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이슬비가 이세하와 함께 행사장을 가는 이야기 1

에토포시드 2018-01-06 5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반감을 사기 쉬운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의 손을 잘 빌리지 않는 편이었고, 그녀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땐 대개 상대가 수긍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슬비는 지금까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해도 큰 문제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슬비는 자신이 지금까지 유연한 화술을 갈고닦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평소 유니온 아카데미의 교육방식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던 그녀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매끄러운 사회생활을 위한 화술 교육에 시간을 할당하지 않은 아카데미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휴대용 게임기를 두들기고 있는 이세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세하는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푸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까다로운 리더가 지금까지 자신의 취미생활을 방해해온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그는 가늠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업무 시간에도 잠시만 짬이 나면 기어코 게임기의 전원을 켜고야 마는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전을 촬영한 동영상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을 편집하고 나니 분량이 너무 적어 방송물로 만들 수가 없더라는 박심현 요원의 이야기는 그로서도 충격적인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세하는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작전 중에 게임을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휴식 시간에 아지트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자신의 자유가 아닌가. 게임에 집중하느라 게임기를 고정하는 손가락이 다소 느슨해진 틈을 타 기어코 손을 빠져나가 그녀를 향해 날아가는 게임 콘솔을 맥없이 바라보는 것은 이제 사양이었다. 이세하는 콘솔을 잡는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방해한 것은 다른 방법의 공격이었다.

 

“이세하.”

“잠깐, 5분만.”

 

어쩌면 저렇게 타이밍이 안 맞을 수가 있을까. 이세하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슬비에게는 염동력 이외에도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모종의 능력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녀가 이세하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그를 부르는 때는 대체로 손을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다가 집중이 흐트러져 얼마 안 남은 목표를 놓친 것이 몇 번이던가. 용돈을 털어 새로 구매한 DLC의 클리어가 눈앞이건만 저 분홍빛 머리의 소녀는 어째서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것일까. 이세하의 머릿속에서 불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얼마 뒤, 이세하는 이슬비를 오래 기다리게 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스테이지를 마무리하고 게임을 세이브했다. 콘솔이 종료되는 것을 확인한 이세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슬비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슬비는 자신이 들어왔을 때 본 모습 그대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왜 불러?”

“응?”

 

이슬비는 그의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다급히 팔짱을 풀며 이세하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세하가 지금까지 ** 못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게임기를 집어넣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발표 수업에서 볼 법한 사무적인 요구사항을 전달하던 그녀였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낀 이세하는 아직도 당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라도 있나?”

 

이세하의 실수였다. 검은양 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족을 제외하면 인간관계라고 해봐야 동성 친구인 한석봉뿐이었던 그였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외의 것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에서 본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지뢰를 밟은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이세하도 눈앞에서 이슬비의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점점 붉게 물드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강대한 알파퀸의 아들이자, 본인 역시도 촉망받는 클로저인 그도 엎지른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세하는 자신의 정수리를 목표로 두꺼운 영어사전이 날아들고 있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슬비는 씩씩거리는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고, 지금까지의 몇 번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이세하의 무신경한 행**지는 지금까지 질리도록 보아왔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도 방금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눈앞에서 꽤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문지르고 있는 이세하를 보자 미안하다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머릿속의 분노를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에게 사적인 일로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이슬비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이세하를 불렀다.

 

“이제 정신 차렸어?”

“그래.”

 

제법 아픈 듯한 제스처를 취하더니만 타격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도 험악한 상황을 몇 번 겪은 클로저 나부랭이니 그럴 만도 했다. ‘평소처럼’을 머릿속에서 되뇌며 이슬비는 이세하에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슬비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녀 자신의 현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코믹월드, 라고, 알고 있지?”

