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나요 - 1. 게임 오프닝 -

Articulus 2017-07-16 5


  ※ 이 이야기에는 시즌 1과 시즌 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며, 작중 시간대는 시즌 2 이후의 상황입니다.
  ※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반영하지만, 글쓴이의 추가 설정 또한 다수 반영됩니다.
  ※ 작중 등장하는 인물, 장소, 기관 등은 현실의 그것과 무관합니다.
  ※ BGM과 같이 감상을 원하시는 경우, '윈도우 익스플로러' 환경에서 '글쓴이의 블로그(http://luxstellae.tistory.com)' 혹은 'UNION 카페의 소설 게시판'에 올라온 글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 1-1


  활공하던 비행기가 기수를 아래로 숙이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기체(機體)의 미세한 움직임에 이세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서 앞만 멍하니 바라보기를 1분 가량 하였을 무렵,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잠시 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착륙준비를 위해 꺼내놓은 짐들은 앞 좌석이나 선반 속에 다시 보관해주시고…"

  벌써 국제공항에 도착해가는 모양이다.
  뉴욕에서 출발하고나서 몇 시간 동안은 뒤숭숭한 마음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새인가 잠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뉴욕에 와서 검은양 팀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한 적은 없었다. 데이비드가 지고의 원반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차원의 뒤틀림으로 인해, 그가 패퇴하여 원반까지 제자리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원종들은 시시때때로 출몰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총본부를 지원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클로저들의 활약으로 더이상의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위상변곡률이 요동치는 뉴욕 중심부로부터 반경 10km 이내 안에서는 여전히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클로저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보이는 일 따위는 없었다. 검은양 팀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차원종을 퇴치하기 위해 밤낮 가릴 것 없이 출동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번 사태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미국은 사태가 수습되자마자 공식성명을 내놓았고, 유니온 총본부에 자국의 감사단을 파견하여 엄중하게 이번 사건을 다루기로 결정하였다.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의 입김이 총본부에 미칠 앞으로의 영향은 꽤나 클 것이고, 탐탁치 않더라도 유니온의 치부가 바닥까지 드러난 이상 총본부의 수장들도 이에 관하여 할 말은 없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실상 이번 사태를 해결하고 뉴욕에 열린 거대한 차원문을 닫은 신서울지부의 검은양 팀은 세간의 주목을 일제히 받았고, 유니온 개혁의 고삐는 그들에게 쥐어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모든 이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가 종결된 후로부터 한 달 째, 총본부에 머물며 개혁의 틀을 짜가고 있던 그들에게 돌연 귀국명령이 신서울지부로부터 하달되었다. 김유정 부국장 겸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은 곧바로 지부에 항의를 해보았지만, 이미 지부에서 개혁을 도울 유능한 인재들이 파견되었으니 그들이 김유정을 보좌할 것이며 굳이 사태가 해결된 이 시점에서 차원종에 대항할 병력인 클로저들이 그곳에 남을 필요는 없다고 지부는 뜻을 강경하게 펼쳤다.
  그나마 그녀의 협상 아닌 협상으로 검은양 팀 전체가 아닌 일부만이 귀국하는 것과 그녀 역시 뉴욕에 남는 것으로 타협한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것고 무조건 복종해야하는 것이 공직사회의 특징인 만큼, 그들은 그들이 원치않는 방식으로 당분간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김유정은 신서울로 돌려보낼 세 명의 클로저로 이슬비와 이세하, 그리고 서유리를 지목했고, 조촐하게 작별인사를 나눈 후 세 사람은 바로 어제 이른 저녁에 뉴욕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이곳, 그리운 그들의 고국이다.

 
  이세하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여전히 새근새근 잠에 떨어져 있는 서유리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신뢰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진 그녀는 이번 사태를 통해 배신의 상처를 경험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놀랍게 성숙했다. 데이비드와의 결전 때 그녀가 보여주었던 날선 눈빛은 잠에 빠져든 그녀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옆의 이 소녀는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18세 소녀 서유리이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반대로 고개를 돌려본다. 이쪽 방향은 이슬비가 앉은 자리가 있다. 아마도 서유리처럼 이슬비 역시 잠에 빠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의 오판이었다.

  '역시 이게 이슬비다운 모습인가?'

  이슬비는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아마도 데이비드를 쫓기 시작한 때로부터 뉴욕에 이르러 사태가 해결되기까지, 그리고 한 달 동안 뉴욕에서 지내며 활동한 모든 기록들을 보고서 형태로 작성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관리요원 김유정 대신 검은양 팀의 리더로서 신서울에 도착하고나서 그간의 활약을 지부에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렇게 그녀는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업무를 해나가고 있는 것이겠지. 정말로 리더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녀는 그 무게를 훌륭히 감당해내고 있다.

  문서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그녀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채고 묻는다.

  "깼어, 세하야?"
  "응. 잠은 좀 잤어?"
  "너희와 비슷하게 자서 2시간 전 쯤에 깼어."
  "더 자두지. 이제 신서울에 도착하면 또 바빠질텐데."
  "그렇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 왜 일까?"
 
  부담감.
  이세하는 그렇게 이유를 분석했다.

  김유정이 뉴욕에 남게 되면서,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의 자리는 당분간 공석이 되었다. 그 자리는 리더인 그녀가 대행하게 되었고, 그 말인즉슨 그녀의 업무 부담감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리더라고 하더라도 그녀 역시 클로저이기 때문에 명령을 받은대로 움직이기만 했으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당분간은 지부에서 그녀에게 직통으로 지시가 내려올 것이고, 이 지시를 세분화하여 팀원들과 함께 수행해나가야 한다. 그녀는 이 기회를 통해 관리자로서의 능력도 키워나가겠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부터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너무 떨지마. 너답지 않으니까."
  "뭐?"
  "내가 아는 이슬비는 적어도 새로운 환경에 그렇게 주눅들지 않아. 언제나 리더로서 당당했지."
  "이세하…"
  "그러니까 그렇게 떨지말라고. 넌 잘해낼 거야, 슬비야."
  "그래. 고마워, 세하야."



  ◆ 1-2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전장이었다. 그 때의 흔적들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말끔하게 지워졌고, 새롭게 단장한 국제공항이 그들의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 그들과 사투를 벌였던 베리타 여단은 이제 와해되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고, 이곳은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특수요원복 차림의 세 사람이 게이트를 나서서 공항의 홀로 나올 무렵, 무방비하게 나온 그들의 앞으로 카메라의 플래쉬 세례가 잇달아 터졌다. 눈부신 섬광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 세 사람에게 몇 사람이 소리쳤다.

  "좀만 더 앞으로 나와서 서줘요!"
  "눈 뜨시고! 여기 보세요, 여기!"
 
  이게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이내 그들은 그들의 배경지식으로부터 이러한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추론해내었다. 보통 공항에 유명인사가 입국할 때 기자들이 일제히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는 것과 무척이나 이 상황은 유사했고, 아마도 뉴욕에서 데이비드가 일으킨 사태를 해결한 그들은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어있을 것이고 그들의 귀국을 미리 안 기자들이 그들에게 온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우선은 기자들의 요청대로 눈을 뜨고 좀더 가까이 다가서자 또 다시 곳곳에서 플래쉬가 터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마이크를 들이대며 무언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슬비 양, SBC 뉴스의 강지연 기지입니다. 지난 데이비드 사태의…"
  "여기좀 봐주세요, 여기! 서유리 씨, 뉴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한 마디만…"
  "Good afternoon, mr. Lee. My name is John Mccuarred, the reporter of CBC News. I wanna some..."
 
