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세하] 당신을 위한 춤

루이벨라 2017-08-08 2

※ 지인분께 헌납하는 하피세하

※ 무희로 가장한 적국의 첩자 하피 x 제국의 황태자 세하





 

 수많은 무희들 속에서 유독 빛이 났다. 저 혼자서도 무도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홀려버리기에 그 무희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름답기도 하면서 자유분방한...자신이 결코 목소리를 높여 주장할 수 없는 것들을 그 무희는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이 갇힌 틀에 답답해하던 왕자가 매료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춤을 추는 무희와 차세대 나라를 이끌 왕자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는 흔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해산!"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에 하피는 대기실로 돌아와 땀을 훔쳤다. 어려서부터 춤 솜씨가 뛰어났던 하피는 동네 술집 같은데서부터 춤을 췄었다. 그녀의 춤은 한번도 안 본 사람은 있지만, 한번만 본 사람은 없을 정도의 그녀의 춤 솜씨는 뛰어났다. 거기다 빼어난 외모로 인해 특히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15살이 된 이후로는 좀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다며 무작정 집을 나와 이 나라의 수도인 곳까지 오게 되었다. 최신 트렌드가 빛나는 나라의 중심으로 왔음에도 하피의 춤 솜씨는 사람들 사이에 입방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1년 전 궁중 무희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궁중 무희 경력 1년인 막내 쪽에 속했지만 몇 달만에 궁중 무희단원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무희가 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돌아오니 자신의 자리에 왠 장미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옆에는 분홍빛의 편지 봉투도 같이 꽂혀있었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하피이니만큼 개인적으로 선물이 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하피가 아는 한 이런 꽃다발과 함께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었다. 하피는 망설임 없이 편지봉투를 찢어버렸다. 편지의 내용은 하나도 읽지 않은 채 말이다. 제 할일을 다 끝내자 하피는 천천히 어느 곳으로 향했다. 황족들만 출입할 수 있는 정원. 그 정원의 문은 항상 닫혀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열린 상태였다. 하피는 열린 문을 향해 익숙하게 들어갔다. 조금 걷자 나오는 정자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마침 달빛이 구름 속에서 나와 그 상대방의 옆얼굴이 선명하게 보여졌다.


 "...오셨어요?"
 "무슨 일이시죠, 전하?"


 자신을 부른 사람은 이 나라의 차세대 지도자가 되는, 현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세하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제국의 왕자님, 황태자였다.

 "오늘 공연도...너무 멋졌다고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건 꽃다발에 같이 보낸 편지에 써도 되었잖아요?"
 "...직접 말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 같은 천박한 무희한테 너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좋다고 몇번이나 말씀드리는거죠?"
 "오늘까지 합하면 총 199번입니다."


 그걸 일일히 세고 계셨구나...하피는 팔짱을 꼈다. 왕자는 무대가 있던 날 밤마다 늘 그렇게 축하의 꽃다발을 보냈다. 거기에는 항상 장소와 함께 이 곳으로 나와달라는 편지도 함께였다. 항상 같은 장소로 199번 불려가니 하피는 이제 그 장소가 어디인지 외울 정도였다.


 "마침 저도 전하께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뭐죠?"


 맑은 토파즈 같은 눈동자를 가진 황태자를 보며 하피는 무심코 생각했다. 나도 저런 눈동자를 가졌던 때가 있었던 거...같은데, 언제였더라. 일일히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억만 하면 더 큰 아픔만 될 뿐.


 "제가 왜 전하한테 저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청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천박한 무희, 라는 말이 대부분의 핑계에 들어가있는 걸로 보아 신분이 이유입니까?"
 "그것도 있죠."


 이제 말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래, 이제 곧 마지막일테니까.


 "전 내일로 무희 생활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네?"
 "무희 생활을 그만둔다고요."


 웃음기마저 서려 있는 목소리에 황태자는 당황한 듯 보였다. 아직, 어린애구나...그러고 보니 황태자는 이제 갓 성인식을 치루었다. 그러면 나랑 나이 차이도 좀 있다는 건데...여러모로 안타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그런..."
 "그만두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도 소용없어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까요."
 "..."
 "이제, 무희 생활이 질렀을 뿐이에요. 고향으로 내려가서, 평범하게 밭이나 갈며 살고 싶어졌어요."


