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어서 기억해줘

루이벨라 2017-12-13 7

※ 암광세하 x 네틱유리
※ 암광세하 x 네틱유리 처음 팔 때 생각한 뇌피셜을 이제서야 글로 옮기네요.

※ 폴더 속에 묻혔던 걸 찾아서 재업합니다(...)

 




 

 "우와...!"
 "..."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제 또래의 소녀를 보며 소년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소녀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아무것도 없는 재와 먼지뿐인 공간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세하야!"
 "...?"
 "이거 봐!"


 유리의 손에는 한줌의 흙 위로 뿌리를 내린 작은 새싹 하나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까지 생명이 싹트다니 참 신기할 노릇이다. 그리고 소년이 생각한 그대로를, 소녀는 읊조렸다.


 "신기해!"
 "..."
 "이거 잘 키우면 나중에 예쁜 꽃 피울까?"
 "...응."


 아마도, 그럴 거야. 막연한 대답임에도 유리는 좋아라했다. 그렇겠지. 이 쓸쓸한 공간에서 그런 작은 생명이라도 하나가 있어야 겨우 숨통이 트일 정도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유리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 즉 신서울에서 있었던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유리에게는 이곳이 자신은 태어난 곳이자, 자신이 절대 벗어나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왜 절대 벗어나면 안되는데? 라는 대답을 유리에게 하면 유리는 '몰라.'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뿐이었다. 지금의 유리에게는 이 칙칙한 외부차원의 어느 성이 자신의 모든 세계였다.


 세하는 이 곳과 이절적으로 빛나는 유리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스쳐지나가는 주마등. 자신이 처음으로 본 주마등이기도 했다. 그 때의 세하는 분명 죽기 직전이었다. 세하 자신도 '아, 이제 죽는구나...' 라고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서 악마가 보였다. 악마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유인했다.


 -살고 싶지 않아?
 -...
 -이세하.


 악마의 모습은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생겼다. 뿔이 있고 꼬리가 달린 모습이 아닌, 자신과 똑같은 모습. 언젠가 어디서 보았던 그런 모습이었다.


 -네 안의 차원종의 힘을 받아들이면, 넌 살아나겠지. 그리고 또 강해질 수 있겠지.
 -...
 -어떡할래? 이세하.


 죽음과 종이 한장 사이를 두고 있는 사람의 심리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클로저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은 분명 그 제안을 거절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악마가 아주 기분 나쁘게 웃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눈을 떴을 때의 자신은 이미 차원종의 군단장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끝없는 자기혐오가 밑바닥부터 끓어오는 이 기분. 악마는 그 뒤로 다시는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안다. 그 악마는 '남' 이 아닌 세하 '자신' 이었다.


 인간의 피 냄새를 맡아도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인간계를 내려갈 때마다 자신을 경멸하는 표정으로 둘러싸는 클로저들의 얼굴을 보는게 익숙해지는 자신을 볼 때마다 자기혐오는 점점 더 커졌다.


 그러던 중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유리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가슴이, 걷잡을 수 없게 뛰었다.

 

 


* * *

 

 


 어느 정도의 과거 회상을 마친 세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하의 눈에는 바로 유리가 보였다. 인간이었을 때와는 별반 차이가 없어보였지만, 유리의 몸의 반 이상은 사이버네틱 부품으로 이루어진 상태였다.


 설마 클로저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지도 못하게 하는 끔찍한 삶의 연장이라니. 사이버네틱 수술은 기본적으로 '정상적인 작동' 이 최우선이라, 다시 태어나게 된 사람의 인격이라던가 기억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세하는 그 사실을 사이버네틱 수술을 마친 유리와 처음 대화를 했을 때 깨달았다.


 처음 유리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의 절망감을 차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감각, 그리고 믿을 수 없었기에.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마냥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말하던 유리의 그 한마디.


 -누구야?
 -...


 누구, 라니.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거니. 세하는 입술을 피가 나올 정도로 깨물었다. 유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세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유리의 시점에서는 세하의 얼굴이 반쯤 가려저서 세하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세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유리가 수없이 자신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자신의 이름을.


 -이...세하.
 -이세하...?
 -그래, 이세하...


 이 이름을 듣고도 도저히 모르겠니? 세하의 처참한 기분과는 달리 유리는 해맑게 웃었다.


 -응! 모르겠어-
 -...


 내던져 버려지는 이 기분. 무참히 즈려밟아진 이 기분. 그 날 세하는 소리죽여 울었다. 그런 세하의 얼굴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을 매만지며 유리가 물었다.


 -이건, 뭐야?
 -...!


 뭐냐니. 눈물...이잖아. 눈물...몰라? 유리는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모른다는 의미였다.


 거기서 세하는 또 절망하고 말았다.


 지금의 유리는...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새하얀 백지, 그리고 그 위에 이제 막 한글자씩 채워나가는 단계.


 유니온은 세하의 모든 걸 앗아갔다. 소중한 사람도, 추억도, 기억도, 그리고 마음까지도.


 실소가 터진다. 자신은 점점 인간으로서의 무언가와 멀어지는데 비해, 유리에게는 '인간' 이 됨을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왜? 어째서냐고? 나와 같은 절망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아서.


 유리가 평생 이 상태일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유리의 모든 기억이 돌아오리라고 세하는 생각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때 유리가 슬픈 감정을 느끼지 않게끔 하는 것이 지금의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있잖아."
 "..."
 "세하는 왜 안 웃어?"
 "..."


 그렇다. 웃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웃는 것 이외에도 모든 감정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런 세하와 함께 지냈음에도 유리는 예전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아, 눈부시구나.


 "...몰라."


 하는 방법, 잊어버렸어. 세하의 나지막한 핑계에 유리는 총총걸음으로 세하에게 다가온다. 그러고서는 세하의 볼을 쫙 잡더니 옆으로 올린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 쉽지?"
 "..."
 "안 쉬워?"
 "..."


 지금의 유리는 예전의 유리보다 더 어려진 느낌이었다. 하긴 백지 상태로 시작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더 세상물정을 몰라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너라는 하얀색에 나라는 때가 묻을까봐 가끔은 겁이 나.


 그게 자신이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유리에게 인간임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상해. 분명 웃는 거, 세하가 알려주었는데..."
 "..."
 "세하는 못하네."
 "..."


 이상해. 다시 반복하는 유리의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유리에게는 전혀 나쁜 의도가 없는 걸 암에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세하도 못 하는거 있구나."
 "모르는 것도 많지."
 "그렇구나."


 세하는 괜시리 유리의 머리를 매만지며 헝클였다. 그런 세하의 쓰다듬이 나쁘진 않은 듯 유리는 옅은 미소를 띄웠다.


 이런 삶도, 나쁘진 않다.

 

 


* * *

 

 


 언젠가는 기억해주겠지? '서유리' 라는 너 자신과, 그리고 그런 서유리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이세하' 라는 사람도.


 하지만 그때의 너는 자신이 아는 이세하가 아니라며 나에게 검을 겨눌지도 모른다. 그건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지금의 난 클로저 이세하가 아니다. 이제는 솔직히 내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겠다.


 그래도...난 바라고 있어. 어서 모든 걸 기억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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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23:17:5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