  국내의 방송사들의 기자들은 물론 미국의 저명한 뉴스의 기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바람에 곧바로 신서울로 돌아가려던 그들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이들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해보이고, 결국 이들에게 붙잡혀 꽤 오랜 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야겠지. 
  신서울지부에서의 마중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을테니, 어느 정도 대화에 응하다가 공항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 질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또한 그들의 생각을 대답하기를 어언 10분 정도 했을 뿐이지만, 여전히 많은 기자들은 쉬지않고 그들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다는 것을 안 세 사람은 눈을 굴리며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그들을 피해서 밖으로 나갈 곳을 찾아보았지만, 그들은 완전히 둘러싸인 채로 있어 빠져나가려면 이들을 밀치고 지나가야만 한다. 이대로 꼼짝없이 사람들이 빠지기까지 기다려야하나 자포자기할 무렵, 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요, 지금 이 분들 엄청 바쁜 사람들이거든요!"
 
  그리고 곧 경찰복을 입은 이들이 기자들과 세 사람을 떨어뜨리면서 그들이 빠져나갈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길이 열리자 그들 앞에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충성~ 그동안 잘 지냈어?"
  "송은이 경정님!"

  세 사람은 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송은이 경정.
  그녀는 한국의 특경대 중에서도 수도공항 경비대 소속으로서, 그동안 국제공항에서부터 러시아, 뉴욕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검은양 팀을 서포트해오며 적들과 맞서 열심히 싸웠다. 그녀와 특경대는 뉴욕 사태가 해결된 지 며칠 만에 본국으로의 복귀 명령을 받고서 그들과 일찍 작별하고 헤어져야만 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그녀는 국제공항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경찰이기 때문에, 나름의 위수지역을 오랜 기간동안 벗어날 수 없다. 그동안은 검은양 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편의를 봐주었지만, 평시로 되돌아온 상황에서는 그들의 복귀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검은양 팀이 그녀를 못 본 건 어언 한 달이 넘어간다.


  웃음짓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웃음지으며 말한다.

  "신서울지부에서는 너희를 데리러 나오지도 않았더라? 매정하기도 하지.
  인류의 영웅들을 이렇게 대접하는건 아니다 싶어서, 나라도 너희를 마중나왔어. 그럼 같이 갈까?"
  "어디를요?"
  "어디긴 어디야, 신서울이지. 마침 나도 신서울로 갈 일이 생겼거든. 겸사겸사 너희 세 사람도 같이 특경대 차량으로 호송해줄게. 그러면 길도 안 막히고 뻥 뚫리겠지?"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야 정말 감사하죠!"
  "그럼 따라와. 바로 밖에 차를 주차해뒀으니까."

  송은이 경정의 뒤를 따라 세 사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그들에게서 만족할 만한 답과 이야기를 얻어내지 못한 기자들이 일제히 그들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일정 거리 이상은 경찰복을 입은 이들 - 아마도 특경대일 것이다 - 에 의해 다가오지 못하고, 세 명의 클로저들은 공항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 출구로 나갔다. 그리고 출입구 바로 앞 도로에 주차된 특경대 소속으로 보이는 몇 대의 차량 중 중앙에 주차된 차량에 탑승한다.

  송은이 경정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나머지 세 명은 앞과 뒤에 나눠타는 방식으로 차에 탑승하자, 그녀는 곧바로 차를 몰고 도로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차량을 뒤로 네 대의 차량이 줄줄이 뒤 따르다가, 그 중 두 대가 더 앞으로 빠져나가 사이렌을 울리며 차가 지나갈 도로를 양보받는다. 사이렌 불빛과 소리를 들은 차량들이 도로 한 가운데를 비켜주기 시작하자, 그 사이로 특경대 차량들이 지나간다. 

  국제공항 앞 도로는 꽤 복잡해서 신서울까지 가는 고속도로로 진입하고 나서도 처음의 얼마간은 빠른 속도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영종대교 근처에 다다를 정도가 되면 그제서야 조금 더 속도를 낼 수 있을까? 도로의 사정을 아는 이슬비는 잠시동안 차가 더디게 가더라도 이해하고, 오히려 속도를 내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는 송은이에게 이야기를 걸었다.

  "은이 언니, 이곳에선 별 일 없었나요?"
  "뉴욕에 비하면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지. 국제공항 복구 작업 때문에 고생좀 하긴 했지만…"
  
  왠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 송은이의 얼굴을 보아, 말은 저렇게 하더라도 이곳 역시 편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항시 평화로운 곳에서 갑자기 일어난 참사는 그 대가가 꽤 크다. 사후 복구는 언제나 오랜 시일이 걸리고 많은 수고가 추가로 요구된다. 그 수고를 감당하는 것은 모든 국민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는 그녀와 같은 공무원들이다. 누구 하나 노고를 인정해주지 않지만 거친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 그녀다. 그런 점은 클로저와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고된 일상을 보 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세 명의 클로저 요원들은 그녀에게 저마다의 위로를 건네며 말을 줄인다.

  "이제 슬슬 영종대교에 들어서겠는데?"
 
  차를 몰고가던 그녀가 전방에 펼쳐진 거대한 다리를 가리킨다. 차원전쟁 당시 붕괴될 뻔한 이 대교는 수많은 클로저들의 희생으로 지켜냈다고 한다. 당시 국제공항은 유니온 신서울지부가 공중전함과 같은 거대 위상병기들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이었고, 그 때문에 차원종들의 우선 공격목표가 되었다. 국제공항과 신서울을 이어주는 몇 안 되는 이 다리의 중요성은 누가 강조하지 않더라도 부각되었고, 이 다리를 지키기 위한 많은 클로저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한 때 격전지이었던 다리 위로 들어서자 슬슬 송은이는 차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그들이 타고 있는 차를 호송하는 네 대의 차들도 더불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보다 신서울로 복귀할 시간이 단축되어가고 있다. 이슬비의 뒤에 앉아있는 이세하가 앞 쪽의 송은이에게 공항에서부터 쭉 궁금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은이 누나, 신서울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응? 아, 출장이야, 수도경찰청으로. 국제공항 테러사건과 데이비드 사태 등에 특경대가 파견되어 활동한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 국제공항 복구작업에 투입되느라 미뤄졌거든."

  두 사람의 대화에 이슬비가 끼어들어 묻는다.
  "보통 그런건 서면으로 보고하고 끝나지 않아요?"
  "음, 일단 입국한지 일 주일 정도만에 서면보고를 하긴 했는데, 그걸로는 좀 부족했나봐. 하하하…" 
  "그렇군요."

  머쓱은 듯 웃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이슬비는 고개를 끄덕인다.
  전투에 있어서는 강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업무에 취약한 그녀의 특성을 고려하자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강남에 있을 적부터 채민우 경정이 그녀에게 자주 투덜거렸던 것도 이러한 것 때문이겠지.

