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no 01. 앨리스(Alice)

루이벨라 2017-08-07 2

※ 배경은 중세 ~ 근대유럽 모티브로 한 페럴레 세계입니다.
※ 볼프강 로열로즈 C타입 일러보다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뱀파이어물 연성
※ 장편은 무리고 중편 정도로 마무리할 예정

※ 캐릭터 재해석주의

※ 이전편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2298/

 

 

 

 

 

 "...짜증나는군."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실감이 되었다. 나, 완전 인간은 아니게 되었구나, 하는 그런 후회같지 않은 후회.

 ...이미 어느 정도 각오했잖아.

 그 먼지투성이의 서재 안에서 이 검은 책을 발견한 순간부터.

 

 -괜찮나?
 "...괜찮아보이면 그런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괜찮은 거냐고 하면 괜찮은 거고, 안 괜찮은 거냐고 하면 안 괜찮은 거다.

 ...뭐가 이리 모순적이냐, 나라는 사람.

 

 "걱정 마. 다친 곳은 없으니까."

 

 지금 흠뻑 뒤집어 쓰고 있는 거, 내 피가 아니라 아까 골목에서 마주한 흡혈귀의 것이었다.

 그래, 그 녀석...죽었겠지.

 

 -그보다 일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게. 이렇게 복잡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

 

 마치 재리의 태생처럼 엄~청 복잡하군. 아, 맞아. 대충적인 내용 정도는 될테니 재리에게 보고서나 작성할까. 난 옆에 있는 검은 책의 한 페이지를 뜯었다. 어차피 이 책은 뜯어도 뜯어도 페이지가 줄어들지 않는다. 페이지를 아무리 많이 채워도 공백인 페이지도 늘 그대로였다.

 신기한 책이다. 아무튼 재리에게 전달할 내용을 대충 적어내린 다음에 종이비행기를 접었다. 비행기를 날리자, 비행기는 저 하늘 높이로 솟구치더니 사라졌다. 분명 재리에게로 전해지리라.

 재리와는 늘 이런 식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 책이 저주의 책이라느니 하는 뭐라고 하는 건 있지만 이런 통신수단에서는 제법 쓸만하다. 이 밖에도 의외로 이 책의 페이지를 사용해서 유용하게 써지는 부분이 많았다. 참 실용적인 책이다.

 아, 이 책에 '악령' 이 잠들어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래서 어쩔거야?"
 -...

 

 이쪽에서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어서 벨에게 물어보았다. 녀석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지. 지난 수백년간 살아오면서 이런 케이스는 처음이었으니까. 아마도 벨 녀석 인생에 있어서도 처음인 모양이었다. 항상 처음인 것은 서투른 법이다. 하지만 서툴 것도 따로 있지. 이건 까딱 실수라도 하나 하면 엄청 대형사고로 퍼질거 같은 거라고...

 

 -볼프.
 "왜 불러."
 -날 그곳으로 다시 데려다줄 수 있나?
 "...뭐?"

 

 거길 또 가?! 아, 진짜...안 그래도 구역질 나게 처리를 해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 중 하나인데. 하지만 벨 녀석이 꺼낸 다음 말은 충분히 설득이 되었다.

 

 -지금의 난 사념 그 자체. 사념이 못 깃드는 곳은 없다. 그리고 이런 사념이 된 것이라도 이득인 점은 하나 있더군.
 "...기억 읽으려는거지?"

 

 벨 녀석...그걸 왜 이제 말해! 그랬다면 처리하자마자 바로 그렇게 하게 해주었을 거 아니야...지금은 가봤자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 말라비틀어진 피밖에 없을텐데. 너, 고체는 못 먹잖아?

 톡- 내 머리 위에서 무슨 액체 하나가 떨어졌다. 아, 맞아. 나 그 녀석 피를 뒤집어쓰고 왔지. 그래서 이거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오해 받기 쉬우니 밤이 되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고.

 

 "꼭 거길 갈 필요는 없을거 같긴 한데..."
 -헌데?
 "근데 아주 조금인 것도 괜찮으려나."
 -괜찮다.

