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나요 - 2-1. 고등학생, 일상으로 -

Articulus 2018-01-14 1


  ※ 이 이야기에는 검은양&늑대개 팀의 시즌 1과 시즌 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며, 작중 시간대는 검은양&늑대개 팀의 시즌 2 이후이며 사냥터지기 팀의 스토리 이전의 상황입니다.


  ※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반영하지만, 글쓴이의 추가 설정 또한 다수 반영됩니다. 단, 본 이야기는 위의 이유로 사냥터지기 팀의 대다수 스토리 등이 미반영될 수 있습니다.


  ※ 작중 등장하는 인물, 장소, 기관 등은 현실의 그것과 무관합니다.


  ※ 현재 네이버 카페와 클로저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BGM 재생이 불가능합니다. BGM과 함께 소설을 감상하고 싶으신 독자분들께서는 글쓴이의 티스토리 블로그를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2-1

   신서울의 평화로운 종로. 신서울의 대표적인 시가지이자 중요한 정부의 행정 건물들, 그리고 유서깊은 여러 빌딩들이 들어서 있는 이곳에는 유니온 신서울지부의 청사 역시 들어서있다. 중앙의 높은 빌딩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 각각 또 다른 별관이 들어선 모습의 이 청사는 신서울지부에 소속된 직원들이 상근하는 곳으로서, 가히 이 일대의 모든 차원재난을 담당하고 있으며, 클로저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건물의 중앙에 높이 치솟은 빌딩은 클로저들보다는 일반인 직원들이 더 많이 분포해있는 부서들, 예컨대 공보국, 총무행정국, 대외협력국, 기술혁신개발국과 같은 행정이나 연구업무가 주된 업무인 부서들이 들어서 있다. 사실 이런 업무의 부서들이 조직의 7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들을 중앙건물로 한꺼번에 몰아넣게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좌측의 서관과 우측의 동관에는 각각 일반인 직원보다 클로저들이 더 많이 분포해있는 부서들인 감찰국과 요원관리국이 들어서있다. 비록 중앙건물에 비하면 4층 정도로 작아보이는 건물이지만, 결코 단일 청사로 보았을 때 작은 크기의 청사는 아니다. 이런 건물을 한 채씩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감찰국과 요원관리국이 조직 내에서 가지는 위상이 드높고 또한 속한 직원의 수가 단일부서라는 점을 참작할 때 꽤나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중 중앙청사의 대회의실에서는 어제 한국으로 복귀한 검은양 팀 세 명이 저마다 보고서로 보이는 종이 뭉치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슬비는 혼자서 무어라 중얼대며 보고서를 열심히 읽고 있었고, 이세하는 비록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서유리는 하품을 하면서 살짝 귀찮은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역시 긴장되는 건 피할 수 없는 것일까.
 

  "후우! 난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서유리!"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보고 서유리는 크게 혼잣말을 했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혼잣말을 한 이유는 단 하나다. 긴장 속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검은양 팀은 이른 아침부터 유니온 신서울지부 청사로 출근하여, 잠시 후 30분 후부터 있을 임무보고를 준비하고 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중앙 청사의 10층에 있는 대회의실로서, 현재 이곳에 들어와있는 모든 부서의 간부들이 모여 회의하더라도 자리가 충분할 정도로 커다란 회의실이었다. 이곳에서 오늘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검은양 팀은 그동안 국제공항에서부터 뉴욕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과 데이비드의 반란에 관한 일들을 보고해야 한다. 

  유니온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철저히 관리요원을 통한 보고나 서면보고가 기본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로는 이렇게 간부 전체가 집합하여 특정 팀의 보고를 듣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예외적인 상황으로서 차원전쟁 당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차원전쟁 당시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보고하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하다는 이야기이리라.

  이 정도로 사안이 중대한 임무를 맡은 클로저들도 무척이나 드물고, 또한 이렇게 모든 간부들 앞에서 보고를 하는 것 역시 드문 일이다. 클로저 생활을 시작하고서 은퇴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 못하는 클로저가 대다수인 것을 생각하면, 검은양 팀에게는 무척이나 큰 영예일 수 있다. 그러나 당장 모든 상급자들이 보는 앞에서 보고를 해**다는 것은 무척이나 커다란 부담이고, 동시에 두려움도 같이 마음에 자리한다. 그 마음에 그들은 아침 일찍 출근하여 보고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비, 너 잠은 잔거야?"

  "걱정해준거야, 이세하? 뭐, 비록 3시간 정도지만, 확실하게 잠을 잤지. 괜찮아."
  "3시간? 우리 슬비, 그렇게 잠을 안자면 피부가 상할지도 몰라!"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유리야! 피부가 상하긴 누가 상한다고…"

  연달아 이어지는 이세하와 서유리의 질문에 슬비는 잘 대답하며, 자신의 긴장감을 조절하고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아카데미의 대표로 연설도 해보았고, 검은양 팀의 리더로서 여러 자리에서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에 대하여 내성이 생긴 그녀이다. 그럼에도 지부의 모든 간부들 앞에서 하는 발표는 그녀에게도 처음있는 경험이니, 그녀는 기대 반 떨림 반이겠지.

  주르르. 무언가 액체를 따르는 소리와 함께, 이세하는 보온병의 뚜껑에 따뜻한 무언가를 가득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마셔."
  "이게 뭐야?"
  "페퍼민트차, 엄마가 오늘 보고하는데 긴장하지 말라고 타준거야."
  "서, 서지수 선배님이!? 이, 이렇게 귀한거, 나 마셔도 되는거야?"
  "뭐래. 빨리 마셔, 다 식겠다."
  "고마워!"

  그의 손에서 차가 담긴 뚜껑을 건네받고,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에 그녀는 목으로 넘겼다.
  페퍼민트 특유의 향기가 온기와 함께 온 몸에 그윽히 퍼져나가면서 떨리는 마음도 가라앉았다. 

  이상했다. 카페에서도 쉽게 사서 마실 수 있는 그런 차임에도, 이 차에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존경하는 대선배가 직접 만들어준 차라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부모의 사랑을 어려서부터 잃었던 그녀에게 다가온 부모의 따스함이 그녀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일까.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모두 마신 후에, 그녀는 뚜껑을 다시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잘 마셨어. 역시 서지수 선배님은 이런 것까지도 잘 하시는구나. 열심히 닮아야겠어."
  "닮다니? 설마, 우리 엄마를?"
  "응."
  "닮지마, 절대 닮지마!"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여, 여튼! 넌 닮으면 안돼! 절대로!"

