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鳥 - 3 - 추악하고도 아름다운 ①

비타짱하얘 2018-01-03 0


小鳥 - 3 - 추악하고도 아름다운 ①

  15번은 평범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또 평범한 실험체였다. 특출나게 뛰어나지도, 눈에 띠게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랭킹도 늘 중위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무작위 대결의 승률이 49%와 51%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그 안정감의 증거였다.
  오후 대련 파트너였던 20번이 강화 시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는 파트너가 바뀐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10여 년을 페어로 지낸 20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는 혼자서 펑펑 울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감성을 지녔던 것이다.
  새로운 파트너가 된 13번의 첫인상은 미묘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인상은 어디에 비할 바도 없이 더러운데 평소 언행은 얌전함 그 자체였다. 그래도 잘못 심기를 건드리면 금방 화를 낸다. 하지만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화를 내지는 않는다. 화를 내도 사과하면 금방 풀린다.
  독서를 아주 좋아한다. 본인 왈, 할 만한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15번이 보기에는 그냥 본인이 책 읽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 대련을 했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저 13번의 화염 공격을 2차례 피한 것 뿐에 볼과했는데도 그가 혼자서 지쳐 쓰러져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이겨버렸다.

  “몰랐냐? 나 시설 랭킹 꼴등 낙오자 쓰레기야.”
  “저기……, 전 파트너는?”
  “내가 너무 약하다고 교체 신청 당했다. 왜? 너도 바꾸고 싶어졌냐 벌써?”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엇다.

  13번은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는 전환기를 준 인물이었다. 평범하고 소심한 15번은 그렇게나 약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그가 부러웠다.

  “꺄앗!”
  “뭐야 15번이냐?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못 생긴게!”

  식당에서 다른 실험체와 부딪혀 죽그릇을 엎어버린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15번의 잘못이 아니라 앞도 안 보고 떠들면서 성큼성큼 움직이던 상대방 쪽 책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본인이 항의하지 않는 한 굳이 다른 실험체가 나설 이유도 없었고 그녀에게는 직접 따질 배짱 같은 건 없었다.

  “야.”
  “엉??”
  “사과해라.”
  “뭐야 이 자식아? 너 13번 아냐? 만년 꼴찌 쓰레기 자식!”
  “그게 뭔 상관이야. 당장 이 녀석한테 사과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뒤늦게 이해한 15번은 필사적으로 13번을 말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몸싸움이라도 나면 13번에게 너무 큰 민폐를 끼치게 된다! 머릿속엔 그것밖에 없었다.

  “13번!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 그만!”
  “내가 안 괜찮아. 이 썩을 놈의 자식, 사과 받아내야겠다.”
  “네가 대체 무슨 상관인데 나서고 **이냐?”
  “페어다.”
  “뭐?”
  “대련 파트너라고, 이 엿 같은 ***야!”

  13번은 그대로 들고 있던 죽그릇을 상대방 얼굴에 박아버렸고 필연적으로 둘은 뒤엉켜 마구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출력 조절이 잘 안 되는 화염 공격뿐인 13번이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벌은 나란히 독방 1주일 감금으로 똑같이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감금 해제가 되는 날. 15번은 독방 앞까지 그의 마중을 나갔다.

  “미안해.”
  “뭐가. 사과하지마. 머리 숙이지도마!”
  “아니, 나 때문에…….”
  “안 그러려면 충분히 안 그럴 수 있었어. 넌 상관이 없다. 그건 그렇고 배고프네.”
  “아, 그럴 거 같아서 블럭 숨겨왔어! 먹을래?”
  “어? 어어…….”

  대결 이외에 입고 다니는 평상복에는 주머니 같은 건 없기 때문에 따로 블럭 같은 것을 숨겨오려면 제법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이것도 아주 확실한 규칙 위반이기 때문에 걸리면 바로 독방행이다.

  “일주일간 간뗑이 좀 키웠나**?”

  천진난만하게 씨익 웃으면서 블럭을 우물우물 먹는 13번을 보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화사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마도 두 뺨도 벌겋게 상기됐던 것 같다.
  그 때부터였다. 그녀가 매사에 발랄하게 행동하려 노력하기 시작한 것. 당당하게 행동하기 시작한 것. 시비가 붙으면 바로바로 따질 만큼 배짱을 키우기 시작한 것.
  그녀의 모든 생각의 중심이 13번이 되어버린 것.

