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鳥 - 4 - 추악하고도 아름다운 ②

비타짱하얘 2018-01-04 0


小鳥 - 4 - 추악하고도 아름다운 ②

  9번과 13번의 특별 대결 이벤트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13번은 교관의 말대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로든 일약 스타덤에 올라 연일 화제에 올랐고 본인이 뜨기만 하면 일면식도 없거나 평소 업신여기던 실험체들조차 우르르 몰려가서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무슨 비결로 갑자기 강해졌는지, 혹시 여태까지 힘을 숨겨온 것인지, 비밀 수술이라도 받았는지 여부 등등 **론에 가까운 추리까지 등장할 정도로 탑3 랭커 9번이 시설 최하위 13번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9번은 대결 이후 금방 힐링 팩터의 가공할 치료 능력 덕에 금방 제 컨디션을 되찾았지만 그건 몸뿐인 이야기였다. 혼이 빠진 듯이 넋을 잃은 채 비틀비틀 걸어 다니는 것은 물론이요,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네도 묵묵부답.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이고 그렇게나 좋아하던 트레이닝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게 됐다. 늘상 9번의 자랑을 늘어놓던 그의 담당관도 덩달아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소문도 들릴 정도였다. 더 이상 9번의 설 자리는 없어보였다.

  15번은 남말할 처지가 아니라고 자조하는 중이었다. 그녀도 설 자리가 이젠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 오전 트레이닝 시간에 13번은 11번과 같이 ‘그곳’에 가서 페어 트레이닝을 한다. 15번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개인 트레이닝 시간에 몰래 방을 빠져나와 둘의 트레이닝을 엿보곤 했다. 사실 이렇게 밥 먹듯이 규칙 위반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제 1 동 만큼은 교관의 영향으로 통제가 굉장히 느슨해져 있다는 것을 15번이 알 턱이 없었다.
  오후 대련에는 입장이 역전해서 이젠 13번이 15번의 역량 향상을 위해 힘조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는 어떻게든 15번에게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처지였다. 그 상황이 몇 주일도 아니고 단 며칠 만에 역변해버렸다.

  “요즘 영 아니잖아. 무슨 일 있으면 말 하지 그러냐?”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럼 상관없지만.

  무심하게 툭 던지는 13번이 살짝 얄미워지려고 했다. 요즘 15번이 영 아닌 것은 당연하다. 13번은 매일 11번과 페어 트레이닝을 하고 있고 15번은 툭 하면 자신의 트레이닝을 빼먹고 엿보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으니까.

  둘이서 페어 트레이닝 할 때가 즐거웠는데…….

  아무리 떨쳐내보려고 해도 ‘빼앗겼다.’라는 기분이 사라지질 않았다. 13번을 처음 만나고 나서부터는 즐겁고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11번이 13번에게 간섭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마치 지옥도와 같은 나날의 연속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열 번쯤 다시 생각해봐도 근본적인 문제는 단 하나였다.

  내가 너무 약해.

  더 이상 고집 피워가며 참을 자존심도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른 15번은 며칠 뒤 있을 무작위 대결에서 결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볼래?”

  평소와 같이 13번과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맞은편의 생소한 얼굴의 실험체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가슴팍을 보아하니 28번이다.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최초 240명이 있던 실험체가 반수로 줄어든 것을 감안해 7동부터 12동까지의 시설을 폐쇄하고 1동부터 6동까지로 통폐합 시켰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네가 그 13번이지? 진짜 시원했다고!”

  28번은 9번과 무작위 대결에서 패배한 뒤 있는 대로 비아냥을 들은 적이 있는 듯 했다. 9번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 28번은 13번을 추켜세우며 비위를 맞추려는 듯이 끝도 없이 입을 놀렸다.

  “그 자식 언젠가 큰 코 다칠 줄 알았거든! 뭐, 솔직히 말하자면 11번이나 99번이 그 주인공일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13번 네가 일을 낼 줄이야! 아무도 상상 못 했어.”
  “밥 먹어라.”
  “아니, 미안해라. 이런 얘길 하려던 게 아니었어. 이번 무작위 대결이 끝나면 곧바로 강화 시술이 있잖아? 그거에 관해서 요상한 소문이 있어. 여태까지의 시술을 한층 더 강화한 신기술이 개발됐다는데 그걸 적용시킬지 말지 아직도 관리자들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
  “밥 먹으라고 했지.”

  최근에 탑랭커를 잡아낸 유명인으로서 온갖 질문공세와 의미도 모를 아부에 시달려온 13번은 긴 말 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그대로 먹던 블럭을 내려놓고 28번을 노려봤다. 28번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조용히 미안하다고 중얼거린 뒤 식사를 재개했다.
  그런 한편 옆에서 아무 말도 않고 있던 15번의 뇌리에는 순간 어떤 단어가 스쳤다.

