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여전히 그의 주부생활은 고달프기 그지 없다.

Prile 2015-02-08 19


"야, 니들 늘어져 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내팽겨쳐져 있는 옷들이나 물건들 좀 치워."

"아... 조금만 있다가 치울게에에..."

"지금 당장 해. 곧 있다가 손님 온다며."

"세하 이 박정한 녀석아아아...."


수요일. 오전 10시 15분.

여름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 밖에서 매미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집에는 아침형 인간이지만 여름에 약해서 늘어져 있는 유리와, 임무로 수업을 듣지 못한 만큼 친구의 노트를 빌려 공부를 하고 있는 슬비, TV를 보며 특제 건강 주스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가 한 명.

테인이는 잠시 유정이 누나와 외출한 상태다.

에어컨은 전기세가 많이 나가니 틀지 않았고, 대신에 선풍기를 틀고 창문을 열어두었다.

남은 지금 손님이 온다고 해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거늘, 거실에 있는 3명의 대화가 싫어도 들려왔다.

"아저씨이이.. 그 프로그램 재밌어요?"

라고 쇼파 뒤쪽으로 다리를 걸쳐서 늘어져 있는 유리가 말하자 아저씨답게 한 쪽 다리를 탁자에 걸치고 있는 제이 아저씨가,

"그냥.. 그럭저럭 볼만해. 그리고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불러..."

라며 쪄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TV 소리가 시끄러운 건지 슬비의 노트에 요점 정리를 하고 있는 손이 가끔씩 멈추고 있다.

보통 때의 슬비라면 "아저씨, TV 소리가 시끄러우니까 소리 좀 줄여주세요." 라든지, "TV 소리 좀 줄이시지 그래요? 아니면 나이를 드셔서 귀가 어두우신 거예요?" 라며 짜증을 내거나 독설을 내뱉을텐데 지금은 너무 더워서 그럴 여력도 없는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저번달에 썼던 전기세가 장난이 아닌지라 지금은 절약 중이다. 그도 그럴게, 나와 테인이, 슬비, 유리, 아저씨, 유정이 누나까지, 합쳐서 6명의 방에서 가뜩이나 전기세를 많이 잡아먹는 에어컨을 시도 때도 없이 틀어댔기 때문이다.

아, 거실에서도 틀었었다. 그렇게 써대다 보니 아무리 전원이 4급 공무원 이상의 대우라지만 현재 도시 복원을 위해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우리들이 받고 있는 돈으로는 가계가 아슬아슬하다는 소리다.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해주진 않을까, 하고 턱없는 기대를 하고 있자 유리와 슬비가 거실에서 힘 없이 걸어와서는 '여느 때처럼' 말했다.

"세하야... 딱 1시간만 에어컨 틀면 안 돼?"

"......."

"응? 제발~ 딱 1시간만~ 응? 응?"

"이세하.. 요몇일간 절약 꽤나 했으니까 1시간 정도는 틀어도 되지 않아..?"

2명의 처절할 정도의 부탁에 들리지 않게끔 칫, 하고 혀를 찼다.

확실히 요몇일간 전기세를 아끼긴 했다. 하지만 사실 전기세만이 문제가 아니다. 수도비도 문제다. 여름이다 보니 남성진들은 그렇다 쳐도 여성진들은 샤워를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로인해 전기세 다음으로 많이 빠져나간 것이 수도비. 가계를 담당하는 내 입장에서는 달가로운 상황이 아니다. 대부분이 전기세와 수도비로 나간다면 식비로 쓸 게 얼마 남지 않게 된다.

가뜩이나 여름이라 음식들이 상하기 쉬워서 골칫덩이라 미칠 지경인데 식비로 쓸 돈이 얼마 남지 않게 된다면 밸런스가 잡힌 식단을 제대로 짤 수 없게 된다.

"후... 알았어. 조금 있다가 손님 오면 그때 틀어줄테니까 참아."

"뭐어어? 올려면 아직 1시간이나 남았잖아아..."

"그, 그래.. 손님이 오기 전에 집을 시원하게 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

그야 물론 지금 틀어두면 손님이 왔을 땐 시원하겠지만, 손님이 택배기사라도 되냐? 용무만 마치고 바로 가게? 적어도 15분이나 30분 정도는 있을 거 아냐.

그럼 그 손님이 머무르고 있을 때까지 더워 죽을 듯한 표정으로 에어컨 틀어달라고 조를 게 뻔한데 지금 틀어줄 것 같냐.

