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of Striker-이세하 Ep-16 의무
Sehaia 2017-12-31 1
안 된다. 이걸 해내기에는 내 힘이 역부족이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해보려고 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눈앞에 너무나도 거대한 강적을 두고, 서유리와 나는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이슬비만이 의연하게 버티고 있었지만, 슬슬 힘에 부치는 건지 피로한 기색이 엿보인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분투하는 그에게는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이슬비......사......살려줘......”
“무슨 소리야, 아직 끝나려면 한참 남았어. 이 정도 가지고 앓는 소리를 내면 어떻게 해? 애초에, 이런 건 평소에 다 끝내뒀어야지.”
“이런 걸 열흘 안에 끝내라니, 장난치지 마!”
“세하야, 나는 틀렸어. 너는 내 몫까지 힘내......”
“유리야, 너까지 그러기니? 하......”
이슬비는 이젠 잔소리를 할 기력도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 옆에 쌓인 커피의 산을 보면 이 며칠을 우리가 얼마나 밤낮없이 분투했는지, 누구라도 알아줄 것이다.
말렉과의 고된 전투를 끝내고 드디어 우리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강적과의 조우는 그걸로 끝인 것이 아니라 더 큰 강적을 불러올 따름이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니, 그런 거 몰라. 난 태어나서 그런 흉악한 말은 들어본 적 없어! 없다고 칠거야!”
열흘 후가 중간고사였다.
벌써 4월 중후반. 어느새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당연히 공부는 거의 안 되어있다. 시험 직전에 짚어주는 선생들의 요점 정리는 진즉에 끝났고, 물론 듣지 않았다. 한동안 클로저 업무가 많아져서 조퇴한 적도 많아, 교과서를 들춰봐도 당최 뭔 소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공부는 성실히 하라는 유정 누나와 아저씨의 말 때문에 고2인 우리 삼인방은 지금 검은양 팀 작전 회의실을 자습실로 쓰고 있다. 어찌됐든 가장 조용하게 있을 수 있는 얼마 안 돼는 장소 중에 하나기 때문이었다.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을 이렇게 쓰다니,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거기에 이 공부는 끝을 보일 생각을 하질 않는다. 그나마 다른 과목은 어떻게 단기간에 암기를 한다고 치더라도,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이런 걸 어떻게 풀라는 건데.”
수학이었다.
문과로 진학을 한 덕분에 과학 과목을 할 필요가 없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없는 와중에 이해가 많이 필요한 과학을 해야 했다면 더 이상 생각하기 힘들 만큼 끔찍했을 것이다.
헌데,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 와서는 별로 의미도 없을 것 같다. 하루 이틀해가지고 될 분량이었으면 진작은 아니어도 끝냈겠지만, 고등학생이 해야 할 공부의 분량이란 생각보다 많다. 앞으로 남은 열흘 안에 이것들을 전부 끝내는 것은 나 혼자서 말렉을 이기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비장의 수를 쓰자.
“야, 이슬비.”
“왜?”
“열심히 해. 난 피방 간다.”
깔끔하게 일어나서 의자까지는 넣어준다. 떠난 뒷자리는 아름다워야 하니, 보던 참고서들을 전부 가방에 깨끗하게 밀어 넣고 둘러멨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결백한 나는 한 줌의 후회나 애잔함을 남기지 않고, 등 뒤를 한껏 펼치며 방을 걸어 나갔다.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은 이슬비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예의 그 높은 목소리를 키웠다. 쳇, 실패인가.
“야, 이세하! 거기 안 서?”
“뭐! 시험 기간이 가장 놀기 좋은 때 인거 모르냐! 이때에는 피방에 애들이 없어서 텅텅 비었다고!”
“미안하게 됐어! 난 아카데미에서 살아서 그런 거 모르거든!”
비겁하게 개인정보를 가지고 대꾸하다니, 반박할 말이 없다. 생각도 없이 쟤한테 일상생활에 관련된 얘기를 꺼낸 거 누구야? 나와.