  "그런데 공문을 보니까 꼭 보고만 하는건 아닌 것 같더라."
  "그러면요?"
  "보고도 있긴 한데, 뭔가 다른 사항도 있는 것 같던데?"

  다른 사항.
  그것이 무엇인지 이세하가 묻는다.

  "다른 사항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음…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뭔가 업무지시라도 하려는게 아닐까? 특경대는 아무래도 보안이 요구되는 사항이 많은 조직이기 때문에, 비밀이 지켜져야만 하는 특별한 지시가 내려질 경우에는 이렇게 사람을 직접 본부로 불러서 지시를 내리기도 하거든."
  "누나만 바빠지시겠네요. 고생이셔요."
  "아냐, 너희들에 비하면 내가 하는건 아무 것도 아니지. 하하하."

 
  자동차는 더욱 더 속도를 내어 대교를 빠져나가 땅 위의 고속도로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
  이제 이곳에서 그들이 돌아가야할 강남 GGV까지는 약 1시간 정도. 그보다 빠르면 1시간 이내로 들어갈 것이다.

  "아마도 오늘 저녁 늦게나 국제공항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다들 괜찮으면 오늘 같이 저녁이라도 먹는거 어때? 강남에 잘 아는 한우구이 무한리필집이 있는데."
  "한우!?"

  차에 타자마자 다시 졸면서 비몽사몽 중에 있던 서유리는 잠결 중에 들려온 말을 듣고 바로 반응을 보인다.
  그녀의 눈을 빛나게 만든 말은 단연 한우다. 그녀의 한우사랑은 이세하가 게임 없이 살지 못하는 것이나 이슬비가 TV 없이 살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은이 언이, 정말 가는거죠? 한우, 한우!"
  "하하, 그래. 슬비나 세하도 괜찮지?"

  그녀는 서유리가 반드시 갈 것이라고 이미 확정지은듯 나머지의 의사만 묻는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도 그다지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저야, 뭐. 좋죠."
  "언니와 같이 식사한지도 꽤 오래됬으니까요. 같이 저녁 먹어요."
  "그럼 같이 저녁 먹는거다? 오늘 저녁 7시 쯤에 강남역 7번 출구 앞에서 보자, 그 근처에 있으니까."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먹는 저녁.
  동료와 함께 한 시간이기에 더 기쁠 것이다. 
  비록 세 사람이 뉴욕을 떠날 때에는 가뿐하지 못한 마음으로 떠나야만 했지만, 신서울에서 그들을 따스하게 맞아주는 이 동료가 있기에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공항의 활주로를 박차고 상공으로 날아올라가는 외국 국적의 비행기를 바라보며 뉴욕에 남은 이들을 기억했다. 그곳에 남은 김유정과 제이, 그리고 미스틸테인이 아무 일 없이 있기를 마음으로 빌며, 그들은 점점 국제공항과 더 멀어져만 간다.



  ◆ 1-3

  "고마워요, 은이 언니."
  "누나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강남 GGV 앞 버스 정류장 근처에 특경대의 차량이 몇 대씩이나 들어서자 그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그곳으로 쏠렸지만 이내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진다. 그러나 차 안에서 내린 사람들은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한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며 웅성대기 시작하자 이내 강남 GGV 일대는 소란스러워진다. 
  주위 상황을 본 송은이는 차에서 내린 세 명에게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다.

  "그럼 이따가 7시에 보자고~"
  "이따 뵈어요!"

  인사를 마치자 송은이는 창문을 닫고서 강북 방향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네 대의 차량도 같이 움직이며, 남북으로 길게 뻗은 강남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신호가 걸리지 않아서인지 특경대의 차량들은 금세 멀어졌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수도경찰청은 강북에 있기 때문에 아마도 성수대교를 타고 한강을 넘어가겠지. 그리고 차가 막히지 않는다면 그녀도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눈길로 배웅을 끝낸 세 명의 클로저들도 이제 움직여야할 시간이다.

  "집에 가면, 안되겠지… 이제 어디 갈거야? 사무실?"
  "지부에서는 내일 방문하라고 했으니까, 오늘은 오후 6시까지만 사무실에서 근무시간만 채우면 될 것 같아."

  이슬비는 수첩을 꺼내들고 보면서 이세하의 질문에 답한다.
  사실 그들이 강남으로 오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근무지역을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 신서울로 돌아온 이상 그들은 근무지역에서 좋든 싫든 정해진 근무시간을 지켜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평시 체제로의 복귀 지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규근무시간인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의 근무시간을 모두 채우고 귀가해야 한다. 평시 체제는 아마도 지부에 보고를 한 후에야 이루어질 것이고, 그제서야 학교를 등교하는 정상적인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은 그들에게 완벽한 자유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7시까지 있어야할 이유가 있잖아, 한우 먹어야지!"
  "그래, 유리 말대로 그것도 있지. 그런데 지금은 좀 쉬고 싶어."
 
  입을 가리며 크게 하품하는 이세하의 모습을 보며 이슬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살짝 기분 나쁜건지 그는 곧바로 따져 물었다.

  "뭐야, 왜 웃는건데?"
  "아니. 세하, 네가 웃긴게 아니라, 이제 정말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싶어서."

  그녀의 진의는 이것이었을까.
  그래, 그녀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었으리라. 불과 하루 전만 하더라도 파괴된 뉴욕의 음침한 거리에 있던 그들은 지금 여기 신서울의 강남 거리에 있다. 박탈당했던 그들의 일상이 그들에게 다시 되돌아왔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되돌아오는 세상의 순리처럼, 힘든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것이 지나가는 것이 삶의 원리다. 사지(死地)를 누벼가며 목숨 걸고 싸웠던 그들에게 돌아온 일상은 그들에게는 작지만 세상에서도 제일 소중한 선물과 다름 없을 것이다.

  "저기, 그런데 슬비야, 우리 자리는 옮기면 안 될까?"
  "응?"
  "강남에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한데, 유독히 여기로 몰리는 느낌이랄까…"
  "아…"

  그들 주위로 사람이 몰리고 있음을 그녀도 알아챘다. 공항에서 기자들이 들이댔던 것처럼 사람들이 들이대진 않았지만, 잔뜩 그들 주위로 둘러서서 휴대폰을 들고 그들을 찍으며 웅성거리고 있다. 그리고 이윽고 용감한 누군가가 그들에게 크게 소리쳐 묻는다.

  "사진 한 번 같이 찍어주시면 안 되나요!?"

.
.
.

  오랜 시간동안 굳게 닫혀있었던 검은양 팀의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린다. 그리고 정들었던 방 안으로 세 명의 클로저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따로 생각한 것도 없이 몸이 기억하는대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테이블에 웅크려 모은 팔 속으로 고개를 파묻는다.

  "후… 애썼다."
  "그러니까 일찍 들어가자고 했잖아. 이게 다 세하 너 때문이야."
  "난 그저 사진 한 번 같이 찍어줬을 뿐이라고. 누가 그렇게 사람들이 다 몰려들 줄 알았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찌릿하고 따가운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
  그러나 유리와 이세하의 말다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만들 해, 두 사람 모두. 그래도 공항에서 인터뷰했던 만큼은 아니었잖아?"

