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of Striker-이세하 Ep-11 위상 집속

Sehaia 2017-08-23 3

추하고 끔찍했던 기억의 상영이 끝난 뒤 눈을 가볍게 쓰다듬는 정도의 전등이 눈을 열어젖힌다. 몸이 무겁다. 아마 위상력을 너무 많이 끌어낸 탓이겠지.


그 시절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거냐, 나란 놈은. 한심하구만.”


위상력을 무리해서 끌어내면 회복되기 전까지는 체력적으로 상당히 빈약한 상태가 된다는 것 정도는 그 시절에 뼈에 새겨지도록 배웠을 터. 그런데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면서 계속 뽑아낸 힘은 결국 정신을 대가로 취한 모양이다. 나중에 도박하다가 손모가지를 거는 상황까지 가면 곤란한데, 라고 남 일처럼 중얼거린다. 하긴, 걸 손모가지는 이미 묶여있으니 걸 수도 없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


진지하게 묻는데, 이거 왜 묶여있는 거냐.


, 일어났니?”


묶은 사람은 딱히 괴한이라거나 강도, 유괴범, 범죄자 같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분홍머리의 이슬비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별 걸 다 할 줄 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편이지만, 이건 뭐 범죄 영화라도 TV에서 본 걸까? 상당히 정교하게 묶여있어서 납치범 같은 게 날 구속한 건 아닌가 했다만, 혹시 얘, 진짜 납치범인가.


누가 납치범이니, 누가. 자기 눈을 후벼 파려고 발악하는 걸 막아준 사람한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아주 험담만 늘어놓는구나.”


미안한데, 나한테 자해하는 취미나 그런 거 없어. 그런 기억도 없고.”


자고 있을 때 기억 안 나나 보네. 가위에 눌려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괴성을 지르나 했더니, 갑자기 붕대를 하고 있는 눈 쪽에 손끝을 세워서 갖다 댔잖아.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 그런 거였군. 그래서 이렇게 등 뒤로 손을 수갑마냥 묶어놨다는 건가. 상당히 난폭한 방법이긴 해도, 이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내가 날뛰었다는 거겠지. 내 정신의 안정을 확인하고 이슬비가 자유를 돌려준 손목은 너무 깊다 싶을 정도로 매듭 자국이 남아있었다. 단순히 묶은 것만으론 이렇게 될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사실인 듯하다.

그 말이 사실이란 건, 눈꺼풀 안에 남아있는 꿈의 잔재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장님이 되지 않고 눈이 멀쩡하다는 사실은 꽤나 고마운 얘기다. 이건 감사인사를 취해야 할 국면이겠지. 거기에 나 때문에 고생을 했는지 눈에 피로한 기색이 엿보인다. 도대체 무얼 한 건지, 얘답지 않게 전신의 위상력 흐름이 좀 흐트러져있다. 얘 본인한테서 느껴지는 이상함도 이상함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이것들이다.


거기 있는 악기들은 다 뭐야?”


피아노에 바이올린, 첼로? 순간 여기 훈련실에 오케스트라 연주가들이 잠시 쉬러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풍스런 악기들이 놓여있었다. 평소 무기와 위상력으로 인한 폭력이 왔다 갔다 하는 이곳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물건들이다.


널 진정시키는 데 쓴 것들. 내 개인적인 위상력 제어 연습과 너 진정시키기 둘 다 하려면 이게 적격이긴 했는데, 좀 지친다.”


저것들이 위상력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거지?”


자고 있을 땐 그렇게 편안하게 듣더니만, 이제 와서는 하나도 기억 안 난다는 투네......한 번만 더 할 거야. 이젠 나도 힘들어.”


