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날

에토포시드 2017-12-28 4

아침 6시. 눈을 뜬 그는 시곗바늘처럼 몸을 일으켰다. 한발 늦게 눈을 뜬 알람이 수면을 방해받은 연인처럼 불만스레 울었다.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텅 빈 집에는 알람을 달래줄 다른 손이 없었다. 남자의 무시에 알람이 청승맞게 칭얼거렸다.

 

5분쯤 지났을까,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바닥은 그의 머리처럼 엉망이었다. 대충 벗어 던진 셔츠와 속옷을 피해 걷던 그의 발이 종이컵을 쳤다. 종이컵은 바닥에 널브러지며 술에 절은 담배꽁초를 쏟아냈다. 곤란한데. 그는 난처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것도 잠시, 담뱃진에 검붉게 변색한 액체가 담배꽁초 무더기 사이에서 스며 나오는 모습에 그는 기함했다. 흘러나온 내장을 보물처럼 부여잡고 의사를 찾던 시민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남자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화장실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누구라도 자신의 손을 잡아줬으면 했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다 괜찮다고,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고 해줬으면 싶었다. 그런 사람은 더는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덩굴처럼 기어오르고, 세월이 머리칼에 하얗게 쌓이고, 마침내는 얼굴이 무너져 추한 흔적만 폐가처럼 남는 그 순간까지도. 뻣뻣하게 굳은 채 떨리는 손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손목으로 억지로 물을 틀었다. 남자는 샤워기가 쏟아내는 찬물에 머리를 적시면서 영혼을 토해내듯 울었다.

 

늘 그렇듯, 평범하게 외로운 기상이었다.

 

 

내키지 않는 아침이었지만 챙겨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약을 거르기엔 너무도 중요한 날이었다. 메뉴는 늘 그렇듯 라면과 인스턴트 밥이었다. 퇴근이 늦어 밤이 짧은 아내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만들던 때가 있음을 그는 기억했다. 낯설다. 그때의 그와 자신 사이에는 지나치게 큰 간극이 놓여있었다. 그의 손이 다시 부엌칼을 잡을 날이 올까. 고민 같은 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남자는 부정했다. 부엌칼을 잡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목에 구멍을 낼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찰기 없는 밥을 라면과 함께 억지로 밀어 넣으며 위장을 달랬다. 식사를 마친 남자는 입을 열고 약봉지를 털어냈다. 씁쓸했다.

 

남자는 오랜만에 몸을 씻기 위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행여 묵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그는 몸을 꼼꼼히 씻었다. 혹시 덜 씻어내 거뭇한 부분이 있지 않나 몇 번을 확인하면서. 악몽에 시달리며 긁어댄 가슴께의 상처에 흉하게 딱지가 앉아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세워 딱지를 억지로 뜯어냈다. 몸을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붉은 기운이 섞였다. 딱지가 없어도 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은 이미 흉터투성이였다. 대부분은 자해 때문이었다.

 

물기를 닦아내며 거울 앞에 서자 볼품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집 없이 굴곡진 얼굴, 제멋대로 자라 꼬부라진 수염, 군데군데 검게 변한 피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버려진 무덤 같았다. 움푹 들어가 퀭한 눈두덩이 안에서 그의 두 눈만이 도깨비불처럼 매가리 없이 빛났다. 수도꼭지를 열고 얼굴을 씻어도 그런 인상은 가시지 않았다.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손을 뻗어 면도기를 집어 들자 한참을 쓰지 않은 면도날이 붉게 녹슬어있었다. 들지 않는 칼날을 억지로 얼굴에 굴렸다. 얼굴이 따가웠다. 그녀에게 맞은 뺨이 다시 시큰거리는 느낌이었다. 성긴 칫솔에 치약을 대충 묻히고 이를 닦아냈다. 치실질도 잊지 않는다. 습관이 되지 않아 어색한 손길로 치실과 한참을 씨름하던 그는 거울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화장실을 나왔다. 지쳤다.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이불에 파고들고 싶었다. 오늘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옷을 입으며 거실 구석의 종이가방을 확인한다. 간밤에 그를 두고 도망치진 않았을까. 더는 그와 있을 수 없다며 그를 버리지는 않았을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가방은 그가 놓아둔 곳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남자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녀는 오늘 나를 만나러 나와줄까. 혼자일까. 둘일까. 나를 보자마자 아름답던 얼굴이 구겨지지 않을까. 나의 모습에 또다시 실망하진 않을까. 그녀는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역겨운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녀가 자신을 다시 사랑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혐오가 가속되었다. 남자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자신을 쓰레기로 격하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싫었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신 역시도 싫었다. 자신은 애초에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비참했다. 남자는 또다시 울었다.