 

결국 이슬비는, 앞으로 몇 년간은 후회할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야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

 

이세하는 코믹월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 아이템을 증정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코믹월드 행사장에 방문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세하는 이 분홍빛 소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코믹월드의 이미지를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보았지만, 생각나는 것은 좁은 공간 안에 우글거리는 사람과 거기서 기인하는 숨 막히는 공기뿐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 깐깐하고 고지식한 완벽주의자가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이세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이슬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일단 말을 시작하긴 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엔 ‘이렇게 이야기했어야 했다’라는 식의 예제들이 뒤늦게 떠올랐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말재간을 저주하며, 이슬비는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세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셜록 홈즈 관련 합동지를 판매하는 부스의 소식을 트위터에서 들었으니 사러 가야겠으며, 자신은 초행길이니 이런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이세하가 자신과 동행해줬으면 한다’라는 것이 이세하가 들은 그녀의 요지였다. 이슬비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녀를 놀리다가 본전도 못 찾고 부들부들 떨며 돌아온 제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열의가 이 정도일 것일 줄이야. 홈즈가 그려진 컵받침에 감히 컵을 올리지도 못하던 만화 속 주인공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세하는 그녀에게도 이런 부류의 장난이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에는 이세하가 무시하고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세하는 직설적으로 질문했다.

 

“너, 거기 뭐 하는 데인지는 알아?”

“간단하게 조사는 했어. 특정 미디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동인지나 관련 상품을 파는 곳이잖아?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매우 긍정적인 활동이지. 인상 깊었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이세하는 머리가 아파졌다. 이 반응을 보건대, 그녀는 ‘동인지’라는 단어를 국어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정의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를 코믹월드같은 곳에 데려갔다간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이세하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녀가 택한 동행인이 하필 자신이란 것 역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성인인 제이나 동성인 서유리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 둘에게는 이미 물어봤어. 유리는 코믹월드가 뭔지도 모른다고 했고, 제이 씨는..., 반응이 이상하던데. 그런 건 네가 잘 알 거라며 너를 추천해주셨어.”

 

이세하의 안에서 제이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이렇게 능글거리니까 결국 아저씨인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을 추천한 뒤에 속으로 제이가 얼마나 웃었을지는 굳이 그를 직접 ** 않아도 뻔한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이 광대놀음을 회피할 방도를 찾기 위해 핑곗거리를 찾아 머릿속을 뒤지던 이세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난 어머니가 반대해서 못 갈 것 같은데. 예전에 한 번 갔을 때도 어머니 설득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

 

이슬비가 그의 대답에 수긍하는 모습에 이세하는 조용히 안도했다. 그녀가 그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존경심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이세하는 그녀가 더는 자신을 귀찮게 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실은, 그리고 그의 리더는 그를 이 정도로 놓아줄 정도로 녹록치 않았다.

 

“그럼 내가 너희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을게. 그럼 문제없겠지?”

 

난데없는 제안에 이세하는 또다시 당황했다.

 

“네가 우리 어머니 번호는 어떻게 알아?”

“나는 팀의 리더야. 팀원이 부재중이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한 비상 연락망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오늘은 아무래도 액일이 분명했다. 이세하는 아침으로 돌아가 방에서 농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맹렬히 상상했다. 하다못해 쉬는 동안엔 게임을 좀 해야겠다며 검은양 아지트로 향하지 않는 모습이라도. 당연하게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핑곗거리가 떨어진 이세하는 결국 자신의 선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맘대로 해.”

 

하지만 이세하는 자신이 코믹월드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의 행사 때에도 이번 한 번 만이라는 약속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몇 주간의 투쟁의 열매를 얻어냈던 이세하인 것이다. 그랬기에 이슬비가 전화 한 통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허락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 이세하의 생각이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저런 유감스러운 이유로 전화가 간다는 것은 이세하로서도 기분이 다소 묘해지는 이야기였으나, 어찌됐건 상황을 정리하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그가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이세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슬비를 에스코트하여 코믹월드에 가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듣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어딜 가요?”

“저번에 세하 네가 갔던데 말이야. 글쎄, 너 오기 조금 전에 슬비가 전화를 해서 너를 좀 빌렸으면 한다지 뭐니? 어쩜 나이도 너랑 동갑인 애가 그렇게 야무진지! 그 애, 정말 괜찮지 않니? 저번에도 내가 이 말 했었나?”

 

이세하는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슬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아카데미에 다녀온 서지수가 그에게 이슬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붓감 운운할 때에 미리 선을 그어놓지 못한 것을 이세하는 후회했다. 물론 그 시점에서 이슬비와 이런 식으로 엮이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터였으니 의미 없는 후회였지만. 결국, 이세하는 다음날 학교에서 다음 주 주말에 코믹월드 행사장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표 예매를 이슬비에게 맡긴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2024-10-24 23:18:1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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