 하피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그 사실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하피가, 이 무희가 그동안 보여준 춤에 대해 굉장한 위안을 얻었던 황태자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하피는 평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 평범하게 밭이나 갈며 살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 나지막히, 원망하듯이 말을 꺼냈다.


 "...거짓말."
 "네?"
 "거짓말도 정도껏 하거라."


 하피는 잠시 움찔거렸다. 황태자와 만나게 되면서 황태자가 자신에게 위엄적인 말투를 쓴 건 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태도로 보아 지금 황태자는 상처를 받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랬는데. 이 소중한 왕자님.


 "거짓말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금방 들통이 나버렸네요."
 "..."
 "황제께서도 염려하신 사항이 있잖아요. 첩자...같은 거 있는 게 아니냐고."


 첩자. 그 말이 나오자마자 황태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피는 이로써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 소중한 황태자에게 절대로 줘서는 안되는, 그리고 치유가 되지 않을 상처를 줬다는 걸.


 "...네가 첩자라는거냐?"
 "네."
 "어째서 그렇게 쉽게 말하는거지?"
 "그야 물론, 전 내일 마지막 공연을 이후로 없었던 사람이 될 거니까요."


 하피가 말하는 없었던 사람이 될 거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였다. 소리도 없이 사라져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겠다는 것, 아니면 첩자인게 들통이 나 참수형을 당하는 것.


 하피는 후자의 경우를 원했다. 그래서 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칠 셈이냐."
 "그래야죠. 그게 첩자의 역할 아닌가요?"
 "나한테 이 사실을 말하다니, 무른 것 아니냐. 내일 공연이 끝나자마자, 체포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경우는 생각하지 않은건가?"
 "네, 전 천박한 신분일 뿐이지 멍청하진 않으니 당연히 알죠. 그저..."


 한숨, 두숨, 세숨.


 "죽게 된다면 전하한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 말은..."
 "...죽여주세요."


 아, 또 상처를 주고 말았다.


 "첩자로 살면서 안된다는 걸 알지만, 저도 전하가 꽤 좋아진거 같아요. 그래서 첩자로서는 최악의 인생으로 남는 일이, 저한테는 최고의 인생으로 남는 일이 되어버린거겠죠."
 "...하피."
 "가련하고, 소중한...깨지기 쉬운 보물과도 같은 사람..."


 좋아했어요. 아니, 지금도 좋아해요. 사랑...까지라고 말을 해도 될까요? 아마도 죽는 순간까지도 난 당신을 사랑할지도 몰라요.


 "내일, 최고의 무대를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춤이 끝나는 즉시, 절 죽여주세요."
 "..."
 "부탁이에요."


 당신한테서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고 싶으니까.

 

 


* * *

 

 


 "곧, 공연 들어갑니다!"
 "네, 준비 다 되었어요."
 "하피 씨, 정말 아쉽네요. 은퇴를 하시다니..."
 "이제라도 부모님 곁에 가서 못한 효도라도 해야죠."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동료 무희는 그 말에 쉽게 속아넘어간다. 역시, 자신은 거짓말을 매우 잘한다. 그 황태자님이 너무 눈치가 빠른 것이다.


 공연까지는 앞으로 5분. 그리고 자신이 죽기까지는 앞으로 1시간 남짓. 죽는다는 거...어렸을 때는 두려워했는데 지금 곧 죽는 하피의 마음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사실 하피라는 이름도 가짜. 애초에 못 배우고 자란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니 이름 같은 게 있을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이 '하피' 라는 이름도 소중하게 되었다. 당신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니까.


 물끄러미 거울을 보고 있노라니 어제 황태자가 보내준 장미 꽃다발이 눈에 띄었다. 하피는 충동적으로 그 중 하나를 뽑아 자신의 머리에 고정시켰다. 이쁘게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마지막 공연이 시작되었다.


 하피가 입장하자마자 환호와 안타까움이 섞인 군중들의 아우성이 들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황태자 딱 하나 뿐이었다. 유일하게 모든 걸 아는 황태자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달리 굳어있었다. 하피는 그런 황태자를 향해 미소를 날렸다.


 어느 농부의 딸이 아니라, 어느 나라의 첩자가 아니라, 무희 하피로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련한 한 무희의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받친 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춤은 황태자에게 바치는 춤이었다.


 무희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라고 역사서에는 그렇게 기록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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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23:16:4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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