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죽음이 보이는 아이
루이벨라 2017-09-14 7
※ 예전에 다른 커플로 썼던 글 소재를 리메이크
※ 장편 소재로도 좋은 각이 나오지만, 필자는 귀찮아서 그냥 단편으로 마무리(장편 소재로 쓰고 싶은 분 계시면 연락 주세요.)
어느 날부터 나한테 '죽음' 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죽음이 보인다고 말은 했지만 거창하지는 않았다. 막 영화에서와 같이 큰 낫을 든 사신이 그 사람 주변에 도는게 보이는 게 아닌 그냥 딱 보면 머릿속에 이 사람이 곧 죽는다는 자각이 새겨지는 것 뿐이었다. 그저 그뿐, 나는 그 사람들이 그 죽음이라는 그림자에 벗어나는 걸 도와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아니, 위상력을 가진 입장에서는 보통 말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능력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는지는 항상 궁금했다. 또 영화 같은데서 보면 이런 능력을 가진 인물은 자신이 사람을 구해**다는 거창한 의무감과 함께 무슨 엄청난 능력도 같이 내려오던데 나는 아니었다. 위상력은 갑자기 내려온 능력이 아닌,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힘이었다. 물론 위상력은 사람을 지키기 위한 힘인 건 분명했지만 분야가 달랐다. 차원종의 출현이 뜸해지고 있던 이 시점에서는 자칫하다가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힘이었다.
결국 손을 놓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차근차근 쌓여갈수록 내 정신을 망그러뜨리기에는 충분했다. 천천히, 조금씩, 하지만 꾸준하게, 변함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나의 달라진 태도에 의아함을 나타낸다. 말하지 않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죽음을 본다니...그런 판타지적인 거...진짜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믿을 사람이 있기는 할까?
아마도...없다. 없을 게 뻔했다.
처음엔 서유리에게도 차마 이야기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점점 예민해지는 나를 보며 서유리는 그저 악몽을 자주 꾸는 줄로 안다. 내가 그렇게 얼버무리기도 했고, 실제로 악몽 때문만은 아니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잠을 점점 못자는 나날들이 늘어났다.
-오늘도 잠 못 잔거야?
-...어...
-우리 세하 어떡해...점점 초췌해져가네.
잠을 제대로 자 본적이 근래에 없으니 그렇게 보일 수 밖에. 흘러내린 내 앞머리를 쓸어담아주는 서유리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에게 걱정이나 짐을 남겨두는 거 내 성격상 정말 싫어하는 일 중 하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 믿어줄거잖아.
억지로 웃는 나를 보며 서유리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곧 너는 해답을 찾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흠...이건 어떨까?
-뭐...?
-이거!
그리고 그 뒤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난 내 몸이 비스듬히 누워졌다는 걸 자각했다. 그런 내 뺨을 쓸어내리는 손의 주인은 분명 너겠지.
내 입에선 당황한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서유리?
-응...?
-이, 이게...무슨 짓이야?
-응? 무릎베개!
무릎베개인건 나도 안다. 내 물음의 의미는 왜 이걸 갑자기 해주냐, 는 의미였다. 내 물음을 그제서야 이해했는지 서유리는 싱긋 웃어보였다. 웃는 모습이, 참 어여뻤다.
-세하, 편히 자라고!
-...
-난 예전에 엄마가 무릎베개 해주면 잠 잘 왔던걸로 기억하는데...무, 물론 내가 세하 엄마는 아니지만...! 그리고 날 네 엄마처럼 여기라는 것도 아니고...!!
안다. 지금 나오는 이런 행동이 그저 나를 걱정해주는 순수함이 가득 담긴 호의라는 걸. 어서 편히 자라는 듯 계속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는 서유리의 손길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유리야.
-응, 왜?
-...너는 내가 하는 말, 전부 믿을 수 있어?
-세하가 거짓말한다는 거 생각해본 적 없는데?
가슴이 저려왔다. 지금도 난, 계속 너한테 거짓을 고하고 있는데.
