이슬비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역시 그랬다.

 "더스트한텐 개인적으로 좋은 인연도 있어서 말이야. 난 계속 더스트를 쫓고 있어. 그런데...유니온 상부에서는 내가 더스트와 엮이는 걸 상당히 꺼려하는 눈치야. 그러던 중 더스트 섬멸 작전에서, 처음부터 담당했던 우리를 대신해서 너희 검은양 팀이 나갔지."
 "..."

그리고 사건은 일어났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가르쳐 줘. 난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 실종된 클로저는 누구지?"
 "그게 더스트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죠?"

 이슬비의 적절한 핑계였다.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실종된 클로저, 그 사람이 더스트랑 꼭 같이 있는 법도 없고 애초에 생사 여부마저도 확실치 않다.

 볼프강은 이슬비가 '그 클로저' 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볼프강이 대놓고 말했다.

 "혹시 나한테 숨기고 싶은거야?"
 "숨길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슬비는 들고 있던 스크린을 몇 개 톡톡 건드리며 반문했다. 볼프강은 이슬비가 거짓말을 하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슬비가 보여준 페이지는 여느 클로저의 정보 페이지였다. 하지만 그 클로저에 대한 건 이제 잊으라는 듯, 원래부터 이 세상에 그 클로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자료의 손상이 심했다. 노이즈가 낀 거 같았다. 그나마 눈에 잡히는 건 요원 프로필 사진에 희미하게 보이는 턱선이었다.

 저 얼굴선을 본 적이 있는 거 같다고 볼프강은 생각했다.

 "고위관료도 아닌 제 신분으로 이리 자료를 훼손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도 그렇군...유니온의 상부가 한 짓인가?"
 "글쎄요...제가 상부라면 오히려 이 페이지 자체를 없앴겠죠."

 이슬비의 말도 그럴 듯 하다. 하긴 아예 증거 박멸이 유니온의 주특기였다. 이리 허접하게 수채화 그림에 물을 엎지르는 식의 일처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노이즈를 형성시켰는가.

 "제가 보기엔..."
 "...?"
 "원하지 않는 거 같아요."

 '그 아이' 는 남겨지는 걸 원치 않나봐요...이슬비의 말은 침통하기 그지 없었다.



* * *



 끝으로 살짝씩 장난만 치던 검을 일부러 세게 지면에 내리 찍었다. 앞에서 비교하던 장난질에 비해 세게 내리쳤을 뿐, 강도는 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냥 칼이 꽂혀진 지면이 살짝 파였을 뿐이다.

 옆에서 계속 붙어다니던 자가 말했다.

 "마음을 잡았구나."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꺄하! 그래도 좀 섭섭한 걸...온 지구가 이리 먼지투성이인 것도 그리 보기 좋지는 않단 말이지? 몇몇 도시는 안전지대로 놔두어도 될 거 같은데."
 "너한테 그런 자비로움따위 없던 거 같은데."
 "어머, 너무 국어책 읽기 톤이었나?"

 희롱하는 자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 때 객관적으로 가장 이쁘게 나오는지 아는 듯 했다. 방금 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 한군데는 텅 비어버리게 만들어도 나쁘지 않을거 같아."

 비어있다는 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 밑 빠진 독에 무언가가 채워질리가 없다.

 '그곳' 마저도 없어진다면, 그 그릇에 계속 불필요하게 들어오는 무언가도 없어질 것이다. 작은 감정에도 요동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고요-

 "그래, 신서울 말이야!"

 더스트의 입에서 그 곳의 이름이 나왔다. 티끌만한 감정이 요동친다. 그리움? 후회? 아니 그것보다 더 부정적인 감정 짜투리 같다.

 다음 목적지는 신서울이다.



* * *



 '결국 얻어낸 건 없었군...'

 한강 노을이 잘 보인다는 어느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캔커피를 따 마시는 볼프강이었다. 저녁 무렵에 캔커피는 안 괜찮지 않나요? 싶지만 어차피 오늘 밤은 잠자기에 글렀다. 아메리카노도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다.

 '잊혀지기 원한다, 라...'

 쉽게 생각하면 쉽게 풀리고, 어렵게 생각하면 도저히 끝나지 않을 난제였다. 그런 류의 대사를 책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 몇 번 본 적 있으나 막 와닿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볼프강이 그런 류의 대사를 본 매체는 대체적으로 로맨스물이었기 때문이다. 닭살 돋는 건 싫어한다.