 

*

 

오랜만에 집을 나오니 아침임에도 날이 제법 무더웠다. 6월이 가까워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남자는 옷을 좀 더 가볍게 입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사실 미리 알았다 해도 그다지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모두에게 보이기엔 너무나도 추한 모습이었다.

 

약속 장소는 남자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여자는 그가 그의 집에서 멀리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의 정신이,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탓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배려가 무거웠다. 여느 남자들처럼 그녀의 집으로 그녀를 마중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을 나선지 겨우 10여 분이 지났을 뿐임에도 이미 떨리기 시작한 그의 시야가 그에게 차갑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남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곳은 자그마한 시민 공원이었다. 평일이었던 터라 공원은 거의 텅 빈 채였다. 주름이 자글한 노인 둘만이 유일한 그늘인 등나무 교실을 차지하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들이 부러웠다.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태양 빛에 몸을 그슬린다면 좀 더 빨리 늙을 수 있을까. 그는 헛된 상상을 했다. 햇빛에 노출된 손등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몸을 타고 오르는 주름을. 등은 굽어들고, 어깨가 쭈그러들고, 마침내 눈이 희미해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미래를 생각했다. 하지만 짧지 않은 시간 칩거의 나날을 이어왔음에도 그의 몸은 굳건했다. 그의 머릿속만이 좌절에 시커멓게 찌들어 있었다.

 

남자는 미끄럼틀에 기다려 여자를 기다렸다. 햇볕이 따가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있을 생각이었다. 여자는 시간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앞으로 몇 분만 더 기다리면 그녀가 나타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거짓말이다. 남자는 그늘로 향하기가 무서웠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자리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쥐**처럼 숨어들어도 그들이 그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그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순간 남자는 신화 속 괴물의 눈을 마주 보고 만 불행한 도전자처럼 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버린 남자를 그들은 기괴한 구경거리처럼 바라볼 것이다. 남자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급히 고개를 푹 숙이는 남자를 익숙한 목소리가 불렀다.

 

“뭐하는 거야.”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벚꽃색 머리카락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입을 열려다 꽉 막힌 목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남자는 애써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슬비.”

 

그의 부름에 응하듯 그녀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세하.”

 

어두운 집안에서 심해어처럼 떠돌던 남자는 그녀의 부름에 오랜만에 수면으로 부상하여 이세하가 되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일단, 옮길까.”

“자리 말이지. 그래.”

 

이슬비가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인사부터 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뭔가 할 말이 많았을 터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던가, 여전히 예쁘다던가, 요즘 사는 게 어떻냐던가.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눈은 그를 발가벗겨 내팽개치는 듯 했다. 결국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숨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세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이세하는 카페가 싫었다. 그가 좀 더 젊었던 시절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카페에는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분위기. 그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듯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불안하다. 그는 허락받지 못한 불청객이 된 느낌이었다. 당장에라도 테이블을 닦던 점원이 다가와 그를 내쫓을 것만 같았다. 이세하는 괜스레 커피를 뒤적이며 얼음 소리를 냈다. 이슬비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시선 처리였다. 이슬비는 그가 자신의 시선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녀를 살폈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은 2년쯤 전이었다. 그에게 숨길 수 없는 손자국을 남긴 2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기억 속의 이슬비와 지금 눈앞에서 말없이 앉아있는 이슬비의 모습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니,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알아보기엔 그가 너무 피폐해진 것일지도. 사실 그는 2년 전의 이슬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모습을 기억에 다시 덮어씌운 것일 수도 있었다. 이세하는 무엇이 답인지 알지 못했다.