  정색하면서까지 말하는 이세하에게 이상함을 품었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슬비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둘의 대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서유리가 끼어들어 이세하에게 핀잔을 준다.

  "하여튼 이세하 아니랄까봐. 너는 아주머니를 좀 더 귀하게 생각해야 해."
  "내가 뭐!"
  "세상에 그렇게 좋은 엄마가 어딨니? 아들 생각에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선물도 주시지, 아들 못 먹는다고 외식도 자주하지, 이렇게 아들 보고한다고 떨리지말라고 차도 타주시지…"
  "야, 그거랑 이건 별개지! 나도 엄마 생각한다고!"
  "아주머니를 생각한다는 사람이, 자기 엄마를 닮지 말라고 하는게 어딨어."
  "야! 그거랑 이건 다르다니깐!"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음에 답답함을 느낀 이세하가 서유리와 언성을 점점 높여가자, 두 사람이 말다툼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슬비가 중재한다.
  "자, 두 사람 모두 그만. 이제 보고까지 20분도 안 남았어. 마지막 최종정리를 해야 할 때야."
 
  그녀가 대회의실의 반대쪽 끝에 걸려있는 커다란 전자시계를 가리키며 말하자, 두 사람은 이내 그녀의 뜻에 따라 말다툼을 멈추고 다시 보고서를 보는데 신경을 쏟는다. 

  이번 보고는 이슬비가 대체적인 흐름을 맡아서 진행하지만, 중간중간 이세하와 서유리의 활동보고가 15분 가량씩 끼어 있기 때문에, 그들도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이렇게 보고서를 보면서 일생에 단 한 번 뿐일 수도 있는 모든 간부들 앞에서의 보고를 공들여 준비하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부분을 완벽히 소화해낸 이슬비는 이제 자신의 노트북을 켜서 시각화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살펴본다. 그녀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있던 이세하는 힐끔 눈을 돌려, 그녀가 지난 밤 잠도 ** 않고 만들었을 자료를 곁눈질로 살폈다.

  과연 단 하루만에 나온 것일까 싶을 정도로 그녀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프리젠테이션 자료는 깔끔했다. 그만큼 그녀가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본 노하우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을 만드는데 꽤나 오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텐데,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잠을 줄여가며 만들었던 걸까.
 
  "이슬비. 정말 준비 열심히 했구나…"
  "아냐. 너희가 어제 배려해줘서 열심히 한 덕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어. 다 너희 덕이야."
  "우리 덕이라니, 네가 고생한 거지."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에게 칭찬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처음 그들이 검은양 팀이 구성되어 만나게 된 날 사소한 일로도 티격태격 싸웠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 정도로 관계가 발전한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사실 검은양 팀 모두가 그동안 생사를 오가며 함께 적과 싸워왔던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생겼을 전우애이자 동료애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절대적인 위협이자 어둠이었던 데이비드와 싸웠을 때, 그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 서로를 격려해가며 마음을 다잡고 그와 싸웠던 것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이 성까지 넣어부르는 풀네임이 아닌 서로의 이름만을 부르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으니까.
 
  "자랑스러워, 세하 너같은 멋진 클로저와 팀이라는게."
  "나도야. 슬비, 너처럼 훌륭한 리더와 동료라는게."
  "…"
  "…"
  "아하하…, 보고 준비하자, 준비!"
  "그래…, 나도 좀 더 준비해야지!"

  그렇지만 여전히 어색한 그들의 관계. 서로를 향해 다정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됬어도, 이 부끄러움이 완전히 가시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이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발표까지 이제 15분 가량 시간이 남았다.



  ◆ 2-2
 
  "네… 잘 도착하셨다고요. 아이들은 별 일 없어 보이던가요?"
 
  파괴된 돔 안의 유니온 임시본부.

  밤 늦은 시간이 되어 사방이 어둠으로 물들었음에도 어느 커다란 천막 안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그 안에는 매우 피곤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김유정이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전화를 나누고 있다.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랜턴 안의 불빛에만 의지하여 어두운 천막 안을 비추는데,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 앞 책상에는 여러 문서가 어지러이 널려져 있다. 분명히 그녀가 담당하는 업무에 관한 서류들이겠지.
 
  바쁜 일을 하는 중에도, 그녀가 이렇게 전화를 나누는 이유. 그것은 신서울로 먼저 떠나보낸 아이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비밀리에 맡긴 일과 관련하여서도.
  그녀는 데이비드의 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신서울지부의 지부장이라는 자리까지 내버리는 심정으로 이 모든 일을 지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미국의 유니온 지부에 파견나온 클로저마저 한국으로 되돌려보내서 검은양 팀을 지킬 수 있도록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전에 말했던 이상징후는 포착하셨나요."
 
  그런 질문을 던진 후, 그녀는 잠시동안 전화기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곤으로 정신이 몽롱해지는 시간이지만, 그녀는 이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이야기가 끝을 내자, 그녀는 살짝 안도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고마워요. 계속 아이들을 지켜봐주세요.
  아무리 그들이 유니온의 특수요원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니까요."
 
  다시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말에 집중하는 김유정은 이번에는 길게 듣지 않고 대답했다.
  너무나도 명백히 그녀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이기에.
 
  "걱정말아요. 여기는 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보다도 신서울은 괜찮나요. 듣자하니 요즘들어 이유 없이 차원문이 세계 곳곳에 열리기 시작했다는데."
 
  돌아온 대답이 짧았기에 그녀는 바로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하지만 신서울에 또 언제 차원문이 열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에요. 그러니 아이들을 챙기는 것과 함께, 당신의 본연에도 충실하셨으면 해요. 그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정기적으로 이 시간에 연락을 주시기 바랄게요. 그럼 오늘도 힘내주시길."
 
  무언가 휴대폰 너머로 말이 들려오다가 끊어졌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들어오는 불빛 하나 없는 것으로보아, 아마도 배터리가 모두 닳은 모양이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더듬거리며 보조배터리를 찾았지만, 이내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했음을 지각하고 찾기를 멈추었다.
 
  "그러고보니 저 안 쪽에 놔뒀었지."
 
  이제 곧 잠자리에 들을 그녀이기에 굳이 천막 안으로 더 들어가 배터리를 찾을 필요는 없다.
  굳이 전화가 걸려온 곳으로 다시 전화를 할 필요도 없고, 마지막에 다 못 들었던 말은 통상적인 헤어짐의 인삿말이었을 뿐이니까 말이다. 램프에 불을 끄기 위해 바람을 불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려 할 때, 그제서야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온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누구와 그렇게 통화했던 거요?"
  "트, 트레이너 씨!"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군. 아쉽지만 나는 귀신이 아니오. 나는 사람이지."
 