 

 이 몸을 무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책 주제에 히죽 웃고 있는 거 같았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페이지를 펼쳤다. 어서 피를 달라는 듯 책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사 핑계로 먹이 섭취하려는 건 아니지?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주 작은 한방울이 책 위로 톡- 떨어졌다. 극소량의 양이었는데도 벨 녀석이 엄청나게 반응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피의 주인의 기억이 무척 격렬한 모양이었다.

 

 "작은 단서 하나라도..."

 

 나오면 좋겠는데. 이 게으름뱅이 주인 녀석이 일을 제대로 해야 말이지.

 

 

* * *

 

 

 "또 흡혈귀한테 당했대!"
 "이번엔 A지역 골목이래!"
 "이래가지고 편하게 살 수 있으려나..."

 

 그렇게 걱정이시면 어둑한데 다니지 마시고, 낮에만 다니시면 되잖수. 아, 이번에 일어난 사건은 낮에 일어난 사건이지? 그럼 그건 패스하기로 하고.

 

 "한달 동안 벌써 50명이나 희생이 되었어...!"
 "황제께서는 도대체 언제 결단을 내리시려나."

 

 ...황제, 라.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어서 얼른 다른 쪽 귀로 흘러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여전히 금발은 더럽게 많군. 금발에 적안인 사람은 별로 없지만. 하여간 꼴도 보기 싫은 머리카락 색이다. 금발 안에 있으면 흑발이 더 눈에 뜨이니까.

 벨에게 들릴만큼만 속삭였다.

 

 "...야, 벨."
 -...
 "아직도 조사 중인거냐?"

 

 그 이후로 벨 녀석...묵묵부답이다. 기억이 꽤나 거칠었는지 잠시 요동을 치던 책은 곧 잠잠해졌다. 이제 한시간만 더 지나면 조용해진지 만 하루가 되어가나. 생각할 시간을 달라, 라는 걸까. 아직 마땅한 단서가 하나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 느긋하게 쉬고는 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이거 왠지 모르게 엄청난 일에 휘말린 느낌이었다.

 재리에게도 마땅한 연락은 오지 않고. 나는 지금 그야말로 '여행자' 신분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즐기기에는 지금 이 나라 시국이 많이 뒤숭숭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황제 나이가 어리다고 했지? 15살이라고 했나? 그래서 황제의 삼촌이기도 한 대공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하던데. 황제가 결단을 내리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대공이란 작자가 마음을 먹어야 뭐라도 할 거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대공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방치하다가는 그 중세시대의 오싹한 마녀사냥 열풍이 또 일어날 거 같고.

 물론 실제로도 조금은 다른 형태로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재리가 말한 그 흡혈귀 사냥꾼이라는 집단이 대표적인거겠지.

 

 "안녕하세요."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게 처량맞아보였지만 모르는 여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흑발만큼 이 나라에서는 특이한 보라색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
 "전 앨리스 와이즈맨(Alice Wiseman)이라고 합니다. 그쪽은요?"
 "..."

 

 어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통성명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이 대담한 아가씨는 또 누구야. 가만, 이름이 앨리스 와이즈맨이라고?

 

 "여기 출신은 아닌가 보네. 앨리스라면...저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식 이름 아닌가?"

 

 근데도 타 나라 언어 능숙하네. 내 말에 발끈했는지 앨리스라는 여자는 또박또박 말을 했다.

 

 "물론 제 이름은 여기 나라식 이름이 아니고, 저희 조부모님이 그 바다 건너 나라 출신이긴 하셨습니다만, 전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G의 나라 출신인거나 다름 없습니다."
 "아, 네네."
 "그러는 그 쪽도...타 국적을 가진 사람 같은데...이름이 뭐죠?"

 

 처음부터 궁금했던 건 내 이름이었군. 풀네임을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모르는 척하면 계속 캐물을 거 같아서 최소한으로만 알려주기로 했다.

 

 "볼프다."
 "...네?"
 "볼프, 라고."

 

 한글자씩 천천히 읽어주어야 알아듣겠냐?! 너, 여기 출신이나 다름없다며. 잠깐의 침묵. 갑자기 앨리스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에요? 그 할아버지들 이름 같은 그 촌스러운 이름은...푸읍..."
 "..."
 "정말 당신의 부모님이 그렇게 지어주신거에요?"