  이후 그녀는 13번과의 대련 때 서로 싸우기 보단 협력해서 훈련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대련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역량차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13번은 자존심이 센 편이었지만 현실을 ** 못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뭐, 또 교체당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그리고 그녀는 관리자에게 둘의 대련시간에 훈련을 할테니 샌드백이나 과녁과 같은 적절한 도구를 갖추어줄 수 없는지 물어봤다. 사실 대놓고 통제에서 벗어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 15번은 겁***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13번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교관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통제 거부로 폐기 처분 당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15번은 지금도 모른다.

  “파트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한데. 어이 주임님. 내가 허락하겠어. 준비해줘.”
  “아, 아무리 교관이라고 해도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준비해달라고 했어. 내가 말이지. 권한이라면 당신이 행사하면 그만 아냐?”

  관리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교관의 기세에 눌려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자리를 떴다. 교관은 그 뒷모습을 웃으면서 배웅한 뒤 15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질 않는 눈과 입의 양쪽으로 길다랗게 이어진 흉터 때문에 흉흉한 인상이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인 15번도 그것에는 기가 죽었다.

  “15번이었나? 네 파트너에게 감사하렴.”
  “예? 13번한테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긴 하는데…….”
  “푸핫, 그런 의미가 아냐. 13번은 좀 특별한 개체거든.”
  “특별?”
  “그래. 조만간 모두가 알게 될 날이 오겠지. 그럼 가마. 그 녀석을 잘 지도해보라고.”
  “아……. 교관님! 감사합니다!”

  긴 복도 끝으로 사라져가는 교관에게 감사인사를 한 15번은 그대로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내일부터는 13번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지만 뭐라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행복했다.

  13번은 생각 외로 고분고분 15번의 훈련 메뉴에 따라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누굴 가르칠 만한 실력은 아니기에 굼벵이 기어가는 듯한 성장세였지만 페어 트레이닝을 시작하고나서 약 3개월이 지나자 어떻게든 15번과 대련이 성립되는 수준까지 실력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오늘은 아까웠네?”
  “**! 이 놈의 위상력만 더 있었어도……!”
  “그래도 몇 달 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 아냐? 이제 시설 내 꼴찌는 아니잖아?”

  놀랍게도 13번보다도 더욱 가망이 없는 실험체가 다른 동에 존재했다. 운이 따라준 것인지 3개월 간 3번의 무작위 대결에서 가까스로이긴 해도 2번 승리한 13번은 시설 꼴찌에서 뒤에서 5등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여전히 엘리트가 많은 제 1 동에서는 부동의 꼴찌이지만 13번 입장에서는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야 그렇지……. 뭐, 너한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으……, 응! 앞으로도 힘내닫! 아얏……!”

  혀 깨물었다.

                                         ∴

  “13번, 미, 미안해…….”
  “이 **아. 나 죽을 거라고?”
  “진짜 미안해! 나도 그만 분위기를 타서…….”
  “사과하지마라. 소용없으니까. 게다가 따지고 보면 네 잘못도 아니고. 제삿밥 준비나 해.”

  15번은 전에 없는 후회를 하면서 울고 있었다. 특별 대결이라길래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 같이 즐거워했을 따름이었다. 일종의 탑랭커 1위의 권한으로 주최하는 이벤트라고만 생각했다.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는 13번을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한 그녀는 자기 방에서 훌쩍 훌쩍 하며 흐느껴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미안……. 미안해……. 히잉……!”