  이슬비의 중재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다시 테이블 위에 웅크린다.
  두 사람을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쉰 이슬비는 지금껏 계속해서 들고있던 가방 안에서 노트북을 꺼내들고서, 능숙하게 전원케이블을 벽 전원에 연결한다. 그리고는 잠시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금세 또 다시 타이핑을 시작하였다. 아마도 보고서의 작성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말 없이 노트북만 두들기고 있는 그녀에게 서유리가 시선을 건넨다.

  "슬비야, 조금만 쉬었다 하는 건 어때? 힘들어보여."
  "괜찮아, 유리야. 휴식은 차 안에서 충분히 했으니까."
  "그래도…"
  "그리고 지금 끝내놓지 않으면 이따가 밤 늦게까지 작성해야 할지도 몰라. 오늘 밤 만큼은 집에서 푹 자고 싶어."

  쉬기 위해 일을 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저녁에 송은이와의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꽤 시간이 늦을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일하지 않으면 밤늦게까지 잔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감이 정해진 일이므로 불가피하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와줄 일은 없어?"
  "거의 다 썼어. 금방 끝날테니, 도와주지 않아도 돼."
  "흐응~ 그래도 뭔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음… 그렇다면 뭔가 단 거라도 가져다 줄 수 있어?"
  "단 거? 아! 아이스크림!"

  서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한 구석에 있는 냉장고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로 그녀는 꽤 유명한 가요를 흥얼대며, 냉장실 문에 손을 대었다.
  "우리가 국제공항으로 가기 전에 유정이 언니가 사다놓은 아이스크림이 남은 걸 봤지~♥  랄라, 나도 먹고, 슬비도 먹고, 세하도 먹… 어라?"
  "응?"
  "냉장실이 하나도 시원하지 않아. 앗! 내 아이스크림들이!"

  상온이 감도는 냉장실엔 녹아서 액체가 되어 물렁해진 채로 쏟아지지 않고 겨우 포장지 안에 담겨있는 아이스크림 5개 정도가 놓아져 있었고, 그걸 본 서유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이슬비는 잠시 손을 냉장실 안으로 넣어보고 아래 칸의 문까지 모두 열어보고서야 현 문제에 대한 진단을 내렸다.

  "우리가 없는 사이에 냉장고가 고장이라도 난 모양이야. 나중에 고쳐야겠어."
  "아이스크림... 이거 다 나중에 먹으려고 좋아하는 것들만 놔뒀는데... 슬비 줄 것도 없어..."
  "유리야, 난 괜찮아.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아냐, 슬비야! 슬비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했으니까, 아이스크림을 사오면 돼!"
  "난 정말 괜찮..."
  "아냐, 슬비는 먹어야 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서유리를 보며 이세하가 풋 하고 웃음을 던졌다.
  "야, 서유리. 네가 먹고 싶은거 아냐?"
  "뜨끔!"
  "뭐, 간만에 나도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졌어. 이 근처에 배스★라★스가 있으니, 거기서 사오지 뭐. 이슬비, 넌 무슨 맛 먹을래?"
  "정말 괜찮은데… 그래도 정말 사오겠다면, 딸기우유맛 부탁해."
  "딸기우유맛이라. 알았어, 그럼 서유리, 넌 나랑 같이 나갔다오자. 잠깐이라도 슬비 보고서 쓰는데 방해하지 말아주자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에 잔뜩 기대가 부풀어오른 서유리는 그의 말에 즉각 반응을 보이고, 사뿐사뿐 그의 옆으로 다가간다. 그들이 아이스크림을 마지막으로 맛본 건 꽤 오래된 일이었으므로 - 물론 뉴욕 사태를 해결하는 도중 늑대개 대원인 티나에게 받아먹은 아이스크림은 제외하고서 - 간만에 먹는 아이스크림은 무척이나 달콤하고 맛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이야기임에도 이슬비는 이세하가 남긴 마지막 말이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였다.

  "아니, 방해되는 건..."
  "그럼 금방 다녀올게. 열심히 쓰고있어."

  두 사람은 금세 문 밖으로 나섰고,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된 이슬비는 못 다한 말을 그제서야 뒤늦게 내고 있었다.

  "방해되는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두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도 곧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그들이 사올 아이스크림의 단 맛을 상상하며 살짝 웃음짓고, 다시 자리에 앉아 조금 남은 나머지 문서 작업을 계속 이어갔다.

.
.
.

  "슬비가 단 게 먹고싶다고 말할 정도라면, 정말 뭔가 단 것이 먹고 싶었나봐."
  "어지간해선 자기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게 슬비니깐."
  "그나저나 우리가 없는 사이에, 여기도 많이 원래 모습을 되찾은 모양이야. 꽤 원래대로 돌아왔지?"
  "하긴 강남대로에 그렇게 차들이 돌아다니는걸 보면, 강남 복구작업도 꽤 진척된 모양이겠지."

  복구된 강남 GGV 뒷골목을 걸으며 이세하와 서유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 속에서 사무실 안에서 약간의 실랑이를 벌이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강남 사태로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도로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차원종들이 누비며 유린하던 문명의 이기는 이제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고, 아직 파괴된 건물들은 여전히 복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검은양 팀이 강남을 떠나기 전에 비교하면 강남은 무척이나 놀라운 속도로 제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특히 젊음의 거리인 이곳 뒷골목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은 만큼 더욱 빠르게 복구되어, 지금은 거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곳에 익숙한 이세하와 서유리에게 그들의 그리운 강남이 원래대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꽤 그들에게 감동이 된 모양인지,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며 걷는 동안 주위를 이리저리 바라보며 평화롭게 강남 거리를 거닐던 옛 추억에 잠긴다.

  검은양 팀 사무실과 아이스크림 가게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아서 가벼운 두 사람의 걸음걸이로는 금방이다. 사무실에서 나온지 몆 분 만에 도착한 유명 아이스크림 전문점은 약간은 더워진 날씨 덕분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가게 안에 자리잡고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주문대 앞에 선 사람은 거의 없다싶이했고, 이 정도라면 예상한 것보다 빨리 아이스크림을 사서 이슬비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특성 상 꽤 많은 아이스크림이 있기에 미리 먹고싶은 맛을 골라오지 않는 한, 주문시에 흔히 선택장애라고 불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만다. 차례를 기다리며 무엇을 먹을까 고민해도 되지만, 꽤 빠르게 두 사람의 차례는 다가왔다.

  "서유리, 뭐 먹을지 정했냐? 세 가지 맛으로 골라갈 거니까, 원하는 거 하나 말해줘."
  "음음… 잠깐만, 좀 더 시간을 줘. 이것도 맛있겠고, 저것도 맛있겠고, 아아, 이를 어쩌지."
  "오면서 미리 생각해놓진…"

  무엇을 고를지 결정하며 우왕좌왕하는 그녀와는 달리 이미 그는 어떤 맛을 고를지 생각하고 온 모양이다.
  "슬비는 딸기우유맛 골라달라고 했으니 우유에 빠진 딸기로 하면 되겠고, 난 새콤한게 먹고싶으니까 무지개 샤베트로 할거야. 이 두 개 빼고 다른 맛 골라."
  "우와앗? 자, 잠시만! 난, 난…"

  여러 아이스크림의 이름과 생김새를 보면서 고심하던 그녀가 마침내 고른 맛은,
  "그래 결정했어. 아몬드 퐁당!"
  "오케이. 저기, 주문할게요. 세 가지 맛으로 우유에 빠진 딸기랑, 무지개 샤베트, 그리고 아몬드 퐁당으로 주세요."

