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주황 장미(SAD)
루이벨라 2018-02-03 14
※ 주황 장미 = 수줍음, 첫사랑의 고백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어느 날 갑자기 알아버렸다. 그 기분을 아는가. 손가락에 난 작은 스친 상처는 자각하고 나면 더 아프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그랬다. 난 이 사람이 너무도 좋은데, 갑자기 좋은 티를 확 내면 그게 또 이상하지 않을까! 하는 참 어이없고도 행복한 고민도 막 하고...
나 같은 경우도 어느 날 갑자기 내 감정을 뉘우친 쪽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짝사랑이 아니었고, 내가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참 행운인 일이었다.
이런 참 럭키한 상황이었는데도 우리는 서로 삽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딱 그거였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그런 상황에서 찾아간 후 대놓고 ‘너, 사실은 나 좋아하고 있지?’ 라고 묻는 것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둘 중 누구 한 명은 그런 눈치 없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도 꾸밈없는 내가 더 용기를 내야 한다고도 결심했다. 그 아이는 보기와는 다르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하나하나 조심스러웠고, 자신이 먼저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는 걸 꺼려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 러브코미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네! 라며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말한다. 낭만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볼 때마다 수줍어서 불과 1초라는 짧은 시간동안 얼굴을 못 마주치는 것.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건강 하나 자신 있는 내가 사실은 아픈 게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 그 분위기가 다일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남는 건 없었다.
내가 말을 꺼내려고 하면 기가 막히게 고양이가 미야옹거리며 앞을 지나가거나, 유정 언니나 슬비가 우리를 부른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제이 아저씨가 불쑥 나타난다거나 등등...끊임없이 방해 요소는 곳곳에서 등장했다. 이제는 내가 언제 이 말을 할 수는 있는지에 대한 걱정을 먼저 하기 시작했다. 고백하고서 차이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 고백이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건 참 우습지 않은가.
우리는 둘 다 수줍었고, 이런 관계에 대해 참 간질거리면서도 껄끄러워했던 거 같다. 살짝 손이라도 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내가 더 부담스러워질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라던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가야하는 거라던가...답답한 면목은 많았다. 아예 대놓고 슬비가 ‘고백은 언제?’ 라고 나에게 말했다면 아마 우리 뿐 아니라 주변인들도 답답했나 보다.
아예 나중에 가서는 고백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이제 떠먹으면 되는데 이상하게 나나, 내가 아니면 세하가 그 자리를 박차가 떠났다. 그냥 쉬운 말인데 그게 정 입에서 안 떨어진다. 이젠 우리는 물론 주변인들도 포기에 이른 상태. 혹시 감정의 질이 떨어진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님. 세하가 나를 보면 귀까지 빨개지는 건 3년 전이든, 3년 후이든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먼저 식은 것이 아닌가? 그것도 아니다. 그냥 우리는 죽어라 타이밍을 못 맞추고, 예상외의 사태가 들이닥칠 까봐 두려워하는 겁쟁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상외라는 건...
-있잖아, 서유리.
-응?
-...나, 신서울 떠나게 되었어.
-...뭐?!
...이런 거 말고 다른 예시가 있다고! 어랏...근데 이런 게 현실로 일어났다!
* * *
세하가 정확하게 발령받은 곳은 모른다. 사람들이 많이 죽는 곳이래, 라는 말로 미루어봐서는 몸 성하게 돌아올 곳은 아닌 거 같다.
-언제 돌아와?
-글세...그것도 공문이 내려와야 알겠지?
-헤어지는 거네.
내가 말하고도 어감이 이상해서 잠시 멈칫했다. 헤어지다니...실제로 사귄 적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쉽게 해도 되는 거야?
-뭐, 인생 우리네 뜻대로 되진 않으니까.
-너 그렇게 말하니까 애늙은이 같아.
-애는 아니야. 성인이잖아.
아, 그렇다. 얼마 전에 세하는 만 21살이 되었다. 나보다 생일이 한 달 정도 느려서 동생이다! 하면서 골려먹는 재미는 있었는데, 그런 기간은 딱 한 달 뿐이구나.
-몸 건강히 챙겨.
-알았어.
-너무 무모하게 다니지 말고.
-너, 꼭 엄마 같다.
또래 친구에게 엄마라니! 그런 심한 말이 어딨어! 그렇게 한껏 두들겨 패고서 마지막에 한 말은 눈물 젖은 ‘빨리 와야 해.’ 였다. 그 때는 나 참 추하다,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슬비가 한 상자를 영차, 하며 가지고 온다. 먼지가 쌓인 윗부분을 털어내니 우리나라는 분명 아닌 주소지가 쓰여져 있었다.