아, 나였습니다.
서유리는 교과서 몇 권을 들춰보다 한참 전에 실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공부하는 우리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하품하다가, 솔직히 살짝 정신이 사나웠다. 공부가 안 되는 원인 중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꿰차고 계신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아 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눈에 생기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가만, 근데 우리 공부할 필요가 있나? 이러다가 시험 날에 뭔 일 생기면, 전부 다 헛수고 아냐?”
“유리야?”
“공부를 한다고 해도, 어차피 유니온에서 계속 일하게 될 거구. 위상 능력자는 클로저로 살 수 밖에 없구. 난 검도도 못하게 됐는데, 그럼 클로저 일 외엔 뭘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걸.”
서유리는 별로 인상을 쓰고 있거나 하기 귀찮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순수하게 ‘이걸 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를 묻고 있었다. 이슬비조차도 곧바로 무슨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평소에 항상 활기찬 녀석이 이러는 만큼, 어떻게 할 말이 없는 상황은 궁색했다. 그럴 정도로, 그 얘기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절절했다.
서유리의 경우는 여러모로 특이했다. 좋아하기도 했겠지만, 얘가 검도를 통해 얻고 싶은 건 가족을 부양할 돈이었다. 그래서 위상력이 각성했다고 했을 때도 겉으로라도 에헤헤 웃으며 클로저로 곧바로 전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부는 곧바로 돈이 되지 않는다. 돈이 되려면 더 공부를 하거나, 취직을 할 발판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취직이 끝났다.
서유리에게 있어서 공부는 눈곱만큼도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이다.
위상력이 있다면 당연히 클로저로서 일하게 된다. 직장이 내 의사에 상관없이 정해진다면 꿈이고 희망이고 전부 다 팔아치운 현실적인 얘기가 되지만, 그걸 감안해도 괜찮을 정도로 유니온에서 일하면 봉급 자체는 어지간한 회사보다 많이 나온다. 요즘 들어서 클로저의 권리 축소네 뭐네 하며 조금씩 줄어드려는 추세를 보이고는 있다만, 그래도 많은 건 많은 거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나도 위상력이 있고, 지금 클로저로서 일하고 있느니만큼, 나 또한 이런 공부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필요와 불필요만으로 모든 걸 단정지을 수 있을 만큼 인간이란 건 단순하지 않아서 문제다. 감정이라는 성가신 게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에 항상 훼방을 놓는다.
이 고통을 혼자 맛보는 것도, 함께 도망치는 것도 왠지 껄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는 이 공부를 해야 할 개인적인 이유가 사실은 존재했다. 극히 개인적이고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인 이유긴 하다마는. 그러니 얘가 도망가는 건 왠지 맘에 안 든다. 흔히 말하는, 나 혼자만 죽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살짝 회유를 시도해 봤다.
“그, 뭐냐, 공무원이 철밥통이긴 해도, 공무를 보려면 영어를 좀 해 둬야 하니까, 서유리 넌 지금부터 영어를 좀 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어? 유니온은 범세계적인 조직인데, 거기에서 영어를 안 쓰면 무슨 말로 소통을 하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클로저 요원증도 영어로 쓰여 있었고, 유니온은 뉴욕 지부가 가장 큰 지부이기도 한 만큼 영어가 끼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범세계적인 조직이니만큼, 한국인들도 상당히 많지만 그런 건 넘어가도록 하자.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는지 머리를 쥐어 싸맨다.
“으으, 통역관을 두면 어떻게든.......”
“그것도 돈이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건 안 돼!”
그제야 좀 의욕이 생긴 건지, 다른 책들은 저 멀리 밀어두고 영어 교과서를 꺼내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보아하니 얼마 안 가서 다시 영어도 그만둘 것 같기는 한데, 이 정도면 나름 부추길 만큼 부추겼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 신경은 그만 쓰고 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둘러멨던 책가방을 옆에다 두고 다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의외라는 듯이 이슬비가 이쪽을 봤다.