  천막 입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험상궂은 인상의 남성은 김유정에게 싸늘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한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이 나누고 있던 대화를 그가 모두 들었을까봐 걱정했다. 그녀가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도 말하지 않았고, 검은양 팀에게 도움을 붙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제이와 미스틸테인, 그리고 그녀뿐이다. 트레이너나 늑대개 팀에게는 말할 이유도 없었고, 혹시나 비밀이 새어나갈 수도 있기에 이야기해서조차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들키고 말았으니, 이건 완벽히 그녀의 실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며, 그에게 해명했다.
 
  "별거 아니에요. 신서울에 있는 알고 지내는 사람과 통화한 것 뿐이에요."
  "흠. 그저 알고 지내는 사람과 그런 내용을 나눈단 말이지. 정말이지, 유니온의 간부들은 차원문이니 본연이니, 이런 말들을 쉽게 하는군."
  "…"
  "비밀로 하고 싶은 일이라면, 이쯤에서 입을 닫도록 하지. 다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느니, 아예 변명조차 하지 않는게 좋소. 그게 더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 말이오.
  그럼 이쯤에서 이야기를 바꿔서, 왜 아직 자고 있지 않는 것이오? 내일 있을 작전을 잊었소?"
  "설마요."
 
  트레이너가 꺼낸 이야기. 내일 있을 작전이라는 것은 차원종 토벌작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데이비드가 지고의 원반을 사용하여 차원의 비틀림을 만들어버린 이후, 뉴욕의 일부 지역은 위상변곡률이 급격히 불안정해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정상화되어감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차원종 출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급기야 오늘 오전 뉴욕 외곽 지역에 고위급 차원종이 다수 출현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에 따라 뉴욕에 출몰했던 차원종들 다수가 외곽으로 후퇴하여 재집결하고 있는 모습이 첩보팀에 의해 포착되었다. 그리고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고위급으로 보이는 차원종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차원종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군세를 이뤘고, 단일 팀으로는 도저히 격파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그녀는 뉴욕에 집합한 모든 클로저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차원종들이 완전히 재정비하기 전에 완벽히 섬멸하기로 작전이 수립되었다. 이 작전은 아침 동틀녘에 맞추어 시작되고, 뉴욕 외곽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해들어가는 방식을 취할 것이다.

  이 작전에서 그녀는 지휘권을 가지고 모든 클로저 팀을 통제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침에는 지금과 같이 피곤에 쩔어있는 모습이 아닌,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트레이너는 그녀에게 지금까지 잠을 ** 않느냐고 물은 것이리라.
  그의 걱정에 대한 보답으로, 이번에는 그녀가 트레이너에게 반대로 물었다.

  "그렇다면 트레이너 씨는 왜 지금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은 거죠?"
  "그야… 잠이 오지 않아서이지."
  "트레이너 씨야말로 최전방에서 늑대개 팀과 함께 싸워주셔야 할텐데, 저보다 트레이너 씨가 더 잠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
  "훗, 걱정 마시오. 도망자 신세이었을 때에는 잠까지 줄여가며 도망쳐다녔으니까. 18년 전보다야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은 걱정을 받을 만큼 약하지는 않소."
  "믿어요. 트레이너 씨를."
  "재밌군. 아무리 아군이라고는 해도, 나 외의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 될텐데."
  "아뇨. 그동안 트레이너 씨와 늑대개 팀이 보여준 모습은 충분히 신뢰할 만해요. 그렇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요."
   
  말 없이 웃음만 지으며 트레이너는 다른 화제로 돌렸다.
  "듣자하니 뉴욕 외에도 이곳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차원문이 열린 듯 하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어느 곳이나 지휘관급 개체가 되는 고위급 차원종이 출현하면 잔챙이들이 몰려들어 군세를 이룬다는 것이지. 단일 개체보다 격파하기 더 힘들어진 만큼, 더욱 열심히 싸워야만 하겠지."
  "뉴욕을 어서 해방시켜야 해요. 이곳을 속히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 그것이 우리 유니온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모든 유니온의 사람들이, 김유정 부국장, 당신만 같았으면 좋겠군. 그럼 주무시오, 난 조금만 더 순찰을 하다 자러 가겠소."
  "알겠어요. 그럼 내일 아침에 뵈어요, 트레이너 씨."

  손만 흔들고선 트레이너는 임시본부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녹아든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김유정은 크게 한숨을 쉬고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야. 트레이너 씨라면 입도 무거운 축이니까, 어디가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
 
  그리곤 잠시 천막 밖으로 나와 뚫린 돔의 천장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간절히 빌었다.
  내일 있을 모든 작전이 원활하게 진행되기를, 그리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기를. 그리고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서 그녀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천막 안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

.

.


  "이상으로 모든 보고를 마칩니다."


  기나긴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대회의실을 가득 채운다.

  일부는 자리에서 직접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보내지만, 일부는 그냥 자리에 앉아 건성으로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 신서울지부의 최고자리에 있는 부지부장이 기립하여 박수를 치자, 건성으로 치는 이들도 어쩔 수 없지 자리에서 일어나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신서울지부의 모든 간부가 검은양 팀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가 처음 팀을 조직했을 때에도, 그를 중심으로 한 파벌과 그를 반대하는 파벌이 나누어 싸우면서, 검은양 팀에 대해 악질적인 승급심사 주문을 내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것을 겪었던 그들이기에 신서울지부 내에서 자신들은 환영받기도 하고 또한 환영받지 못하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저들 중에 변변치않은 표정을 지은 이들이 그런 부류이겠지.


  아마도 그들은 데이비드의 토벌에 실패하면, 데이비드가 검은양 팀을 조직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죄없는 검은양 팀을 해체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검은양 팀은 매우 훌륭히 데이비드의 수하인 베리타 여단과 데이비드 본인을 격퇴하였고, 그에 대한 상으로 그들은 정식요원에서 특수요원으로 승급하였다. 유니온 내에서 특수요원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음을 생각할 때, 팀원 전체가 특수요원으로 속해있는 팀은 신서울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이다. 보통 특수요원들은 단독활동을 주로 하니까 말이다.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검은양 팀이 유니온의 간부들도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의 직급인 특수요원으로 승급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이들은 금세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고, 박수 치는 것을 멈추고 짜증이 섞인 눈빛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슬비를 쏘아보고 있다. 이제 이어질 20분 가량의 질의응답 시간에 그들은 간부들의 자잘한 공격에 방어해야 한다.