 '나도 이대로 잊혔으면 좋긴 하다만...'

 모든 사람이 아닌, 특정인에게만. 그래, 유니온한테는 제발 잊혀지면 좋겠다. 그럼 일도 안 들어오고 그 가고 싶은 휴가도 실컷 갈 수도 있고...!

 "...나 왜 이러는거냐."

 비어버린 캔을 저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골인, 명중이다.

 더스트에게 빚이 있어서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고 싶었는데 상부는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예 더스트에 관한 정보도 일순간 끊었다. 이곳 신서울에 온 것도 휴가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는 했지만 최근에 더스트를 접촉했던 검은양 팀의 리더로부터 더스트의 행방을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에 대한 소득은 최악이었다.

 무반응, 회피, 그리고 여기서마저도 장애 요소가 만만치 않다.

 하늘을 보니 서서히 끝부분이 자주빛으로 물들어간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볼프강은 이슬비에게 사과를 해야했다. 굉장히 무례했다. 그리고 실종자를 물어본 것도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그냥 그 때의 직감이, 어서 캐물어! 라고 했다. 이런 어린애 같은 변명은 변명도 아니니 그냥 집어치우기로 했다.

 땅거미가 꺼지는 장면을 보러 온 사람은 볼프강 말고도 제법 있었다. 같이 따라온 루나와 소마는 다른 곳에서 본다며 볼프강과 잠시 떨어져있는 상태였다. 자신들과 같은 외국인 말고도 한국인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여드는 사람을 구경하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인파를 보고 있는데, 컴퓨터 시뮬레이션 같은 게 아닌데 노이즈가 낀 것처럼 보였다. 피곤한가. 그렇다고 하기엔 정신은 너무 말짱했다.

 눈을 몇번이나 비볐지만 특정 부분에서 노이즈는 계속 잡혔다. 볼프강은 처음 이곳으로 온 목적은 까맣게 잊은 채 그 노이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해는 기어이 저물었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따로 노을을 보러 갔던 루나와 소마도 돌아왔다.

 "쌤~ 저희 왔으니 그만 가요."
 "..."
 "쌤?"
 "너희, 잠시만 여기 있어봐."

 어리둥절해하는 제자들을 두고 볼프강은 황급히 어디론가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까부터 지지직거리는 저 기분 나쁜 형체에! 볼프강은 그 물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과는 달리 무언가가 잡혔다. 그리고 잡힌 것이 사람의 팔이라는 부분에서 더 당혹스러웠다. 여름용 후드가 달린 자켓을 깊숙히 쓰고 있는 어느 소년으로 보이는 자의 팔이 볼프강에게 잡혔다.

 침묵- 후드를 써서인지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상대방도 볼프강만큼 당황한 거 같았다.

 "...저기?"
 "너...뭐야?"
 "무슨 소리를."

 검은 책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긴장감을 푼 볼프강은 여전히 팔을 잡은 채 다시 물었다.

 "넌 뭐냐고?"
 "내가...보여? 그리고 잡혀?"

 실소로 들리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섬뜩했다. 잡혀? 이 부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운 건 물론이고 꽤나 즐거워하고 있는 듯 했다.

 잠깐만, 저 뒤틀린 입술꼬리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소년(으로 추정되는 이)은 볼프강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역시 그랬구나, 라는 표정이었다.

 "아아...지독한 내가 나는군. 하얀 거에 타버린 지독한 내라..."
 "어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거 실례이지 않나?"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처음 보는 사람 팔 이리 잡는 건 실례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넌 '인간' 이 아니잖아."

 볼프강은 검은 책을 다시 보았다. 책장은 아직도 넘겨지지 않았다. 악의는 없다는 건가?

 소년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둘다 대략적으로는 눈치 챘나 보군."
 "너...여기는 왜 온 거지? 차원종이 침략하기에 앞서 미리 보낸 첩자인가?"
 "난 개인적인 일로 왔다고."

 짜증나다 못해 억울하다는 목소리이다. 개인적인 일? 차원종이 무슨 개인적인 일? 신서울, 인간형 차원종의 접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볼프강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은 책을 손에 그러쥐었다.