  이세하는 자신이 직접 계산하려는 모양인지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낸다. 그리고 그를 친절히 맞는 직원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주문한 메뉴를 확인한다.
  "우유에 빠진 딸기, 무지개 샤베트, 아몬드 퐁당이지요? 총 만 원, 결제 도와드릴게요."

  만 원이라는 소리에 그는 말 없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직원에게 건넸고, 그에게서 카드를 받아든 여성은 기계에 카드를 긁고 그에게 다시 카드를 건네준다. 통상적인 계산절차가 끝나고 그는 다시 카드를 지갑에 넣고서 주머니 속으로 지갑을 꽂는다.

  "저희 직원이 금방 준비해드릴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저기…"
  "네?"
  "혹시 미국에서 일어난 큰 일을 해결했다던 검은양 팀 분들 맞으신가요?"
  "네, 뭐… 맞아요."
  "어머, 오늘 귀국했다고 뉴스 속보로 나오던데, 바로 강남으로 오셨네요. 정말 반가워요! 그리고 인류를 지켜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아하하… 고맙긴요…"

  직원의 반가운 환영에 가게 안이 잠시 술렁거렸다. 유니온의 클로저 요원들이나 입을 만한 제복 차림으로 나타난 두 사람은 꽤나 오늘 방송을 달궈놓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세하와 서유리의 존재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은 뒤, 다시 계속 무언가를 입력한다. 아마도 SNS에 이 소식을 공유하는걸까.

  여기에서마저도 관심의 중심이 된 그들은 속히 이곳을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강남대로변 길가에서 사진찍기와 싸인을 강요당했던 그들로선 당연한 반응이겠지.
  그런데 바로 아이스크림 진열대의 건너편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봤자 위상능력자일 뿐이지."

  왠지 모를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는 이세하의 신경을 긁어놓기 충분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하자, 거기엔 목소리의 주인공인 한 남성이 시선도 주지 않은채 이세하가 주문한 아이스크림을 커다란 용기에 퍼담고 있었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성은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인 모양인지, 머리엔 주문을 받은 여성과 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이세하의 불편한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서유리가 주문한 마지막 맛을 퍼담고서 숙인 허리를 치켜세운 남성은 시선을 분명하게 그의 눈에 맞추었다. 렌즈 뒤에 감추인  금안이 고요히 남자의 차가운 은색의 눈을 주시한다. 따가운 시선교환이 아주 잠깐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고, 이내 남자는 조소를 흘리며 시선을 거둔다.

  "꼴에 위대한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네."
  "뭐라고…?"
  "아, 혼잣말입니다. 잊어주시죠. 420그램 더 담았습니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듯 얼굴에 웃음을 피운 남성은 봉투에 숟가락 세 개와 포장한 아이스크림을 넣은 뒤, 진열대 앞에 서 있는 이세하에게 건네며 말했다.

  "맛있게 드시고, 또 오세요. 손님?"

  그러나 바로 봉투를 받아들지 않고, 여전히 이세하는 날선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의 저항, 그것은 그가 지금껏 당해온 부당한 처우에 대항하는 방법이다. 일반인에게 위상능력자가 이렇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노려본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보통 금세 기세를 꺾고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 남자는 달랐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웃음을 보이고 있다.

  냉랭한 기운이 감돌자 이내 이세하는 일반인을 상대로 이러해봤자 무얼 하겠냐는듯 봉투를 건네 받고 상대에게 향하던 매서운 시선을 거둔다. 그러나 여전히 기분은 나쁜 것인지, 평소라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상대일 그의 동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유리야."
  "으, 응."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서유리는 개입할 수도 없었고, 얼떨떨하게 끝난 신경전을 뒤로 하고 그녀는 순순히 동료의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런 분위기에선 장난을 걸거나 더 말을 붙이기 힘들다는건 그녀 역시 잘 알기에, 그녀는 동료의 뒤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벗어난다.

  등 뒤로 따라붙는 악의 어린 기분나쁘고 질척한 누군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두 사람은 강남 GGV의 뒷골목으로 빠져나간다.





  ◆ 1-4

  "네? 새로운 클로저들이요?"
  "그래. 이들을 비밀리에 영접할 것을 요청받았네. 아무래도 미국의 클로저들이다보니, 우리나라도 꽤 신경을 써야하는 모양이야. 한미동맹은 중요하잖나."
 
  수도경찰청의 어느 집무실 안, 책상에 앉아있는 경찰 정복 차림의 누군가에게 송은이 경정은 지시를 받고 있다. 이에 앞서 그녀는 직접 특경대의 활약 상을 서류와 함께 구두로 30분 가량 보고했고, 그녀의 상관들은 여러가지 질문을 30분 정도 던지더니 그녀의 답변이 모두 끝나자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사무실 밖으로 퇴장하였다. 사실 이 사무실이 저 사람 개인의 단독 사무실임을 생각하자면, 오히려 용무가 끝났을 때 퇴장하는 것이 옳다. 그렇기에 그녀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사실 본론은 그제서야 시작이었다.

  다른 이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는듯 그녀의 상관은 기존의 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고, 긴 이야기 끝에 그녀에게 주어진 지시는 오늘 늦은 저녁에 도착 예정인 '새로운 클로저들'을 마중하고 그들을 조용히 신서울로 들어오도록 도우라는 것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이유는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녀는 새롭게 질문을 던졌다.

  "사무관님, 굳이 조용히 들여와야하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인가요?"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어. 나도 지시를 받은 대로 할 뿐이니까.
  명심하게, 절대 이 지시는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되고, 그들이 들어온 것도 자네는 비밀로 해야만 하네."
 
  요컨대 보안이 요구되는 임무이다.
  상부의 지시에는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그녀의 위치 상, 그녀는 이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할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 때문일까, 그녀에게선 꺼림직한 기분이 도저히 가시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제가 맞아야 할 그 클로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상당히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는 그였지만, 이내 그는 잠시 책상 위에 흩어져있는 문서들 중 제일 아래에 놓여있던 종이뭉치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잠시동안 뒤적이던 그는 문서의 어딘가를 보면서 답했다.

  "마지막으로 해주는 답변이네. 이 이상은 자네도 나도,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어.  
  나도 상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공개된 자료로는 화이트 키즈라는 이름을 가진 팀이군. 유니온 워싱턴 지부의 소속의 청소년 클로저 팀이라는 정도만 나왔어. 팀 전체가 오지 않고, 세 명만 입국할 예정이라고 하는군. 이들의 사진은 자네에게 줄 문서에 동봉되어 있으니, 얼굴은 돌아가는 길에 확인하도록 하고.
  그럼, 이 정도로 끝내지. 명심하게,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해, 심지어 유니온의 다른 클로저들에게도 말이야."

