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하] 닮아가다
루이벨라 2017-05-21 5
※ 삼순(@samsoon_332)님 생일 축하, 축전 소설입니다!
※ 세하 캐붕주의 + 작가의 의식의 흐름 주의
※ 시간적 흐름은 강남 CGV -> G타워 -> 임시본부
클로저 일을 시작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손때 묻은 건블레이드라든가, 아직은 불편하기만 한 요원복이라든가...하지만 내가 제일 익숙해지지 못했던 건 바로, 차원종을 처리해야하는 일이었다.
차원종이라고 해도 내 손으로 직접, 살아있는 무언가를 죽인다는 기분은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어릴 때 클로저를 하기 싫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무기를 쥔 내 손에서 나오는 열기와, 살아있는 생물의 숨을 끊었을 때의 그 첫 감각을 난 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시물레이션이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생생했다. 그날은 악몽을 꾸었다.
<검은양> 에 발탁되고나서는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야했다. 아니, 익숙해져야만 했다. 아무리 싫어도 나는 일단은 클로저였다. 수습 요원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클로저였다.
그렇게 처음에는 익숙해지지 못할거 같았던 것들도 나한테는 자연스럽게 묻어나갔다. 그걸 느낄 때마다 왜 이리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는지 모른다.
* * *
-승급...심사요? 제가요?
순수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승급 심사는 아니었지만 불안한 한편으로는 기뻤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불안함이 더 컸다.
내가? 왜? 내가 왜?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질문을 가진 채로 큐브라는 곳에 들어갔다. 어렸을 때 했던 시물레이션의 차원종들이 대거로 쏟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뜻밖의 존재를 조우하게 되었다.
'저건...나잖아...?'
나와 똑같은 모습의 시물레이션. 녀석은 아주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내 얼굴을 한채로 저렇게 웃으니 너무 소름이 돋았다. 시물레이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저 녀석이 나한테 한 말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나의 가슴을 파고드는 말을 해댔다.
-너, 정말 모순적인거 알아?
"...?"
-너, 아무리 시물레이션이라도 살아있는 걸 죽일 때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넌...도대체 어디간 거지?
"..."
내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가는게 느껴졌다. 어떻게...그런걸? 녀석은 눕혀져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목에 얼마 안되는 거리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내 건블레이드를 두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녀석은 힘껏 건블레이드의 날을 향해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피가...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놀란 내 표정을 보더니 녀석은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래도...네가 정녕 옳은 일을 하는거라고 생각하나?
"...**. 넌 어차피...시물레이션일 뿐이잖아!"
-이게...시물레이션일 뿐이라고? 너와 같이 피를 흘리는 내가? 너와 같이 아픔도 느끼는 내가?!
녀석은 건블레이드에서 손을 뗐다. 이제는 다 자포자기한 표정이었다.
-이세하, 넌 모를거야.
"..."
-네가 너도 모르는 동안 네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뭐야, 이 녀석...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거야? 녀석은 짙은 미소를 뿌렸다.
-난 오래전부터 계속 네 안에서 존재했었어. 네가 위상력이라는 힘에 눈을 뜨게 된 이후부터 계속.
계속...이 말이 왜 이렇게 수긍이 가는지 모르겠다. 난 분명 이 녀석의 말을 부정해야했다. 어디서 개소리냐고. 난 차원종이 되고 싶은 생각을, 처음부터 가진 적이 없다고. 아니, 앞으로도 계속 없을거라고. '차원종이 된 이세하' 는 나의 내적 혼란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았다.
-그동안 네 마음속 어딘가에서 '내' 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 줄 알아?
"...뭐...?"
-난 아마도 342번째일거야.
그리고 내 앞에 있던 341명을 죽인 건...누굴까? 녀석은 나에게 질문을 했다. 나는 일부러 답을 말하지 않았다. 녀석은 모순적이라며 날 더욱더 웃어제꼈다.
-그리고 여기서 날 죽인다고 해도...'내' 가 다시는 안 나올거 같아? 네가 살아있는 한, 네가 클로저로 있는 한은 '나' 는 계속 탄생할텐데 말이야.
그날도 나는 악몽을 꾸었다. 큐브에서 본 녀석은 피가 묻은 건블레이드를 쥔채 내 앞에서 환히 웃고 있었다. 그 앞에 펼쳐진 상황은 너무도 끔찍했다. 꿈일텐데도 생생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역질이 차올랐다. 녀석은 나에게 다가와 주저앉아버린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녀석의 얼굴은 군데군데 피가 묻어있었다.
-어때? 네가 '나' 를 죽인 숫자만큼 죽여봤는데.
"...우읍..."
-뭐야?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거지?
너도 별반 다르지 않아, 이세하.
* * *
그 뒤로, 녀석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나한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 클로저의 적은 차원종인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와 같은 인간들에게도 검을 겨누어**다는 자체는 너무도 괴로웠다.
녀석의 말이 가끔씩 떠올랐다.
-너도 별반 다르지 않아, 이세하.
...별반 다르지 않다면 뭐해? 난 그 녀석 같이 되지 않을거다.
처음의 각오는 이러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차원종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익숙해진 것처럼, 점차 테러리스트들에게 검을 겨누는 일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치솟아올랐다.
물론 난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를 입힌 적은 더러 있었다. 그 상처가 만약 깊게 파고들었다면? 치명상이 되었다면? 어쩌면 급소로 파고들었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하지만 생각하게 된다.
매일매일 힘든 임무는 계속 되었다. 적들은 날날이 반항이 거세지고 그에 따라 유니온의 추악한 일이 밝혀지고...
얼마 전에는 유니온이 엄마의 클론을 비밀리에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분했다. 너무 분했다. 엄마는...그 유니온 때문에 항상 집안에만 갇혀있는 신세인데...그런 엄마를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 속셈이었는지...
내가 분노를 했던 건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분노를 받아들이는 주변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더 분이 올랐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며칠동안 내리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아무도, 나한테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혼자 두는 것이 더 옳다고 판단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지금 상황이 최악으로 내딛고 있던지.
그렇게 4일째 되던 날, 난 세면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문득 거울 속에 비춰진 내 얼굴이 누군가를 닮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울의 물기를 닦아내니 내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저 삐딱한 입술선, 독이 오른 눈동자...
그 녀석이 내 안에서 보였다.
-너도 별반 다르지 않아, 이세하.
...그래,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람' 을 죽였는지 몰라?
알 필요 없다.
-그거랑 비슷한거야.
그 감각이랑 비슷한 것만 알면 된다.
-언제까지 참을거야? 착한 어린애마냥.
-멍청하게...
-그냥...그 감각 그대로 검만 휘두르면 되는데?
"...그렇지. 정말...쉬운거였지..."
다시 올려다본 거울 속의 나는 큐브에서 만난 그 녀석처럼 짙게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내' 어느 부분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