  Execution A

  원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음. 목숨을 걸 것.

  설마하고 생각했지만 금방 별 관계없을 것이라 다시 생각한 15번은 식기를 정리하러 가는 13번을 따라 부랴부랴 블럭을 입에 쑤셔 넣은 뒤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냥 둘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던 예전을 떠올린 그녀는 또 못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 11번 때문이야.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11번을 원망하고 있다. 그녀가 밉고 이젠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무리하게 착한 아이로 있으려고 하지 말자. 그냥 못된 아이가 되자.

  그리고 되찾는 거야. 13번과의 일상을.

  무작위 대결의 날짜는 폭풍전야처럼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

  “실험체들은 각자 배정된 대결장을 확인해라.”

  실험체 전원이 움직이는 큰 일정이 있을 때만 이용하는 대강당에 관리책임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실 무작위 대결 외에는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쓰임새가 없는 곳이다. 그들이 기억하기로 그 외에 이곳을 이용했을 때는 좀 더 어릴 적에 현재의 교관의 임명식을 했을 때와 아마도 몇 번째인가 모를 강화 시술 때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공식적으로 관리 시설의 입장을 표명했을 당시 한 번뿐이다.

  “이번 상대가 76번이야? 그 녀석 랭커잖아?”
  “응. 13위지. 난 이번엔 이길 생각 없어.”
  “근성 없네. 발버둥치지 않으면 폐기 당한다?”
  “너처럼 하위권은 아니니까 네 걱정이나 하셔.”
  “야야, 13번은 상대가 누구래냐?”
  “몰라. 누군진 몰라도 재수 옴 붙었지. 원래는 신났어야할 텐데 말야.”

  언제나 대결 직전에 지켜야할 규칙과 안전수칙을 읊는 책임자의 말은 그 누구도 듣지 않았다. 저번의 특별 대결은 공식 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탑3를 이겼다고 해도 순위 변동은 없었다. 고로, 13번은 표면적으로는 아직도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13번을 잡기 편한 사냥감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자명했다. 누가 뭐래도, 그가 탑3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실험체 전원에 교관까지 포함되어 직접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다느니 저러하다느니 하는 자질구레한 이슈들은 지금 15번의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몇 줄 건너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서있는 11번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원망스러운 얼굴을.

  “그럼, 각자 대결장으로 이동해라.”

  때가 왔다. 15번은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쥐고 뒤돌아서 대결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중무장을 했다. 평소에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잘 차지 않는 팔목, 팔꿈치, 무릎 보호대와 팔 보호대, 각반, 그리고 가슴보호대까지 온갖 방어구를 착용했다. 거기에 더해서 주 무장인 쌍검을 투척하거나 놓칠 경우를 상정해 여분의 검들도 허리춤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민첩함은 그만큼 떨어지겠지만 13번과의 대련을 떠올려보자면 이미 스피드에 신경 쓸 단계가 아니다. 차라리 맞더라도 더 버티는 쪽을 택하는 것이 낫겠다고 15번은 판단했다.



  대결장에 도착하자 11번은 이미 자신의 자리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 중이었다. 완전 헐벗은 꼴이다. 배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탱크탑에 허벅지의 위쪽부터 맨살이 드러나는 핫팬츠. 거기에 가벼워 보이는 짧은 재킷. 그게 그녀가 입은 것의 전부였다. 어지간하면 다들 착용하는 무릎 보호대조차 차고 있지 않다. 얕보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다만 들고 있는, 그녀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긴 줄로 이어진 두 자루의 쿠크리는 척 보기만 해도 흉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대전 상대가 그녀임을 확인한 날부터 15번은 담당관에게 부탁해 11번의 대련 데이터와 영상 자료를 닥치는 대로 받아내서 그녀를 연구했다.
  말도 안 되는 변칙술의 대가이다. 단순한 쿠크리라면 그녀의 쌍검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두 자루를 연결시키는 저 신축성 좋은 줄을 이용해 예상할 수 없는 다양한 공격 패턴을 구사하는 것을 영상을 돌려보면서 몇 번이고 확인했다.

  “반가워. 15번이지?”
  “응.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한다고 들었는데, 날 알아?”
  “에이 그래도 맨날 보는 사람도 몰라보면 안 되지 않겠어?”

  9번이 이 얘기를 들었다면 분노하다 못 해 땅을 치고 통곡할 것 같다.

  “매일 우리 대련을 봤단 말야?”
  “응! 요령 없는 13번과 달리 제법 센스 있어 보여서 기억하고 있었지.”

