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세리] 겜창팔이 소녀의 재림 (4화)
21대대통령서유리 2017-08-21 0
어림잡아 백 마리 정도 였던 괴물들의 숫자가 두 자릿수, 한 자릿수 단위로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내 주위에서 유기적인 생체활동을 하는 개체들이 한 마리도 남지 않게 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게 플라즈마라서 그런 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효과는 나름 이걸로 입증된 것 같네. 사체 타는 냄새가 주변서 고약하게 진동하긴 했지만 그게 별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 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건, 상황 파악.
“이것들은 대체 뭘까?”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고열에 뭉개지거나, 신체의 일부가 대기 중으로 증발한 변사체들이 곳곳에 널려있는 풍경을 관망하며 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의 원초적인 질문. 저 **들은 대체 뭐고, 어디서 어떻게 왔으며, 무엇을 위해서 왔는가. 정상적인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도구를 사용한다던가 하는 게 아니라 이빨 하나만 믿고 나를 공격하려 했던 걸로 봐서는 지능도 상당히 떨어지는 것 같다. 참, 지능이 떨어지니까 괴물이겠지.
그나저나, 현재까지 모은 팩트로만 가설을 세우고 현 상황을 추론해내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지 싶다. 가설 추론 같은 수준 높은 것을 하기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나도 빈약할 뿐더러, 무엇보다 난 지금 이 쇼핑몰 바깥으로 나가보질 못했으니. 좋아, 일단 이 곳을 벗어나보자. 시내 꼴을 보다보면 뭐라도 할 일이 생기겠지.
“저기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명랑하고 청명한 목소리. 사람, 그것도 젊은 여자 목소리다! ** 드디어 사람을 만나는 구나! 세종까지 혼자 가다가 고독사해서 뒤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말동무가 생겨서 다행이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마자, 단연 눈에 확 띄는 인상착의를 한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순간 살짝 멈칫했다. 뭐야 저 여자. 왜 일본도랑 권총을 들고 있지? 복장으로 추정해보건대 나랑 비슷한 나잇대의 여고딩 같은데, 도검류 소지 허가증이 나올 리가... 아, 그래. 지금이 전시 상황이라면 말이 되는 군. 납득했다. 전쟁 통에 폭도들이나 인민군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는 행위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지. 저 쪽도 딱히 날 공격할 이유가 없으니, 안심하고 말을 걸어보도록 할까.
“아, 안녕하세요. 아직 피난 안 가셨어요? 저도 아직 피난을 못 가서...”
이건 진짜 피난을 갔는지 안 갔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서울이 지금 내 예상대로 피난가야 할 장소가 맞는지, 혹은 피난 갈 이유가 없는 장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물어보는 일종의 정보 탐색이다. ‘왜 피난을 가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면 여긴 안전하단 뜻이고, ‘무슨무슨 이유때문에 피난을 못 갔습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면 지금 당장 저 여자와 일행으로 합류해서 세종까지 내려가야겠지.
“네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기 계시면 위험- 하진 않으시겠지만, 여긴 유니온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예요! 폐쇄 된 지가 언젠데, 대체 어떻게 들어 오신 거예요?!”
유니온?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 이게 다 뭔 소리지? 무슨 피난이냐는 대답으로 미루어 봐서는 지금 전시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여기가 오래 전에 폐쇄 된 구역이라고? 아 **, 갑자기 두통 온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지금 전쟁난 거 아니예요? 여기 내 기억 상으로 타임스퀘어 맞는데, 여기가 폐쇄 된 장소라굽쇼?”
“...저기요, 아까 보니까 위상능력자이시던데... 클로저 아니세요?”
“클로저? 그게 뭐예요? 먹는 거에요?”
“그게 먹는 거라면 참 좋겠지만... 으으,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따라오세요! 안전한 곳으로 바래다 드릴게요, 만나 뵈셔야 할 사람도 있으니까.”
반응 보니까 전시 상황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 여자, 이런 상황에서도 내 농담을 받아주네. 근데 잠깐만, 위상능력자? 클로저? 이게 다 무슨 말이래? 요즘은 그런 직업도 있나? 일단 안전한 곳까지 바래다 준다니까 순순히 따라가기야 하겠는데, 무슨 만날 사람이 있다는 거야?
...**, 안 되겠다. 잠깐 머리 좀 휴식시키자. 안 굴리던 짱구를 갑자기 하드코어로 몇 십분 씩이나 굴리다 보니까 ***에 과부하 걸릴 것 같아. 그래. 먼저 생각 좀 비우고, 그 다음에 천천히 정리를 해보자. 그럼 뭐라도 나오겠지. 이대로 가다간 추론은 고사하고 내가 먼저 죽겠다. 지금 내겐 휴식이 필요하다고, 암.
***
‘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지?’
유리가 그 여자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감상이었다. 자신보다 위상력을 몇 배는 더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능력과, 자신처럼 총기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단번에 ‘베테랑’이라고 일컫을 수 있을 만한 화려한 사격 실력, 그리고 차원종을 마구잡이로 학살해대며 드러냈던 그 광적인 모습은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왔기에.
거점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나누게 된 대화로 알게 된 사실은 더 충격적이었다. 이 아이, 나랑 동갑일 뿐더러 원인 모를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다. 자신이 발휘한 능력이 위상력이라는 것도 모르는 건 고사하고, 자신이 왜 그 곳에 있었는지조차 기억을 못해내니... 순간적으로 한기남 아저씨와 같은 벌처스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버렸다. 말도 안 돼, 벌처스에 나 같은 어린 애들이 있을 리가 없잖아. 있어도 지금 사정이 안 좋은 유니온에나 있겠지.
“어쩌다 거기 들어간 건진 모르겠는데, 거긴 무지무지 위험한 곳이야. 나 같은 클로저나 유정이 언니 같은 유니온 관계자, 그리고 송은이 경정님 같은 특경대만 허가를 받고 거기 들어갈 수 있는 거라구.”
“그렇구나, 앞으론 조심할게.”
“...너 하는 거 보니까, 딱히 조심할 건 없겠더라.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당황스러웠을 법도 한데, 진짜 잘 싸우더라구! 내가 봤을 땐 너 클로저 맞는 것 같아. 임무 때문에 여기로 왔다가, 사고로 기억을 잃은 게 분명해!”
“그걸 또 언제 봤대.”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지는 듯 하다가 바로 태연한 척 하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는 그 여자애의 모습에서, 유리는 순간 자신의 소꿉친구의 모습을 본 것 같다는 감상을 느꼈다. 어째 정미정미랑 성격이 좀 비슷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최근에 정미정미를 못 본지 너무 오래 되서 그런건가? 잠시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려던 유리는, 복잡한 작업을 거부하는 자신의 두뇌에 통증이 느껴지자 그것을 바로 그만 둬 버렸다. 역시 난 머리 쓰는 일엔 영 젬병이라니깐.
“아, 그러고 보니 여태 이름을 안 물었네! 너 혹시 네 이름 기억 나?
“...어.......음.....”
“...기억 안 나?”
기억 상실증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우후죽순으로 하도 많이 나와서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 실제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친구를 보니 괜히 우울해진 유리였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나, 유리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세리.”
“응?”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 애는,
“이세리, 이게 내 이름인 것 같아. 아마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