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이슬비가 이세하와 함께 행사장을 가는 이야기 3

에토포시드 2018-01-14 6

이세하와 이슬비가 행사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이슬비에게서 콘솔을 돌려받아 윗옷 안주머니에 소중히 집어넣은 이세하는 신세를 졌으니 밥이라도 사주겠다는 이슬비의 말에 그녀에 대한 작은 복수로 다소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한 이세하는 할 일이 없어지자 이슬비에게 한기남이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세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슬비는 서유리 관련 상품들이 가장 잘 나간다는 부분에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유리같은 애가 인기 있구나.”

“뭐?”

 

별 생각 없이 이야기하던 이세하는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이슬비의 뜬금없는 반응에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이세하가 보던 그의 리더의 모습과는 신강고와 유니온 본부만큼이나 거리가 먼 반응이었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가 평소에 생각해온 이슬비의 이미지였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찾느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이세하는 한기남의 부스에서 본 이슬비의 뚱한 표정을 떠올렸다.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판매대의 상품 말이야. 사람들이 유리가 그려진 물건은 두 개, 세 개씩 집어가던데.”

 

귀찮다. 그것이 이세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녀였다. 오랜만에 클로저 일에서 해방된 만큼 조금 나사가 풀린 정도는 그도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식사 중에도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은 좀 너무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적당히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마음먹은 이세하는 짐짓 눈을 돌리며 말을 꺼냈다.

 

“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긴 하지. 그런데, 막상 걔랑 하루만 같이 있어 보면 절반은 넘게 도망갈 걸? 걔 성격이 어지간해야 사람이 버텨내지 않겠어?”

 

이세하의 농담에 이슬비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웨이트리스가 가져다준 물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이슬비가 한숨을 쉬었다. 평소 팀원들의 엉뚱한 행동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무거운 한숨이었다. 이상하다. 이러는 애가 아니었는데. 이세하는 자신이 또다시 지뢰를 밟은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도 유리 정도면 어딜 가도 통할만 한 애잖아? 예쁘지, 붙임성 좋지... 이것저것 말이야. 인기가 있을 만도...”

“너무 열등감 느끼는 거 아냐? 너도 학교에서 꽤 인기 있는 편인데.”

 

이세하가 이슬비의 말을 잘랐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남학생들이 여자 이야기를 할 때 서유리만큼이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슬비의 이름이었으니까. 평소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쓸데없이 떠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놓은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뭐?”

“진짜야. 다들 귀엽다고 난린데. 인형 같다고 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슬비는 말없이 시선을 내린 채 물수건을 쥔 손가락을 놀렸다. 가늘고 모양도 잘 잡힌 손가락이었다. 평소에 큼직한 단검을 쥔 모습만을 보다가 이런 모습을 접하니 제법 색다르다는 것이 이세하의 감상이었다. 시선을 슬쩍 내려 자신의 손과 그녀의 손을 비교해보니 그 차이가 제법 크다. 거대한 건 블레이드를 쥐고 휘두르는 데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의 손등은 핏줄이 드러나고 굴곡이 심해져 제법 험하게 변한 상태였다. 반면에 염동력을 이용한 투척 공격 외에는 무기를 사용할 일이 많지 않은 그녀는 그 나잇대 소녀의 매끈한 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이슬비는 손 자체의 크기도 차이가 제법 컸다. 그가 그대로 감싸 쥘 수 있을 법한 작은 손과 얇은 손목, 그리고 좁은 어깨.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읊었을 뿐이었건만, 직접 비교를 하면서 생각해보니 이세하는 그녀가 정말로 인형처럼 느껴졌다.

 