“유리야, 이거...”
“...이게 그 물건이야?”
“응...근데 이거 우리가 받아도 괜찮을까?”
“아주머니는 지금 여기에 안 계시잖아. 우리가 잠시 맡는 수밖에 없지.”
이 상자는 그 아이의 마지막 물품이었다. 아이를 그 후로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 달 전, 그 비보를 들은 게 그 아이에 대한 전부였다.
바보, 빨리 온다면서 이렇게 빨리 오는 법이 어디 있니.
상자를 열어보았다. 아주머니께서 그 정도는 허락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주머니는 우리에게도 그 아이와의 이별 시간을 선물해주셨다. 그 아이의 온기는 이제 이렇게나마나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흙먼지 속에 있었으면 물품들이 다 하나같이 먼지가 옅게 보호막 생성되어 있듯이 배송되어 왔다. 어느 틈엔가 좁은 동아리방 안은 먼지가 둥실둥실 떠다니게 되었다. 슬비가 콜록거리며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한다.
‘책이 많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이제 보니 일종의 무언가를 기록하는 보고서 책이었다. 이거 기밀 아니야? 라고 하지만 보고서로 쓰였던 부분은 이미 상부에서 다 회수해갔는지 찢긴 자국만 거칠게 남아 있었다.
벌써 저녁놀. 슬비는 먼저 가버리고 동아리방 안에는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처음 그 비보를 접했을 때 우리 모두는 울었다. 나도 울었다. 하지만 난 조금 애매한 감정이었다. 난 어떤 사람의 부재를 슬퍼하는 걸까. 동료? 연인? 그 둘 다 아니다. 그나마 가까운 표현은 ‘좋아하는 사람의 부재’ 였다. 왜 과거형이 아니냐면 지금도 좋아하니까? 그 아이는 이미 과거형이 되었는데 나 혼자 진행형이라니 참 이상하다.
상자 속 물품 중에 유독 얇은 공책이 있었다. 일기장이었다. 남의 일기장 훔쳐보는 건 취미가 아니었지만 이건 훔쳐보는 것과 다른 의미가 아닌가? 유품 정리야, 유품 정리. 응응, 그런 거야.
애써 자기 부정을 해가며 한 줄 한 줄 읽는데 별 내용은 없었다. 그냥 오늘 날씨는 이렇다, 오늘은 이런 일을 했다, 신서울이 그립다 등등. 전쟁터에 내팽겨진 한 젊은 병사의 짧은 일기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더 읽어봤자 울적해질 거 같아서 책을 일부러 요란스럽게 닫는데 공책 사이로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오며 떨어졌다. 얇게 코팅된 종이, 일명 책갈피였다. 책갈피 안에는 주황색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아아, 생각났다.
그 비보를 듣던 날, 난 바로 동아리방을 뛰쳐나와 나와 그 아이가 자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강변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강변에다가 주황색 장미 한 송이를 흘러 보냈다. 일종의 안녕이었다. 그 장미는 너를 향한 내 진심이기도 했다. 그걸 이 강을 따라 가면 네가 어느 틈엔가 낚아채서 그 향을 맡으며, 여행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해도 산 자인 내 눈에는 보이진 않겠지만.
그 때도 지금과 같이 저녁놀이 예쁜 오렌지빛이었다.
이 책갈피는 그 때의 향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평면 위에 그냥 2차원으로 그린 그림인데 왜 향긋한 향기가 나는 거 같지. 나는 책갈피를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는 나지 않았다.
장미 그림 뒤쪽에는 무슨 문구가 써 있었다. 누구 글씨체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일기장과 똑같은 필체였다. 한번 소리 내어 읽어봤다.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좋아한다.
“응, 나도 좋아했어. 아니, 지금도 좋아해.”
책갈피를 소중히 그러쥐었다. 한동안 그러다가 난 책갈피를 원래 있던 일기장에 고이 끼워두었다. 그리고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뒷정리를 다 한 후, 동아리방의 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간다. 어두운 동아리방은 창문 너머로 비치는 노을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오래된 선물용 상자에 주황색 장미 한 송이를 넣었다. 싱싱한 장미는 절대 시들 거 같지 않다. 조심스레 상자의 뚜껑을 닫고 리본으로 정성스레 포장했다. 그리고 강에 흘려보냈다.
너에게 꼭 전해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