무얼 하려는지는 몰라도 굳이 더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이미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은 이슬비를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부드럽게 연주를 시작한 바이올린과 첼로가 통통 튀는 선율을 함께 자아낸다. 높아서 자칫 시끄러워 질 수 있는 바이올린의 음색을 첼로가 저, , 고음을 반복해서 이동하며 잡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윽고 합류한 피아노는 바이올린의 발에 맞춰 자신의 현란한 음색을 뽐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웅장하게 분위기를 살짝 틀은 첼로에 바이올린이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선율을 맞추며, 그 뒤를 피아노의 음색이 흐뭇하게 받쳐준다. 다시 경쾌하게 바뀐 순간에는 모두가 뛰어다니는 화창한 날의 어린이들 같은 경쾌한 음을 자아내면서도, 조용해지면 그 어린이들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노인들의 평화로운 웃음을 연상시키는 음이다.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오로지 조화 하나만을 위하여 악기가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피아노와 첼로 앞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투명인간이 앉아있는 것과도 같이, 피아노와 첼로는 그 자신을 스스로 움직이고 현을 켜고 있었다.


이윽고 하나의 경쾌한 춤과도 같은 곡 연주가 끝나고, 이슬비는 악기들을 사라지게 했다.


이제 오늘은 절대 안 할 거야......힘들어......”


브라보, 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네. 혼자서 3명분의 연주를 하다니, 너 악기도 배웠었어?”


어릴 적에 좀 배웠어. 그 이후로는 염력에 대한 훈련으로 혼자서 합주곡 연주도 많이 했지. 내 맘대로 무의식적으로 힘을 쓴다는 점에서는 위상력과 악기 연주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으니까. 그리고 여성한테는 브라바라고 하는 거야.”


진이 다 빠진다는 듯이 건어물이 되어있다. 확실히 지치긴 많이 지치겠다. 나도 예전에 리듬게임에서 나온 곡이 마음에 들어 악기를 배워보려 했으나, 그 난이도에 질려 금방 그만둔 적이 있다. 하나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집중력이 필요한데, 3개의 악기를 한 번에 연주하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라는 말로도 모자란다.


가만, 내가 쓰러진지 얼마나 지났지?


지금이 7시 반이고, 내가 정신을 잃은 게 6시 반 정도였으니까, 그럼 너, 1시간 동안 이걸 한 거야?”


정확히는 40분 정도. 잠깐 동안은 가만히 옆에서 책 보고 있었는데, 너가 발작을 일으키잖아. 널 진정시킬 방법이 딱히 떠오르질 않아서 해 봤더니, 의외로 효과가 좋더라고.”


그러니까,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을 옆에 두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건 다른 의미로 많이 무섭다. 설마 내가 계속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으면 어쩔 생각이었던 거냐.


아니. 사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눈을 다치지 않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야지. 그리고 미묘하게 몸이 따뜻한 것이 아무래도 이불도 좀 덮어준 듯하다.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있는 걸로 봐서는 금방 치워준 것 같다. 감기 걸릴 일은 별로 없다고는 해도, 가위에 눌린 걸 간호해 준건 고마운 일이다.


아무튼, , 고맙다. 그리고 이불 건도.”


이불?”


이불 덮어준 거 아냐? 아직 몸에 온기가 남아있는데. 그거 덕분인지 나름 잘 잔거 같다.”


고개를 한동안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짚이는 게 있는지 아 하면서 스톱한다. 순간 얼굴이 붉어지나 했더니, 고개를 휘젓다가 뺨을 두 손으로 몇 번 친다. 옆에 살짝 묶어서 내려놓은 머리가 휭휭 휘날리다가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그런 거. 그런 것보다, 빨리 연습이나 해.”


뭐야, 감사인사정돈 받아줘도 되잖아. 쌀쌀맞기는.”


아냐, 됐어. 그런 걸로 감사 인사를 받으면 오히려 부끄러우니까, 하지 마.”


손까지 내저으며 이렇게 말하는데, 굳이 계속 말하는 것도 실례다. 얌전히 연습이나 하자. 그럼, 어디까지 했더라.


분명, 건블레이드에 위상력을 둘렀던 건 맞는데, 그게 과해서 쓰러졌지.”


새삼 다시 자기가 한 일을 입에 담아보니, 멍청하다는 말 외에는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건블레이드에 날을 세우는 것도 하지 못하고, 무식하게 길이만 길게 하다가 위상력 과다 소모라니, 이 무슨 어리석음의 극치란 말인가.


그러나 이슬비의 눈에는 그렇게 나쁘지는, 최소한 처음 했던 위상력 측정 결과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는 결과였나 보다.


아니,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좋은 결과라고 해도 좋을 정도야.”