  이제 와서 칭찬해봤자 기쁘지도 않다. 게다가 13번에게 요령이 없다는 것도 백 만년 쯤 전 얘기가 된 지 오래다. 지금은 11번을 제외하면 시설 내 최강자 중 한 명이 된 것이 그 13번이다.

  “그리고, 살짝 걱정하고 있었는데 말야! 지금 널 보고 안심했어!”
  “걱정? 안심했다니 무슨 소리야?”
  “성적은 10년이 넘게 딱 중간. 승률도 10년이 넘게 딱 50%. 승률 100%를 찍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실 딱 반을 유지하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부탁하기도 전에 기합이 팍팍 들어가 있네? 전력을 낼 생각이지?”

  15번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 대해 조사했어?”
  “조사라니? 승패와 승률 데이터는 전부 다 공개돼 있잖아? 너도 내 공개 데이터를 실컷 연구했을 텐데? 나는 최초의 무작위 대결부터 찬찬히 너의 기록을 살펴봤을 뿐이야. 그리고 원래는 13번을 관찰할 생각이었지만 너도 꽤나 흥미로웠거든. 왜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15번은 이를 갈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이년은 다 꿰뚫어보는 걸까. 10년 넘게 함께 했던 파트너 20번도, 딱 붙어다니면서 매일 대련을 하던 13번도, 물론 그녀의 담당관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 한 그녀의 비밀을 11번은 얼마 되지도 않은 기간에 간파해버렸다.
  15번은 눈에 띠는 것을 싫어했다. 9번같이 존재감을 어필하지 못 해 안달이 난 타입은 가장 혐오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쓸 데 없이 관심을 사게 되면 아군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적도 늘어나는 것이 필연이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성적을 안 내버리면 폐기 처분 당한다. 관심을 거부하는 그녀라도 의미도 없이 죽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중간’이다. 위로 치고 올라가려 발버둥치는 실험체 무리들 속에서 중간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당히 이기고, 적당히 강해보이면 지면 그만이다. 어떻게든 담당관에게 칭찬 한 마디 들으려고, 관심 좀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들 사이에서 적당한 존재감을 유지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기에 13번은 그녀의 상식을 깨부순 인물이었다. 엄청나게 약하면서 칭찬도 원하지 않아, 관심도 필요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승률을 조절하는 것도 아냐. 자기가 원하는 대로 트레이닝을 하고, 원하는 대로 책만 읽으면서, 아군을 만드는데 힘을 쏟지 않고 적이 생길만한 행동도 주저하지 않아. 13번이라는 남자에게 푹 빠져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옆에 계속 있고 싶다.

  “너에게 대답해 줄 이유는 없어. 어차피 이번 대결에는 내 전력을 부딪힐 생각이야.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어? 그리고, 이번에는 내 쪽에서 말할 건데, 부탁이 하나 있어.”
  “으응~? 그으래? 뭔데? 말해봐!”
  “이번 대결에서 내가 이기게 되면……. 13번에게서 떨어져. 접근하지마.”
  “!?”

  11번의 이렇게 놀란 표정은 적어도 15번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통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작게 승리 포즈를 취했다. 그럼 그렇지, 이 요망한 것.

  “헤에~ 그런 거였어? 아하~ 그런 거였구나~? 아하하하하하~”
  “똑바로 대답해.”
  “좋아. 네가 이긴다면 13번에게는 일절 말도 걸지 않을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걸?”
  “……?”
  “내 승률이 100%란 거 잊었어?”
  “크읏……!?”

  11번은 말이 끝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비겁하다 뭐다 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대결장의 각자 자리에 선 그 시점에서 대결은 시작 판정을 갖게 된다. 11번이 오른쪽 쿠크리를 냅다 던졌다. 15번은 침착하게 날아오는 그것을 쌍검 교차 방어로 튕겨내고 오른쪽으로 튕겨나가듯이 뛰었다.
  튕겨낸 쿠크리를 여유로운 표정으로 수거한 11번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반대 방향으로 튀어올랐다. 그렇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순식간에 11번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 뒤?! 옆?!’

  분명 어디선가 습격할 것이다. 영상을 철저하게 연구했기 때문에 예상할 수 있었다.

  “핫!”

  15번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을 믿고 뒤돌아 11번의 배후습격을 방어했다. 순식간에 뒤로 돌아 공격한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무거운 검격이었다.

  “13번의 주특기를 흉내낸 건데 역시 익숙하구나?”
  “에잇!”

  ‘13번’이란 단어에 무심코 반응해 버렸다. 왼쪽 쌍검을 크게 휘두른 15번의 공격을 가볍게 숙여서 피한 11번은 그대로 다리걸기로 15번의 무게 중심을 흐트리고는 한 바퀴 돌아 그대로 발로 차 그녀를 날려버렸다.