  그전에 먼저 현재 신서울지부의 공석인 지부장 자리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부지부장이 웃는 얼굴로 검은양 팀을 치하한다.


  "멋지군요, 아주 멋져요. 검은양 팀의 목숨을 건 활약에 우리 지부는 데이비드에 대한 일로 책잡히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요.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했던가요, 데이비드 사건을 무사히 해결한게 다름아닌 우리 지부의 클로저들이니, 유니온 회원국 내에서도 우리나라의 입지가 크게 서겠지요. 정말 잘해냈어요, 검은양 팀."

  "감사합니다, 부지부장님. 저희는 클로저로서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역시 특수요원은 특수요원이라는 건가요? 부족한게 하나 없군요."

  "과찬이셔요. 저희는 무엇보다 유니온과 인류를 배신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좋아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조직에 대한 충성도도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어때요, 모두들 그렇지 않나요?"


  부지부장의 말에 대다수의 간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동의의 뜻을 드러내는 말들로 응답한다. 생각보다도 다수의 간부들이 검은양 팀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슬비는 무척이나 이를 고무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활동하던 초창기엔 많은 간부들이 검은양 프로젝트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란듯이 훌륭하게 그 어떤 클로저들보다 단기간 내에 폭발적인 성장과 성과를 거두었고, 결과를 보았을 때 쉽사리 이를 부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검은양 팀은 그들 스스로를 훌륭한 클로저로 증명해낸 것이다.


  "부지부장님, 저는 이의가 있습니다."

  "음? 감찰국장?"

 

  맨 앞 좌석에 앉아있는 최고위급 간부들 중의 한 명인 남성이 손을 들어 의사를 표했다. 신서울지부에 속해있는 클로저치고, 이 사람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럴만한게 이 남자가 소속된 부서는 지부 내에서도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감찰국이기 때문이다. 감찰국은 요원관리국과 더불어 가장 지부 내에서 입김이 세기로 유명한 부서이다. 바로 그 부서의 총괄대표인 사람이 바로 저 남자이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이세하의 표정은 굳어만 간다. 그럴만 한 것이, 지금껏 그와 그의 어머니를 감시해왔던 것이 바로 저 감찰국이었기 때문이리라. 저 남자는 지금껏 자신의 자리를 지켜오면서 모든 것을 훤히 알고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거리낌없이 - 마치 아무런 잘못도 자기에게도 없다고 말하듯 - 당당하게 저런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저 남자야말로 이세하에겐 데이비드 만큼이나 끔찍히 싫은 '어른' 중의 한 사람이다. 시시로 어두워져가는 이세하의 표정은 바로 그걸 말하고 있다.


  "먼저 검은양 팀, 데이비드와 그의 수하들이 일으킨 반 유니온 테러를 무사히 해결해 준 것에 대해선 정말로 감사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희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게 있다. 바로 이세하 군, 자네에 관련된 일 - 어머니의 클론 - 이지."


  한 손을 들어서 이세하를 가리키며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이슬비나 서유리는 그가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부디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이야기이었으나, 그들의 기대는 이리도 쉽게 무너져버렸다.


  마치 삿대질을 하듯 이세하를 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남성은 이세하와 시선을 맞추며 짧게 비웃음을 흘린다. 그 순간 이세하의 입가에서는 저절로 무언가가 발음되었고, 그 이후 입술을 꽉 깨물며 그는 자신의 상관이며 자신의 원수와도 같은 그 남자를 노려본다. 하지만 저 남자는 결코 그를 향한 조소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쏘아볼테면 계속해서 그렇게 해보라고 도발하는 듯 말이다.

  소리없는 눈빛의 싸움이 오간 후, 남성은 자신이 앉은 자리의 뒤를 돌아보며 수많은 간부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검은양 팀은 뉴욕에서 ** 말아야할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뉴욕의 총본부가 벌였던 그 놀라운 실험 - 클론 복제 - 의 결과물들을 말이죠.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우리 신서울지부가 배출한 위대한 차원전쟁의 영웅인 서지수 씨가 그렇게 이용되고 있었을 줄이야.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이세하는 자신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위상력으로 만들어낸 불덩이를 저 남자의 머리에 집어던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심경변화에 민감한 이슬비가 그에게 작게 속삭인다.


  "도발이야. 넘어가면 안돼, 세하야."

  "알아…, 나도."

  "감정적으로 상대할 일이 아니야, 저 인간은. 간부 중에서도 최고위급 간부니까."

  "…"


  그녀의 말대로 저 남자는 신서울지부의 최고위급 간부다. 사소한 말로 꼬투리를 잡히면 손해를 보는건 당연히 이쪽이다. 그를 짓누르기 위해선 모두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어른들의 세계란 언제나 권위와 자기체면을 중시하니까, 여기서 감정적으로 그를 상대했다가는 오히려 다른 간부들의 반감만 살 뿐이다. 그렇기에 이세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역겨운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말이죠. 불행하게도 이 검은양 팀에는 그녀의 아들인 이세하 군마저 포함되어 있었죠. 즉 불행하게도 데이비드에게 이용당하던 어머니의 클론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분명히 우리 조직에 대한 반감을 품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혹시 모르죠…, 자신의 어머니를 이 지경까지 내버려둔 우리 지부에 대해서 배신하려고 할지도요."


  다시 남자는 뒤돌아서서 이세하를 바라본다. 

  고개를 뻣뻣이 치켜올리고선 남자는 물음을 이어갔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시는게 어떤가, 이세하 군?"

  "…"


  그의 말에 이세하는 침묵했다.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이 돌아오지 않자, 남자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며 다시금 묻는다.

  

  "왜 아무 말도 없는거지? 설마 내가 지금까지 한 말들이 정말 사실인건가? 하하, 그것 참 우연이군. 이렇게도 내 생각이 잘 맞아떨어질 줄이야."

  "이세하 군, 감찰국장의 질문에 답을 해주길 바라네."


