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더위는 그녀를 그의 주부생활처럼 고달프게 한다.
Prile 2015-02-08 16
"아저씨! 아저씨! 그만 누워 계시고 애들한테 건강 주스나 좀 만들어 주세요."
"으, 으음?"
"계속 누워만 있으면 몸이 굳으니까 몸도 풀어둘 겸 움직여요."
"알았어, 알았다구. 정말이지, 잔소리 하는 건 누님을 쏙 빼닮았어, 동생."
투덜투덜 거리면서 냉장고로 향하는 제이 아저씨.
늘 생각하는 거지만 몇살이신 걸까. 적어도 엄마를 '누님' 이라고 부르는 걸로 봐서는 20살은 넘는다고 생각된다.
처음에 유정이 누나가 가지고 있던 아저씨의 프로필 내용을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었다.
온갖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의 보호자 역할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도 우리들이 불안해 하거나 할 때면 제대로 보호자 노릇을 해주시지만.
"이봐, 동생. 야채같은 것들은 냉장고 밑부분의 2번째 칸에 있는 거 맞지?"
"아니라니까요, 아저씨. 야채 같은 것들은 3번째 칸이에요."
"아, 그랬던가? 그리고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러."
제이 아저씨가 애들에게 나눠줄 건강 주스를 만들 때까지 나는 저녁을 뭘로 할지 고민하기로 했다.
여름이면 생각나면서, 여러명이 먹어도 괜찮고, 맛도 있으며, 밸런스가 좋은 음식을 생각해 보고 있지만 그다지 떠오르는 게 없다.
"어, 세하야 마침 잘 됐다."
"엉?"
저녁 거리를 생각하며 거실로 향하고 있던 도중, 방에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온 유리와 마주쳤다.
푸른 색의 핫팬츠와 흰 색의 반팔 셔츠, 머리는 더워서 그런 것인지 한데 묶은, 포니테일이었다.
"어디 나가게?"
"응? 정미랑 영화본다고 했잖아."
"나가서 본다는 소리는 안 했잖아.. 난 또 집에서 DVD로 본다는 건 줄 알았지."
"어찌됐든! 어때? 이상하지 않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냐..
유리는 자세히 봐달라는 듯,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면서 입을 옷들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리가 입은 핫팬츠와 반팔 셔츠, 둘 다 유리의 늘씬한 팔, 다리를 드러내면서 약간 요염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으면 확실하게 말할테고, 무진장 바보 취급했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유감이다."
"뭐? 음... 아, 칭찬이구나! 뭐야! 빙 둘러서 말하기는!"
"됐고, 정미랑 나가서 영화 본다고?"
"그래! 오랜만에 정미정미랑 데이트야! 헤헤."
아주 신나셨구만. 한동안 일 때문에 같이 놀러다니기는 커녕 만나지도 못 했으니까 당연한 건가.
근데 잠깐만..
"....너, 나가서 뭐 사먹을 돈은 있어?"
"어, 어? 음... 그게..."
눈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이녀석아.
하긴 무리도 아닐 것이다. 일 때문에 보급품을 사야했던 일이 허다했으니까, 남겨둔 돈이 그다지 없는 게 정상이겠지. 할 수 없지.. 내 지갑을 빌려주는 수밖에. 누구한테 얻어먹기만 하는 꼴은 내가 못 보겠다. 잘 가라.. 내 PS V★TA... 언젠가는 사줄게..
"일단 아저씨 건강 주스 마시고 나면 정미랑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 너도 같이 가려고?"
"그럴리가 있냐. 난 집안일도 해야하는데."
"아.. 그렇네."
누구 놀리냐. 조금 있다가 장도 봐야 하는데 영화 보러 갈 시간이 어딨어.
아저씨의 건강 주스가 다 만들어질 때 쯤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불길한 느낌이 드는 아저씨의 초록빛 특제 건강 주스가 5잔 놓여있었다.
이거 정말 건강 주스가 맞는 건가.. 마셨다간 건강은 커녕 한 번에 골로 갈 거 같은데.
"아, 동생. 왔군."
"이거 정말 건강 주스 맞아요? 이상한 거 넣은 건 아니죠?"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늘 마시는 거 보면 몰라? 그리고 이상한 걸 넣었다가는 유정씨한테 죽어."