  “크헉!”

  굉음과 함께 벽에 처박힌 15번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 시작부터 좋지 않다. 멋대로 친근하듯이 그의 번호를 부르지 말란 말이야!

  “쿨럭……!”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녀에게 11번의 왼쪽 쿠크리가 바로 눈을 노리고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아예 죽여버릴 셈인가? 가까스로 고개를 꺾어 피한 자리에 쿠크리가 날아와 벽에 꽂혔다. 그녀는 박힌 쿠크리를 회수하기 전에 검자루를 잡고 다른 손으로 거기에 이어진 줄을 잡아 힘껏 당겼다.

  “우옷?”
  “흐아아!!”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끌려오는 11번에게 쌍검을 휘둘렀지만 11번은 가볍게 오른손에 남은 쿠크리로 그걸 튕겨내면서 15번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벽을 박차고 내려오면서 왼쪽 쿠크리를 회수, 그대로 아래에 있는 15번에게 두 쿠크리를 처박았다.
  15번이 겨우 늦지 않게 회피한 그 자리에 또 다시 굉음과 충격파, 먼지구름이 퍼져나간다. 도대체 얼만큼의 위상력을 담은 일격이었을까. 먼지구름이 걷히자 9번이 13번과 싸우면서 만든 구덩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참상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하아……, 하아…….”
  “제법인데?”
  “그거 고맙네!”

  사실은 하나도 안 고맙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괴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태까지 무작위 대결에서 만나지 않은 건 다행일까? 반대일까?

  “그럼 다음 간다!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 건데 특별히 여기서 써주겠어!”

  그 다음 11번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묘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공중에……, 떴어?”
  “이것도 위상력 응용의 한 종류야. 나는 체공만 하는 수준이지만.”

  사실 실전 레벨은 아냐- 라고 말하며 11번은 두 쿠크리를 고쳐 잡더니 사정없이 날려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날리고 회수하기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15번은 정신없이 날아오는 쿠크리를 되받아치고 돌아갔다가 다시 날아오는 그것들을 되받아치기를 무아지경으로 반복했다.

  “하아아아아아!!!!!”
  “아하하하하하하하~~~!!!”

  몇 수나 튕겨냈을까. 제 3자가 보기에는 5초도 걸리지 않았겠지만 15번에게는 점점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래서는 끝이 없다. 반격을 하고 싶어도 거리가 너무 멀다. 검격에 더해 투척과 회수가 11번의 특기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잇!”

  간신히 틈을 잡은 15번은 허리춤의 검 중 하나를 급하게 뽑아 11번 쪽으로 날렸다. 제대로 조준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맞추려고 던진 것은 아니다. 11번이 날아오는 검이 희미하게 빛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바로 1미터 옆에 그것이 도착했을 때였다. 그 순간 검이 눈부신 섬광과 함께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터졌다. 이 날 이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그녀의 비기였다. 11번은 예상하지 못 했는지 얼굴을 찌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후우…….”

  쉬고 있을 틈이 없다. 11번이 이 정도로 KO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1초도 안 되는 새에 숨을 고르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나려는 11번의 위치를 특정한 그녀는 세 자루의 검을 더 뽑아 11번을 중심으로 삼각형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위치로 던져서 바닥에 박았다.

  “아닛……?”
  “마무리다……!”

  3자루의 검도 아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섬광을 뿜으며 폭발을 일으켰다. 15번은 공중으로 뛰어 오르면서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검을 더 뽑아 11번이 있을 터인 그 위치로 던졌다. 방심은 하지 않는다. 시야에 보이지 않더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한 낌새는 없다. 직격하지 않더라도 좋다. 그 다음부터는 두 손에 남은 쌍검으로 결착을 지을 셈이다.

  날려놓은 두 검이 마찬가지로 커다란 폭음을 일으키며 터졌다.

  ‘이대로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15번은 바로 검세를 고쳐 잡았다. 절대로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 상대는 탑랭커 중에서도 넘버원. 예상한 대로 11번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장비, 아니 장비라 부르기도 민망한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좋다. 빗나간 것은 아니다.

  “진짜 깜짝 놀랬네. 꽤 아팠어. 게다가 이 줄이 끊어진 건 언니한테 이 무기를 받고 처음이야. 혼나겠는걸~? 너 진짜 제법이란 말야? 칭찬하는 거야!”
  “마음에도 없는 소릴……!”

