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틸테인 단편] 백일몽
미스터태인 2015-02-13 4
꿈을 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어떤 물건도, 심지어 내 몸조차 보이지 않는다.
춥다. 나는 팔뚝을 부여잡고 웅크리고 싶지만, 몸에 감각이 없다. 내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아니, 내가 지금 존재하고는 있는 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춥다.
눈을 뜬다.
작전 대기실에서 깜빡 잠들었나보다. 잠이 덜 깬 채로 주위를 더듬는다. 미스틸이 어디로 간 거지? 분명 책상에 기대놓았던 미스틸이 만져지지 않는다. 마른 세수를 하고 고개를 든다. 세하 형이 미스틸을 멋대로 손에 쥐고 있다.
"손 대지 마요!"
미스틸을 빼앗아, 등 뒤로 감춘다. 세하 형은 어색하게 웃는다.
"아니, 되게 무거워보이는데 용케 잘 휘두르고 다니네, 싶어서."
"……."
"…미안."
세하 형은 형이 항상 앉던 자리로 돌아가서 게임기를 켠다. 대기실은 게임기 버튼이 툭, 투둑 눌리는 소리로 가득 찬다. 나는 미스틸을 껴안는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 미스틸을 껴안고 5초를 세면, 신기하게도 누군가가 위로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형, 미안해요. 과민반응 해버렸다. 이상한 꿈을 꿔서……"
대답은 없다. 뭐, 됐다. 분명, 연장자에게 소리친 건 잘못한 일이지만, 나는 사과를 했고, 이 일에 계속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나는 미스틸을 다시 책상에 기대어두고, 가방에서 노트와 샤프를 꺼낸다. 무언가를 그릴까. 노트를 펼치고 샤프를 쥐었지만 딱히 그릴만한 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형은 게임기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말한다.
"무슨 꿈을 꿨는데?"
꿈을 꾸었다.
내 주위는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이 널부러져있다. 피. 팔과 다리.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얼굴, 아니, 고통스러워 한 채 끝나버린 얼굴. 아니,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형 차원종이었고, 내가 그들을 죽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할아버지들이 박수를 친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사명을 다했다. 우렁찬 박수소리, 그 가운데 한 할아버지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할아버지?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보고 있나요? 제가 자랑스럽지 않나요? 제가 무언가를 잘못했나요? 할아버지. 이제는 없는 할아버지.
"기억나지 않아요."
흐응. 형은 다시 게임에 열중한다. 형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언뜻 보면 무표정이지만,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게임이 유리하게 돌아갈 때는 입가가 꿈틀꿈틀 올라간다. 다시 불리해질 때는 올라가던 입가가 푹 내려가고, 미간이 좁아진다. 신기하다.
"형은 게임이 재밌어요?"
"그렇지. 재밌으니까 하는 거지."
"하지만, 게임이 끝나면, 아무 것도 없잖아요. 아무런 의미도 없잖아요."
지우개를 꺼낸다. 노트에 그려진 낙서들 위로 문지른다. 지우개 때가 노트 위에 남는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무서워요."
지우개 때를 노트 밖으로 털어낸다. 무언가를 그리고 싶다. 하지만 그릴만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형은 게임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꼭 모든 것에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
나는 요즘 많은 꿈을 꾸고, 많은 꿈을 잊어버린다. 어느 꿈 속에서는, 얼굴이 뿌연 할아버지가 나를 품에 안았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죽이지 않아도 괜찮다.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아도 괜찮다. 할아버지의 말은 이상했지만, 따뜻했다.
"생산적인 걸 하라.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라. 요즘 다들 시끄럽잖아? 근데 난 이렇게 생각해. 의미가 없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뭐, 하나도 남는 게 없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 즐거웠음 장땡 아냐? 끄악. ……봐. 비록 지금 게임오버 됐지만, 플레이하는 동안은 재밌었으니까 괜찮아."
형은 게임오버 화면을 내게 보여주며 웃었다. 아, 그리고 싶은 게 생겼다.
"형."
"왜, 감동했냐?"
"오글거려요."
"……."
"괜찮아요. 별빛에 잠겨랏★! 부터 알아봤어요."
"남의 흑역사가지고 그러지 말자."
꿈을 꾸었다. 세하 형이랑, 슬비 누나랑, 유리 누나랑, 제이 아저씨랑, 유정 아줌……누나랑, 다같이 소풍을 간다. 평범하게 도시락을 까고, 평범하게 웃고 떠든다. 저기 할아버지가 걸어온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아마 웃고 계실 것이다.
"잘 그렸네."
형은 내 노트를 흘긋 보더니 다시 게임 속으로 빠져든다. 다시 대기실은 게임기 버튼 누르는 소리로 가득 찬다. 나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같은 대사를 떠올리며 또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