그건 또 뭔 소리야?”


모르겠어? 이걸 잘만 이용하면 너의 사거리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소리야.”


그건 무슨.......


서유기라고 하는 훌륭한 고전 문학이 있지. 거기 나오는 손오공은 자신의 무기 여의봉을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두 번째.’


불현 듯 아저씨의 말이 떠오른다. 무기를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확실히 이거라면 무기의 사거리를 임의로 조정하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야야, 방금 쓰러진 거 못 봤냐. 거기다 제대로 연마되지도 않고 늘어나기만 하는데, 이걸 둔기로라도 쓰라는 거야? 효율이 너무 나쁜 거 같다만.”


위상력은 많이도 잡아먹는 주제에, 이슬비의 나이프처럼 날이 서는 것도 아니다. 절삭력이 좋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파리채마냥 후드려 때리는 것에 특화가 되어있어 보인다. 이래서야, 전투법이 아예 변해버려서 무얼 위한 사거리 증가인지 알 수가 없다.


위상력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건 집중력이 많이 필요한데, 네 경우엔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지. 내 자랑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알면 말하지 마.


그러니, 이러는 수밖에.”


말을 마친 이슬비는 나한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몸을 반 바퀴 팽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몸을 내 등에 밀착시키더니 내 팔을 잡아든다.


, ! 뭐하는 거야!”


소리 지르지 마, 귀 아프니까. 그보다 집중이나 해.”


아니, 그렇게 갑자기 몸을 눌러대면 당연히 당황하지, 안 하는 놈이 어디에 있어! 동갑내기 여자와 이렇게 몸을 밀착한 건 유치원 이후로 없었다고!


옷 너머로 등이라도 맞댄 듯 평평히 느껴지는 몸에서 흘러나온 체온이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딱히 몸 어딘가가 눌린다는 느낌도 없는 안정감이 오히려 이성을 계속해서 뒤흔든다. 은은하게 퍼지는 샴푸 향기가 알싸하게 정신을 농락하는 와중, 혼신의 힘을 다해 억지로 건블레이드에 정신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왠지, 이런 말조차도 이상하지만, 뭔가 익숙하다. 이전에도 이렇게 꽉 안겨있었던 것 같은, 그런 요상한 기분이 든다. 에이, 내가 말해놓고도 뭣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꿈에서 엄마한테 안겨 있었던 것 때문일 것이다.


괜히 고양이처럼 버둥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리고 오른손으론 건블레이드를 들고, 왼손은 그 도신에 갖다 대 봐.”


머리는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와중, 오직 반사 신경만이 순순히 이슬비의 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좋아. 그 자세 그대로, 위상력을 둘러 봐. 너무 지나치게 한다 싶으면 내가 말 해 줄 테니, 그 부분은 걱정 말고.”


건블레이드가 내 몸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위상력을 두른다. 그러나 다시 서서히 늘어나는, 하지만 전혀 날이 설 기색은 보이지 않는 위상력을 보니 다시 맥이 빠진다. 길이를 더 이상 길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날이 서지도 않고 두꺼운 기둥처럼 그 형태를 바꿔가는 걸 어떻게 해 볼 방법도 딱히 없다. 이거, 또 실패인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슬비가 내 왼쪽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내 손 느껴지지? 지금부터 네 위상력을 날이 서도록 할 테니, 집중해. 내가 흘려 넣는 흐름을 잘 기억해.”


겹쳐진 손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내 손을 타고 흘러가더니, 이윽고 건블레이드를 타고 회전하기 시작한다. 나선형을 그리며 조금씩 담쟁이덩굴처럼 건블레이드를 타고 올라간 끝에, 내가 두른 위상력을 천천히 조인다. 끝에서부터 창과 같은 형태를 만들던 푸른빛은 이윽고 그 형태를 조금씩 날카로운 검의 형태로 바꾸어간다.


그렇게 힘을 주입하기를 몇 초, 마침내 내 눈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내 키보다도 긴, 빛나는 검 한자루였다.


후우, 이정도일까.”


지쳤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벽에 기대고 주저앉는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이 가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건블레이드에 정신이 팔렸다.