  다시 13번과 만나기 이전 소심했던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다.
  더욱 싫은 것은, 13번이 화를 내기야 했지만 결코 15번을 탓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줬으면 좀 나았을 지도 몰랐겠는데. 좀만 똑똑하게 상황파악을 했더라면, 먼저 화를 내면서 9번과 11번에게 따지고 들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 성격을 바꾸려 노력해왔던 걸까? 정작 중요할 때는 멍청하게 아무것도 안 했지 않았나.
  더 이상 가만있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그대로 방을 나와 13번을 찾아가기로 했다. 어떻게든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면 빠져나갈 방도가 있지 않을까? 최악의 경우에는 13번을 설득시켜서 엎드려 빌도록 만들어볼까?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다. 13번이 죽는 꼴을 볼 바에야 그에게 미움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살려보도록 하자. 그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본 것은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히고 끌려가는 13번의 뒷모습이었다. 그 누군가는 그녀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1위의 탑랭커이자 제 1 동 최고의 트러블메이커인 ‘11번’이었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아간 장본인인 그녀가 대체 왜? 혼란에 빠진 15번은 조심조심 둘의 뒤를 따라갔다.
  시설 내 최고 금기인 시설 외부 이탈을 하는 둘을 본 15번은 더 이상 따라나설 용기를 잃어버렸다. 어쩌지? 살아 생전 최고의 갈등을 경험하게 된 그녀는 둘이 나가고 나서 다시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갈팡질팡 왔다갔다를 정신없이 반복했다. 나도 따라 나가볼까? 그랬다가 셋이서 사이좋게 폐기 처분 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11번은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자기만 나갈 것이지 왜 13번을 같이 데리고 나간 거람? 무슨 짓을 하려고?

  그렇게 손톱을 깨물어 가며 고민하는 사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두 사람의 말소리가 문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15번은 허겁지겁 바로 옆을 통하는 통로의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겼다.

  마침 쓰레기통이 있어서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안도하면서 숨어있자니 이윽고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강하니까 즐기면서 싸우는 거지. 난 목숨이 달려있다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 안 들어봤어?”
  “어디서 또 그럴싸한 말은 주워들어 가지고!”

  13번과 11번이 친근하게 티격태격하고 있다.

  ‘저 자리는 내 껀데……!’

  그녀의 마음에 시커먼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

  다음날 오전.
  15번은 이번에야말로 13번과 잘 이야기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규칙을 어기고 개인 트레이닝 시간에 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녀가 본 것은 11번과 같이 어제와 같은 곳으로 향하는 13번의 뒷모습이었다.

  한 발 늦었다! 저 가증스러운 년! 너에겐 규칙도 없는 거냐!

  15번은 어울리지 않게 작은 입술로 욕을 뱉고는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이번에는 멍청하게 구경만 하지 않겠다. 폐기 처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11번에게 달려들어 따질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그녀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둘을 미행했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둘은 밖으로 나간 뒤 문을 굳게 닫았다. 15번은 딱 60초를 센 뒤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가만히 열었다. 11번과 13번은 딱히 멀리 가지도 않았다. 문과 가까운 곳에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녀도 바깥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니 파란색의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우와…….”

  자기도 모르기 탄성이 나온 것을 깨달은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기 입을 손으로 막았다. 지금 이런 걸 보면서 경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조금 멀지만 집중하면 둘의 대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아직 서투르지만 청력 강화에 위상력을 싣는다.

  “어렵지 않아! 돈 워리, 비 해피!”

  무슨 소리야?
  11번은 워낙에 목소리 톤이 높고 볼륨 자체가 크기 때문에 제법 들리지만 13번의 조곤조곤한 말은 거의 들리지가 않았다. 원래 생각으로는 틈을 봐서 11번에게 달려가 이것저것 따질 생각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13번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서 나가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13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린다면 좋겠는데!

  “13번은 분명 위상력을 보라색 불꽃으로 만드는 게 특기지?”
  “부럽단 말이지~. 난 특기라고 할 만한 건 없거든.”
  “그거 말이지~? 이것도 언니가 말해준 건데, 난 다른 사람들보다 능숙할 뿐이지, 위상력 컨트롤이란 건 누구나 쓰는 기술이래. ‘바깥’의 능력자들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거라고 했어. 참고로 언니같은 경우에도 별다른 특수한 능력 없이 위상력 컨트롤만으로 겨우 그 수준에 도달했다니깐 말이지. 그걸 보완하기 위해 검술을 단련한거고.”

  여전히 11번의 말만 똑바로 들린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런데도 하나하나 성질도 내지 않고 11번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13번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뭔가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지금 나가서 11번에게 따지면 오히려 방해가 아닐까? 그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애초에 11번에게 따지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오로지 13번을 위해서였으니까. 반대로 그에게 방해가 되는 짓을 하면 그야말로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둘을 관찰하던 15번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됐다. 이번만큼은 13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한 힘찬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불은…… 생명의 상징이다.”