 

 아, 그래, 너한테는 그렇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내 이름, 내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엄청 세련된 이름이었다고?! 난 내 이름에 지금껏 불만을 가지고 살았던 적 한번도 없다고. 일 때문에 가명을 써야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래도 많이 애용한 이름이 이 '볼프' 라는 이름이었다고.

 

 "...웃긴가 **?"
 "아, 아니...죄송해요. 너무 의외인 단어가 나와가지고..."

 

 앨리스는 웃던 걸 멈추더니 다시 침착하게 제 할말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아, 아무튼 이 동네에서 못 보던 분인거 같아서요. 여행자이신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 혹시 그건가. 이렇게 뒤숭숭한 시기에는 여행자, 외지인에게 특히 더 많은 의심이 간다.

 아, 그냥 여관 방 안에서 그냥 죽치고 기다리고 있을거 그랬나. 이럴 때 의심을 받는 건 일하는데 악영향만 줄 뿐인데.

 

 "여행자라면 왜 하필 이 때 여기에 온 것이죠? 지금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판국에."
 "...F의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여기가 최단선이었을 뿐이야."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낸 내 자신이 너무도 놀라웠다. 아 옷차림이라면...그래도 여행 경비가 그렇게 넉넉하지 않는 여행자로 보일거 아니야? 그럼 더 설득력이 있을텐데. 나의 말에 앨리스는 흐음, 이라는 아직도 수상하다는 느낌으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안전이 더 우선이잖아요."
 "내가 워낙에 스펙터클한 걸 좋아해서 말이지."

 

 사실은 나도 안전 최우선이지만, 그래도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리 '안전' 이라는 기준이 워낙에 달라서. 인간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한테는 안전할 수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겨도 난 내 몸 하나 건사할만한 능력은 가지고 있으니까.

 

 "...흐음...그러시군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내가 대놓고 수상쩍어 보인다고."
 "그,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요?"

 

 어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했는데 못 알아채는 사람이 더 바보겠다. 내 어이없는 표정을 보자 앨리스는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모양이다.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걸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듯 보였다. 오히려 너무 혈기왕성해서 자신의 열정을 주체 못한 신입의 포스라고나 할까.

 

 "...그랬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마음이 앞서서..."
 "아니, 뭐 이런 시국에는 내가 대놓고 수상해 보이긴 하겠지. 하지만 그런 태도는 상처만 줄 수도 있다고?"
 "...그렇군요."
 "뭐, 흡혈귀 사냥꾼이라도 되니 이리 열정적인건가?"

 

 그냥 지나가는 듯이, 농담조로 말했을 뿐이다. 근데 그게 딱 들어맞았다.

 

 "네."
 "...어?"

 

 ...잘못 들은 거겠지. 지금 추대를 받고 있는 흡혈귀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흔할 리가 있겠나...

 하지만 앨리스는 내 이런 흔들리고 있는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방금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흡혈귀 사냥꾼이냐고."
 "...응?"

 

 진짜...흡혈귀 사냥꾼이라고? 진짜? 지금 상황에서 제일 만나기 싫고 귀찮은 존재 중 하나를 만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다시 물어봤다. 정말, 흡혈귀 사냥꾼이냐고. 그리고 그런 앨리스의 대답은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Yes' 였다.

 

 "...흡혈귀 사냥꾼?"
 "네."

 

 일 하나 엄청 예술적으로 꼬이네.

 

 

* * *

 

 

 "...흡혈귀 사냥꾼?"
 "네. 정식 팀 이름은 '사냥터지기(Wldhuter)' 에요."

 

 내 혼잣말에 앨리스는 정확하게 대답해주었다. 그 촌스런 네이밍센스는 또 뭐야! 어이, 당신도 볼프 가지고 비웃을 때가 아닌거 같은데?! 최악의 네이밍센스네. 저 팀 이름을 앨리스가 지었을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근데 당신 같은 사람이 왜 흡혈귀 사냥꾼이 된 거지?"
 "도대체 그 '당신 같은 사람' 은 무슨 의미이죠?"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야. 그저 뭐랄까..."