  말을 마친 정복 차림의 남성은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서류봉투 하나를 서랍에서 꺼내어 송은이에게 건넨다. 서류를 받아들고서 곧바로 경례를 붙인 뒤,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사무실 바깥으로 나간다.
  밖으로 나가면서도 여전히 가시지 않는 찝찝함에 그녀는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 청사의 계단을 내려오며 그녀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시간은 오후 4시에 가까워져가는 시간이었다.

  "7시까지 강남역으로 가야하니, 아직 시간은 충분해. 차에서 조금만 쉬다가 가볼까?
  어차피 같은 유니온의 클로저들인데 별 일 있겠어?"

  그녀는 검은양 팀과의 약속을 기억해냈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마음에 자리잡은 꺼림직함도 조금씩 녹아내려만 갔고, 그녀가 주차장에 도착했을 무렵엔 간만의 폭식을 기대하는 마음만 가득할 뿐 완전히 마음에서 불편한 기색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차 안의 조수석에 받은 서류를 던져놓고선 휘파람을 불며 휴대폰을 꺼내어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다.

.
.
.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한 사무실의 문이 열렸고, 열린 문 사이로 이세하와 서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문서작성에 집중하고 있던 이슬비가 그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잠시 작업을 그만두고서 눈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마중한다.

  "다녀왔어?"
  "응."
  "아이스크림 먹자아아아!"

  서유리의 목소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기대에 부풀어 무척이나 경쾌한 평소의 모습대로인데, 나갈 때와는 다르게 이세하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낮아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이상함을 느낀 이슬비는 곧바로 밖에서 무언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냐, 아무 일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그렇게 표정으로 '나 기분나빠'라고 써놓고선."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그래."

  완강히 답을 거부하는 그에게 계속해서 물어보았자 그녀가 기대하는 답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떠났던 또 다른 동료에게 물어보는 수밖엔 방법이 없다.
  그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이슬비는 서유리에게 물었다.

  "유리야,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저, 그게…"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던 찰나, 그마저 이세하는 완벽히 차단해버렸다.

  "아이스크림 먹자. 다 녹겠어."
  "그, 그래. 우선 아이스크림부터 먹자."

  일단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친 뒤, 서유리는 이슬비에게 윙크를 함으로써 나중에 계속 이야기해줄 것이라는 무언의 암시를 건넨다. 그것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이슬비도 더 이상 그녀에게 묻지 않고, 순순히 이세하의 요구대로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그가 펼쳐놓은 컵 앞으로 다가섰다. 정말 빠르게 그가 세팅을 끝내놓았기에 그녀가 따로 할 일은 없었다, 그저 앞에 놓여진 일회용 숟가락의 포장지를 뜯어서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일이라면 남은 일일 뿐.

  "그럼 잘 먹을게, 세하야!"
 
  그리고 아주 빠르게 서유리는 자신이 주문한 맛을 찾아서 숟가락으로 떠선 한 입 가득 입 안에 넣었다. 그녀가 주문한 아몬드 퐁당은 초콜릿 맛의 크림 속에 아몬드로 보이는 견과류가 들어가 있는 아이스크림인데, 단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제외하곤 누구나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맛이다.

  "잘 먹겠습니다."
 
  자신이 직접 샀음에도 무언가를 먹기 전에 습관처럼 나오는 말을 하고선 이세하 역시 자신이 주문한 맛을 찾아서 한 스푼 떠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맛있네' 정도로 간단히 평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아직 그의 기분이 풀리려면 한참은 남은 듯 하다. 그가 주문한 무지개 샤베트는 여러 과일맛이 섞인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으로 유명한데, 아마도 그가 이 맛을 시킨 이유는 그를 제외한 모두가 단 맛을 선택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기 때문이리라.
  이슬비야 처음부터 딸기우유맛을 선택했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서유리의 식성 상 상큼한 과일보다는 달콤한 초콜릿을 선택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선택이 맞아 떨어졌다. 단 것만 계속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가 선택한 무지개 샤베트는 서로가 선택한 맛을 돌려가며 먹을 때에서야 비로소 빛을 발할 것이다.

  "잘 먹을게, 이세하."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들은 이슬비는 눈 앞에 놓은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바로 숟가락을 쑤셔넣는 대신 먼저 다른 이들이 먹는 것을 감상하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것보다 각자에게 주어진 아이스크림을 혼자서 먹는 것에 익숙했으니까.
  아마도 눈 앞의 흰색과 분홍색의 선들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색의 맛이 그녀가 선택한 딸기 우유맛일 것이다. 이런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사오는 아이스크림은 여러 맛이 있음에도 각 맛마다 있는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사람은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제외하곤 무척이나 드물며, 이러한 이유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주문은 딸기우유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와달라는 정도였다. 통념대로라면 딸기우유는 보통 분홍색 빛이 나기 때문에 그녀는 세 가지 맛 중에서 분홍색 빛이 도는 맛에 숟가락을 가져가서 한 스푼 가득 떴고, 그것을 입에 가져와 넣는 순간 입 안 가득 퍼지는 단 맛에 황홀한 기분과 시원한 느낌이 그녀의 온 몸에 퍼져나간다. 혼자 먹는 아이스크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맛있다.

  세 명 모두 각자가 주문한 맛에 대해 충분히 만족을 표했고, 이제 서로가 주문한 맛을 돌려 맛보아가며 미각의 욕구를 충족해나가면 이 아이스크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은 다 얻는 셈이다. 한참을 맛있게 먹어대던 검은양은 어느새 한 가지 맛이 가장 먼저 사라져버렸음을 알아챘는데, 그 맛은 다름아닌 이세하가 선택한 무지개 샤베트였다. 역시 단 것만 계속해서 먹으면 물리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서유리가 자신이 주문한 맛보다 다른 맛들을 많이 먹었는데, 그 중 이세하가 주문한 맛이 유독히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연신 그것만을 집중적으로 먹어댄 이유도 있었다.

  "어쩌지, 벌써 다 떨어져버렸네."
  "샤베트도 괜찮았는데."

  다소 아쉬워하는 서유리와 이슬비에게 이세하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누가 이 맛만 먹으래, 골고루 먹어야지.
  벌이야, 두 사람 모두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이따가 검사하러 올거야."

  말을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창가의 소파에 다가가 누운 후 자켓에 넣어둔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또 다른 주머니에서 꺼내든 이어폰을 게임기에 연결하고 귓가에 꽂더니, 금세 게임에 빠져들어 다른 곳에 신경조차 주지 않는다. 게임에 빠져든 이세하라면 두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다 먹든 남기든 전혀 관심을 주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두 사람은 천천히 먹기로 했다. 두 사람에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단연 이세하에 관한 일, 이슬비는 이세하가 전혀 이곳에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밖에서의 일을 서유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유리야?"
  "실은 아까 세하랑 아이스크림 갔을 때 좀 일이 있었어. 처음엔 좋게 들어갔는데, 아아, 몰라. 도대체 왜 거기서 그 직원이 그런 말을 했는지…"
  "직원이 무슨 말을 했길래?"
  "정확한 건 나도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위상능력자를 비꼬는 것 같은 말을 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세하랑 세하 엄마에 대해서 안좋은 듯이 말했고. 그 말에 세하가 매우 불쾌한 모습을 보여서 금방이라도 큰 일이 날 것 같았는데, 금방 가게를 나와버려서…"

  위상능력자에 대한 아니꼬운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했다.
  전 세계 인구의 단 몇 퍼센트 정도의 사람들만이 부여받는 위상력은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모종의 이유로 주어지고, 위상력에 각성한 사람들은 흔히 '초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능력을 발현할 수 있게 된다. 검은양 팀이 뉴욕에서 데이비드와 기나 긴 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알아냈던 사실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지고의 원반'이라는 특이한 물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고, 그것은 마치 스스로 사고를 할 수 있어 현재 클로저라고 불리우는 이들에게 위상력을 부여했다.