 "좋은 추억 여행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닌거 같다만."
 "..."
 "더스트가 보내서 온건가?"

 살기. 독사와도 같은 살기. 소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나보군."
 "바른데로 말해."
 "하얀 것과 검은 것...공존은 안 되는 것이여야 하는데."

 소년은 볼프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얀 거? 이 특수요원복 때문인가? 검은 거? 이 책의 표지 색 때문인가?

 "본래라면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공존이었는데."
 "너 이 책에 대해 아는 거야?"
 "내 질문은 그게 아니라고, 클로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흑과 백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려고 하지. 그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검지도 않고 하얗지도 않은 자들은...도대체 불리우는걸까?"

 여기도 참 골치 아픈 비유법을 쓰는 자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인간, 후자의 경우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 차이가 있지만.

 볼프강이 아무 대답 없자 소년은 자문자답했다.

 "회색이야."
 "..."
 "그리 쉬운 것도 모르나? 검은색과 흰색을 섞으면 회색."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볼프강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방금 전 회색, 이라는 답을 내놓으며 한번 큰 동작을 한 소년의 후드 안으로 얼굴 윤곽선이 살짝 보였다. 자세히 본 게 아닌 노이즈가 낀 느낌이었지만 그로 인해 볼프강은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의 차원종은 인류를 '인간'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소년은 '사람' 이라는 표현도 썼다!

 무언가 켕기던 것이 확신이 되었다.

 "너...'인간' 이었지?"
 "..."

 소년의 침묵. 하지만 볼프강은 그 침묵이 소년이 긍정적인 대답을 보인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말한 회색이라는 거...널 의미하는 거였지?!"
 "..."
 "좀 더 정확히 말해볼까? 넌 검은양 팀 소속이었고 실종 처리..."
 "...입 좀 **줄래?"

 소년이 고개를 쳐올렸다. 순간 자주빛 섬광과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 순간 소년은 소름끼치게 웃어제꼈다.

 조소. 소년은 자신을 실컷 비웃었다. 웃음기 머금으며 이런 찬사를 내뱉는 걸 보면!

 "사실 세상은 회색빛과 검은 빛밖에 없어. 하얀빛 따위는 없어."
 "...너."

 소년은 다시 수수께끼를 꺼냈다.

 "한 가지 더 문제를 내볼게. 불에 타고 남으면 뭐가 남지?"
 "재(灰)..."
 "그래, 재만 남지. 잿빛이지. 회(灰)색빛이지."

 무언가 불사르고 남는 건 재. 격렬한 감정 뒤에 남는 것은 상실. 상실을 파보면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버렸다.

 "난 이제 감정을 담을 수 없게 되었어. 그런데,"
 "..."
 "자꾸 티끌이 날 사로잡아. 그걸 버틸 수 없어. 난 텅 비어버렸거든. 조금만 무언가가 스며들어도..."

 버티지 못하고 으스러져버린다. 소년은 위태로웠다.

 "유럽의 전 하늘...모두 잿빛이지. 거기선 오히려 숨 쉬기가 편안했어. 근데 무언가가 자꾸 내 안에서 톡톡 떨어져. 모래 시계 모래알마냥...톡톡...이러다가 나..."

 망가져버릴거야...!!

 볼프강은 자신이 했던 억측이 다 맞아떨어짐을 알게 되면서 소름이 끼쳤다. 이 앞의 소년...인간인 시절의 이름은 뭐였을까. 소년은 모든 걸 재와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장본인이었다.

 자신과 너무도 똑같은 회색빛의 풍경을 좋아하는 자였다.

 "아까 신서울에 개인적인 일로 왔다고 했지?"

 소년의 주변으로 심상치 않은 오오라가 뿜어져 나온다. 이때까지는 무반응이었던 검은 책의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소년 주변을 감싸고 있는 바람의 영향만은 아니었다.

 악의다. 회색빛이 아닌 오히려 검은빛에 가까운 악의.

 바람이 잦아들자 그 틈으로 소년이 보였다. 흔한 외출복에서 용의 비늘과도 같은 갑주를 촘촘히 입은, 그리고 언제 꺼냈는지 모르는 검을 한 손에 쥐고서,

 "자--!!"

클로저 볼프강 슈나이더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일할 시간이다, 클로저."





[작가의 말]

열린 결말.
2024-10-24 23:18:5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