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새겨둘 수 있어
루이벨라 2017-08-14 11
※ 전편 『새겨둘 걸 그랬어』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2069/
※ 몇몇 설정 날조주의
※ 어쩌다보니 '사계' 시리즈 다음으로는 '울다' 시리즈를 연재하려고 했는데 '새겨두다' 시리즈를 중간에 먼저 연재하기 시작
※ 조만간 '울다' 시리즈도 스타트할 예정
부제 : 처음으로 느낀 벅찬 희망이었다
"...세하야?"
"...!"
아, 맞아. 지금 상황에서 내가 얼마나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서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간대는...<지고의 원반> 과 관련된 첫번째 사건을 수습한 직후의 시간대였다.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에 갑자기 헐레벌떡 나타나서 눈물을 쏟아내는 게 얼마나 이상한 행동이었는지 깨달았다.
무엇보다 날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서유리의 얼굴을 보는 게 싫었다.
웃어줘. 이 한마디를 당장이라도 하고 싶었다.
"세하야, 너 괜찮아?"
"어, 어...응...괜찮아."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꺼냈다. 이때의 이세하라면, 이세하라면...서유리에게 드는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둔하고도 멍청한 사람이었으니. 그 멍청이를 연기를 해**다. 서유리가 내 손을 잡더니 일으켜주었다. 이제 어느 정도 눈물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전력질주를 한 사람처럼 숨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야말로 벅찬 감동. 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정말로 다리가 풀려버렸다. 그 원반 때문에 내가 얼마나 험한 일을 많이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원반에게 감사함까지 느끼고 있다. 정말, 정말이었다. 현실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일어날 수 없었던 현실이 현실이 되었다.
"무슨 일이셔? 갑자기 그런 행동이나 하고."
"..."
그런 행동...이라. 그래, 여기에 있는 나를 제외한 모두는 미래 따위 모르는 현재를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 중에서 자신들의 앞에 어떤 사건이 터질지, 자신은 그로 인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꿈인가...싶어서."
충분히 중의적인 의미의 대답이었다. 너한테는 데이비드를 무찌르고 뉴욕을 탈환한 의미겠지만, 나한테는 아니었다. 나한테는 이 시간대를 한번 더 지낼 수 있음이었다.
"에에, 꿈 아니잖아!"
"...그렇지?"
"응! 세하는 말이야, 가끔씩 보면 너무 감수성이 풍부하단 말이야. 그렇다고 말이야, 갑자기 그렇게 주저앉아 울어버릴거까진야..."
"..."
감수성이 풍부하다랄까. 그런 소리를 가끔씩 서유리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다. 난 감수성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흐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감정에 예민해지는 건 항상 너와 관련된 일이었다. 넌 그걸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예전에는 이 시점에서 서유리와 나는 무슨 말을 했더라. 분명 이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던 같은...데...왜 이리 기억이 희미하지?
-세하, 잘 잤어?!
-...응.
-아침 먹어야지!
-...
-...이세하, 너 아직도 자고 있지?!
-...
"..."
...기억이 희미했던 이유를 알 거 같다. 말했지 않은가. 이 시점에서는 우리는 아주 힘든 임무를 하나 마친 직후였다. 피곤에 절인 몸이 휴식기를 가지고 있던 시기. 이 상황에서의 내 기억이 희미한 이유는 당연했다. 난 이때, 아주 멍청하게도 반쯤은 잠에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와의 이런 일상적인 대화도 미래의 나한테는 얼마나 소중한지 난 이제 알기 때문이다. 그 흐릿한 기억 대신 이 기억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겠지.
이 상황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 *
"이제 여러분들은, 클로저에요."
<늑대개> 팀원들을 향해 말하는 유정 누나의 말. 뒤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우리들도 가슴이 뜨거워지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이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나는 알고 있다. <늑대개> 팀은 <검은양> 팀과 합동 작전을 벌이는 유니온 특수 처리반이 되었고, 늑대개 대원들은 모두 '요원' 이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나타들이 요원복을 입은 모습이 이제 내게는 익숙해졌다.
미래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사라지고 무(無) 상태에서의 나로 다시 시작했다면 난 또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지고의 원반> 을 찾아갔겠지...물론 나는 그게 두번째인지는 몰랐겠지만.
나 개인의 욕심으로 섭리를 거스르는 건 한번이면 충분했다. 이 한번의 기회도 얼마나 소중한건지, 원래라면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걸...난 너무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유정 누나의 '클로저에요.' 라는 말은 신호탄과도 같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유리의 죽음으로 다가가는 카운트다운의 시작이었다. 이 이후부터 우리가 맡게 된 임무는 천천히, 티가 안 날 정도로 조금씩, 가는 비가 옷을 천천히 스며들듯이...서유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걸 서유리를 잃고 나서야 깨달은 천하의 멍청이였다.
옆에 있던 서유리가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서유리는 나타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웃음꽃이 핀 너의 옆얼굴이 참 예뻤다.
"이야, 우리 나타 사부도 클로저라니...!"
"...그렇게 좋냐?"
"응! 너무 좋은걸 어떡해!"