"역시 안 돼. 손님이 오면 틀어줄테니까 1시간 정도는 참아."

"에에에에에엥....."

"우으..."

"자, 자. 너희들 계속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거실에 어지럽힌 것들 좀 치워. 그리고 아저씨한테는 발 올린 탁자, 제대로 닦아 두라고 하고."

"체에엣... 알았다구우우..."

"난 내 노트랑 펜만 치우면 돼.."

결국 에어컨을 지금 틀어달라는 것은 포기했는지 다시 힘 없이 거실 쪽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적어도 저녁은 맛있는 걸로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띵-동. 띵-동.

차임벨이 두 번 울리며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

"너희들 제대로 다 정리했지?"

"했다구우... 어서 나가보기나 해."

"어휴, 정말이지.."

누굴 닮아서 저렇게 늘어진 거냐 대체. 평소에는 아침에 워킹 갔다와서도 팔팔한 인간이 여름만 되면 저렇게 축 늘어지니 원..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손님도 더운 여름에 문 밖에서 기다리는 건 고문인지 빨리 나오라는 재촉을 하는 모양이다.

"네에! 지금 나가요!"

띵-동. 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띵동.

"아 쫌! 나간다고!"

덜컥.

"나간다니까 뭘 그렇게 누르는 건데?"

"그럼 처음 벨 눌렀을 때 나왔으면 좋았잖아. 거기다가 이런 더운 날에 집에 오라고 한, 지금쯤 축 늘어져 있는 애한테 따져."

"알았으니까 그만 화내고 들어와, 우정미."

"여태껏 안 들여보내 준 건 너거든?"

"미안하다 그래.."






정미를 초대한 건 유리다.

문자로 집이 무너져서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유니온에서 마련해 준 집에서 <검은 양> 팀이 '한 집'에서 지낸다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남자들과 한 집에서 지낸다는 게 걱정이 되서 오늘 이렇게 행차하셨다고...

아무리 남자들이라고 해도 말이지.. 13살의 남자애랑 나, 아저씨가 한 명. 아저씨는 유정이 누나가 있으니 문제 없고, 테인이도 별 걱정이 안 될테니까.. 결국 내가 뭔 짓을 저지르진 않을까, 하고 오셨단 말씀이신군요. 네.

그렇게 신용도가 낮냐..

"그걸 이제 깨달은 거야?"

"정미정미야~ 어서와~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그런 것 치고는 쇼파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에헤헤..."

뭘 웃고 있냐.. 축 늘어진 게 마치 곰이네 곰. 밥 먹고 늘어지고 밥 먹고 늘어지고 하는데 저런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놀랄 따름이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나 더운데 에어컨도 안 틀고 뭐하는 거야?"

"저번달에 시도 때도 없이 틀어서 전기세가 장난이 아니게 나왔거든? 그래서 절약중이다. 손님이 왔으니 틀긴 할 거지만."

"난 그다지 상관 없는데. .....빨리 안 틀면 쟤는 진짜 녹아버릴 것 같으니까 틀어.."

"....어."

쇼파에 축 늘어지다 못해 진짜 녹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슬비까지 책상에 엎어져서 땀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저씨는... 너무 더운 나머지 기절한 것 같다.

그래도 별 수 없어..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지 않으면 가계가 위험해..


"일단 근처 빵집에서 케잌이랑 팥빙수 좀 사왔어. 저렇게 축 쳐져 있을 게 뻔하니까."

"진짜 살아난다.. 고마워."

"딱히 너만 먹으라고 사온 것도 아니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알았어, 알았어. 고맙다."

"....필요 없다니까."

그러면서 왜 얼굴을 약간 붉히시나요 정미양.. 말하면 맞을 게 분명하니까 다물 거지만.

"세하야! 빨리 에어컨! 에어컨!"

"그전에 창문부터 닫아. 시원한 공기 빠져나가니까."

"옛서!"

에어컨 튼다는 걸 알고 나서 생기가 넘쳐나네. 아까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주제에..

창문과 2층에 있는 방의 창문들을 닫고 에어컨의 전원을 켰다. 창문을 닫고 방문을 열어두면 방 안은 조금은 시원해지겠지.

나는 정미가 가져온 케잌을 주방에 가져가서 유정이 누나와 테인이의 몫을 남겨두고 음료수와 아저씨가 마실 건강 주스, 접시와 포크를 가지고 거실로 향했다.