아름답다. 이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은은하게 푸른빛을 빛내며 한계까지 응축된 위상력이 하나의 검집처럼 건블레이드를 감싸고 있었다. 구름 속에 가려진 달을 살짝 꺼내들어 건블레이드에 휘감은 듯, 차갑게 느껴지지만 그 나름의 유연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검집이 가지지 못한 매서움을 품고 있는 그것을 보자, 그 얼마나 단단한 것이라도 가볍게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 휘둘러보자,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공기를 소리도 없이 가른다.


그렇게 손끝에서 피어나는 감각에 취해있던 나를,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현실로 끌어내렸다.

조금씩 흩날리는 걸 보니 지속시간도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빨리 모으지 못하거나, 너 혼자서 모으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만 조건이 안 맞아도 실전에서 쓰기는 힘들겠어.”


기지개를 크게 키며 이 검의 문제점을 들먹인다. 기껏 들떴던 기분이 조금씩 식는 것이 느껴진다. 확실히, 매번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위상력을 집속할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전투에서 11초는 생사를 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공격을 하려고 할 때 이걸 만들기 위해 7초나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이슬비의 도움을 받아서 그 정도라면 곤란하다. 2명이나 전장에서 이탈하다니, 그럴 바에야 이걸 씌우지 않는 채로 전투를 속행하는 편이 몇 배는 낫다.


그래도, 전투 상황에서 언제나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는 편이 좋아. 위상력을 컨트롤하는 연습에도 좋을 테고, 위력 자체는 좋아 보이니까, 틈틈이 연습해.”


, . 그럼 대강 이 정도인가?”


아니, 하나 남았어.”


말을 끝낸 이슬비는 휘청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위상력 결핍 증세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굳이 저렇게 까지 할 건 없지 않나. 그러나 저런 상태라면 내가 뭔 소리를 해도 듣지 않겠지. 정말 갑갑하다는 걸 넘어서있다. 차라리 동상이 쟤 보다는 유연할 것이다.


처음엔 너가 빨리 익힐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는데, 위상력 컨트롤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고, 방금 그거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이것도 겸사겸사 익혀둬.”


말을 마치고 다시 단검을 7개 꺼내 띄운다. 그리고 그걸 벽으로 일제히 날린다. 그건 몇 시간 전에도 시범을 보여줬지만, 그게 나한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지? 기껏해야 흐름을 익히는 시범정도라면 참고할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외엔 내 전투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너하고 내 위상력은 계열이 아예 다르잖아. 넌 염력, 전격. 난 발화. 별로 참고할 건 없을 거 같다만.”


바보야, 너 무기의 이름이 뭐야.”


바보라니, 이거 이름은 건브......., 설마.”


이거 이름이 블레이드니까.......


그래. 내가 단검을 쏘는 요령을 잘 익혀서, 불꽃을 사출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해.”


그건 벌써부터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것 같은.......”


, 맞아. 그러니까 연습하셔야지.”


좀 봐주면 안 될까?”


그럼 처음부터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면 안 됐어.”


씨익 웃으며 지친 얼굴을 끌어올리는 이슬비가, 오늘 따라 너무 무서워 보인다.

역시, 노력 같은 거 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불꽃을 쏘기 위해 또다시 잔소리를 들으며 수련하기를 대략 1시간, 서로가 위상력이 바닥을 기기 시작해서 오늘은 이만 하는 것으로 끝내기로 결정이 났다.


오늘은 여러모로 고마웠다. 이 눈도 그렇고, 연습 도와준 것도 그렇고, 연주까지.”


아냐, 괜찮아. 오늘 한 거나 나중에 체크, 복습할 테니 연습 잘 해둬.”


그 말은 나중에도 또 연습을 도와주겠다는 의미인 걸로 들린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귀찮다고 면박을 줘야하나. 처음 도와달라고 했던 게 나인만큼 별로 군소리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얘는 역시 너무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친다. 배우는 쪽도, 가르치는 쪽도 피곤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 그럼 얘는 매일 수련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지독하다.


이 이상 그 얘기를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에 화제를 돌린다.


근데, 너가 연주해 준 곡 이름이 뭐냐? 나중에 좀 찾아보게.”


