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가 유리와 놀아줄뿐인 이야기
사일로시빈 2015-02-10 36
"드디어 연성했다."
그 날은 제이 아저씨가 대기실 한쪽에서 기이한 실험에 몰두하고 있었다.
건강식품 개발이 취미라며 온갖 검증되지 않은 민간의학 지식을 총동원해 수상한 약물을 만들어 권하곤 하는데,
플라스크와 더불어 반사광을 발하는 고글이나 믹서기와 시약병을 조합해 무언가를 추출하는 모습은 마치 연금술사와 같다.
유니온의 연구원들도 이렇게 일을 하는 걸까. 이쯤되면 클로저 관두고 캐롤 누나랑 같은 부서로 가는게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아까부터 쓴내가 나네. 그런 거 좀 집에 가서 하면 안될까요?"
"하, 우리 동생 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이걸 봐라."
뭔가 작고 동글동글한 알약같은 것을 보여준다.
"우황청심환이라도 만든 거에요? 특허권 침해라고 아세요?"
"짜식, 이건 풍유환이라고 부르는 거다 임마."
"............푸, 풍...유환...이라고?"
고전게이머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잊을 수 없다. 정말 환상으로만 전해지는 전설의 영약이 아니던가.
아저씨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해야할 일이 있다.
"일단 신고할께요."
"엉?!"
"식약청하고 경찰서에."
"왜?!"
"그거 유정 누나한테 쓸 거죠?"
아저씨가 사래가 들린듯 기침을 한다.
"아니 왜 니들은 뭐만 하면 나랑 유정씨를 엮...."
"아니에요.... 그럼 설마 슬비한테....?"
"너 슬비한테 사과해야 하는 발언을 막 하는 거 같다."
"그럼 테인이한테 쓸건가요? 아무리 애가 이쁘장해도...."
"아니 왜 지인들한테 쓴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건 그냥 호기심에 만들어본 거라고."
"호기심에 술이랑 담배를 시작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죠... 이제 신고해도 될까요?"
"너 점점 슬비 닮아가냐. 부부는 닮는다더니."
"에?! 부, 부부부부 부부는 무슨!"
"부부젤라마냥 부부거리지말고 일단 진정해 마인 부우같은 놈아."
아저씨의 형편없는 개그를 들으니 뭔가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저씨도 이제 개그가 실패한건 신경쓰지도 않고 말한다.
"캐롤에게 가서 이게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할 거야. 효과를 입증해 특허등록을 하면 난 여생을 카드빚에 허덕이지 않고 살 수 있지."
"정말 글러먹은 어른의 표본같은 대사를 하시네요. 성분이 뭔데요?"
"일단 소이 이소플라본이랑... 뭐 여러가지가 있어 임마."
"정말 노골적으로 수상한데..."
"식후 30분 한 알식 꼬박꼬박 3개월간 복용하면 틀림없이 효과를 볼 거야. 정말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지 모르겠어...."
아저씨가 느슨하게 웃으면서 의자에 몸을 기댄다.
"가슴 크기는 여성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너무 커도 문제지만, 너무 작아도 문제란말야.
수술 없이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다면 많은 여자들이 행복해지지 않겠어? 난 인류애를 실천한 거야."
"유정 누나가 가슴이 커지는 약을 개발하는 남자를 좋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네요."
"아니 유정씨 얘기는 자꾸 왜 나와?! 뭐 인기쟁이 이세하의 눈에 나란 남자는 초라하게 보이겠지."
"이, 인기라니 무슨 말씀을..."
열심히 게임에 집중하는 척했지만 아저씨는 히죽히죽 짜증나는 미소를 띄고 말을 걸어온다.
"너 저번에는 유리네 집에 놀러가더니, 이번에는 슬비랑 **하고 있잖..."
"도, **라니. 오해할 말 하지마세요."
"두집살림이란 말 알고있냐?"
"알고싶지도 않아요."
아저씨는 이쪽을 놀려먹을 생각에 몸에 전** 때의 활력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곧 자리를 비워야했다.