  15번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쿠크리 사이를 이어주던 줄이 폭발에 날아갔는지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이제 그 성가신 투척 회수 패턴은 없다. 단순한 검투라면 15번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11번은 가증스럽게도 깔깔깔 웃으면서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이해가 도통 되지 않는다. 이런!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다!
  두 여자는 각각의 손에 든 검으로 정신 나간 듯이 서로 난무를 하기 시작했다. 실성한 것처럼 웃으면서 쿠크리를 휘두르는 11번과 있는 대로 구겨진 얼굴의 15번의 공방이 한참이나 계속 됐다.

  ‘이 녀석?’

  11번의 노림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기 강탈이다. 튕겨내든 어떻게 하든 15번의 몸을 노리는 게 아니라 그녀의 검만을 집중해서 타격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름 13번의 파트너라고 상처입히지 않고 무력화시킬 셈인 걸까? 복장을 봤을 때도 부아가 치밀었지만 자신을 도대체 몇 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건지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치열한 난무 중에 15번은 아주 자연스럽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왼손검을 잡은 손에서 힘을 살짝 뺐다. 11번은 놓치지 않고 그것을 두 쿠크리 사이에 감아서 비틀 듯이 끼운 다음에 힘차게 바닥에 내리쳤다. 왼손검은 비명같은 금속음을 내며 11번의 발치 아래로 떨어졌다. 걸렸다!

  “선물 고맙네~? 이제 남은 하나도 받아볼까?”
  “그래! 너무 근사한 선물이라 눈물이 다 날걸!”
  “에?”

  15번은 재빨리 크게 백스텝을 해서 자리를 떴다. 순간 그녀의 왼손검이 화사한 빛을 내뿜더니 장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똑같은 검이지만 아까 투척한 것들과는 담아낸 위상력의 양이 차원이 다르다. 15번은 방심하지 않고 허리춤에 남은 예비 검을 하나 꺼내들어 다시 검세를 취했다. 제발 이대로 KO좀 되라고 빌고 싶지만 그런 어리광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어디로 올 거냐?!’

  폭발의 위력이 어찌나 큰지 먼지와 재로 이루어진 안개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너 진짜 제법이야.”
  “!”

  뒤? 말도 안 된다. 15번은 경악하며 뒤돌아 경계를 취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신체 강화로 스피드가 빨라졌다 해도 온 신경을 집중해 경계하는 그녀의 시야를 벗어났을 리가 없다. 아니면, 아까 공중에 붕붕 뜬 것처럼 또 다른 묘기를 부리고 있는 건가?

  푹.

  “아…….”

  방심은 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15번은 아랫배를 꿰뚫은 쿠크리의 칼날을 보면서 말을 잃었다. 뒤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11번은 15번과 검투를 벌이던 그 자리에서 투척 자세로 서있었다.

  “이것도 위상력의 응용이야. 내 목소리는 네 뒤에서 들린 게 아니라 귓속에 울린 거라구? 너무 경계했네! 아, 책망하는 건 아냐. 누구라도 뒤라고 생각했을걸?”

  먼지구름이 걷히고 드러난 11번은 폭발의 여파로 넝마가 된 옷을 걸치기만 한 꼴로 싱긋 웃고 있었다. 비장의 폭발의 직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확실하게 15번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 들어갔지만 그녀의 위상력 방호가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나……. 나는…….”

  아랫배를 꿰뚫린 아픔 때문이 아니다. 15번은 참지 못 하고 무릎을 꿇은 뒤 왈칵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졌다. 13번과의 미래를 걸고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했는데도 져버렸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너 이렇게 실력이 좋으면서 10년 넘게 중간만 유지했어?! 9번과 싸워도 좋은 승부가 되는 수준이잖아?! 15위 이내에 드는 건 일도 아니겠어! 나도 그 터지는 검은 상상도 못 했단 말야? 무진장 아파! 물건에 위상력을 담아 터뜨리다니 굉장한 응용이야!”
  “그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난 이 승부만 이겼으면……. 크으……, 쿨럭!”

  15번은 등에 박힌 쿠크리를 뽑으면서 피를 왈칵 토했다. 눈에서는 피가 역류했는지 눈물이 피눈물로 바뀌어 흘렀다. 슬슬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뚫린 아랫배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붉게 물든 시야 사이로 13번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것 같다. 힐링 팩터고 뭐고 그냥 여기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중요한 걸 말해줄게. 15번.”
  “어……?”
  “만일 네가 여기서 내게 이겼다고 한들, 넌 13번과 함께 있지 못 해.”
  “뭐……라고?”
  “싸우면서 너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봤어. 너에겐 ‘살겠다.’라는 강한 의지가 보이지 않아. 13번은 여태까지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그게 강하거든? 걔가 바라는 미래가 무엇일 것 같아? 우린 이 시설에서 언젠가 나갈 거야. ‘자유’를 손에 넣을 거라고. 넌 여기서 안주하고 싶지? 내게는 그게 보여. 언제까지나 너는 중간인 채로, 13번은 최약체인 채로. 걔가 언제까지고! 죽을 때까지! 너랑 그렇게 살고 싶어할 것 같아? 저~얼대 그렇지 않을걸?!”