식사가 나오고 그릇이 모두 빌 때까지도 이슬비는 말없이 식기를 놀릴 뿐이었다. 이세하는 드디어 찾아온 평온에 쾌재를 불렀다. 그녀의 일변한 태도에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은 반나절 간의 고생 끝에 찾아온 휴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식사를 마친 이세하와 이슬비는 특별한 일 없이 귀갓길에 올랐다. 신강고 근처의 역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세하는 이슬비의 오늘 하루 동안의 언동을 생각했다. 이상하게 수동적이다가도 묘한 데서 억지를 부리던 행사장에서의 모습. 그리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식사 중의 대화. 이세하는 그녀가 자신이 평소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슬비는 오늘 하루 계속해서 그래왔듯 그보다 한 걸음 정도 뒤에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 평소 작전 중에 팀원들을 이끌던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곁눈질로 뒤를 보면 평소 그녀의 태도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이슬비의 작은 체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어깨높이에 머무르는 작은 키에 위태롭고 가냘프게만 보이는 마른 체구. 클로저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 촉망받는 유소년 클로저 팀 검은양의 리더, 그리고 차원종의 대규모 습격에서 강남을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는 이세하의 눈에 들어오는 그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그 작은 어깨로 얼마만큼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을까. 그러한 기대감의 무게를, 그리고 그 무게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세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세하와 이슬비의 집 사이에는 조금 거리가 있다. 둘이 각자의 길로 향해야 할 갈림길에 도달하자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감사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집을 향해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세하는 그녀가 고아임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가면 그녀는 아무도 없는 집의 불을 켜고 자신뿐이 먹지 않을 식사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아마도 그녀가 좋아하는 TV 드라마를 조금 보다가 역시 홀로 침대에 들어가 잠들 것이고, 아침에 일어난 그녀가 집을 떠나면 그 집은 텅 빌 것이다. 갑작스레 쓸쓸해 보이는 이슬비의 뒷모습에 이세하의 마음속에서 기분 나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슬비가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어머니의 얼굴을 그렇게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돌아가면 결국 혼자인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는 혼란스러웠다.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이세하는 아직 제법 여유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슬비의 뒤를 따라갔다.

 

“뭐야, 이세하.”

 

이세하의 발걸음을 들은 이슬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세하는 짐짓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우리 리더님이 혼자 가는게 맘에 안 들어서.”

 

“게임 세계를 지키러 가는 쪽이 급한 거 아니었어?”

 

이슬비가 이세하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변명 삼아 멋쩍게 대꾸했다.

 

“가끔 이런 기분도 들 때도 있는 거야.”

 

결국 이세하는 그녀가 집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왔던 길을 제법 돌아와야만 했기에 이미 해가 질 무렵이 된 뒤였다. 얼마 뒤에 집으로 돌아올 어머니의 몫까지 식사를 준비하고, 끼니를 때운 뒤 그 뒷정리까지 마무리하자 그가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남지 않았다. 잠을 줄여볼까 고민하던 이세하는 당장 다음날에 검은양 팀의 회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졸린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가는 그를 덮칠 이슬비의 잔소리를 떠올린 그는 투덜거리며 게임의 클리어를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

 

그 뒤로는 별다른 일 없는 일주일이 흘러갔다. 이슬비는 이세하의 기억이 마치 꿈이었기라도 한 듯이 평소의 깐깐한 리더로 돌아왔고, 강남 지역의 복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작전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이세하는 검은양 아지트로 먼저 돌아와 게임 콘솔의 전원을 켰다. 반 시간쯤 뒤, 이슬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평소의 조용한 입실과는 정반대인 모습에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본 이세하는 바들바들 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푸른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이세하.”

 

이세하는 안 좋은 예감을 느끼고는 머릿속을 다급히 뒤적였다. 최근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릴 일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엔 작전 중에도, 또 회의 중에도 게임을 한 적이 없었고, 전날 밤새 게임을 하고는 학교에서 잠을 몰아 자다가 시뻘게진 눈으로 아지트에 들어오는 횟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어있었다. 그렇다면 이 예감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슬비는 곧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그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이거, 네가 얘기한 거, 맞지?”

 

이슬비가 보여준 트위터에는 한기남이 새롭게 발매한 검은양 관련 굿즈의 라인업이 리트윗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팀의 리더인 이슬비와 셜록 홈즈를 크로스오버한 상품이었다. 셜록 홈즈의 트레이드마크인 사냥 모자와 망토 달린 코트를 착용하고 돋보기를 들고 있는 이슬비의 그림과 그녀의 취미 운운하는 홍보 글귀를 발견한 이세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 뭐라고해야 되나... 그... 미안...?”

 

이세하는 자신을 향해 무엇이 날아올지를 궁금해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충격에 대비하며 이세하는 내심 웃었다.

 

어찌됐건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이슬비였다.

2024-10-24 23:18:2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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