  그가 펼친 오른손에만 보랏빛 불꽃이 영롱이며 번쩍거렸다. 척 보기에도 안정되어 보인다. 13번의 눈은 그의 보랏빛 불꽃만큼이나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봐온 그 어떤 그와도 다르다. 뭔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참 예쁜 불꽃이야.”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된 15번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문을 닫은 뒤 방으로 뛰어갔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현실의 부조리함에 마음이 먹힐 것만 같았다. 그 말은 자신이 언제나 해주고 싶던 말이었다. 언젠가 해주려던 말이었다.

  ‘왜 내가 아닌 거야? 왜 11번이 그런 말을 해주는 거야?’

  쭉 옆에 있던 건 자신인데. 말을 붙인지 이틀밖에 안 된 11번이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가져다 줬다. 나도 11번만큼 강했더라면 좋았을까? 이제까지 둘이서 잘 지내왔는데! 왜 우리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거야! 왜 네가 그에게 나보다 더 도움이 되는 거야?!

  15번은 그 날 점심을 걸렀다. 식사를 하는 것도 통제 하에 관리되므로 멋대로 굶은 것이 들킨다면 그것도 규칙 위반으로 벌칙 확정이지만 9번과 13번의 특별 대결 때문에 분위기가 끓어 오른 제 1 동의 관리자들은 정신이 없는 탓에 15번이 명부에 체크만 하고 식당을 나간 것을 눈치 채지 못 했다.

  “점심 먹을 때 안 보이던데?”
  “오늘은 식욕이 없어서, 조금만 먹고 빨리 나왔어.”
  “네가? 다른 녀석도 아닌 네가?”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렇다고 오후 대련을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싸우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랬다간 13번이 불필요한 걱정을 할 수도 있다. 아니, 걱정을 해줄까 과연? 이젠 11번이 있잖아? 15번 같은 건 이제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뭘 해도 평균치인 15번과 탑1인 11번. 둘 중 골라야 한다면 단연코 11번 아닐까?

  “뭐 그래. 어찌됐든. 오늘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난 어제의 나와 다르거든!”

  알고 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15번은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겨나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다.

  ‘11번 덕분이겠지!’

  질 수 없다.
  누구에게 질 수 없다고 느끼냐면, 당연히 13번이 아니라 그녀의 눈에만 그의 뒤에 환상처럼 어른거리는 11번의 그림자이다. 시커먼 것이 또 그녀의 마음에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15번은 13번이 어떤 행동으로 올지 탐색했다. 평소 같으면 일단 그가 먼저 선공을 날리러 달려올 것이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막무가내로 덤벼들지는 않는다. 다리를 이용한 좌상단, 우상단, 좌하단, 우하단 공격과 정권지르기를 페이크를 섞어서 맹렬하게 공격해오다가도 순식간에 배후를 잡는 것이 13번의 주력 전투 스타일이었다. 틈을 엿본 필살의 화염 공격이나 그가 ‘연옥구’라 이름붙인 원거리 수단도 고려해**다.
  그러나 15번의 몸에 배인 여태까지의 ‘13번 대처법’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콰당!

  정신을 차려보니 시야에는 대련실의 천장이 보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지?

  “어때?”
  “어……?”
  “아직 이 속도가 좀 익숙하진 않지만 말야. 빠르지? 반응을 못 하던데.”
  “어…….”

  신체 강화인가? 아니면 그 일종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순간 모습이 사라지는 13번의 모습이었다. 직후에 충격과 함께 시야가 빙빙 돌아버렸고 눈을 떠보니 이런 상태다. 그의 말대로 반응은 커녕 그의 움직임을 인식하지도 못 했다. 가능한 건가? 하루 만에 이 정도의 변화가?
  물론 상식적으로 하룻밤 만에 이만큼 움직임이 달라질 리가 없다. 15번도, 11번도, 심지어 본인도 알아채지 못 한 사실이지만 13번이 개인 트레이닝 시간에 행하는 고강도 신체 단련은 시설 내 그 누구도 따라하지 못 할 수준의 ‘고행’에 가까운 행위였다. 적당히 위상력에 의존하면 되기 때문에 시설 내의 실험체들의 트레이닝 수준은 13번에 비하면 대부분 체형을 유지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11번이나 9번 정도가 어찌어찌 비슷한 정도의 트레이닝을 행하고 있을 뿐이다.
  날개 잃은 새가 날개를 다시 달았을 뿐인 이야기였다.

