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하] 회유
루이벨라 2017-05-21 2
※ 리퀘(@red_closers) + 다른 3분들의 썰(@red_closers, @cheubyeol, @ssdfg1151)
※ 시간의 흐름은 G타워 -> 국제 공항 -> 임시본부
-넌 항상 어린애 같았지.
공허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 *
하루에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것이 있었다. 어찌보면 웃길 수도 있는, 정말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구나, 라는 소리를 들을 법 할정도로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내 안의 다른 누군가가 있는건, 아닐까? 라는.
세상에 아직도 그런 망상을 하고 있니? 라는 한숨 어린 소리를 들을법한 생각이었지만 가끔씩 나도 알 수가 없는 기시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기시감을 느낄 때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 안의 무슨 다른 것이 있는지 모른다고.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얀 깃털에 둘러쌓인듯 포근한 것보다는, 심연의 깊은 늪에 있는 끈적한 액체와 더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어렸을 적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G타워에서 했었던 승급 심사 이후로 더 확고해졌다.
승급 심사를 위한 큐브 안에서 만난 '또 하나의 이세하' 를 만나고 말이다. 녀석은 말했다.
-어른들의 장난감이 되는 거 시시하지 않아?
-나라면 좀 더 멋진 걸 해볼텐데.
-'차원종'...이라던지.
웃기지 마. 내가 왜 차원종이 되**다는건데!? 그 당시의 나는 이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녀석은 내게 다시 말했다.
-이세하, 너 말이야...지금 날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나본데...
-난 절대 죽지 않아.
-네가 클로저로 계속 살아간다면, 나도 계속 존재한다고.
-'네' 안에서 말이야.
그저, 사라지는 흔한 악당의 마지막 발악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악연이 계속 지속될 줄은 몰랐다.
-여어~우리, 처음 보는 사이는 아니지?!
-...
그날 밤, 나는 녀석을 내 꿈 속에서 다시 재회했다.
* * *
-여~오랜만~
"..."
-뭐지,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인데?
내가 왜 저 녀석을 만나는 걸 달가워해야하는지 모르겠다. 녀석은 내가 반응을 하면 할수록 즐거워하는 녀석이니...이럴 때는 무시가 상책이었다.
처음 내 안에 녀석이 있다는 걸 자각한 직후의 녀석에게는 형체는 없었다. 그저, 기분 나쁜 목소리만 들릴 뿐. 하지만 녀석은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형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투명도 10 정도로 희미하게 보였지만, 이제는 제법 눈에 띄일 정도로 실체화되어가는 거 같았다.
하지만 큐브에서 만났던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 녀석의 몸은 여전히, '가짜' 인 느낌이 들었다.
-그치? 이건 역시 가짜 몸인거 티가 딱 나지?
...그리고 녀석은 내 생각을 금방 다 알아차린다. 자기도 나름 '이세하' 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그렇게 따지면 나도 녀석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고, 녀석은 그 이유를 '네가 아직 날 인정하지 않아서' 라고 대꾸했다.
그렇다. 내가 왜 저 녀석을 인정해야하는걸까. 녀석이 처음 등장하면서 나에게 했던 소개는 무엇이었나. 바로 차원종이 된 이세하라고 했다. 난 클로저다. 클로저와 차원종은 어울려서는 안되는 존재.
-차원종이 없다면, 네가 클로저로 있을 수도 있을까?
"..."
무시를 하고 싶어도, 녀석은 내 머릿속을 훤히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화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기묘한 상황.
-어렸을 때부터 계속 생각했잖아?
"..."
-내 안에는 심연의 늪과 같은...
"뭐?"
녀석은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다.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의 초침이 흘러가듯이. 나의 반응에 녀석은 호탕하게 웃었다.
-말했잖아. 난 너라고. 너에 대해서면 뭐든지 다 알고 있지.
"..."
-어쩌면 너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거, 정말 기분 나쁘네. 타인에게 '나' 라는 존제가 낱낱이 밝혀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알기론 없다.
-오히려 억울한 건 나야.
"..."
-이 멋진 힘을...! 네 안에 숨겨져 있는 이 힘을...!!
"..."
-어째서 너는 인지하지 못하는거지?
녀석과의 만남은 언제나 내 자각몽 속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불쾌한 목소리로 가득찬 꿈만 꾸는 기분이었던 것에서 이제는 실제 감각이 느껴지는 꿈을 꾸는 것으로 바뀌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그 꿈 속에서 나와 녀석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
녀석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건블레이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향해 던졌다. 무슨 짓인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직후 우리가 있던 검은 공간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린 공간 뒤로 보이는 것은 아름답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푸른 밤하늘이었다. 분명 내 기억이 토대로 만들어진 꿈이라면 저 밤하늘은 내가 어디선가 봤던 것이 되어야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내가 밤하늘을 올려다본적이 있었던가.