  부지부장 역시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유리는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찰국장이 처음 말을 시작할 때부터 지었던 표정 그대로 이세하의 얼굴빛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는 양 손 모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서 말없이 손만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녀는 그의 마음 속에 얼마나 감정이 휘몰아치는지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이야기했다가는 휘몰아치는 감정이 그대로 발산될 것이 뻔하기에,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있는 중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곧바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클론이라고 하지만 그 수많은 여성형 클론들이 그의 어머니로부터 나온 것이라는걸 알아버린 이후로부터, 그는 클론들을 상대로 싸우기를 극도로 회피했었다. 한동안 패닉에 빠져 그가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저절로 검은양 팀의 전력은 약화되었고, 그 때문에 검은양 팀이 겪어야했던 작전 수행에서의 어려움은 이루 말로 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 당시 이슬비와 제이의 배려로 이세하는 일부 작전에서 배제되었고, 데이비드에게 탈취당하여 이용당한 클론들과 싸우는 일은 저절로 다른 검은양 팀원들의 몫이었다. 클론의 생산시설이 완벽히 파괴되고 더이상 서지수의 클론이 전장에 나타나지 않게 되어서야, 겨우 이세하는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클론과 싸우기를 거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유니온에 적대감을 품거나 조직을 배신하려고 했다는 말은 심각한 논리비약이다. 


  만약에 그가 유니온에 적대감을 품었다면 당장에라도 데이비드의 편에 붙었을 것이다. 사실 지고의 원반을 장악한 데이비드가 유리했다면 유리했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클로저 중에서 유일하게 위상력을 상실하지 않고 그와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건 고작해야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이 전부였으니까. 더욱이 모든 위상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원반의 소유자였던 데이비드라면 자신의 편에 이세하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이세하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자신의 적이자 인류의 적인 데이비드와 맞섰고, 종국엔 모두와 함께 그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궁지에 몰린 데이비드가 쏘아댄 유혹에 그가 넘어가지 않고 그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은 그의 무고함을 입증하기에 너무나도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런 과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함부로 말을 쏘아대는 남자에게는 따끔한 한 마디가 필요하다.

  그런 생각으로 서유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이보세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지금, 뭐라고 그랬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냐고 물었어요! 세하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아세요? 만약에 세하가 유니온을 배신하려고 했었다면, 데이비드는 지금까지도 살아남아서 활기치고 다녔을거라고요!"

  "자네, 그게 지금 무슨 말버릇인가? 자네의 관리요원은 상관한테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가르쳤나?"

  "유정이 언니는 상관 없는 일이잖…"


  서유리의 말이 끊긴다. 그녀의 한 쪽 손을 누군가 잡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는 이슬비의 손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더 투박하고 거친 딱딱함이 느껴지는 촉감이었다. 

  그녀의 손을 맞잡아준 사람은 다름아닌 이세하였다. 


  "고마워, 유리야. 이제부터는 내가 말할게. 그래도 될까?"

  "어? 으, 응…"


  그녀는 얼떨결에 대답을 해버리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잡아당기듯 그녀를 잡은 손이 그녀를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대신 그녀를 자리에 앉힌 사람이 그녀 대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이야기했다. 여전히 맞잡은 손은 놓지 않은 상태였다.

  이세하는 똑똑히 시선을 자신에게 질문을 쏘아낸 사내에게 맞추며 이야기했다. 금색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그저 쌀쌀한 느낌만 드러낼 뿐이다. 사뭇 달라진 느낌 때문인지 감찰국장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원래의 여유를 되찾는다.


  "흥. 이래서 고까운 녀석들은 안된다니깐. 

  그럼 어디 한 번 이야기나 들어볼까, 이세하 군?"


  저절로 모두의 시선이 이세하에게 쏠린다.

  신서울지부의 모든 간부가 일제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중압감 때문일까,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말을 잇는다.


  "감찰국장님의 말씀대로 한 때나마 유니온을 미워했었죠, 저와 엄마를 감시한 것도 모잘라, 이제는 엄마의 클론마저 우리 가족 몰래 만들었냐면서."

  "그럼 그렇지. 여러분 모두 들으신 바와 같습니다. 이세하는 아직도 조직에 대한 적대…"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엄마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찌질하고 불쌍했으면, 그렇게 본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몰래 만들 수밖에 없었을까, 하고요."

  "그거야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총본부의 인간들이 저지른 짓과 우리는 무관해."

  "그렇죠. 신서울지부는 총본부의 일을 모를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말이에요, 국장님. 처음 저희가 국제공항에 가서 베리타 여단과 처음 충돌했을 때, 그곳에 있었던 감찰국 요원 최서희 씨에게 들었어요. 우리 지부의 감찰국이 몰래 저와 저희 엄마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요."


  그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간부는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폭로되자 전혀 이러한 사실을 모르던 간부들은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장내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감찰국이 뭔가 이상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듯 했다. 이쯤은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감찰국장도 그에 질세랴 막히지 않고 답했다.


  "그래. 그 어떤 차원종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류최고의 위상능력자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 신서울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서도 필요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차원전쟁 직후로부터 우리 유니온은 서지수 씨와 너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러했던거다. 나쁜 의도는 없었어."

  

  그의 답에 이세하는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을 기분나쁘게 생각한 감찰국장이 그에게 질문을 쏘아붙인다.


  "뭐가 우스운거지, 이세하 군?"

  "아뇨, 별거 아니에요. 잘도 지난 18년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최서희 씨같은 훌륭한 클로저들을 이용해서 보호했는데도, 엄마의 DNA가 그렇게 잘도 총본부로 넘어간게 우스워서 그래요. 우리 신서울지부의 감찰국의 수준은겨우 이 정도밖에 안되었던 거네요."

  "뭐라…, 고?"

  "이해가 가지 않으시나요? 최고의 위상능력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24시간 철통감시를 했으면서도 엄마의 클론이 신서울에서 그토록 먼 남의 나라 뉴욕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지부의 감찰국의 능력이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는 거죠.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감찰국이 무능하다는거죠."

  "풉…!"

  "크큽… 흐흠!"


  이세하의 말이 끝나자 간부들 중 일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게 터뜨리고 말았다.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적막에 휩싸인 대회의실 안에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는지 웃음을 터뜨린 간부들을 향하여 감찰국장의 시선이 향했다. 명실공히 신서울지부의 서열에서는 상당히 높은 직급에 위치하고 있는 그가 고작해야 이제 특수요원으로 갓 진급한 요원에게 망신을 당하고 있는 것이 다른 간부들의 입장에서는 우스운 것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자신의 부서가 감찰국보다 낮은 위치를 가지고 있는 부서들의 대표들이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비웃음을 당한 것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공식적인 자리이기에 분을 삭힐 수밖에 없던 그에게 또 다시 모욕의 말이 이세하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만약 감찰국이 무능하지 않다면 내려지는 결론은 하나에요. 감찰국이 엄마의 클론이 만들어지도록 방치하고 총본부와 동조했다는 결론. 인류를 위한다면서 반인류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총본부의 인간들과 다르지 않네요, 감찰국장님도."