  “하하……. 졌네.”
  “그래! 내가 이겼다!”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
  “어, 11번 녀석이 위상력 낭비가 심하다고 요령을 좀 알려줬거든. 거참, 그 년 설명을 오지게 못 해서 감 잡는데 애먹었다. 참, 이 얘기 다른 놈들한테 하면 안 된다. 특히 관리자 놈들 귀에 들어가면 나 진짜로 폐기 당할 수도 있어.”

  13번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로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몇 개월 간 딱 붙어다니면서 알게 된 그의 성격의 일면이었다. 15번은 순수하게 축하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은 그렇게 오래 같이 지내면서도 도움이 되지 못 했다는 회한, 그리고…….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한 11번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3일 뒤면 대결이지?”
  “그래. 별로 안 남았다만, 남은 두 대련도 잘 부탁한다.”
  “응. 맡겨줘!”

  맡겨달라고 말은 하지만 방금 보여준 13번의 움직임을 떠올리자니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불공평해. 분해.

  왜 그 녀석일까? 왜 11번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자기 멋대로 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다 빼앗아가 버리는 걸까? 이제 13번의 옆자리도 자기가 꿰차겠지. 왜 나는 힘이 부족한 걸까? 좀 더 강해지는 방법은 없을까? 상상 이상으로 강해져버린 13번의 옆에 있으려면 나도 그만큼 강해져야 할텐데!

  -11번만 없었더라면…….

  적어도 강해지진 못 하더라도 13번과의 즐거운 페어 생활은 지켜낼 수 있었을텐데!

  주체할 수 없는 시커먼 감정은 15번의 제어를 금방이라도 벗어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혼자서 고개를 붕붕 돌리면서 생각을 고쳐먹으려 애썼다. 안 된다. 그런 건 너무한 생각이다. 13번은 이제서야 본인이 그토록 바라던 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11번만 없었더라면- 이라니, 13번이 계속 약하면 좋겠다- 라니,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다.

  13번이라면 약한 자신이라도 계속 함께 있어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굳게 믿기로 결심했다.

                                         ∴


  교관의 검이 대결장의 바닥을 찼다.
  순간 9번은 주무장인 배틀액스를 움켜쥐고 오른발로 바닥을 박찼다. 선제공격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시설 내 최약체인 13번이 자신의 돌격에 반응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헷.”

  그러나 9번의 배틀액스는 아무것도 없는 대결장의 바닥을 내리쳤을 뿐이었다. 굉음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13번은 최초 대결장에 등장했을 때의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와 살짝 백스텝을 한 뒤였다.

  “피했어?”

  -확실히 15번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게 빠르다.

  13번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허세도 일종의 무기다. 애초에 9번의 혼신을 다한 돌격을 눈으로 보고 피한 것만 해도 며칠 전에는 불가능했던 묘기다. 조금의 허세 정도는 부려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해봐.”
  “이 자식이…….”

  9번은 이번엔 적당히 봐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도발에 걸려주겠다고 정했다. 그래, 방금은 무의식적으로 봐준 것이 분명하다. 13번이 너무나 약한 탓에 마음 약한 자신의 심층심리에서부터 살해하는 것을 주저한 것이 분명하다.

  “으아아!!!”

  고로, 다시 한 번 오른발로 발구르기를 하며 뛰었다.
  이번에도 9번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말도 안 돼?!”
  “돼!”

  13번은 순식간에 9번의 배후로 돌아 발뒤꿈치로 찍기를 시도했다.

  “흥!”

  9번은 순식간에 뒤돌아 배틀액스의 손잡이로 13번의 공격을 흘려버렸다. 과연 썩어도 준치, 탑3의 랭커라고 할 만 하다. 9번이 흘려낸 13번의 뒤꿈치도 바닥을 치며 굉음과 함께 폭풍을 일으켰다.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백스텝으로 거리를 벌린 13번은 다시 탐색을 했다. 과연 이것이 강자의 세계인가. 10년 넘게 문턱도 못 밟아봤던 세계에 들어온 그의 감상은 뭐라 말하기 복잡한 것이었다. 탑3의 공격을 피하고, 자신의 공격을 그 탑3가 막아낸다. 며칠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 했던 일이다.