  그 결과 사람이자 일반인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위상능력자가 출현하게 되었고, 이들은 유니온에 소속되어 차원재난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인류를 지켜왔고 지금도 계속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차별은 항상 있어왔고, 그 때문에 차원전쟁이 종료된 18년 전부터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유니온의 입지와 위상능력자들에 대한 대우는 날이 갈수록 낮아져만 갔다.
  이슬비는 이러한 모든 이유가 위상능력자들을 아니꼽게 보는 일반 대중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에 따른다면, 아마 세하에게 독설을 흘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 사람도 그런 부류 중의 하나이겠지.

  서유리는 잠시 말을 거두더니, 무척이나 안쓰러운 표정으로 잠시 세하에게 눈을 돌렸다. 그가 여전히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에 시선을 주고 있지 않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비록 그가 듣지 못할지라도 방금 전 이야기했던 목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이슬비에게 말한다.

  "그리고 뉴욕에서도… 세하 엄마에 관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세하가 한 동안 작전에 나가지 못했었잖아…"
  "그랬, 었지…"

  두 사람은 뉴욕에서의 끔찍한 어느 밤의 일을 상상했다.
  전장에서 다시 조우한 이리나 페트로브나가 밝힌 유니온의 암부(暗部)이자 치부(恥部), 즉 유니온이 그의 어머니인 서지수를 샘플로 일종의 생체실험을 해왔던 것이 알려지자 그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한 동안 전장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를 달래기 위해 김유정과 트레이너,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몇 번이고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한 끝에 그는 겨우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전장에서 맞닥뜨리는 어머니의 클론은 여전히 쉽게 상대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했던 그에게 어머니의 이야기까지 해가며 독설을 뱉었다는 것은 꽤나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이슬비 역시 마음 한 편이 아파왔고 동시에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그곳에 가서 사과를 받아내고만 싶었지만, 섣불리 자신이 나섰다가 일을 더 크게 벌릴 수도 있다는 우려섞인 생각에 우선은 침묵하기로 그녀는 결정을 내린다.

  그녀는 도저히 눈 앞의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선, 고개를 숙이고 만다. 무척이나 숙연한 분위기가 사무실 내를 감돌고, 차가웠던 아이스크림은 방 안의 온기에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안 갈 것만 같던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세 사람이 송은이와의 저녁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와만 간다.


  ◆ 1-5

  "유정 씨, 다녀왔어."
  "다녀왔어요, 유정이 누나."

  한참 동안 서류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유니온 임시본부의 김유정이 자신에게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뒤로 돌아서 두 사람을 맞는다.

  "어서와요, 두 사람 모두. 정말 고생 많았어요, 이 정도하면 우드사이드(Woodside) 구역은 거의 정리된 것으로 보이니, 당분간 새로운 지시가 내려올 때까진 휴식을 취하도록 해요."
 
  싱긋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제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후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드디어 쉴 수 있는건가."
  "아저씨, 배고파요. 맛있는 거 먹으러가요."
  "그래, 테인아. 그런데 그 전에 조금만 여기서 쉬었다 가자고."
  "아저씨, 벌써 힘든 거예요? 미스틸은 더 사냥할 수도 있는데!"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봐, 그런 말이 나오나."

  평소의 검은양다운 대화가 오간다.
  두 사람의 활기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김유정은 다시 자리에 앉아 하늘이 보이는 돔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계속되는 격무에 시달리는 그녀가 표현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속으로 느끼는 압박이나 최근에 있었던 일로 인해 저절로 생기는 걱정은 무척이나 클 것이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제이가 넌지시 그녀에게 격려하는 투로 말한다.

  "유정 씨,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그 아이들, 차원종 군단이 와도 살아남을 정도로 강인한 아이들이라는거 잘 알잖아."
  "그렇죠. 안전한 신서울로 보냈으니까, 그 아이들에 대해선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여전히 마음은 쓰이네요, 아직 잘 도착했다는 전화도 없고…"
  "슬비 누나, 유리 누나, 세하 형, 모두 잘 도착했을 거예요. 걱정말아요, 누나."
  "그래, 잘 도착했을 거라고 믿어. 분명히 미스틸의 말대로 잘 도착했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김유정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하다.
  그러자 근처에 있는 티나의 냉장고에서 꺼낸 정체불명의 녹즙을 가지고 온 제이가 김유정에게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이거 한 잔 하고 걱정 좀 덜라고, 유정 씨. 그런 얼굴은 유정 씨같은 미녀에겐 좋지 않아."
  "미, 미녀는 무슨 말인가요! 걱정 안해요, 제이 씨. 이미 손을 써뒀으니까요."
  "손을 써두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세 사람을 가까이에서 서포트 할 수 있도록 이미 지원자를 파견했어요. 지금 쯤이면 슬슬 검은양 팀 주위에서 지원 임무를 시작했을 것 같군요."
  "지원자라니. 유정 씨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정도인가봐?"
  "그럼요. 충분히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하하핫, 평화의 도시 신서울에서 지켜줄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유정 씨, 너무 걱정이 과해도 좋지 않아."
  "모르겠어요, 솔직히. 지부에서 왜 그렇게 검은양 팀의 귀국을 강하게 명령했는지. 뭔가 불안해요."
  "괜한 걱정이라니까. 자, 이거나 들라고, 유정 씨. 몸의 피로를 싹 씻어줄거야."


  제이가 건네는 정체불명의 녹즙을 받아든 김유정은 병의 뚜껑을 따고는 잠시 코를 가져다대어 냄새를 맡는다. 그러자 곧 그녀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마시고 있는 그와는 분명히 대조되는 표정이다.

  "제이 씨, 이거 도대체 뭔가요?"
  "응? 녹즙이야. 몸에 좋은 약초들을 한약방에서 많이 구해와서 넣었지. 피로회복제로 최고라니까?"
  "으음, 안 마시고 싶은 이 느낌은 왜 일까요?"
  "유정 씨, 나 믿지?"
 
  무척이나 진지한 말투와 표정으로 물어오는 그에게 이 이상 안 마신다고 버티는 건 결례라고 생각한 그녀는 무척이나 쓴 냄새가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녹즙을 입에 가져가 붓는다.
  그녀의 혀가 녹즙의 괴상한 맛과 느낌에 그대로 노출된 그 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입 밖으로 뿜어내어 버린다. 그녀의 바로 앞에 제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그의 얼굴을 향해 있는 힘껏 뿜어낸 녹즙이 그의 하얀 색 요원복으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곧 그의 괴악한 비명이 임시본부 안을 가득 울린다.

  "으아아악, 유정 씨를 위해 준비한 내 녹즙이이잇!!"