 

“뭐 물어볼 것 없어?”

 

불현듯 이슬비가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일은 어떤지, 여전히 바쁜지, 힘들지는 않은지, 아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중 하나라도 좋지 않은 답이 나오는 순간 그는 죄책감에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검은 가장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떠오르지 못할 터였다. 모든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수술을 받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에서 떠난 것도, 그녀가 아이를 홀로 키우게 된 것도. 모두 그가 한심하게도 과거에 짓눌려 헤어 나오지 못한 탓이었다. 결국, 그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다지.”

“표정이 전혀 안 그런데.”

“내 얼굴을 **도 않고 있잖아.”

“안 봐도 뻔해.”

 

옳은 말이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소용없었다. 자기 일에는 그렇게 둔감한 주제에, 그의 말에서는 없는 행간도 찾아내어 읽곤 했다. 괜히 약이 올라 반론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세하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잘살고 있어. 거의 책상에서 먹물만 파는 일이고, 위험할 일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는 질문 없이도 그에게 대답했다. 이전과 똑같았다. 이세하는 묘한 안락함을 느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잠시나마 당시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애써 용기를 짜내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슬비야.”

“왜?”

 

지금 말해야 한다. 다음 기회는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혀를 이세하는 억지로 놀렸다.

 

“지금, 나 봐줄 수 있어?”

 

이슬비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대답 없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달착지근한 계피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찻잔 속의 새하얀 어둠을 바라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사과하지 마.”

 

이슬비가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세하는 후회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은 역시 미쳐있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꺼낼 리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너를 못 봐도, 괜찮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날 봐줘.”

“...진심이야?”

 

찻잔과 그의 얼굴 사이에서 표류하는 그녀의 시선에 그는 다시 한 번 죄책감을 느꼈다. ** 소리였다. 자신은 그녀의 시야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소리 없는 사과가 그를 내리눌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역시 됐어. 잊어줘.”

“그 말이 아니야.”

 

이슬비의 시선이 갑작스레 그를 똑바로 향했다. 이세하는 그녀의 눈길에 또다시 몸이 굳었다. ** 마. 아니, 날 봐줘.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기 없는 왼쪽 눈이 그를 준엄하게 꾸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자격이 없어.

 

“나를 다시는 못 봐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래.”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가 몇 시간 뒤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만 했다. 불필요한 각주라도 변명처럼 덧붙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최초의 요청조차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자기혐오에 이세하는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거짓말.”

 

이슬비가 그의 대답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이세하는 그녀를 참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 우리의 관계는 끝났을지도 몰라.”

 

그녀의 말에 이세하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희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앞으로 계속, 죽을 때까지, 영원히 그는 어둑한 방구석 어딘가에서 홀로 썩어들어 갈 운명이었다. 그녀의 행복을 망가뜨린 그에게 어울리는 음울한 결말이었다. 꽉 다문 입에서 다 자라지 못한 비명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이세하는 자신의 신음 속에 파묻혔다.

 

그래서 그는 이슬비의 다음 말을 조금 늦게 들었다.

 

“하지만, 너와 나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어.”

“뭐라고, 했어?”

 

이세하의 마음이 술렁였다. 이세하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짓밟았다. 깊은 의미는 없을 이야기였다. 그는 괜한 희망을 품을 자격이 없었다. 그녀의 사랑을 갈구할 자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되물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내가 널 싫어하게 됐을 리 없잖아.”

 

그러지 마. 이세하의 생각이 와글와글 끓어올랐다. 다시 생각해 봐. 네 눈앞에 있는 건 괴물이야. 내가 널 상처 입혔어. 나 자신이 가증스럽게도 그 날의 기억에 가위눌리고 있는데, 너는 오죽하겠어. 내가 네 세상을 절반으로 줄여버렸는데. 이세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랬다. 그는 눈물로밖에 말할 수 없었다.