  그런데 뭔가가 부족하다. 단 몇 수밖에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확연히 느껴지는 위화감이 있었다. 그게 뭐였지?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싸움을 즐겨봐.’

  순간 뇌리에 11번의 목소리가 스치듯 들린 것 같았다.
  그래. 잠깐 잊고 있었다. 그녀가 최초로 준 조언을.

  살짝 눈만 굴려서 11번을 바라보자 그녀의 입가에는 그 날 밤 보여준 사악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마치 13번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후후후, 하하하, 캬하하하하하핫!!!!”
  “뭐, 뭐야. 실성했나?”
  “아니, 아니.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서 말야. 지금 굉장히 기대되거든.”

  11번에겐 또 한 번 고맙다고 해야겠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 전투 중에 느낄 수 있는 정열, 환희, 감탄! 그야말로 도파민과 엔돌핀이 분비되어 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그 느낌. 바로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워낙 오랜 시간동안 패배만 줄기차게 했더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자, 놀아볼까?”

  순간 13번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9번은 필사적으로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대단히 빠르지만 아직 반응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이제는 왜 갑자기 13번이 이토록 강해졌는지 의문을 가질 틈도 없다. 대결 개시 직전까지 가지고 있던 여유를 부릴 수도 없게 됐다. 눈앞의 상대는 그런 존재다. 9번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아!!!”
  “크읏!”

  배후로 돌아올 줄 알았던 13번이 별안간 눈앞에 나타나서는 정권찌르기를 시전했다. 말도 안 되는 스피드다. 이런 느낌은 아주 익숙하다. 매일같이 맛보고 있다. 이건 마치-

  “11번-”
  “뭐가 어째?! 캬하하하하하핫!!!”

  가까스로 피한 13번의 주먹이 슥 펴지더니 거기에 흉흉한 보랏빛 불꽃이 감돌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9번은 가까스로 위험을 감지하고는 방향도 모른 채 일단 그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정신없이 뛰고 낙법을 구사한 뒤 13번의 위치를 찾았다. 그는 불꽃 폭발을 일으킨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9번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단해! 괜히 3위는 아니란 거군. 아니면 내가 아직 멀은 건가?”
  “으으……, 웃기지, 마아아아앗!!!”

  9번은 배틀액스를 붕붕 돌리고는 위상력을 담아 바닥을 내리쳤다. 자신이 설정한 적을 쫓는 대지의 파도. 굳이 적중시키기 보단 재빠른 적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는 기술이었다. 스피드에 자신 있다는 상위 랭커들을 제압하는데 애용하고 있는 성가신 재주였다.

  “흠…….”
  “도망칠테면 도망쳐봐라!”

  대결장 바닥이 쩌저적 갈라져가면서 13번을 향해 간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터라 13번도 자리를 떴지만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파도는 방향을 틀어 그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더럽게 귀찮군.”

  9번이 그동안 놀고 있을 리도 없어서 13번이 파도를 피하려 움직이는 동안 양동 작전을 펼치듯이 그를 추적하려 했다. 여태까지 스피드를 중시한 실험체들 중에 이 패턴을 공략한 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파도로부터 도망치는 13번이 드디어 등을 내보였다. 9번은 승기를 잡았음을 확신하고 흥분에 찬 목소리로 배틀액스의 풀스윙을 준비하며 외쳤다.

  “잡았다!”
  “아니, 내가 잡았다.”

  -뭐라고?

  순간 13번의 온 몸에 불길이 붙는 듯 싶더니 이윽고 그 자리에 보라색의 커다란 불기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치솟았다. 13번이 가끔씩 선보이는 최대 화력의 공격이다. 딱 붙어서 시전해야 하는데다 위상력의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에 반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그만의 필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모니터를 통해 싸움을 지켜보는 실험체들의 얼굴에 경악이 달리고 있었다. 지금 최약체 13번의 필살기가 탑3 9번에게 정통으로 들어간 것이다. 모두가 탄성을 지르는 한 편 오직 15번 한 명만이 13번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아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13번의 기합소리와 9번의 비명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대결장에 울려퍼졌다. 대지의 파도는 진작에 불기둥에 상쇄돼 소멸해버린지 오래다.