유정누나가 와서 뭐라고 쏘아붙이니 쩔쩔 매며 끌려나가는 것이 영락없는 기둥서방이다.
아마 아저씨가 또 상부랑 시비가 붙어서 뒤처리로 고생했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눈치없게 차나 한잔 하자고 무마하려다가 발등을 밟혔다.
킬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서 킬힐이라더니. 미리 더 혼나지 않도록 기원해주도록 한다. 속으로만.
.....거짓말이다. 실은 꼴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하야!"
이크. 바람 잘 날이 없군. 게임 속 캐릭터는 마을에서 춤을 추고 있다.
호쾌하게 문을 열어젖힌 유리가 토닥토닥 가벼운 발걸음으로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는다.
"너 무슨 보급품 강화한다고 하지 않았었냐."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역시 그랬겠지...."
"기계가 날 싫어하는걸까?"
"유니온의 기술력이 모자랄 뿐이야. 당분간 쓸 거 없으면 내가 구해줄게. 괜히 벌처스에 돈 쓰지말고."
"세하라면 그렇게 말할줄 알았어!"
녀석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목을 끌어안아온다. 너무 일상적인 일이라 게임기가 흔들리지도 않는다.
유리는 웃을 때마다 주변의 공기를 바꾸는 힘이 있다. 날아가던 나비가 휘청휘청 갈지자를 그릴듯한 달콤함이다.
이것도 위상력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
녀석의 뺨이 가까워지면 어째선지 부드러운 우유향이 났다. 긴 속눈썹 아래로 깜빡이는 눈은 보석처럼 박혀있다.
반지에 박힌 보석의 푸르름이 아니라, 달력사진에서만 보던 지중해의 푸르름을 연상시킨다.
동그랗고 단단하게 박힌 파란색이란 점에서 왜란 열매처럼 보이기도 한다.
녀석이 위상력을 쓸때면, 그 파랑이 더 짙어져서 이 세계의 색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놀아줘 세하야!"
"너 자립이라는 말 알고있냐. 잠깐동안 저기서 혼자 놀고 있으면 혼자서도 잘해요라고 도장찍어줄게."
"알았어!"
유리는 아저씨의 노트북을 강탈해서-평소엔 이걸로 어째 바둑만 둔다-지뢰찾기를 실행했다.
그리고는 1분도 안되어 장렬하게 격파당한 후 의자를 목마마냥 끌면서 다가와 보고했다.
"오래 버텼어!!"
"제일 작은 사이즈잖아!"
"이제 칭찬해줘."
"너무 빨라서 탈락이야."
"세하는 칭찬에 너무 인색하네."
녀석이 펜을 입술 위에 올리고 뚱한 표정을 지은채 책상에 다리를 올린다.
모서리가 바닥을 긁을 때마다 끼익끼익 비명소리가 났다.
"넌 가만있지를 못하냐."
"난 게임 속 애들처럼 얌전하지 않은걸-"
"게임 속 애들은 내 손가락이 바쁜만큼 바빠."
"너 맨날 등 그렇게 구부정하게 하고 그러면 거북이처럼 된다?"
"시끄럽네."
"언제 철들래?"
"그럼 내가 너하고 어떻게 놀아줘. 너 머리 쓰는거 못하잖아."
"뭐, 뭐어?! 너도 나랑 비슷하면서!"
"너보다는 나아."
"헤에-"
"그럼 끝말잇기로 승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는 격파당했다. 이후에 초성 퀴즈나 빙고로도 승부를 보았지만, 역시 유리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 녀석은 머리보다는 몸 쓰는 일을 잘하다보니, 이런 간단하고 건전한 게임조차 제대로 클리어하질 못한다.
녀석이 형광등을 뽑으려 하기에 의자로 방어한다.
"너 왜 갑자기 멀쩡한 형광등을 건드려."
"검도로 승부를 보자 이세하."
"내 머리 쪼개버릴 생각이지?!"