 

 흡혈귀 사냥꾼이라고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기는 했지만 도저히 그 이미지랑 당신 이미지랑 매치가 되지 않거든? 난 겉만 보고 사람 판단하는 속물은 아니지만 당신이랑 그 직업의 이미지는 그렇게 알맞게 일치는 되지 않아.

 ...이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으면 분명 화내겠지?

 

 "그냥 당신 같은 미인이 흡혈귀 사냥꾼을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흥미롭다고나 할까."
 "제 실력이 영 못 미더우신 모양이네요."

 

 으음, 그렇게 들렸을 법도 하네?

 

 "못 미더운 건 아니라 그냥 의외여서."
 "이런 시국에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할 정도에요."

 

 그만큼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고 급박하다는 뜻이었다. 그걸 나도 어제서야 겨우 알았다. 세상에...누가 저런 무분별한 대량생산에 가깝게 한다는걸까. 마치 공장에서 한없이 찍어내는 면직물 같았다.

 

 "그보다 볼프 씨? 라고 불러도 되죠?"
 "볼프라고 했으니 그렇게 부르던가."
 "볼프 씨 머리색은 특이한 편이네요. 저도 흔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새카만 머리카락은 처음 봐요."

 

 어느 틈엔가 모자 밖으로 머리카락이 삐죽 튀어나온 모양이다. 황급히 숨기려는데 앨리스가 그 움직임을 제지했다. 빤히 바라보는 앨리스의 시선이 참 부담스러웠다.

 

 "...왜, 그리 봐..."
 "그냥, 신기해서요."
 "나는 당신 머리색도 신기한데?"
 "저도 당신 머리색이 신기해요."

 

 막상막하의 기싸움이었다. 앨리스는 이제는 별 꺼려지는 게 없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잘 물어봤다.

 

 "볼프 씨, 당신도 이 나라 출신인가요?"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
 "생김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아마도 머리카락 색 때문에 그러는거겠지. 사실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지적한 점도 그것이었다. 이게 뭐야! 이렇게 눈에 뜨이는 머리카락 색으로 바뀌면 어쩌자는거야?! 그리고 실제로도 요 머리색으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주목을 많이 받았다.

 마음 속으로 머리도 길었으면 더 눈에 뜨였을거라는 생각에 단발로 자른 내 센스에 감사를 올렸다.

 

 "그런데 정식 팀이 있다면 왜 당신은 혼자 이 곳에 있는거지? 혹시 다른 팀원들도 여기에 같이 있는건가?"
 "아, 아니에요. 전 정보 수집원이라서 따로 다니는 경우가 많아요."

 

 전투력 대원은 아니라는 모양이었다. 하긴 흡혈귀 사냥꾼이라고 무조건 싸움을 잘하리라는 법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싸우기 위해서는 상대편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했다. 마치, 저 건너편에서 나한테 날아오는 종이 쪽지와 같은 정보가...

 ...어라? 저 모양새로 보아하니 재리가 어제 내가 보낸 보고서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종이가 분명했다.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정보 전달을 하필 이럴 때, 그것도 다 보이게 오느냐는 것이었다.

 

 "...종이가...떠다니네요? 게다가 우리 쪽으로 오는 거 같은...데요?"
 "...하아."

 

 흡혈귀 사냥꾼 팀 소속, 그것도 정보 수집원이라는 걸 알자마자 최대한 수상하게 보이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는데 그게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재리...타이밍 정말 잘 맞추는구나.

 

 "이렇게 되는 이상 협조 좀 구해도 될까? 흡혈귀 사냥꾼 씨?"
 "뭐에요? 갑자기 말투가 정중하게 확 바뀌고."
 "귀찮은 거, 최대한 많이 엮이고 싶지 않으니 말이야."

 

 협조 좀 부탁해줘. 차라리 이게 잘 된 걸지도 모른다. 전투 담당이었다면 또 한바탕 해야했을지도. 정보 수집원이라면 의외로 말이 잘 통할지도 모른다. 잠시 대화를 나눈 것으로도 내 이 희망이 실현가능하다는게 보였다.

 

 "앨리스, 몇 가지만 물어**. 인간들이 이렇게 사회를 이뤄서 살아간다면..."
 "...?"
 "흡혈귀들도 그렇게 사회를 만들어 살아가지 않을까?"