  “크하!”

  불기둥이 사라지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양 쪽 다 쓰러지지 않았다. 9번은 그만한 화력을 정통으로 맞고서도 버티고 서있다는 점에서 놀라웠고, 13번은 그만한 화력을 출력하고 난 뒤임에도 서있다는 것이 놀라움의 포인트였다. 대부분의 실험체들이 알기로는 13번은 뻗어있어야 할 장면이었다.

  “무슨 짓을 했니? 11번?”
  “응? 별 거 안 했어? 힘의 사용법에 대해서 한 마디 했더니 알아서 깨우치던데?”
  “그래?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구나.”
  “당연하지. 언니가 틀릴 리가 없어!”

  교관과 11번은 구석에서 세상 편한 모습으로 둘의 사투를 구경 중이었다. 둘의 대화가 들릴 리가 없는 9번과 13번, 두 남자는 서로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공격한 쪽과 공격당한 쪽의 소모 차이가 없을 리가 없다.

  “하핫……. 부족했나**?”
  “허억……. 허억……. **라……. 얼마든지…… 더 싸울 수…… 허억…….”

  이미 9번의 눈은 반쯤 풀려있었다. 정신이 쇼트되기 직전인 것이 뻔했다.

  -내가 질 리가 없어. 상대는 13번이야! 만년 꼴등 쓰레기 낙오자 13번!

  이미 오기로 서있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9번은 손이 허전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무기가 없다. 가만히 시선을 위로 향해보니 자신의 배틀액스가 허공에서 춤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13번이 발로 걷어찼다는 것도 눈치 못 챌 만큼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으, 으아아아아아!!!”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9번은 눈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발차기를 한 모습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13번을 꽉 잡아낼 생각으로 돌진했다. 이번에야말로 잡았다! 무기가 없다고 내가 무력해질 줄 아느냐!?

  “또 잡았다.”
  “아니……?!”

  눈앞에 있는 13번은 잔상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으로 뒤돌아 본 9번의 시야에는 이미 커다란 손바닥만이 보일 뿐이었다.


  “끄아악!”
  “원한다면 한 방 더!”

  9번의 얼굴을 손으로 꽉 잡은 채로 바닥에 내리꽂은 13번은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 ** 듯이 웃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하하하하하하핫!!! 하아아아아!!!!”

  또 한 번 흉물스런 기운을 내뿜는 보라색의 불길이 13번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할 때였다.

  “그만. 승부는 났다. 네 승리다, 13번.”
  “어엉?”
  “네 승리라고 했다.”
  “내가 이겼다고?”

  탑3인 9번을 자신이 이겼다고? 싸움을 즐기느라 잠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지, 참. 이건 대결이었지. 잠시 생각해보자. 그래. 시비를 거는 9번의 말을 듣고 11번이 주선해서-

  “우, 웃기지 마라, 교관……. 내가 질 리가 없어…….”

  13번이 구속을 풀자 9번이 비틀비틀 일어나며 중얼대기 시작했다.

  “아니, 네가 졌다. 9번.”
  “그럴 리가! 난 더 싸울 수 있어……. 자, 덤벼! 13번…….”
  “네 패배라고 했다. 9번. 한 번 더 말하게 하지 마라.”
  “으으……. 교관……. 기회를……. 난 아직…….”
  “죽어야만 정신을 차릴 놈인가.”

  교관은 말이 끝나자마자 뭔가를 휙 휘둘러 퍽 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9번은 그 순간 눈이 뒤집히면서 쓰러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순식간에 검집을 허리춤에서 풀어서 그것으로 목을 가격한 것이었다. 13번은 그 광경을 보고는 교관 상대로는 아직 못 이기겠다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다. 11번은 그 옆에서 언제나처럼 방글방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꽤나 화려하게 싸워줬군. 대결장이 엉망이야. 6동 시설관리자들에게 사과해야겠는걸.”
  “수고했어!!! 13번! 제군은 훌륭하게 임무를 왔수했다네! 스승으로서 자랑스럽구먼!!!”
  “그래도 간만에 재밌는 구경이었어. 최약체인 네가 탑3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팬 광경은 모든 시설의 실험체들이 실시간으로 확인했을 거야. 앞으로 꽤나 귀찮아질걸?”
  “왜? 13번이 왜 귀찮아져? 언니?”
  “세상이 그래 생겨먹었단다. 11번. 이렇게 극적으로 하극상을 일으켜버리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유명인이 돼서 사람들이 들러붙게 되거든.”
  “음~ 잘 모르겠는데?”
  “만약 저 9번이 갑자기 나를 이겨버리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볼래?”
  “아~ 뭔지 알 것 같아!”