.
.
.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언니."
  "배가… 배가, 터질 것 같아요."
  "강남에 이런 한우집이 있을 줄이야, 정말 몰랐어요. 덕분에 좋은 것 먹었네요, 누나."

  순 한우 무한리필이라고 대문짝만큼 커다랗게 쓰여진 홍보문구가 유리창에 붙어있는 커다란 가게의 밖으로 나오며, 이슬비와 서유리 그리고 이세하는 한 마디씩 오늘 저녁을 사준 송은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서유리와 송은이, 이 두 사람의 먹성은 정말로 놀라워서, 그들이 먹은 고기의 총량 중 절반을 훨씬 넘는 양을 두 사람이 먹어치웠다. 서유리같은 경우는 스스로가 배가 터질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무척이나 배가 부른지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아보인다. 그나마 그녀의 집이 이 근처 강남에 있다는 것이 다행일 정도다.

  자신의 정량만큼 맛있게 먹은 이세하와 이슬비는 다소 정상인 표정이지만, 간만에 먹은 한국의 고기는 무척이나 그들의 입맛을 자극했고, 덕분에 그들도 정량보다 약간 더 많은 양을 섭취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전혀 무리가 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계산을 마치고 뒤늦게 가게에서 나오는 송은이의 한 쪽 팔엔 영수증이 들려있었고, 왠지 모르게 그 팔을 그녀는 떨고 있다. 아마도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청구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은양의 세 명의 팀원 중 단 한 명도 그녀의 이러한 고충을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 저녁을 사겠다고 말한 건 송은이 자신이기 때문에, 결코 이 선택에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 사람이 자신에게 건넨 감사의 말에 웃는 얼굴로 답한다.

  "나도 너희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맛있게 먹었던 것 같아. 기회가 있으면 종종 이렇게 만나자고."
  "언니, 언니, 다음에도 한우!"
  "그, 그래, 유리야…"
  "만세에에에에에!"

  무척이나 기뻐하는 서유리와 다소 떨고 있는 송은이의 모습의 차이란…
  이제 슬슬 그들도 헤어질 시간이다. 이슬비와 이세하의 집은 강북에 있고 서유리의 집은 비록 강남에 있지만 이곳에서 좀 더 가야 한다는 점과 현재 시간을 고려할 때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송은이 역시 급히 국제공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갑자기 생각난 그녀는 자신이 수도경찰청에서부터 궁금했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했다.

  "저기, 얘들아. 혹시 외국의 클로저 중에서."
  "외국의 클로저요?"
  "아…"

  순간 그녀의 입은 다물어진다.
  그녀의 상관으로 받은 지시가 뒤이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명심하게, 절대 이 지시는 밖으로 새어나가선 안 되고, 그들이 들어온 것도 자네는 비밀로 해야만 하네

  함구를 명 받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녀의 상관은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만한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함구령이 그녀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던 것이고. 
  그러나 공직사회에선 보안이 요구되는 사항이 분명히 존재한다. 취급자 외의 타인에게는, 심지어 같은 부서의 일원이라고 할지라도 누설해서는 아니되는 사항, 그것은 바로 그녀가 지시받은 명령과 같은 형태로 주어진다.

  그녀는 급히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그게… 그러니까, 맞아! 뉴욕에 너희가 남았을 때, 다른 외국의 클로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었어?"
  "글쎄요… 외국 클로저들과 검은양 팀은 서로 다른 구역을 담당했었으니까요, 딱히 기억에 남는 클로저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세하야, 유리야?"
  "응."
  "나도 그런 것 같아."

  얼떨결에 다른 이야기로 무마한 그녀의 실책 때문에, 그녀의 심장은 무척이나 크게 뛴다. 다음엔 절대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녀가 국제공항으로 돌아가 맞이하고 이곳으로 데려와야 하는 그들이 무척이나 신경쓰인다. 같은 유니온 소속인데도 이들조차 몰라야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지 말이다.

  "혹시 말야…"
 
  그 의구심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그녀는 아주 작은 힌트를 검은양에게 전달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에 잠시 세 사람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하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와 그녀에게 말하기를,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없을 거예요."

  그들의 답에 그녀는 의구심을 버리기로 했다.
  "그래. 아무런 일도 없겠지, 여긴 평화의 신서울이니까."

  그렇게 대화를 끝내고 네 사람은 모두 헤어진다. 같은 강북 방향으로 가는 이세하와 이슬비가 먼저 인사를 하고 헤어졌고, 이내 근처에 사는 서유리 역시 그녀와 포옹으로 인사하고 갈 길을 간다. 이젠 송은이도 갈 길을 가야 한다.
  세 사람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듯 몇 번이고 폴짝 뛰고선 그녀도 근처 주차장에 세워 둔 경찰차로 향한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한 경찰차의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끼어넣었을 때 그녀는 약간의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내가 창문을 약간 열어놨었나?"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경찰차는 모든 문을 완벽히 잠그고 주차해 놓는다. 그런데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달궈진 공기로 가득차 있을 차 안이 왠지 모르게 덜 답답하고 덜 더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창문을 열어놓았을 거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별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운전석에 탑승한다.

  "하긴 초저녁부터 주차해놨으니까 그렇게 차 안이 더워질 이유도 없겠네."
 
  차에 시동을 걸고서 값을 치른 후 주차장에서 빠져나간 경찰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남대로를 벗어나 공항으로 향하는 길로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그리고 약 한 시간이 흘러 그녀가 국제공항에 도착하고, 다시 두 시간이 흘렀다.
  오늘의 마지막 미국발 항공기가 국제공항에 착륙하자, 송은이는 경력을 배치시켜 출구부터 공항의 입구까지 사람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맞아야할 이들을 기다린다.

  넘겨받은 서류 안에 있는 사진을 통해 이미 맞이할 이들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출구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녀가 맞이할 유니온의 클로저들은 총 세 명,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찰나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어째서 도착한 여객기에서 이렇게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10분이나 더 기달리고서야 비로소 출구의 문이 열린다. 자동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캐리어를 끌고서 등장한 세 명의 남녀, 청소년 팀이라는 알려진 정보처럼 완전히 성인은 아닌 이들이다. 그들은 같은 팀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마 팀의 유니폼으로 보이는 후드가 달린 흰 코트를 걸치고 있다. 그것을 제외하고 안에 받쳐입은 옷들은 제각기 달랐다.


  "저 아이들이, 그 클로저들."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뿐인데,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세 명 중 한 남자와 송은이의 시선이 맞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를 향해 걸어오자, 뭐라고 그들에 말해야 할지 그녀는 앞이 캄캄해져만 간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영어를 구사한다.

  "나, 나이스 투…"

  그러나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마치 인사를 받은 것처럼 그들은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로 답해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송은이 경정님."
  "오!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이 경찰이시라니~"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는 팀(team) 화이트 키즈라고 해요."

  자신들을 소개하는 그들은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인사를 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반가움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룩스입니다.
  일하느라 바쁘네요. 그리고 무척이나 덥습니다.
  여러분들도 무척이나 더우시지요...
 
  더운 여름 힘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새로 연재하는 이걸, 잘 써봐야하겠는데... ㅋㅋㅋㅋ 열심히 할게요.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화도 기대해주세요~


2024-10-24 23:16:2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