, 그건 슈베르트의 송어. 개인적으로 연습했던 마지막.......곡이지.”


마지막?”


굳이 필요이상으로 말을 늘어뜨리는 이슬비가 왠지 슬퍼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 이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걸 묻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을 듣기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래. 이걸 연주한 연주회에서, 이 곡을 가장 들어줬으면 했던 분들은 사라져버렸으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저 덧없이 서글프게 쓴 표정을 짓는 녀석의 얼굴이, 그 어떤 때보다도 괴로워 보였다. 이런 때에 위로도 딱히 못하는 센스 없는 자신을 탓하면서도, 떠오른 의문을 철없다는 걸 알면서도 꺼낸다.


괴로운 기억이잖아.......그런 걸, 왜 굳이, 나 같은 걸 진정시키는데 연주한 거야.......”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녀석을 보자 왠지 더 답답해진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그것에서 도망치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 아닌가? 도대체 그걸 마주해서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거냐. 그냥 내버려둘 것이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다른 곡들도 좋아하셨지만, 이걸 연주할 때면 엄마, 아빠는 항상 눈을 감고 은은히 미소를 띠며 감상하곤 하셨으니, 그것 때문일지도. 다른 사람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건 이거하고 하나 밖에 더 없어.

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마음에 안 들어. 설령 그게 게으름뱅이 팀원이라고 한데도 말이야. 그리고 그게 날 구해준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난 번 발전소에서 스캐빈저를 처리한 일을 말하는 건가보다. 아직도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냐? 이 정도면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기가 찬다. 남을 구하는 건 클로저의 의무라느니, 평소엔 모범생처럼 말을 늘어놓는 녀석이 그런 당연한 일을 왜 당연히 여기지 못하는 건지.


여러 감정이 휘몰아쳐 석상이 되어버린 입을 멋대로 적당적당히 움직였다.


“......널 구한 건 딱히 널 위한 건 아니었어.”


그래? 그럼 무얼 위한 거였는데?”


흥미롭다는 듯이 말끝을 쭈욱 늘이는 게 평소보다 얄밉다. 얄밉긴 한데,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느꼈던 답답함은 어느 새 뇌를 꽉꽉 조이는 밧줄이 되어 입을 움직이는 것만을 가까스로 허용한다.


굳이 그런 거 묻지 마. 너가 맨날 말하는 의무인지 뭔지 인게 당연하잖아. 그거 아니고도 남을 도울 정도로, 난 착한 편이 아니야.”


내 대답에 오늘 있었던 일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는 듯, 이슬비는 피곤해 보이는 눈을 늘어뜨리며 그저 웃었다. 여태까지 보인 웃음 중 가장 화창하고 밝게.


, 그러세요. 그런 걸로 쳐둘게요. 착하지 않은, 그러면서 남을 멋대로 구하시는 클로저 님.”


.......

얄미운 녀석.

 


싱긋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드는 이슬비를 반쯤 억지로 무시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는 도중, 어깨와 옆머리에 무언가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홍색, 머리카락?”


이슬비의 것, 이외에는 딱히 짐작이 가지 않는데.


이게 언제 붙은 거지? 딱히 바람이 붙은 것도 아니고, 걔와 접촉한 곳은 등인데, 왜 여기서 걔의 머리카락이 나오는 거냐.


, ,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적당히 몸을 움직이다가 붙었나**.


설마 날 진정시키려고 꽉 안아줬다거나, ‘괜찮아라는 말을 내 귓가에 말한다거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에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그렇게 하기야 했겠어. 요즘 같이 다니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정말 쓸데없는 상상만 는다. 어서어서 잠이나 자자.

.

.

으아, 왜 잠이 안 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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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Closenea입니다. 지난 번 세하의 과거 회상에 이어 위상 집속검수련편이었습니다. 별다른 특별한 건 없습니다만, 조금 한심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번 편을 끝으로 한동안 휴재에 들어갑니다. 자세한 내용(그래봤자 별거 없지만)은 따로 올립니다.



Ep-10 이름 없는 괴물(2)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pageno=3&n4articlesn=12425

 

Ep-12 재해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aspx?n4articlesn=12797

2024-10-24 23:16:5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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