  교관과 11번이 그런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13번은 가만히 서서 방금 전의 싸움의 쾌감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이것이 승리의 단맛. 우위에 섰을 때의 즐거움. 자신을 업신여기던 상대를 발밑에 두는 정복감. 마치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13번, 너는 오늘 식사를 제외한 모든 일과에서 열외 시켜주겠다. 이만 방에 들어가서 쉬어라. 그 상태로는 대련이고 뭐고 못 하겠지?”
  “아, 그렇지. 고마워, 교관.”
  “천만의 말씀.”

  이후 제 6 동을 빠져나와 1동으로 가는 길에서 누구 하나 빠짐없이 쏘아보내는 시선에 13번은 새삼스레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 교관과 11번이 옆에서 동행하지 않았으면 언젠가의 식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질문공세가 덮쳐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15번이 안 보이는군. 그 녀석만큼은 달라붙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보러오지 않았나? 박정하네, 의외로.
  그런 생각을 하며 13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

  15번은 승부가 끝나자마자 제 6 동 방향의 게이트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까지 싸우는 13번은 처음 보았다. 필시 소모가 엄청날 것이다. 걱정이 돼서 참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훠어얼씬 강하다고!”
  “알았다고요. 고맙네요, 고마워.”
  “어!? 하나도 안 고마워하는 얼굴이야! 미워할 거야!!!”
  “아 거참 드럽게 시끄럽네. 피곤해 죽겠다고!”

  15번은 열린 게이트로부터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는 순간 몸을 숨겨버렸다. 또 다시 그 생각이 떠오른다. 왜 그의 옆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닌 거지? 힘이 필요하다. 나도 11번에 뒤지지 않을 만한 힘이 필요해. 그래야 옆에 있을 수 있어. 그럴 자격을 얻을 수 있어.
  13번이 탑3 9번을 이기는 장면을 보고나니 더욱 그 생각을 뿌리치기가 힘들었다. 자신감 부족, 자기혐오, 13번에 대한 소유욕, 11번에 대한 질투…….
  온갖 마이너스 감정이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것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둔감하지 못 했다. 결국에 13번에게 승리 축하 한 마디 하지 못 한 채 그녀는 자신의 방에 힘없이 돌아갔다.

  “하아…….”

  방문을 닫고 불을 켰다.
  책상에 자신이 둔 적이 없는 종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뭘까?

  약간 단단한 재질의 튼튼한 종이였다.

  Execution A

  “익스큐션 A?”

  혹시나 해서 뒤집어 봤다.

  원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음. 목숨을 걸 것.

  “이게 무슨 소리야?”

  누군가 장난친 걸까? 그녀는 그다지 크게 마음에 두지 않은 채 일단 그것을 서랍에 넣었다. 혹시나 관리자 쪽에서 일괄적으로 배포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13번은 아마 오늘 점심식사는 하지 않고 바로 씻고 난 뒤 잘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트너인 15번도 오후 일과 시간이 거의 비어버린다. 사실 기분만 생각하면 자신도 식사 따위 걸러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그랬다간 들켜버리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무작위 대결의 대전 상대가 결정되는 날이다. 특별 대결 이벤트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분명 지금쯤이면 메인 라운지에 있는 게시판에 공지되어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서 어지러움을 느끼던 그녀는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상대를 확인하기로 했다. 작전이라도 짜면서 훌훌 털어보자.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시 웃으면서 그에게 말을 걸기로 하자.

  그러나 상대를 확인한 그녀는 더욱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게 돼버렸다.

  “다음 대전 상대……, 11번?”

  파란의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2024-10-24 23:18:0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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