 

 그들만의 법을 만들어서 살면서 말이야. 의외로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운을 띄우자 앨리스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며 수긍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뒷말은 기가 막혔다.

 

 "근데 그걸 볼프 씨가 어떻게 알고 계신건가요?"
 "..."

 

 눈치가 없는건지, 아니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인지. 아마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내가 생각해도 갑자기 내가 흡혈귀다! 라고 흡혈귀가 나타날 거 같진 않을 거 같고...무엇보다도 이렇게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말이다.

 

 "당사자니까."
 "당사자?"
 "흡혈귀 당사자라고."

 

 이렇게 대놓고 말을 했는데도 앨리스의 반응은 한박자 늦었다.

 

 "볼프 씨...당신이 정말 흡혈귀라고요?"
 "그래."
 "음식을 먹는데도요?!"
 "흡혈귀가 꼭 피만 먹으라는 법도 없잖아."

 

 순혈을 제외한 흡혈귀들은 피 외의 것으로도 영양 섭취가 가능했다. 덕분에 벨 녀석은 내가 정기적으로 피만 섭취하게 해야했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꼭 사람 피만 가능한 게 아니었다. 동물의 피로도 영양 섭취가 가능했다. 오히려 벨 녀석은 동물의 피를 더 선호했다. 인간의 피를 마시면 자신이 가진 권능 때문에 기억이 흘러들어오는 게 싫다나.

 

 "낮인데도 똑바로 다니잖아요!"
 "...어디서 이상한 건 주워들었냐."

 

 낮에 못 다닌다는 문제도 순혈에게만 해당되는 문제. 오히려 이 점을 순혈들이 부러워한다.

 앨리스는 자신이 가진 의문점 전부를 나에게 캐물어볼 기세였다.

 

 "그럼...마늘은?"
 "마늘이 있어야 음식이 맛있지."
 "십자가는?"
 "나 예전에 크리스천이었어."
 "은탄환은요?"
 "어이, 그건 늑대인간이라고."

 

 어디서 잘못된 상식도 같이 가지고 다니는지...이제는 심히 걱정까지 되는 정도였다.

 오히려 이게 정상인걸까? 잘못된 상식을 가지고 다녀도 정확한 전문가가 나타나 이건 참이고 이건 거짓이라고 알려주지 않는 한...하긴 내가 아는 흡혈귀들 중에서 인간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유형은 없었다. 솔직히 어떤 흡혈귀가 '우리는 이게 약점이야!' 라고 떠벌릴까. 그들은 생각보다 유약하고 죽음에 대해 공포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었다. 한번 죽음의 고통을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끄럽네요."
 "갑자기 왜 또."
 "전문가라고 생각했는데 제 지식은 이렇게 형편이 없었네요."

 

 이봐, 그게 정상이라고. 자신이 가진 지식이 모두 헛된 것이었던 게 만만찮게 충격적이었는지 앨리스는 내가 흡혈귀라는 점에 대해 먼저 토를 달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볼프 씨."
 "응?"
 "볼프 씨는 왜 그럼 저한테 흡혈귀인지 알려주신건가요?"
 "말했잖아. 협조 좀 구하겠다고."

 

 흡혈귀가 흡혈귀 사태에 대해서 협조를 구하겠다는 말이 우습게 들린 모양이다. 앨리스가 살짝 웃었다.

 

 "흡혈귀 사회가 있다는 게 정말이었군요."
 "난 거짓말 안 해."
 "그러면 볼프 씨가 파견원이라면...이번 사건은 흡혈귀 사회에서도 모르는 일이라는 건가요?"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나나, 다른 흡혈귀들이나. 너희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흡혈귀들은 조심스럽고 겁이 많아. 죽는 걸 두려워하지."
 "그건 인간들도 마찬가지에요. 죽는 게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니, 너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틀려."

 

 이미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앨리스는 침묵했다.

 

 "...모든 흡혈귀들은 다 그렇게 생기는건가요?"
 "순혈 몇몇이랑 혼혈 빼고는 그래. 하지만 후천적으로 생기는 흡혈귀들이 대다수지."
 "...그러면 대다수의 흡혈귀들이 이미 한번 죽었었다는 거네요."
 "그렇지."

