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ntom Soldier -0-
비타짱하얘 2017-06-25 1
그것은 대략 서기 9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확히는 1997년도 여름이었다. 세계 곳곳에 어떤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 같은 경우, 그걸 단순한 구멍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모를 그것들은 간헐적으로 생겼다 사라졌다 하곤 했고, 몇몇 학자들은 ‘웜홀’이 아닐까 하는 다소 성급한 가설도 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 그냥 단순히 ‘구멍’이라고 불렀다.
정말 당연한 수순으로, 과학계에서 이런 신비한 현상을 놓칠 리가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구멍'들 중에서도 안정적으로 오래 유지되는 개체가 등장했고 비로소 그 때부터 인간들의 면밀한 관찰이 시작됐다. 구멍들은 공간의 뒤틀림으로 지구상 어딘가가 아닌 곳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며 과학계, 특히나 천문학계는 흥분을 견디지 못 하며 수시로 각종 매체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It is surprising they are connected to somewhere in cosmos, but that's not all.(그 구멍들은 세상 어딘가 다른 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놀랍지만, 그 뿐만이 아닙니다.)"
"Hmm, what is it? Doctor.(호오, 그게 뭐지요? 박사님.)"
"As we have announced several times, we've observed many phenomena and materials which are abnormal and original. Those do not exist in the observed universe.(우리가 여태까지 발표한 대로 구멍 너머에서는 아주 독특하고 새로운 현상과 물질이 관측됐으며 이는 우리가 여태까지 관측해온 우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So, It is...?(그 말은...?)"
"It is beyond the observed universe.(관측 가능한 우주 너머라는 의미입니다.)"
TV를 틀면 거의 언제나 이런 식의 외신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
"We could not investigate something beyond the observed universe till now 'cause nothing could arrive at the Earth, even the light. But, that's not a real story any longer because it happened. We don't need to discuss what we have to do.(지금까지 우리는 관측 가능한 우주 너머를 연구할 수단이 전무했습니다. 지구로 도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빛 마저요. 그러나 이제는 얘기가 다릅니다. 관측된 이상,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있습니다.)"
이후, 구멍 너머가 저 먼 어딘가로 연결돼 있으므로 과학자들은 그것을 단순한 구멍이 아닌 ‘Gate’, 즉 문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이쪽의 기존 물리법칙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므로, 차원 수준이 다르다고 하여 거기에 Dimension을 붙여 이름하여, '차원문'이라 했다.
처음에는 매우 신기하여 대중적인 화제로 입에 오르내렸으나 시간이 흘러 차원문은 그냥 일상의 일부가 되어갔다. 타차원을 연구한다고 해서 일반인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서울 한복판에도 차원문은 있었지만 그냥 길가다가 구경할 수 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더 이상 차원문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람은 공부 많이 한 과학자들 혹은 일부 괴짜들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즈음, 그래, 월드컵이 열릴 예정이던 2002년이었다. 별안간 인류사적인 레벨로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각지의 차원문이 약 10배에서, 심하게는 수백 배가량 확대되며 '그들'이 튀어나왔다. 글쎄, 그 때는 그냥 괴물이라고 불렀다. 생김새도 크기도 각각 제멋대로였다. 영유아처럼 조그만 놈들도 있었고 탱크 같은 건 비웃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놈들도 있었다. 최악이었던 것은 그 크기가 한계가 없어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왜 침공했을까? 정말 한심한 이야기지만 국군은 정상적인 지휘통계가 마비되어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한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미군이었다. 당시 주한미군이 주먹구구식으로라도 국군을 지휘하지 않았다면 그 1차 침공군을 격퇴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지적외계생명체와의 조우는 이미 백만 년 쯤 과거 이야기가 된 것처럼, 어떻게 하면 저 놈들을 효과적으로 말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시급했다. 왜냐하면 종래 우리가 써왔던 무기가 영 안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방탄복을 비웃듯이 그것들은 소총탄을 튕겨댔고 심한 놈은 수천 발 먹여도 쓰러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비교적 잘 죽는 녀석들과 어떻게 감당이 안 되는 놈들을 정도에 따라 알파벳으로 등급을 매겼다.
일시적으로 그 괴물들을 격퇴한 뒤, 군에서는 그게 일종의 정찰에 불과할 뿐일 가능성을 시사하며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당장 남아있는 잔당들을 수색했다. 괴물들은 마치, 만화에서나 볼 법한 신기한 짓들을 벌였고 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일으킬 때마다 특정한 에너지가 포착되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Phase force, 위상력이라고 명명됐다. 재래식 무기가 잘 통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예상 했던대로 그 놈들은 수차례 규모를 늘려가며 침공 해왔고 그 때마다 국군과 미군을 가리지 않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물론 어디서 나타날지 예상할 수 없기에 민간인 희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인류는 끝장났다. 그렇게 비관적인 전망이 이어져오던 도중, 매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괴물들을 맨 손으로 두들겨 패 죽이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딱히 특수한 장비를 가지고 있거나 엄청난 무기같은 것도 없이, 예를 들어 철제 야구 방망이로 곰 같은 덩치의 괴물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시력, 완력 등의 신체적인 능력도 상식 이상으로 우월했고 더 대단한 사람들은 먼 거리에서도 공격이 가능했다. 마치 그 괴물 놈들의 마법 같은 힘처럼.
물론 학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고 최대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들이 내는 에너지가 괴물들이 내뿜는 그것과 매우 흡사함을 밝혀냈다. 그들은 민간인, 군인, 연령대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각성했고, 대부분 자발적으로 괴물들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런 현상이 타차원과의 동화작용으로 인한 것이라느니 학자들은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 까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여하간 인류에게 있어서는 희소식이었다. 그들은 위상능력자라고 분류되기 시작했고, 이후 미군에서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군으로 편입, 관리체계를 갖추고 괴물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능력자들이 그들과의 전쟁에 반드시 필요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수도권치고는 매우 어두운 야경이었다. 도대체가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던 간판과 가로등은 박살이 났거나, 멀쩡하다 해도 전기가 안 들어온 지가 한참일 것이다. 암전. 그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이윽고, 시야가 어둠을 받아들여 물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차원종이다. 그것들이 바글바글대는 것이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괜찮아 아가씨?”
“…….”
호명된 소녀는 사정없이 덜컹거리는 아파치 헬기 안에서 손잡이를 붙잡고 굳어있었다. 조종사는 상기된 얼굴로 지상에서 날아오는 요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회피기동을 시작한 덕에 헬기 내부는 물건과 물건,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소리로 요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측면 사수 자리의 기관총을 붙들어매던 병사가 다시 물었다.
“아가씨 도대체 몇 살이야?”
“…….”
“말하기 싫으면 됐어.”
딱히 헬기 내부가 위, 아래, 좌, 우로 요동친다 한들 끄떡도 없을 그 소녀는 아직도 손잡이를 움켜쥔 채 막 열린 출입구 아래로 지상을 내려다봤다. 암흑일 터인 지상의 참상이 소녀의 눈에는 아주 잘 보였다. 건축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져 폐허가 돼있고 군데군데 인간인지 괴물놈들인지 모를 시체가 널려있다. 소녀는 이내 이를 으득 갈더니 말했다.
“갑니다.”
그리고는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헬기 출입구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뛰쳐나갔다. 고도는 그리 높지 않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이 뛰어내릴만한 높이는 아니다. 어쨌든 그녀는 뛰어내렸다.
“737부대 케이, 출격했습니다.”
“예정보다 너무 빠르다. 투하 위치를 까먹었나.”
엄하게 충고를 하는 무전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주먹이 지면을 강타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