  "아니야! 우리는 그러지 않았어!"

  "그렇다면 계속해서 무능한 채로 계시든지요."

  "이이이, 일개 요원주제에 잘도…"

 

  그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찰나, 그의 말을 끊고 바로 옆에 있는 최고위 간부가 그에게 돌연 묻는다.

  "나도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감찰국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었다니. 어째서 보고가 누락되었는지 알 수 있는가?"

  "부지부장님, 그게 실은…"

  "그러고보니 감찰국장님은 데이비드 전 지부장과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오히려 저보다는 이쪽을 좀 더 추궁해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이쪽은 실제로 데이비드와 함께 조직에 대해 이적행위를 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니까요."

  

  이세하가 덧붙인 일부 간부들을 제외한 모든 간부들의 시선이 매섭게 바뀐다.

  조직의 정치 알력다툼을 알거나 직접 겪는 간부들은 감찰국장이 데이비드 전 지부장과 가까운 사실을 너무나도 명확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세하의 증언과 논리가 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고, 저절로 감찰국장을 향한 의심이 점점 커져만 간다.


  "우선 이 일에 관해서는 조금 더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군.

  감찰 업무를 담당해야할 감찰국이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어쩔 수 없이 이번 감사는 요원관리국에 맡길 수밖에 없겠군요. 관리국장은 이 일을 조속히 실행에 옮겨주기 바랍니다."

  "네, 부지부장님. 빠른 시일내로 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이런, 벌써 점심시간에 가까워졌는데, 누구 다른 간부들 중에 질문할 사람이 있습니까?"

  

  부지부장의 말에는 빨리 이 모임을 끝마쳤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난다. 실제로 점심시간에 가까운 시간인지라 모두 배도 슬슬 출출해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검은양 팀의 리더인 이슬비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질문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명쾌하게 보고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데이비드를 쓰러뜨린 일만으로도 충분히 검은양 팀은 자기 몫 이상의 역할을 해준 셈이니, 모든 간부들에게 있어서 검은양 팀은 굴러들어온 복이다.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 가득했기 때문에 악의어린 질문을 던질 간부는 없다.


  "없는 것 같으니, 보고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합시다. 모두 고생한 검은양 팀을 다시 한 번 박수로 격려합시다."


  노년의 부지부장이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수를 치자, 모든 간부들도 일제히 일어나 검은양 팀을 향해 박수를 보낸다. 물론 그 중에는 감찰국장처럼 여전히 검은양 팀에 대해 안좋은 시선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지극히 소수였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건성으로 박수는 치고 있었지만, 검은양 팀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간부들의 격려에 고개 숙여 인사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보고가 끝난 것을 감사하며, 이슬비는 환하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오랜만에 한껏 기쁜 표정을 지어보인다. 




  ◆ 2-3


  "이세하, 제법 말 잘하더라?"


  식판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이슬비가 말했다.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이세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이세하 역시 테이블에 자신의 식판을 내려놓는다.

  그러더니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서유리는 어딨어?"

  "아… 저기."

  "하하하…"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신나게 식판에 음식을 퍼담고 있는 서유리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한 지부의 구내식당이기 때문에 서유리는 더욱 들떴을 것이다. 

  어느 행정부서나 본청에서 근무하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직원들의 소망이지만 특히 유니온 신서울지부의 요원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청사의 구내식당을 매일같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설명을 다 해버린 셈이다. 그 정도로 지부 청사의 구내식당은 맛있고 값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기로 유명하다.


  요즘과 같은 고물가 시대에 5천원으로 양질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커다란 장점이다. 유니온 신서울지부의 요원들은 직급에 따라 이 나라 공무원의 직급에 준하여 보수를 받는데, 요즘 공무원들의 1끼 식비가 7천원에 해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2천원이나 더 싸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곳은 정말 낙원과 다를바가 없다. 아무리 업무의 피로도가 높다고 해도 1시간이라는 점심시간만큼은 꼭 이곳에 와서 밥을 먹고 돌아간다는 것은 이곳이 무척이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위상력의 소모로 인해 더많은 열량을 보충해야하는 위상능력자들을 위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은 철저히 뷔페식으로 운영되어 마음껏 배터지게 먹을 수 있다. 거기에 음식의 종류가 밖에서 2만원 이상은 내어야 먹을 수 있는 뷔페수준이니, 더 이상 이곳의 좋음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서유리가 신나서 음식을 퍼담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지.


  서유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옆을 지나가는 세 명의 남자들이 지나간다.

  요원복을 입고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들도 클로저인 모양이다. 그들은 두 사람에게 반갑다는듯 인사를 한다.


  "이열~ 인류의 영웅님들, 그동안 활약에 대해 들었어. 정말 멋지던데, 과연 특수요원들다워!"

  "거기에 오늘은 감찰국장의 코까지 눌러놨다면서? 그 꼰대녀석 얼굴이 찡그린걸 생각만해도 웃기네!"

  "밥들 맛있게 먹어라! 나중에 감찰국 한 번 놀러와서 무용담좀 들려달라고, 영웅님들! 하하하~"


  그들의 인사에 이슬비와 이세하도 고개를 숙여 묵례로 인사한다. 아마도 말로 보아하니 그들은 감찰국의 클로저 요원들인 모양이다.

  참으로 의외라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자신들의 부서의 대표가 망신을 샀는데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걸 보이다니. 어쩌면 그 감찰국장은 같은 부서 사람들에게조차 신용을 얻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더이상 아까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하고, 이슬비와 이세하는 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한다.

  두 사람이 먼저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한지 몇 분이 지나서 두 개의 접시에 한 가득 자신이 먹을 음식들을 담아온 서유리가 이세하 옆의 자리에 앉는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다.

  어마어마한 음식의 양에 놀란 이세하가 넌지시 물었다.


  "야, 다 먹을 수는 있냐?"

  "오늘 청사 출근이라는 말 듣고 점심 먹을 생각으로 아침도 안먹고 왔단 말이야. 이거 다 먹고 또 먹을거야."

  "그래, 많이 먹어야지. 그리고,"

  "응?"

  "아까는, 고마웠어. 나 대신, 감찰국장한테 말해준 거."