"솔직히 좀 봐주면서 해야하는거 아냐?!"
"네가 봐주지 말라며!"
"거짓말이었어!"
"일단 내려와. 응?"
"왜? 사과할 마음이 들어?"
"아니, 치마입고 책상 위로 올라가면 그... 보이잖냐."
유리는 먼저 빠르게 무릎을 꿇은 후, 아주 다소곳하게 책상에서 내려왔다.
이후 치마 끝자락을 잡은 상태로 로우킥을 날리려하기에 서둘러 피한다.
"올라가기 전에 말해야지!"
"말할 시간이 어디...크엑... 알았어..일단 이거 좀 놓고..."
요즘 유리가 나를 대상으로 각종 관절기를 실험하는 기분이 든다.
겉멋만 들어서는 위험한 레슬링 기술을 막 친구한테 쓰고 그래도 되는건가.
"이제, 사과할, 마음이, 들어?"
남자란 불합리한 상황에 굴복해야할 때도 있다.
"미안....."
"싫어. 용서 안해줄거야."
"비겁하다...."
"뭐, 용서해줄 수 없는 것도 아니야."
"뭔데."
"나한테 밥을 쏘면 돼!"
"점점 은이 누나 닮아가냐. 그렇게 얻어먹기만 하면 살찌.... 내가 잘못했으니까 멱살 좀 놔라..."
조금 달아오른 공기가 식고 난 후 유리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어깨를 좌우로 비틀며 스트레칭을 한다.
"음. 좀 쪘나? 차원종으로 다이어트가 되는줄 알았는데."
"딱 봐도 하나도 안 쪘어."
유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볼을 꼬집는다.
"우리 세하 이쁜 말도 할 줄 아네?"
녀석이 덧니를 드러낼 때마다 사육사한테 애교를 떠는 호랑이를 보는 기분이 이렇지않나 생각하게 된다.
너무 오래 볼을 꼬집히면 침이 흐르는 최악의 사태가 다가오기 때문에, 얼른 화제를 전환한다.
"아, 그러고보니까."
"응?"
유리의 뺨에 손을 올리고 엄지로 뺨을 긁듯이 살짝 눌러내린다.
"에? 세, 세하야?"
유리는 푸른 눈동자가 어쩐지 녹아서 색채가 흐려진다.
평소엔 먼저 다가와서 비벼대는 주제에, 먼저 다가가면 잔뜩 곤란해하며 움츠린다. 무슨 길고양이도 아니고.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나 싶더니, 이내 눈을 꼭 감고는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바들바들 떨고있다.
아, 아니 왜. 이 상황 뭐야? 내가 또 뭐 잘못한건가? 왜 말이 없지?
순간 유리의 입술이 무척 도드라져보여 살짝 현기증이 났다. 누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 분홍색을 칠한 느낌이다.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 반창고 갈아야하는 거 아냐?"
"........에?"
녀석의 뺨에 붙은 반창고가 너덜너덜하다. 아마 또 깜빡하고 떼지 않고 샤워를 했거나 그랬겠지.
이거 방수도 된다!라며 자랑했던게 엊그제처럼 느껴진다.
"흉지니까 제때제때 갈아야지. 리더님 말 못 들었냐. 이리 와. 갈아줄께."
"............"
등을 돌리고는 응급물품 키트를 열고있자니, 녀석이 등을 투닥투닥 때리고 있다.
"왜 때리는 거야."
"몰라."
"내면의 폭력성이라도 깨어났냐."
서유리 화났다! 서유리 다 쏘고 베어버릴 거야! 땅땅땅빵!하고 날뛰는 유리를 떠올린다.
그때 분노의 인형인가를 만나고나서는 참 큰일이었지.
어쩐지 계속 머리를 때리려고 하기에, 이러지저러니 해도 녀석이 참 검도를 좋아했단걸 알았다.
더 이상 검도를 하지 않지만 종종 이야기를 꺼내고는 한다. 할 수 없게 된 꿈이지만, 분명 녀석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을 터다.
