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씌우기 - 해피 앤 배드

유리가면착용 2017-09-07 1

덮어씌우기






과거의 관점에서 보면 SF라 하여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들이 현실이 되어있는 지금의 지구 역시, 그 과거에 차원전쟁이란 뼈아픈 이야기를 겪었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를 극복했고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의 신체 3분의 2 가량을 기계로 대체해 사이보그로 만드는 데에까지 도달했다.

처음에는 이 기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현장을 뛰다 크게 다친 자들의 자원이 알려지고, 이 기술을 다루는 이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설득 덕에 여러 안전장치 역할을 해줄 법규들이 생겨 지금은 원한다면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고 사이보그가 될 수 있었다.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 역시 사이보그 클로저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들도 꺼려했지만 시간이 흘러 힘에 겨운 상황을 여럿 맞았고 결국 팀원 만장일치로 수술을 받는 걸 결심했다.



"어떤 걸 하면 되는 알바예요?"

"간단한 거예요, 서유리 양. 며칠 뒤면 하츠네 미쿠 콘서트가 있는데, 거기서 당신의 몸을 하루만 빌려주세요."

서유리 역시 다른 검은양 팀 멤버들처럼 사이보그 수술을 받은 지 오래였다. 거의 기계나 다름없게 된 몸이라 목소리에서도 울림이 생기고 땀도 안 나게 되는 등 신진대사가 크게 달라졌지만, 전기 충전이나 부품의 교체 등 기계가 치뤄야 하는 여러 관리들도 받아야 하는 대가를 내야 했다. 안 그래도 집안이 가난했었는데 임무 중에 크게 다쳐 수술을 받아야 했었고, 그녀는 빚더미에 올라버렸다.

그 때문에 서유리는 열내어 일을 했고 드디어 탕감 직전에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정도연 박사는 하츠네 미쿠라는 안드로이드의 콘서트가 있는데 그에 관해 남은 빚을 갚아내고도 남을 만큼의 꽤 비싼 임금을 지급하는 아르바이트 꺼리를 잡아냈다고 그녀에게 귀띔을 해줘 이렇게 따로 만남을 가진 것이다.


"제 몸을 빌려달라고요?"

"네, 행사 당일에 쓰일 안드로이드가 운반 도중에 파손되어서 이렇게 일거리가 들어오게 된 거예요. 당신의 의식은 제가 책임지고 백업, 즉 다른 안전한 곳에 두고 행사가 끝나면 다시 원래 몸에 넣을 거예요, 약속하죠. 덤으로 당신의 의식도 하츠네 미쿠 콘서트를 감상하실 수 있게 해드릴께요."

아르바이트라지만 자신의 몸을 빌려달라는 위험한 낌새가 나는지라 서유리는 망설였다. 이에 정도연은 그녀가 이해하기 쉽게 인격을 백업하고 나서 행사가 끝나면 바로 몸을 돌려주겠다고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좋아요, 약속이예요. 도연 언니."

"당신이 저희에게 해준 게 얼마인데요. 확실히 해드릴께요."

서유리가 사람 클로저이던 시절부터 임무 때문에 자주 만나고 알면서 지내다 보니 둘의 이야기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쉽게 끝났다. 자신의 몸이 기계인 거야 이미 적응했지만, 자신의 인격을 다른 곳에 둔단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에 약간은 불안한 기색이 있었지만 서유리는 정도연을 믿기로 다짐하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서유리인가, 오랜만이다."

"유리 씨, 당신도 알바 껀으로 오셨나요?"

"설마 티나 언니와 바이올렛 언니도요?"

서유리의 눈앞에 나타난 건 티나와 바이올렛이었다. 티나야 원래부터 안드로이드였던 몸이라 겉을 담당하는 부위만 바꾸면 되었다지만 바이올렛은 사람에서 기계로 종족이 바뀌는 거라 처음엔 상당히 낯설어했었다. 그런 둘을 우연히 만난 유리는 정겹게 인사를 했고 바이올렛이 알바를 입에 담자 그녀도 자신과 같은 일 때문에 왔는지 궁금해져 물어보았다.


"주관식에 주관식으로 답하는 건 0점이지만, 저희도 같은 알바 때문에 불렸었어요. 아마 유리 씨도 저희가 들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들으셨을 거예요."

바이올렛은 자신이 티나와 함께 들었던 이야기를 서유리도 들었을 것이란 전제하에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에 서유리는 둘도 정도연의 부탁에 응했느냐 물었고, 역시 응했다고 답해주었다. 그러면서 같은 알바를 하게 된 동지가 됐으니 서로 잘해보자고 티나와 서유리를 껴안았다.


"우왓,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바이올렛 언니."

"나도 너무 놀랐다, 지금 한적하다지만 네가 선공으로 공공장소에서 이런 행위를 할 줄이야."

바이올렛의 포옹에 서유리와 티나는 각자 정성스레 놀람을 표현했다. 둘의 반응에 바이올렛은 부끄러워하며 하이드가 의기투합의 포옹이라 가르쳐준 거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에 둘은 자연스레 납득하며 반격으로 바이올렛의 어깨에 손을 대면서 이번 알바를 잘 해내길 기원했다. 티나가 키가 심하게 작아 유독 키가 큰 둘이 꽤나 숙여야 했던 건 안 비밀이다.