  15번은 마치 사형선고를 듣는 기분으로 가만히 11번의 맹렬한 눈동자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화를 내고 있는 것 같다. 한 점 거짓말을 느낄 수 없는 올곧은 눈동자. 이게 11번인가? 이게 넘버원의 눈빛인가?

  “그런 건……. 본인에게 물어보겠어.”
  “아무쪼록 그러든지. 충격 받지나 말라고. 어쨌든 약속대로 나는 앞으로도 13번과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함께 열심히 더 강해지겠어. 이건 완전 내 개인적인 추천이지만, 너도 ‘바깥’을 지향해보는 건 어때? 이 퀴퀴한 곰팡내 나는 시설 말고! 13번도, 나도 환영해 줄 거야!”
  “…….”

  얼마 지나지 않아 승패 판정이 울리는 부저가 울렸다.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어서 모니터는 잘 보이지 않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결과는 명백하다. 여유롭게 자신의 피가 묻은 쿠크리를 회수하고 메인 라운지로 걸어나가는 11번의 뒷모습과 급하게 들것을 들고 뛰어오는 관리자들을 시야에 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15번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정신이 들자 보이는 것은 대결장이 아니라 힐링 팩터의 유리창이었다.

  “깨어났군.”

  힐링 팩터의 케이스는 환자의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자동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 첨단 의료 과학의 결정체라 불리는 이 힐링 팩터는 ‘어느 정도의 외상’만큼은 안에 투입되기만 하면 순식간에 완치시켜 버린다. 분명히 두꺼운 쿠크리 칼날에 꿰뚫렸던 그녀의 등과 아랫배도 흉터 하나 없이 치료된 상태였다. 세련된 금속음과 함께 열린 케이스 사이로 반갑고 친숙한 얼굴이 보였다. 13번이다. 여느 때처럼 뭔가 책을 들고 읽던 중이었던 것 같다.

  “기분은 어때.”
  “응……. 괜찮아. 근데 왜 여기 있어? 지금 몇 시?”

  기본적으로 병실은 부상자 이외에 들어올 수가 없다. 아니, 들어올 필요가 없다.

  “한밤중이야. 교관한테 특별히 부탁 좀 했어.”
  “교관님이? 허락해 주셨어?”
  “뭐, 연줄이라고 할까. 11번을 통해서.”

  11번. 그 번호를 듣자 순간 그녀의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또 11번이다. 잊고 싶은 통한의 패배의 순간이 다시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건 반칙 수준이다. 공중에 뜨는 데다 음파 조작까지…….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나 후련하기는 커녕, 좀 더 준비할 수 없었나, 조심할 수 없었나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봤어. 너희들 싸우는 거.”
  “?!”

  봤다고? 곤란하다!

  “어, 언제부터?”
  “난 랭킹 7위하고 맞붙었는데, 어이없을 정도로 금방 끝내버렸거든. 약하더라.”
  “언제부터 봤어!?”
  “너희들이 가만히 서서 뭔가 서로 중얼거리는 것부터.”

  처음부터- 라는 소리다.

  “바로 방에 들어가서 책이나 읽으려다가 네 상대가 11번 녀석이라길래 걱정이 됐지. 부랴부랴 달려갔어. 그 녀석,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흥이 오르는 성격이라 봐주질 않거든. 자기 말로는 싸움을 즐겨야 이긴다나?”

  순간 남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9번을 후드려 팰 때 보여준 13번의 모습은 11번보다 더 했으면 했지, 못 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보다도 걱정했다는 13번의 말에 15번은 살짝 얼굴이 풀렸다. 이게 13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항상 잔뜩 찡그린 얼굴에 좀만 거슬리면 버럭 성질을 내는 13번이지만 방심하고 있으면 갑자기 자상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15번은 다시 한 번씩 반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물어볼 게 있어.”
  “응…….”
  “왜 속였어?”
  “…….”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11번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15번의 실력은 명백하게 9번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위상력 컨트롤을 습득하기 이전의 13번 정도는 아득히 초월하는 경지였다.

  “동정한 거야? 그 이전의 파트너였다는 20번도?”
  “그런 거 아냐…….”
  “그럼 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납득을 해줄까? 아니, 제대로 설명하는 것도 두렵다. 13번은 오랜 세월 자신의 약함 때문에 괴로워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약한 척을 해온 15번을 지금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말하기 싫으면……, 무리 안 해도 돼. 너에겐 너만의 생각이 있겠지.”
  “…….”