나에게 있어선 게임과도 같은 것이었을테니까. 늘 본인은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하지만, 실은 거짓말인걸 알고있다.
유리는 거짓말이 서투르다. 나는 서투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유리가 뒤에서 옷자락을 잡는가싶더니, 이내 등을 껴안는다. 피하려고하니 허리를 감아 고정하곤 얼굴을 묻었다.
등에 닿은 면적만큼 온기가 중첩되고, 옷 너머 얕은 숨결이 척추를 간질거린다.
"뭐하냐."
"지금 얼굴 **마."
"나 참."
"나중에 라면 끓여줘."
"응."
"와플도 사줘."
"응."
"내가 심심할 때 또 놀아줘."
"응."
"칭찬도 잔뜩 해줘."
"응."
"멀리 가지 말아줘."
"응."
"나 귀찮아?"
"귀찮지 않아."
"계속 귀찮게 굴거야."
"맘대로 해."
어째선지 이 녀석의 응석은 거부할 수가 없다.
석봉이는 유리가 너무 터프한 성격만 아니어도 더 인기가 있을 거라고 했지만, 이 녀석은 생각보다 터프하지 않다.
유리의 그런 다른 얼굴을 알고있다는 사실만으로, 유치하게도 아주 약간 우월감에 휩싸이곤 한다.
나는 이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걸까. 단순한 친구인지, 검은 양팀의 멤버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알 수 없다.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필시 내가 겁쟁이라서 한발짝 더 내딛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런 것들을 헤아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것 같다.
게임은 틀이 정해져 있다. 답이 정해져 있고, 공략이 있고, 저장을 하거나 되돌릴 수 있다.
유리가 이렇게 할 때는 어떻게 해주는 것이 정답인지, 아직 상상하지 못한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 녀석이 뒤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제 좀 놔주라."
".....슬비는 되면서?"
어째선지 세계의 의지에 의해 몇번 심하게 기침을 한다.
녀석은 마찰열로 불이라도 지르고싶은지 몇번 얼굴을 세게 문질러 비빈다.
이미 충분히 뜨거우니까 그만해줬으면 한다.
"무, 무슨 소리를...."
"저기...말야... 세하야.... 나..."
굉장히 곤란하고 가슴벅찬 상황에서 신은 동아줄을 하나 내려주신다.
테인이가 특경대 특제 드링크에 빨대를 꽂은 채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화들짝 놀라 거리를 둔다.
소영 누나네 포장마차에라도 다녀왔는지 하얀 비닐봉투에 간식이 포장되어 있었는데, 테인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물음표를 띄웠다.
유리가 손부채질을 하면서 "와아! 간식이다! 슬비 오면 같이 먹자?"하고 깨알같이 아저씨를 무시하는 과장된 리액션을 선보인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이후 슬비가 도착했을 때 봉지를 열면서 근데 왜 아까 둘이 껴안고 있었냐고 타이밍 나쁘게 묻는 까닭에 속으로 피를 토해야했다.
튼튼한 동아줄인줄 알았더니 썩은 동아줄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그 이야기에서 썩은 동아줄을 붙잡은 호랑이는 결국 메밀밭에 추락해서, 이후 메밀줄기가 붉게 변했다고...
슬비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세하, 설명이 듣고싶은데."
*
두서없는 세하하렘물 8탄입니다. 세하슬비물에서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습니다.
별 의미는 없겠지만 어째선지 폭발하는 조회수도 감동이었습니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풍유환은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에 나오는, 가슴이 커지는 약입니다.
모두가 예상하신대로 이번에는 세하유리입니디만... 어째선지 제저씨 비중이 높다...?
슬비가 풋풋한 연인같은 느낌이라면, 유리는 친구이상 연인미만인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슬슬 이 시리즈도 끝날 때가 되어가네요.
이전 시리즈는
세하슬비
세하유리
유리세하슬비(1)
유리세하슬비(2)
세하정미
세하세린
세하슬비(2)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짬내서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