  "고마우면 나중에 밥 사는거다?"

  "물론이지. 날만 잡아."

  "예에에! 세하가 밥 산다!"


  이세하는 말을 마치고 젓가락으로 자신의 식판 한 구석에 담아온 멸치를 한가득 집어 입가로 가져간다. 입 안에 반찬을 넣고서 우물우물 씹고 있는데, 그 모습을 신기하게 이슬비가 바라보고 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냐? 왜 그렇게 쳐다봐?"

  "이세하, 너 멸치 좋아했어? 신기해서."

  "이젠 사람이 먹는 것까지 신기하냐."

  "너가 예전에 그랬잖아, 나는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요리를 좋아한다고."

  "그렇지. 엄마 요리가 정말 맛없으니, 밥 시간에 엄마가 해준 반찬 대신 먹어야하니까. 그런데 우리 엄마가 다른건 다 못해도 멸치볶음은 참 잘해. 그래서 어릴 때부터 멸치만 자주 먹다보니까, 저절로 좋아하게 된 것 같아."

  "세하, 너 배가 불렀구나? 서지수 선배님이 해주신 음식이 맛 없다니! 페퍼민트 차를 그렇게 맛있게 끓여주시는데 음식을 못하실 리가."

  "야, 너가 안 먹어봐서 그래. 진짜 우리 엄마 음식은 별로야."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이세하는 자신의 젓가락으로 톡톡 자신의 식판을 건드리며 말한다.

  그가 전하는 말은 이슬비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말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의 어머니 - 서지수 - 는 모든 것에 있어서 완벽하고 한 점의 결점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이렇게 훌륭히 길러낸 어머니라면 분명히 음식도 맛있게 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말에 반박했다.


  "아냐! 서지수 선배님이 그럴리가 없어!"

  "야, 그러면 내기할래? 언제 우리 집 와서 밥 먹어봐. 만약에 맛 없다는 말 안하면 내가 사과하고 1주일동안 너네 집에 반찬 만들어다 준다."

  "좋아.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에 내가 맛 없다고 하면?"

  "그땐 너가 우리 집에 1주일동안 반찬 만들어다주는거지 뭐. 솔직히 내가 반찬해서 밥 먹기 귀찮거든. 그렇다고 엄마한테 반찬 만들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니 겸사겸사 이런 틈에 득을 보는거지."

  "…"

  

  이슬비는 이세하의 제안에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 이세하가 웃으며 말했다.

  

  "야, 싫으면 안해도 돼! 그대신 진짜 언제 우리집 와서 밥 먹어봐. 너, 우리 엄마한테 굉장한 환상을 가지고 있나본데, 하루만 우리 집에 지내도 엄마에 대한 환상이 다 깨질걸."

  "그게 아니라…"

  "어?"

  "내기는 받아들일게. 대신, 조건을 바꿔줘."

  "뭘로?"

  "내가 지면, 종종 너희 집에 가서 같이 밥해먹을 수 있도록. 서지수 선배님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리가 없잖아!"

  "쿡쿡, 너 그거 진심이야? 진짜 나중에 후회해도 안바꿔준다?"

  "걱정마! 그럴 일은 절대 없을테니까!"

  "콜!"

  "콜!"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말로 서로의 약속을 주고 받았다. 

  어느 쪽이나 손해될 게 없는 내기를 두 사람은 건 것이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기에 과열되는 동안, '먹을 수 있는거라면 다 맛있지'라는 생각으로 서유리는 열심히 자신의 접시를 비워나가고 있었다. 수북히 쌓아서 가져온 음식들이 어느덧 반절이나 줄었다. 

  일상을 되찾은 그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이런 식사시간도 귀중하다. 친구와 함께하는 식사는 언제나 즐겁기에, 그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며 점심의 향락을 누린다.

  저 멀리서 자신들을 주시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그들은 모른체.


.

.

.


  "경정님."
  "…"
  "송은이 경정님."
  "어! 미안!"

  강남의 어느 카페 안에는 송은이와 채민우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 채민우는 강남 지역의 특경대를 지휘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송은이는 본래의 근무지인 국제공항에 있어야할 터인데 한 대낮에 신서울의 강남에 와 있다. 그것은 그녀가 야간근무로 인한 초과근무로 인해 오늘의 업무가 비번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어제 밤샘 근무의 일로 국제공항에서 신서울로 돌아온 뒤, 바로 국제공항으로 복귀하지 않고 자신의 옛 근무지이자 자신들의 그리운 동료들이 있는 이곳 강남을 찾았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여러 특경대의 대원들과 채민우 경정은 그녀를 반갑게 맞았고, 강남의 특경대를 대표하여 그가 그녀와 점심식사를 한 이후, 이곳에 오랜만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다가 채민우 경정이 지난 밤에 무슨 일을 했길래 야간근무를 했냐며 그녀에게 묻자, 갑자기 이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상함을 느낀 그가 세 번이 그녀를 불러, 그녀의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아니, 그 이전에 역시 밤을 새서 피곤하신거 아닙니까?"
  "아냐. 별 일 아니었어. 그리고 피곤하지도 않고."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경정님 얼굴에는 큰 일을 치르고 왔다고 써있는데요."
  "진짜? 진짜?"
  "경정님! 정신 좀 차리세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제게 말 못할 일인가요?"
  "그게…"

  마음 같아서야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다.
  송은이와 채민우는 꽤나 오래 강남에서 같이 근무하며 이 일대의 치안 업무를 담당했던 사이이다. 많은 차원종들과의 교전과 여러 일들을 통해서 생겨난 그들 나름대로의 우정은 꽤 깊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들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런 우정과는 별개로 보안규정에 의해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는 일이다. 특히 법률에 매여서 살아가는 공무원의 처지에 있는 그녀이기에 더욱 말할 수 없다. 심지어 같은 조직의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화이트 키즈(White Kids).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상능력자 팀이다.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능통하게 구사하는 미국의 유소년 클로저들. 그들의 연배는 검은양 팀과 많이 유사하다. 그런데도 그들의 정체와 그들이 입국했다는 사실은 같은 유니온에게조차 비밀로 붙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신서울로 무사히 데려오라는 지시가 그녀에게 주어졌다.

  본래 다섯 명이지만 입국한 것은 세 명. 세 명의 남녀로 구성된 팀.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동그란 안경을 쓴 금발의 여성은 신서울에서 헤어질 때 송은이이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 경찰의 많은 협조 부탁드릴게요. 앞으로도 자주 뵈어요, 송은이 경정님?'