  역시 13번은 자상하다. 자신을 혐오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15번은 울컥하고 뭔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원래 감수성이 풍부한 그녀였지만 요즘에는 더욱 우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저기……. 13번.”
  “어.”
  “11번한테 들었어. ‘바깥’에 나갈 생각이라면서?”
  “아……. 그년이 또 쫑알쫑알 떠들었나보군.”

  평소에 보던 씩씩대는 13번의 모습에 15번은 눈물을 흘리는 채였지만 피식 웃어버렸다.

  “울든가 웃든가 둘 중 하나만 해라.”
  “너랑 있으면 이렇게 돼버리니깐.”

  13번은 가만히 앉아서 15번의 시선을 피하는 모양새로 턱을 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다리를 떨어대면서 뭔가 눈을 감고 찡그린 채로 한참을 또 뭔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하아~’ 하면서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이건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한 거지만, 너니까 이야기 해주겠어. 벌써 11번이 하면 안 되는 말도 들려줘 버렸고. 잘 들어. 그 녀석에게 들은 거야. 걘 교관에게 들었을 테니 확실한 이야기야. 우린 평생 여기 갇혀 지낼 필요가 없어. ‘바깥’에는 우리들과 달리 싸울 수가 없는 ‘일반인’이란 놈들이 지천에 깔려있대. 교관 외의 과학자나 관리자들처럼 약해 빠진 놈들 말이야. 우리가 손가락 하나로도 머리통을 날려버릴 수 있는 허약한 놈들이 발에 채일 만큼 널려있다는 거지. 그런 바깥세상에도 우리 같이 싸울 수 있는 녀석들이 아~주 코딱지만큼 있는데, 그 수를 늘리기 위한 시설이 여기래.”

  13번이 갑자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영문 모를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15번은 필사적으로 사고를 회전시키면서 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애초에 ‘바깥’에 관심이 없는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봤자 혼란스러울 뿐이지만 13번이 아무 의미도 없이 들려줄 만한 이야기도 아닐 터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실력을 키우면 ‘바깥’에 내보내서 싸우게 만든다는 거지. 간단한 이야기야. 사실 너는 성적이 딱 중간이라 애매하긴 했는데, 오늘 싸우는 걸 보고 생각했어. 너라면 충분히 5위안에 들 수 있을 거야. 그 녀석이 교관에게 들은 바로는 상위권에 있는 실험체는 최종 시험을……”
  “잠깐, 기다려 13번!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어! 정말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거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넌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래?”

  직접 물어보기로 맘먹었던 그녀였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그녀는 당황한 채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당히 성적을 유지하면 밥도 주고 잘 곳도 주잖아? 생활에 딱히 불편할 것도 없고! 그래! 네가 좋아하는 책도 원한다면 가져다주잖아? 이젠 그, 무슨 컨트롤인가가 잘 돼서 성적 걱정할 필요도 없지? 굳이 나가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나갈 필요가 있지! 여긴 진정한 ‘자유’가 없어.”
  “자유?”
  “그래.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야. 누군가 정해준 일정이나 통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무섭지 않아?”
  “무섭긴 개뿔! 아주 기대돼서 미칠 것 같다.”

  15번은 마음속 깊은 곳에 절망이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11번이 한 말이 거짓이기를 신에게 빌고 싶은 심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13번이, 그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자신과 같은 곳을 보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 가슴을 커다란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 가지마. 나랑 여기 있자. 우린 폐기 처분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난 무서워. 왜 꼭 ‘바깥’에 나가야 해?”

  15번은 여태까지 말하지 못 했던 본심을 드디어 끄집어냈다. 13번은 그 말을 듣고는 경악에 물든 표정을 짓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그게 여태까지 열심히 안 한 이유냐?”
  “그, 그래! 맞아! 아니, 열심히 한 거야! 눈에 띠지 않고! 폐기 처분 당하지도 않도록 열심히 성적을 조절해왔어! 너랑 계속 같이 페어로 있고 싶어서! 그래서!”
  “**.”
  “저기, 13번? 방금 뭐라고……?”
  “닥치라고 했다.”
  “13번……?”