이미 거실에서는 팥빙수를 비비기 시작한 모양이다. 시원한 게 눈 앞에 있어서 그런 건지, 더위에 맛이 가서 그런 건지 팥빙수를 비비는데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니들 그러다가 옷에 튄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긴 개뿔이. 나중에 빨래하고 나서 안 지워져 있으면 나보고 지워달라고 할 거면서 무슨.

"에휴.. 됐고, 접시랑 포크나 옆으로 돌려."

"오오! 케잌이다 케잌!"

"아저씨! 아저씨도 일어나서 케잌 좀 드세요."

쇼파에 누워서는 골골대고 있는 아저씨는 나이가 들어보이다 못해 할아버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난 단 건 됐어, 동생... 그리고 형이라고 불러.."


다 죽어가시면서 저 소리할 기력은 있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저씨 몫은 따로 챙겨두는 게 좋겠네. 나중에 유정이 누나랑 같이 드시라고 해야겠다.

유리는 정미가 같이 있어서 그런지 축 늘어져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여느 때처럼 활발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얘들 진짜 부부인가.. 같이 있기만 하면 활발해지네.

슬비는 에어컨으로도 부족한 건지 선풍기를 가져다 놓고 바람을 쐐고 있었다. 슬비도 평소의 과묵한 표정은 보이지 않고 시원한 바람을 맞아 행복하다는 얼굴을 짓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있으면 좀 좋냐.


"우으-! 맛있어! 이 시원한 바람! 맛있는 케잌! 정말 최고야!"

"또, 또 오버한다."

"그치만~ 진짜인 걸 어떡해~"

"네에, 네에. 알았으니까 흘리지 말고 먹어."


......쟤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겠지? 에어컨 자주 안 틀어준다고 비꼬고 있는 건 아니지?

왜 이렇게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한 말만 하냐..


"하아.. 유리야, 좀 제대로 먹어."

"응? 왜 그래?"

"뺨에 묻었잖아. 기다려, 닦아줄테니까."

"헤헤, 고마워 슬비야."

"......"



....정미 양? 왜 갑자기 눈가가 찌푸려지시는 거죠? 무섭습니다만..


"야, 서유리. 너 이쪽 뺨에도 묻히고 있잖아. 제대로 좀 먹어."

"응? 이쪽?"

"그래, 이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수건으로 유리의 뺨에 묻은 크림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약간 흡족한 듯 정미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 정미정미가 최고라니까~!"

유리는 곰 인형을 안듯, 정미를 끌어안았다.

"뭐, 뭐하는 거야!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뭐 어때~ 괜찮잖아!"

"안 괜찮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전혀 발버둥치지 않는 건 왜죠.. 과연 백합 플래그 마스터 서유리.. 무섭다..













"케잌이랑 주스도 다 먹었겠다, 슬슬 치워볼까."

"아, 나르는 거 도와줄게."

"됐어, 됐어. 손님은 그냥 앉아 계세요."

" ! "

뭔가 깨달은 듯, 유리는 쇼파에 앉은 정미 옆에 따라 앉았다. 

저 곰탱이가.. 누가 속을 모를 줄 아나.


"일어나세요. 넌 손님이 아닙니다."

"아야야야야! 알았어, 알았어! 나를게! 나른다구!"


유리의 뺨을 꼬집으며 접시와 포크를 들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거지는 내가 할테니까 넌 나르는 것만 도와."

"알았다니까.. 세하 이 계모.."

"누가 계모야, 누가!"


난 너같은 딸 가진 적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녁까지 먹이고 보내야겠다. 일 때문에 자주 못 만났을테니까, 가능하면 오래 같이 있고 싶겠지.


"정미야."

"응?"

"기왕 온 거 저녁 먹고 가."

"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애들이 너무 더워해서 저녁에는 맛있는 걸로 많이 준비할려고 하는데 음식이 남을 것 같아서 그래. 좀 도와주라."

"...뭐, 그런 거라면야. 알았어. 먹고 갈게."

"진짜야? 정미정미야~ 그럼 저녁 먹기 전까지 같이 영화라도 보자!"

"그래, 그래."


되게 좋아하네. 저녁 먹을 쯤이면 테인이랑 유정이 누나도 돌아올테니까 조금 있다가 장보러 가야겠다.




2024-10-24 22:22:5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