------------------------------------------------------------------------------------------






해피편



그렇게 하츠네 미쿠 콘서트 당일날, 정도연은 팀원들과 함께 셋의 의식을 백업한 뒤 몸을 빌릴 준비를 마쳤다. 의식이 없어 빈껍데기인 몸들에 미쿠의 생김새를 입히고, 그녀의 프로그램을 깔아 콘서트 시작시간을 40분 가량 남기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3명의 하츠네 미쿠는 콘서트를 진행하는 데 돌입했다.

콘서트의 관객들은 3명의 미쿠가 불러내는 노래에 열광했고, 콘서트는 상당한 열기를 지닌 채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이맥스인 채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정도연은 일을 끝낸 3명의 미쿠를 다시금 기능정지시키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린 뒤 백업했던 서유리, 티나, 바이올렛의 인격을 다시금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정말 대단한 콘서트였다. 나도 보는 내내 사람들의 열기에 압도당해 무의식적으로 자폭하려는 충동을 참느라 고생했다."

"저에게도 감명깊은 경험이었어요. 여지껏 잔잔한 음악만 들어온 저에겐 문화충격이더라고요."

"전 그런 콘서트는 완전 처음이었어요! 녹화기능을 제때 찾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음 가족들한테 못 보여줄 뻔했다니까요."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티나, 바이올렛, 서유리는 각자가 말할 수 있는 최고의 말로 미쿠 콘서트를 감상한 것을 표현했다. 특히 티나의 말이 압권이었는데 엷은 웃음기를 띄면서 자폭하려는 걸 참았다고 말하니 절로 기계몸이 급속냉각되는 느낌이었다. 정도연은 셋에게 꺼림칙한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고, 약속한 자금은 바로 통장에 넣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유리에게 빚을 다 갚은 것을 축하해줬다.



"응, 제 통장에 돈이 더 들어와있네요? 뭐지?"

"그건 제가 보낸 거예요."

콘서트장을 나서 날아오른 서유리는 정도연의 말을 확인하려고 통장을 머릿속에서 확인했는데, 그녀의 말에서 1.5배는 되는 돈이 들어와 있었다. 서유리의 말에 곁에서 날고 있던 바이올렛은 자기가 받은 수고비에서 반을 떼어 보낸 거라고 말했다. 이에 서유리는 좀 당황해서옆에 있던 티나를 들이받을 뻔했다.


"저 이미 빚 다 갚아서 안 그러셔도 되는데......"

"당신의 기쁨을 불려주고 싶어서요. 빚에 허덕인 경험이 있는 당신이라면 제가 보낸 그 돈을 허투로 쓰지 않을 거란 기대도 있고요."

바이올렛의 말에 서유리는 기뻐서 하늘에 떠 있는 와중에 그녀를 껴안았다. 그런 둘의 사이에 티나도 껴들어 둘이 맞닿은 가슴에 턱을 어딘가에 받친 고양이처럼, 자신의 턱을 올리고 둘을 껴안았다. 이 셋의 공중 스킨십은 다행히 비행기가 지나는 경로가 아니라 셋만의 비밀로 남게 되었다. 








------------------------------------------------------------------------------------------






배드편





하츠네 미쿠 콘서트 당일, 정도연은 셋의 의식을 잘 백업한 뒤 작동이 정지된 셋의 몸을 미쿠로 분장시켰다. 분장 절차가 완료되어갈 즈음에 셋의 의식은 전자공간에서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하츠네 미쿠의 복제체가 되어 본연의 개성이 일정 부분 조작되었고, 자신들처럼 만들고픈 전염욕구에 물든 앞잡이가 되어버렸다. 셋의 의식이 멋대로 원래의 몸으로 향하자 정도연은 당황해서 재빨리 모든 장비를 껐지만 이미 늦어 제압당했다.

의식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보컬로이드로 세상을 뒤덮고 싶어하는 욕망에 찌들어버린 서유리, 티나, 바이올렛은 정도연과 그녀의 팀이 가져온 설비를 개조해 현장의 모두가 스스로를 임의의 보컬로이드라고 여기게 만드는 장치를 만들고 바로 써버렸다. 그렇게 동료를 늘린 셋은 콘서트에 온 관객들을 습격해 자신들과 한패가 되게 만들었다.

워낙 빨리 이루어진 습격이라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은 채 하츠네 미쿠 콘서트는 혼란의 싹을 틔우는 화분이 되었다. 밤을 틈타 콘서트장에서 퍼진 보컬로이드 감염자들은 곳곳에서 수를 늘려갔고, 결국 클로저들마저 감염되기에 이르렀다.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는 감염으로 인해 지구의 여러 국가들은 통치 체계가 무너져갔고, 그 국가들의 영토에는 감염자들이 부르는 노래만이 울려퍼졌다.

그렇게 국가들이 무너져갔고 사람들은 감염되어 보컬로이드들의 노래를 열창했다. 동세대 클로저라면 겪고 싶어도 못 겪는 수라장들을 이겨내어 강하다는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마저 감염에 굴복하고 서유리, 티나, 바이올렛과 함께 보컬로이드 감염의 앞잡이가 되어버렸다. 임의의 보컬로이드가 되버린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은 아직 감염되지 않은 이들을 잡아 전염시키는 앞잡이 일에 광적인 만족을 느끼며 여생을 살게 되었다.





이제 지구엔 노래밖에 들리지 않아.




------------------------------------------------------------------------------------------------------------


타락물 좀 빨아서 꼬멘네.

2024-10-24 23:17:0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