  일상적으로 성질을 내는 13번의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숨길 생각도 없는 노기를 띤 그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15번을 향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13번의 직접적인 분노를 온몸으로 느끼고 두려움에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 그는 그녀를 전력으로 ‘거부’하고 있다.
  13번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앉아있던 의자를 난폭하게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날아가버린 의자는 벽에 부딪히더니 요란한 소음을 내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나중에 이걸로 벌칙을 받든 알 바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뱃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멍청한 년아! 고작 그딴 이유로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나랑 페어를 계속 하고 싶다고?! 밖에 나가서 하면 그만이잖아!!!! 내가 한 얘긴 너한텐 죄다 개소리였구만?! 한 귀로 듣고 그냥 흘려버렸어?! 내가 뭣 때문에 여기서 10년을 넘게 피토하면서 노력했는지 알기나 해?!!!!”
  “잠깐만, 내 말 좀 들어줘!”
  “뭐가 그렇게 무섭냐고!!! 바깥에 나가면 뭐! 세상천지 모든 인간들이 우릴 죽이려고 덤비기라도 할 것 같냐?! 만약에 그렇다고 한들!!! 너랑! 나랑! 11번, 그 정신 좀 이상한 년이랑! 셋이서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하면 될 거 아냐!!!”
  “미, 미안, 미안해……. 하지만…….”
  “하지만, 뭐어어어!!!!!!!!! 내가 도대체 너 때문에 얼마나 고민을……!!!!!!”

  13번이 거기까지 노성을 지른 순간 이상을 감지한 관리자들이 무슨 소동이냐며 병실 문을 열고 뛰쳐 들어왔다. 박살이 난 의자를 본 그들은 당연히 씩씩대고 있는 13번이 원인임을 파악하고는 그를 구속하려 들었다.

  “놔!”
  “가만 있어!”
  “끄아아아악!!!”

  그들은 비상시를 위해 들고 있는 대위상력 충격기를 13번의 등에 갖다대고 가차없이 버튼을 눌렀다. 고통에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본 15번은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힐링 팩터 안에서 나오려고 버둥댔다. 하지만 다리에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금방 무게중심을 잃고 고꾸라지기 직전의 모양새가 돼버렸다.

  “실험체 15번,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했지? 말해보렴.”
  “아,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제가 나빠요! 풀어주세요!”
  “괜찮아. 협박이라도 당했니?”
  “아니예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끌려가는 13번에게 손을 뻗었다. 제발,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 최소한 이야기만이라도 더……!

  “잠깐 놔봐. 얌전히 있을테니까! 저 녀석한테 할 말이 있어……!”

  후욱-! 후욱-! 하며 숨을 고르며 내뱉는 13번의 말에 관리자들은 기백에 눌려 그만 구속을 풀어주고 말았다. 하필 최근에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그라서 일종의 미지의 공포감을 느껴버린 것일까. 만일 이 순간 13번이 작정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약속대로 딱 몇 마디만을 더 했다.

  “어이, 15번. 난 ‘바깥’을 목표로 할 거야. 네가 정 싫다면 여기서 썩어서 죽든지 맘대로 해. 난……, 11번과 단 둘이서라도 바깥으로 나가겠다.”
  “잠깐……!”

  그 말을 끝으로 13번은 뒤도 안 돌아보고 관리자들과 함께 병실을 떠나갔다. 15번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힐링 팩터에서 상반신만 내민 채 참지 못 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우린 이 시설에서 언젠가 나갈 거야.’
  ‘11번과 단 둘이서라도…….’
  ‘자유를 손에 넣을 거라고.’

  11번이다. 모든 것이 11번과 얽히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11번이 괜히 9번과의 대결을 주선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날은 오지 않았다. 그냥 냅두면 어떻게든 둘이서 할 일이었을 텐데 쓸 데 없는 참견을 해서 13번이 강해지게 만들었다. 불필요한 바람을 불어넣은 것도 그년일 것이다. ‘바깥’? ‘자유’? 13번이 느닷없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한 것도 다 그년 탓이다. 오늘도 11번에게 이기기만 했다면 더 이상 그년의 방해는 받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괜찮니? 15번!”

  그녀의 담당관이 긴급연락을 받았는지 허겁지겁 병실로 달려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그녀가 아는 한 담당관은 좋은 사람이다. 늘 중간을 유지하는 그녀를 책망한 적도 없다. 아마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줄 것이다.

  “담당관님…….”
  “13번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괜찮아요. 걘 저 때문에 화가 난 거예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 아무튼, 무사하니 다행이다. 지금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오늘 잘 싸웠다.”
  “헤헤……. 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한 발짝이 부족했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강했더라면 오늘이라도 그년에게 이겨서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렇다. 조금만 더…….

  “곧 있으면 강화시술이죠?”
  “그렇지. 하지만 너는 좀 더 안정되면 하자.”
  “네, 그건 좋아요. 근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 그래! 뭐든 말해보렴!”

  원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음. 목숨을 걸 것.

  “익스큐션 A에 대해 말해주세요.”


  담당관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을 보고 15번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2024-10-24 23:18:0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