 

“울지 마. 괜찮아.”

 

둑이 터졌다. 이세하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통곡했다. 미안했다. 그녀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했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는 그녀에게 짐이 될 뿐이었다. 머리에 와 닿는 그녀의 손에 그의 울음이 더욱 가열해졌다. 관리가 안 되어 푸석한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녀에게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였다. 자신에게 왜 이런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인지, 이세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알고 있는데, 자신은 하나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정작 지금 위로를 받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모든 것이 그랬다.

 

“괜찮아.”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울음을 그치고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세하의 모습에 이슬비는 픽 웃었다. 이세하는 시선을 피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은 이제 괜찮아.”

 

그럴 리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반년에 한 번, 정도연 씨에게 검사를 받아. 의안에 문제는 없는지, 거부반응은 없는지, 그런 것들 말야.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하셨어.”

 

이세하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꺽꺽거리는 딸꾹질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의 한심한 모습에 이슬비가 미소를 띠었다.

 

“약은 잘 챙겨 먹고 있지?”

 

이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약을 거르는 날도 잦았다. 식사를 한 끼도 하지 않는 날이 많은 탓이었다.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 역시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슬비는 그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알고 넘어가 줄 사람이었다.

 

“그거 알아? 우리 애,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가.”

 

알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기계처럼 잊을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때까지 그 얼굴 좀 어떻게 해봐. 애 입학식에 그런 몰골로 갈 생각이야?”

“어?”

 

그녀의 말에 이세하는 얼빠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입을 연 탓에 겨우 잠잠해지려던 딸꾹질이 다시 심해졌다. 요동치는 몸을 억지로 멈추려 끅끅거리는 이세하를 보며 이슬비가 말을 이었다.

 

“평생 애 얼굴도 안 보고 살 생각이었어?”

 

이세하는 그럴 생각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언뜻 비치는 공포를 마주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찻숟가락이 떠올라 그의 이마를 툭 쳤다. 이슬비가 그를 놀릴 때면 으레 하는 행동이었다.

 

“바보.”

 

이세하는 항의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가져온 종이가방은 어느 틈엔가 그녀의 옆으로 옮겨가 있었다. 가방을 열어본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방 안에는 교육에 좋다는 게임기가 들어있었다. 아이에게 전할 선물을 고르며 며칠을 고민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너무도 좁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어쩜 그렇게 변한 게 없어?”

“미안.”

 

이세하의 어깨가 푹 수그러들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것이 없었다. 게임밖에 몰랐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게임기가 들어있는 상자를 살펴보던 이슬비가 또다시 픽 웃었다.

 

“집에 가면 청소부터 해.”

“청소?”

“그래. 어차피 엉망으로 만들어놨겠지.”

 

맞는 말이었다. 이세하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2년간의 그는 생물학적으로만 살아있는 존재였다. 인간 이세하는 그곳에 없었다. 배가 고프면 아무 음식이나 먹고, 마냥 누워 있다가 자신이 잠에 빠지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가위에 눌렸다. 그리고 눈을 뜨면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곤 했다.

 

“그리고 관리 좀 하고. 앞으로도 봐야 할 얼굴인데 그게 뭐야.”

 

이세하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계속해서 두려워하고 고민했던 일을 그녀는 몇 분 만에 정리해버렸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도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고심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세하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다시 우울감에 짓눌릴 것이다. 내일 아침에도 그는 눈물을 쏟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또다시 혐오하리라. 하지만 그런 자신을 이슬비는 긍정해주었다. 다시는 상종 못 할 쓰레기, 자신의 반쪽을 해한 괴물 대신 그곳에서 이세하를 찾아내 주었다.

 

이세하는 또다시 눈시울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느끼고는 애써 기분을 다잡았다. 또다시 그녀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는 싫었다. 눈이 아프다는 양 짐짓 고개를 저으며 눈가를 훔친 이세하는 딱딱한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빗자루를 파는 잡화상이 어디에 있더라, 이세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제법 바빠질 것 같았다.

2024-10-24 23:18:0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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