  자주 만나자니,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화이트 키즈. 해석하면 흰 색의 아이들일까?

  그렇다고 할 수 있는게 송은이가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은 마치 검은양 팀이 검은색의 자켓을 위에 걸치고 있는 것처럼, 후드가 달린 눈처럼 하얀색의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특히 무척이나 차분하게 생긴 한 남성은 머릿카락의 색 마저 흰색인데다가 눈의 색도 창백한 청색이라 원래 차가운 인상임에도 마치 얼음을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남성은 그와는 반대로 무척이나 활발한 성격으로 보였는데, 눈동자 색은 탁한 청색이어서 마치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화염과 함께, 무언가를 태우고 남은 재가 동시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위상능력자를 보고 경험한 그녀였지만 이 정도로 독특한 위상능력자는 그들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기억에서는 쉽게 그들의 이미지가 잊혀지지 않는다. 
    
  화이트 키즈. 화이트 키즈. 화이트 키즈. 화이트 키즈. 화이트 키즈. 화이트 키즈.

  "화이트…"
  "화이트?"
  
  채민우의 되물음에 송은이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아 그… 화이트! 수정 테이프!"
  "예? 갑자기 수정테이프는 왜?"
  "아,  그, 그게… 실은 내가 수첩에 잘못 적은게 있는데, 그걸 수정하려고…"
  "평소의 경정님이라면 종이를 찢어버리던가 찍찍 긋고 새로 메모하시잖아요."
  "아, 그, 그렇긴 한데… 습관을 좀 고쳐보려고, 아하하…"
  "경정님, 진짜 오늘 이상하시네요. 정말 무슨 일이 있는거 아닙니까?"
  "아, 아니라니깐! 야, 채민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해?"
  "경정님이 걱정되서 그런겁니다!"

  자신의 부주의함으로 잘못해서 발설할 뻔 했던 팀의 이름을 어떻게든 다른 화제로 넘겨보려고 그녀는 노력을 다해**만, 역시나 채민우는 이런 것에 있어서는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집요하다.
  그가 말한대로 그가 얼마나 송은이를 아끼기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그건 그것대로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지금에 있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다른 화제로 돌리기 위해 송은이가 다른 말을 꺼내려던 순간, 채민우의 왼쪽 어깨에 걸려있는 작은 워키(무전기)에서 수신음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로 무전이 수신된다.


  "현망에! 현망에 통사 없는지!"
  
  다급한 목소리에 채민우가 응답하기 위해서 워키의 송신버튼을 누르고 답한다.
  "현망에 HQ라고 알리고. 귀소측 신원확인바람, 이상."
  "여기는 섹터 5 정찰조! 논현역 사거리에 무척 큰 크기의 차원문이 생성되었고, 브레이크! 정찰조의 장비로 확인한 결과 다수의 C급과 B급 차원종이 출현함! 이상!"
   
  난데없는 충격적인 소식이 워키에서 들려오자, 채민우나 송은이 뿐만이 아닌 카페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동시에 덜컹 마음이 주저앉는 느낌이었다. 논현역이라면 이곳으로부터 채 5분 거리도 되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이다. 게다가 한창 복구작업이 진행중인지라 많은 민간인 인부들이 있을 그곳에 일반 차원종도 아닌 C급 이상의 차원종들이 다수 나타났다는 소식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저마다 철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카페 밖으로 뛰어나가 논현역으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이 일대를 거닐던 사람들도 동시에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평화로운 강남 GGV 뒷골목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이 난리 통에 또 다시 채민우의 무전기로 또 다른 무전이 수신된다.
  "여기는 섹터 6 정찰조! 논현역 사거리에서 북단 100미터 지점에 또 다른 차원문이 발생함, 브레이크! 이쪽 장비로 확인한 결과 A급! A급 차원종 한 마리, 아니 두 마리, 아, 아니 세 마리…"
  
  설상가상이다.
  특경대의 장비로는 C급 이상의 차원종을 상대하기에도 벅차다. 게다가 다수가 출현한 지금의 상황에 A급 차원종까지 세 마리나 출현했다는 보고는 너무나도 끔찍했다. 도저히 현재 강남에 있는 특경대는 그것을 진압할 수 없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유니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강남사태가 진압된 이후로 강남의 위상변곡률이 안정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전투요원의 배치를 현 상태로 유지할 것을 요청한 정부의 생각과는 달리 유니온 신서울지부는 강남에 배치되었던 수많은 전투요원들을 모두 최근들어 위상변곡률이 심상치 않은 강북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나마 이곳을 지키며 통상적인 정찰 업무를 수행하는 팀은 검은양 팀인데, 그들은 오늘 신서울지부 청사로 출장이기 때문에 비번이다. 즉 현재 강남에는 그 어떤 클로저 요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필 이런 날에… **."
  "야, 채민우. 총 챙겨."
  "송은이 경정님."
  "뭐해! 현장 지휘관이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되겠어? 이런 사이에 민간인들이 희생당한다고!"
  "예! 알겠습니다!"

  송은이는 벽에 기대어둔 자신의 총에 탄알집을 끼우며 노리쇠를 당긴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바로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고, 그녀의 뒤를 따라 채민우 역시 자신의 총에 탄알집을 끼우고 노리쇠를 당긴 후 카페 밖으로 뛰어나간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논현역 근방, 그곳에서 차원종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여기는 HQ! 현망에 건재하는 모든 통사들에게 전파한다! 논현역에 C급 이상의 차원종이 다수 출현하였다! 강남의 모든 경력은 완전 무장 상태로 10분 후까지 논현역 사거리 사방으로 집합하고, 브레이크! 집합 완료 후 HQ의 지시를 기다린다! 이상!"

  그의 무전이 끝나자 워키로부터 그의 통신을 수신한 이들이 지시에 대한 응답을 보내온다. 그러나 그것을 다 들을 새도 없이 채민우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신음이 지나고 상대가 전화를 받자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절박하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채민우입니다! 논현역으로 클로저들의 급파를 요청합니다! 강남 논현역 근처에 C급 이상의 차원종이 다수 출현하였고, A급 차원종까지 섞여있으니, 가능하다면 위상반전탄의 사용여부도 검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채민우의 다급한 전화를 들으며 송은이는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정류장에서 전장이 되어버린 논현역으로.






  길어서 업로드가 안되네요... 그래서 나눠서 올립니다.
  내용은 2-2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2024-10-24 23:18:1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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