"..."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생겼다. 예전이라면 무심하게 바라보았을 나타와 서유리의 저 대화 장면이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왜 대화를 나누는 걸까. 그리고 어쩜 저렇게 분위기가 좋을까. 내 앞에서도 서유리가 저렇게 웃고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있었겠지.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의 끝은 늘 이상한 부분에서만 흐릿하다.
"..."
"...어?"
"뭐냐, 이세하?"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나타와 서유리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끼어들었다기보다는 서유리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끌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나도 모르는 새 하게 된 행동이었다. 많이 남았다면 많이 남은, 하지만 적다고 하면 많이 적은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좀 더, 하루라도, 1시간이라도, 1분 아니 1초라도 더...서유리의 모습을 새겨둘 수 있게 된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난 안다. 그 피를 토하는 거 같이 고통스러운 그 심정을 느끼면서 겨우 얻게 된 소중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조금이라도 더...1초라도 아니 1분...아니 1시간, 하루라도 더 같이 보내고 싶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서유리는 끌려가는 이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운 거 같았다.
"세하야...?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뭘."
"너, 지금 엄청 화난 얼굴이잖아."
내가 화난 얼굴이었다고? 생각지도 않는 기습 공격이었다. 그 기습에 느슨해진 내 손을 빼며 서유리가 손목을 매만졌다. 아파하는 거 같았다. 내가 그렇게...세게 끌고 갔었나?
"나, 화 안 났어."
"에이, 거짓말. 입술이 그렇게 삐죽 나왔으면서?"
"..."
거짓말, 이라고 대꾸하려고 했지만 서유리의 말대로 정말 입술이 삐죽 나왔다. 그렇다는 건...정말 화난 사람처럼 보이는걸까? 날 유심히 보던 너는 알았다, 라며 손뼉을 딱 쳤다.
"아아, 알겠다!"
"...?"
"세하, 너...질투하는 거구나!"
"질투...?"
질투. 그 단어로 서유리는 나에게 한방을 두번이나 먹였다. 화냈다니. 그리고 그게 질투라니.
설마, 설마, 설마...
"세하, 내가 나타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질투 나?"
"...그런 거 아니야."
화를 냈다니, 질투를 했다니...그런 거 아니었다. 그저, 같이 있고 싶었을 마음으로 한 행동일 뿐인데. 그게 화가 나고, 질투하는 행동으로 보였던걸까.
"...정말?"
"정말."
"진짜?"
"진짜."
아니면 난 정말 화가 나고, 질투를 했던걸까. 네가 떠난 그 몇년 동안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걸까, 나. 아니면 감정 표현을 하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자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둘 다인걸까.
그러고 보니 너는 모든 의구심이 풀릴 때까지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거 같았다. 이번에도 그 상황에 해당될 거 같았다. 나를 빤히 보는 그 눈빛이 부끄러워서 일부러 시선을 회피했다.
"에에! 시선 피한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면..."
"에에? 나타 앞에서 날 패기스럽게 끌고 갔던 건 어디로 가고 왜 그리 부끄러워해?"
"그건..."
내가 서유리를 좋아한다고 자각을 했던 건 이로부터 1년 후의 이야기였다. 한창 바빠지고 서로간의 만나는 시간이 부족해졌을 때였다. 인간은, 사라지고나서야 비로소 그 존재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정말 미련맞도록 멍청한 동물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멍청했던 건 나다.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고, 네가 없으면 내가 힘들다는 걸 알았는데도 난 그걸 또 잊어버려 이런 가슴 아픈 결말을 맺을 뻔 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그와 함께 벅찬 희망도 같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서유리."
"응?"
고백하기로 했다. 언젠가의 나는 서유리에게 꼭 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늦출수록 좋은 법도 없었다. 이왕 할거면 지금 이 타이밍에...
"나 말이야."
"응?"
...하라고, 미래에서의 어른 세하, '그 때의 나' 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거 같았다.
"...좋아해."
* * *
이제부터 하루하루를 기록할 수 있게, 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오늘 쓸 건...무엇일까.
처음으로 느낀 벅찬 희망, 오랜만에 느끼고 자각할 수 있었던 나의 감정.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살아있는 너의 얼굴. 나의 고백에 얼굴이 새빨개지던 더듬으며 장난이냐며 묻던 너. 그 반응은 1년 후의 처음 고백했을 때의 너의 반응과 똑같았다.
똑같았어...그래서 다행이야.
그리고 그 뒤에 내가 내민 손을 잡아준 것도 똑같아서 다행이야. 맞잡은 두 손은 체온으로 인해 따뜻했다.
그래, 넌 정말 내가 아는 서유리구나. 게다가 꿈도 아니구나. 정말 다행이야. 새겨둘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제 하루하루를, 마음 깊은 속에 새겨두며 살면 되었다.
[작가의 말]
http://cafe.naver.com/closersunion/242377
참고로 지금 세하의 시점이 조금(?) 성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산전수전 다 겪고나서 경험이 <클로저스> 속 현재 세하보다 훨씬 많은, 쉽게 말하면 애늙은이 세하...
이거 엔딩 루트가 3개(혹은 4개)있는데
차례대로 희망편, 노멀편, 절망편(절망편은 엄밀히 따지면 엔딩이 2개...).
아직 엔딩까지는 2~3편 정도 남았으니 어떤 엔딩을 쓸지는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절망 루트 엔딩 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