“뭐야, 피방 간다더니?”
“아, 별로 신경 쓸 거 없어. 단순히 변덕이야. 너도 너 할 거 하면 돼.”
확실히, 남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 산더미 같이 쌓인 책들을 언제 다 보나. 과목 수로만 따져도 10과목은 족히 넘어가는데, 성실히 전부 하기보다는 적당히 몇 과목만 추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특히 수학, 넌 제외.
뭐,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하지만, 이것도 하지 않으면 진짜 유니온이 놓아준 레일을 그대로 걸어가게 될 것만 같았다. 그리 생각하자 약간은 의욕이 들었다.
조금 해보자. 한숨만 푹푹 쉬게 되는 분량이긴 하다만, 손은 눈보다 빠르다니까, 한 일주일 쯤 밤을 새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 정말 암울하군.
아침 햇살이 눈을 찌른다. 벌써 8시. 분명 새벽 4시까지는 커피 덕분인가 어떻게든 깨어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건지 수학을 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너였냐, 수면제가.
아직 해야 할 게 더 남아있기는 한데, 생각보다는 진도가 나갔다. 어쩌면 일주일이 아니라 닷새정도만 죽어라 하면 될 것 같다.
먼저 일어나 있었던 건지 이슬비가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왠지 감이 안 좋았다.
“얘들아? 이상 차원압이 계측됐어. 우린 앞으로 한동안 구로에서 지내야 할 거래. 취식도 거기에서 해결해야 한다나 봐.”
이럴 줄 알았지.
이슬비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높낮이가 하나도 없이 한없이 건조했다. 물 하나 없는 모래의 사막처럼 갈라졌다. 새로운 임무에 대한 긴장인 건지, 아니면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 남는 건지. 개인적으로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이슬비는 평소에도 사고의 회로 전환은 빠른 편이다. 나는 아니었다.
아까웠다. 내 나름대로 공부했다고 한 건데, 써먹을 일이 사라졌다.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별 마음 없이 게임시간 줄어든다며 투덜거릴 수라도 있다. 그러나 밤을 새워서 진지하게 임했던 만큼, 어쩔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욱신거렸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활용할 일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른다. 그렇게 따진다면 머리에 욱여넣은 이 지식들은 어쩌면 머리 용량이나 차지하는 폐기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럴 거면 역시 피방이나 갈걸 그랬어.”
지나가는 일들에 애착을 가져봐야, 의미는 없다. 그걸 안다고 마음을 바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성인이라는 두 글자는 존재하지 않을 거다. 당연히 나는 성인이 되려면 글쎄, 골백번은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딱히 이슬비가 꺼내줄 것도 없이, 벽에 걸려있던 건블레이드에 손을 뻗었다. 며칠 동안 든 기억이 없는데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만큼 손이 건블레이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묵직한 건블레이드는 이게 현실의 무게라는 듯 손을 짓눌렀다. 나는 절대로 이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나에게 말하는 듯, 손을 타고 올라오는 감촉이 차가웠다.
그 무게에 짓눌리고 싶지 않아서, 조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위상력을 열로 바꾸어, 건블레이드에 살짝 실었다. 안타깝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작동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다.
그럼, 가볼까,
구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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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Closenea입니다. 재미있으셨는지요.
이번 편은 강남과 구로 사이를 매끄럽게 이어보기 위해서 넣은 오리지널 에피입니다. 검은양 팀이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이 별로 게임 속에서 잘 드러나질 않기에 넣어봤습니다. 그게 가장 잘 드러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보니 중간고사 대비가 들어가게 됐네요.
재미있게 보셨기를. 자꾸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Ep-15 A급 퇴치 작전(에필로그)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2&n4articlesn=12860
Ep-17 구로-도시 속 외딴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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