 

 나의 반응이 너무도 담담해서인지 앨리스는 오히려 그 점에 놀란 듯 했다. 한번 죽었다고 해도, 그리고 그 때의 공포나 아픔 같은 감각이 남아있다고해도 그렇게 뇌리에 강렬하게 박혀있지는 않다. 그냥 막연하게 '엄청 무서웠다' 로 각인된 정도. 나 같은 경우는 지난 수백년동안 살면서 그 처음 감각이 많이 무뎌진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죽는 건 나도 두렵다.

 앨리스가 조그맣게 뭐라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잘 안 들렸겠지만 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미안해요."

 

 쓸데없는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마 그런 뜻이었겠지. 난 괜찮았다. 정말 오래전의 일이기도 했고 그렇게 크나큰 상처는 되지 않는다.

 

 "괜찮아."
 "근데 저...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아까부터 저 검은 책이...움직이던...거 같던데..."

 

 ...아, 벨 녀석...이제서야 정신이 든 모양이다. 책을 펼쳐 아무 페이지를 열어보니 선명한 붉은색 글자가 나타났다. 책이 스스로 글자를 쓰고 있는 것과 더불어 글씨체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에 옆에 있던 앨리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난 익숙하니까 패스.

 

 "뭐야, 왜 이리 늦은거야?"
 -기억을 읽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서? 뭐 단서라도 있어?"
 -의외로 그 흡혈귀는 평온한 삶을 살았던 거 같다.

 

 거짓말. 그렇게 광폭적이었는데? 힘들게 쓰러뜨린 건 아니지만 어지간히 끈질겼다고. 이어서 벨은 페이지에 자신이 읽은 그 흡혈귀의 '기억' 을 적어놓기 시작했다.

 G의 나라 변두리에 있는 작은 농촌 출신. 작은 목장 1개 경영. 18살에 옆집에 있던 여자와 결혼. 2남 1녀 득. 소박한 성품에 성실한 성격으로 마을에서 인기 있던 남자...

 한글자 한글자 읽어내려가던 난 벨에게 핀잔을 주듯 물었다.

 

 "야."
 -뭐지.
 "제대로 읽은 거 맞아?"
 -그렇다. 그래서 이 몸도 처음에 그 기억을 읽었을 때 당혹스러웠다.

 

 그렇다면 왜 이때까지 잠잠했는지 이해가 간다. 벨 녀석도 너무 당황했던 것이다. 뜻밖에도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서. 그래서 자신이 놓친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살폈던거겠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가 끊어져 있었다. 마치 누가 거칠게 그 이후의 페이지만 뜯어내버린것처럼 그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리고 중간에 기억이 끊겼군."
 -그렇다. 아마도...
 "아마도 흡혈귀가 된 이후의 기억은 끊어진 모양이군."

 

 결국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재리가 보낸 답장이 왔어."
 -그런가?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인간 여자는 누구지?
 "본의 아니게 협력 아닌 협력을 얻게 된 흡혈귀 사냥꾼님이시다."
 "아, 안녕...하세요?"

 

 아까부터 나와 책이 대화를 나누는 걸 이상하게 쳐다보던 앨리스였다. 앨리스가 먼저 말을 걸자, 벨은 답지 않게 '그래, 안녕이다.' 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 모습을 신기하게 보던 앨리스가 내게 물었다.

 

 "볼프 씨, 이 책은 뭐에요?"
 "아, 하나 잊고 설명하는 걸 잊었는데. 후천적으로 흡혈귀가 되는 경우는 대개 계약을 맺고서 종속 관계가 되거든? 난 이 책이랑 된 경우야."
 "그러니까 이...책이...볼프 씨를...흡혈귀로 만든 분...인 건가요?"
 "응, 맞아."

 

 정확하게 말하면 이 책 속에 봉인된 사념과 계약을 한거지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난 재리가 보낸 문서를 황급히 펼쳤다. 이렇다 할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재리의 정보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재리가 보낸 말은 딱 한 줄이었다.

 

 도망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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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23:16:4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