녀석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적안이 나를 비웃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봐! 정말 멋지지?
"..."
-이렇게 넘치도록 멋진 힘을 넌...왜 숨기고 있는걸까?!
"..."
-'괴물' 이 되기 싫어서?
녀석을 정말로 좋아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다. 녀석은, 나를 너무도 잘 안다. 그렇기에 내가 무슨 말에 상처를 받고 반응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았다.
괴물. 이건 어린 시절부터 나한테 늘 따라붙던 꼬리표였다. 그 꼬리표를 떼고 싶어서 염색을 하고 렌즈까지 끼고 다녔지만 꼬리표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위상력' 이 있는 한, 난 언제나 '괴물' 이었다.
나에게 많은 잠재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힘을 내가 아직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거라고 했다. 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힘을 오롯이 사용하는 날에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녀석이 나에게 말하는 '힘' 이라는 게 그런걸까.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자니 히죽거리던 웃음을 싹 멈추었다. 공허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넌 항상 어린애 같았지.
그리고 난 꿈에서 깨어난다.
* * *
-여, 오랜만이네.
"...뭐야, 왜 온거야."
빌어먹을. 또 이 꿈이다. 왜, 하필 이럴 때에 저 녀석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녀석은 드디어 자신이 나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왜 어른들의 장난감을 일부러 자처해서...
"...**."
-너만 상처받는건데?
"닥치라고."
-넌 항상 어린애 같았지.
의외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단 말이야. 녀석의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녀석의 말대로 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고집이었다. 어린애 같은 고집 때문에.
-결국 상처받는 건 이세하, 너 하나뿐이잖아.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늦지 않았다...? 난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늦지 않았다는건데? 이젠 전 괜찮아요, 라고 말하기에는 난 너무도 멀리 와버렸다. 너무도 많은 진실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그 진실은 온통 시커먼 진실들 뿐이었다. 그에 대해 분노가 치솟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이 분노를 누구를 향해 쏴야하나, 그리고 어디까지 퍼부어야하나와 같은.
-전부 다 토해내.
"..."
-널 이렇게 만든 인간들에게 전부 다, 토해내.
악마의 목소리는 언제나 달콤하다. 그 달콤함으로 인간들을 유혹하는거겠지. 이 길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그리고 나는 이끌려간다.
-그저 네가 '네 안에 있는 진정한 힘' 에 대해 자각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지만...
"..."
-마음이 바뀌었어. 진절머리가 나거든.
너도, 그리고 인간이란 모든 족속들도. 난 이제 녀석의 말에 대꾸할 기력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녀석이 내 뒤로 오더니 내 오른손에 건블레이드를 쥐어준다. 뭘 하는걸까. 녀석은 건블레이드를 위로 올려주며 속삭였다.
-네 분노를, 여기다 터트려.
"...분노?"
-초신성을 만들어 낼 때를 생각해봐.
그거랑 아주 비슷하거든. 초신성을 쓸 때의 감각...내 안에 작지만 커다란 힘이 존재하는 그 기분. 아, 그 기분이구나.
녀석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자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전과 같이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기분 좋지? 라고 녀석이 내게 물었다. 기분이 좋은 건 모르겠다. 그저 드는 생각은 이게...내 안에 있던 힘일까. 이토록 굉장한거였구나. 감탄과 동시에 이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괴물인거다.
또르르- 아, 뭐지? 눈에서 뭔가가 나온다. 눈물이었다. 난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운 적이 없는데. 심지어 그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도 눈물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지금 내가 울고 있다. 도대체 왜?
-넌 항상 어린애 같아.
"...그게 뭐 어때서...!"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넌 어린애다운 고집이 있어. 그 고집이 지금의 너를 만든거야. 아무도 탓하지 마. 네가 탓해야할 건 오직 너야.
녀석은 내 뒤로 다가오더니 눈물이 나오고 있는 내 눈을 아까와 같이 손으로 가렸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악마와의 거래는 시작되었다.
-힘들지?
"..."
-놀아나는거 지겹지?
"..."
이 말을 하고 있던 녀석은 분명 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이제 그만 편해질래?
* * *
세하가 눈을 떴다. 동이 트고 있는지 새벽 어스름이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옆쪽에는 피곤에 지친 몸을 쉬고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아니, 동료들이었던 자들이다.
세하는 곧장 세면실로 향했다.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은 분명 틀림없는 이세하였다. 루비 같이 반짝이는 적안이 매력적이게 느껴질 정도였다. 세하는 문득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남자치고 고운 피부의 촉감이 느껴졌다. 씨익, 웃어본다. 거울 속에 있는 세하도 같이 웃고 있었다.
"굉장해...!"
주체할 수 없을만큼 기분이 좋았다.
"지난번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굉장하군...!"
이 엄청난 힘, 완벽하다라고 생각만 들 수 밖에 없는 '진짜' 몸.
전부 '세하' 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