...그렇네. 유정이 누나가 화내면 무섭긴 하지.
"그럼, 아저씨. 이것들 가져가서 애들한테 좀 나눠주세요."
"알았어. 그리고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라고."
여전히 투덜대며 건강 주스가 들은 잔들을 들고, 제이 아저씨는 거실로 향했다.
"얘들아, 이런 더운 날에는 건강이 제일이야. 특제 건강 주스 한 잔씩 마셔."
"아, 고맙습니다. 제이 아저씨."
"잘 마실게요, 아저씨!"
"저도 잘 마실게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거실에서 여성진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지간히 아저씨를 놀려먹는 게 재밌는가 보군. 실제로 재밌지만.
"세하야! 우리 슬슬 간다?"
"야, 야! 기다리라고 했잖아!"
쟤는 돈도 없으면서 어딜 나가겠다는 거야 진짜. 나는 뒷주머니에서 내 지갑을 꺼내고 유리에게 건냈다.
"내 지갑 빌려 줄테니까 팝콘이나 커피 마실 때 쓰고 와."
"뭐? 아니, 됐어~"
"너야말로 됐거든? 정미한테 얻어먹지 말고 가져가서 먹을 건 사먹고 해."
뭣보다 내가 얻어먹기만 하는 꼴을 못 보겠으니까 갖고 가라고. 다 큰 애가 얻어먹기만 하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 그것도 취직한 녀석이.
"......."
유리와 투닥대고 있자 정미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노골적으로 안쓰러운 눈빛을 보낼 정도로 내 처지가 불쌍하다는 거야?
"...뭔데?"
"아니, 그냥. 너 이제 완전히 얘들 엄마가 다 됐구나 싶어서."
"뭐라는 거야, 정미 너까지.."
소름끼치는 소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정미양... 저는 이런 속 썩이는 딸 가진 적 없다니까요..
"음.. 알았어, 그럼 조금만 쓰고 올게."
"5시 전까진 들어와라?"
"...너 진짜 얘들 엄ㅁ.."
"아니라니까!"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러냐. 아직 장가도 안 간 사람한테.
정미와 유리는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현관 문을 열고 나갔다. 아마 영화보다는 같이 보낼 시간이 기대되는 거겠지만.
거실로 돌아가자 기력 회복이 되었는지 다시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슬비와 TV를 키고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근데 이 아저씨가.. 신문을 읽을 거면 TV를 끄던가, TV를 볼 거면 신문을 나중에 읽던가 둘 중에 한 가지만 하라고 몇번을 말했는데..
"아저씨. 제가 몇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신문을 읽으실 거면 TV를 끄시던가, TV를 보실 거면 신문을 나중에 읽으시던가 하라구요. 저거 다 전기세로 나가요."
"동생, 눈은 신문을 보고 있지만 TV는 귀로도 들을 수 있다고. 낭비하는 게 아니야."
"말이라도 못 하면..."
더 이상 말해봤자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하기로 했다. 저정도는 전기세 얼마 안 나오니까 괜찮겠지.
정미도 유리랑 영화보러 갔겠다.. 이제 슬슬 에어컨을 꺼야겠군.
에어컨의 리모콘을 집고 전원을 끄려고 하니 슬비의 애절한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왜. 뭐. 손님도 갔으니까 끌 거야."
"이세하.. 아직 한 시간 덜 됐어."
시간을 확인했더니 확실히 1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55분 정도 지났지만 그래봤자 5분. 그냥 꺼버려ㄷ..
"이세하. 아직 시간 안 됐다니까?"
"......"
이 리더가 진짜... 보통 이런 일엔 의욕 없으면서 더위에 쩔어서 이러는 거야 뭐야.
그렇게나 더운 게 싫냐.
상관하지 않고 리모콘의 전원을 누르려고 하자,
"우읏?!"
이젠 아예 염력으로 리모콘을 뺏으려고 하신다. 아오! 이 망할 분홍 머리가!
"야, 이슬비! 너 진짜 이럴래?!"
"아직 시간 덜 됐다고! 말! 했잖아!"
오늘따라 얘 진짜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