-...유리 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줄거야?
-응.
한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 나보다 강한 네가 부러웠다.
-유리, 너한테 꼭 말해줘야하는 게 있어.
-응. 뭔데?
그리고 내가 주위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또 다른 이유. 무력하게만 있어야했던 나에 대한 비난이 쏟아질거에 대한 걱정. 난 혼자였던 적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혼자인 것에 익숙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난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흔할 수도 있는 이별이라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서유리에게 천천히, 모든 것을 토해내듯이 알려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보여지게 된 것, 그로 인한 여러가지 사건.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했던 나약한 내 자신의 이야기 등등.
서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다 끝나자, 서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내가 상상한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모든 걸 각오하고 한 이야기잖아. 혼자서 생각하고, 후회하면 뭐해. 바보같은 이세하.
-...힘들었겠다.
-...뭐?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리고 이런 나에 대한 서유리의 태도는...뜻밖이었다. 소금기가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한 너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작게 등을 토닥이는 네 손길에 나도 눈물이 차올랐다.
-세하 네 잘못이 아니잖아.
-...하지만...
-세하 네 잘못이 아니야.
또박또박하게 너는 그렇게 반복하며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무 탓하지 마. 어쩌면 나는 유리에게 이런 걸 원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을 쏟았다. 그간 힘들었던 걸 지금 기회에 만회하려는 듯이, 깨지기 일보 직전인 댐에 있던 물을 다 빼내려는 듯이. 그런 나를 유리는 옆에서 계속 지켜봐주었다.
* * *
"...하아."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쓸데없는 옛날 생각이나 하는걸까. 지금 한껏 아름다운 추억 감상에 젖을 타이밍이 아닌데.
...죽을 때가 다 되어가서 그런가.
지금 이곳은 전쟁통이었다. 그리고 난 그 전쟁통의 최전선에 나와있었다.
너의 눈에서 '죽음' 을 읽었을 때의 그 무력감은 나를 한동안 움직일 수 없게 했다. 난 네가 죽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여느 때처럼 널 구할 수는 없었다. 너는 내 앞에서 죽었고, 난 그 장면을 무기력하게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못난 나를 향해, 너는 죽어가면서도 웃어주었다. 네 탓이 아니야, 라는 말도 함께 하면서.
내 탓이었다. 이건 분명히 100% 내 탓이었다.
그로 인해 네 덕에 한동안은 잠잠했던 이런 능력, 왜 하필 나한테 주어진걸까, 하는 자괴감이 다시 스물스물 올라왔다.
괴로웠다. 안 괴로웠다면 거짓말이었다. 난 내 감정을 타인에게는 잘 숨기는 편이었고, 어쩔 때는 너무 연기력이 뛰어나 나 자신도 속곤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나 자신한테는 결코 거짓을 고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너한테 가졌던 그 모든 감정이, 너를 소중하게 여겼던 감정이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걸 입증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리고 서유리에게서 죽음의 흔적을 본 이후, 하나둘씩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3자에게서 보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자괴감에 나는 밤을 샜다. 그럴 때마다 옆에 나를 위로해주고 진심을 알아주는 네가 없어서 더 괴로웠다.
그렇게 하루하루 사무치고 슬퍼하며 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는, 이라고 하는 이유는 오늘 나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어찌 아느냐? '죽음' 이 보이는 건 타인이 아닌, 나한테도 해당이 되었다. 지금 샤워를 하고 있는 동안 우연히 쳐다본 거울 속의 나에게서 '죽음' 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증기에 가려져 잘못 본게 아닌가 싶어, 거울을 닦고 다시 쳐다보았다. 분명, 난 오늘 죽는다. 확실했다.
확신이 서는 순간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웃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기색보다는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근래에 본 내 표정 중 제일 밝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깃들어진 건 우선적으로 '해방감'. 그리고 그 다음 그려져있는 건 '그리움'.
이제...드디어...너의 곁으로 갈 수 있게 되었어...
드디어...다시 만날 수 있게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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