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이 경정의 은밀한 사생활 -1-
stdioH 2015-02-07 3
신서울 한복판을 차지하고 나타나 재앙을
부를 뻔 했던 푸른 짐승이 쓰러지고, 강남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발령받자마자
오만 장소를 다 들쑤시고 다닌 탓인지, 검은 양 팀은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이것은 그러한 일상의 한 조각에 대한
이야기다.
-
강남으로 발령받고
난 뒤 여유가 없어 풀지 못한 짐들이 쌓여있는 방. 검은 양 팀의 사무실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방은 사무실이라기 보다는 동아리 방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바빠서 풀지 못했던 잡다한 짐들은 이제 풀지
않는 짐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바닥에 묻어있는 때라던가, 보이지
않는 구석에 쌓인 먼지들은 이 방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창 밖으로 먼지 낀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고, 이따금씩 깜빡이는 형광등은 실로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러한 너저분한 방 안엔, 그런 분위기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외양의
소녀가 한 명, 소년이 한 명.
-타닥 타닥 탁-
소녀는 햇살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벚꽃색의 머리카락 끝을 꼬며 노트북 화면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씩 타자치는 소리가 소녀가 내는 소리의 전부. 하지만 옥색의
눈빛만은 노트북 액정의 흔들림에 따라 다채롭게 변하고 있다. 슬픈 눈빛을 했다가도, 이내 기뻐하고, 다시 분노하기도 한다. 물론 그녀에게 감정 조절 장애가 있다거나 하진 않다.
-탁 타닥 탁 탁 타닥-
까만 머리를 한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용 게임기에 집중하고 있다. 격렬하게 버튼을 누르는 소리나, 이따금씩 신음하는 소리가 소년이 내는 소리의 전부. 하지만 조금 날카로운 눈빛만은 게임기 액정의 흔들림에 따라 다채롭게 변하고 있다. 분노했다가도 이내 기뻐하고, 다시 슬퍼하기도 한다. 물론 그 또한 감정 조절 장애가 있진 않다.
실로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이건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하나 없다. 투명한 경계를 둔 채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 마냥, 둘은 서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은.
-덜컥! 쾅!-
“여! 나왔숑! 점심 먹자구!”
마침내, 문을 세차게 걷어차고 들어오는 또 다른 소녀에 의해 깨진다. 윤기가 흐르는 긴 흑발 머리를 흩날리며 난입한 소녀는 하늘 만큼이나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서유리… 문을 다 부술
셈이야?”
분홍색 머리의 소녀는 난데없이 쳐들어 온 소녀를 보며 한숨을 쉬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뽑았다. 그녀의 핀잔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유리는 소녀에게 들러붙었다.
“오옷! 슬비찡~ 뭐 하고 있었어? 내 생각?”
유리는 아저씨 같은 미소를 지으며 슬비의 뒤에 다가가더니, 이내 끌어안으며
슬비의 볼에 자기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슬비의 얼굴이 이리 저리 흔들렸고, 난처한 듯 얼굴을 붉히며 슬비는 유리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윽! 잠깐… 그만… 야 이세하! 얘
좀 말려봐!”
도저히 밀리지 않자 슬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게임기를 만지던 소년에게 화살을 돌린다.
“뭐... 사이 좋아 보이네. 자리 비켜줄까?”
소년은 게임기를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유리가
세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고, 소년은 유유히 문 쪽으로 향한다.
“야! 이세하! 너 내 말 무시해?! 아.. 잠깐.. 거긴.. 앗!”
“우헤헤… 잔뜩 귀여워
해 줄 테니까 그렇게 떨지 말라구?”
문을 열려던 세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둘을 본다. 거의
유리가 슬비를 잡아먹으려는 듯한 형국이 되자, 세하는 못 이기겠단 표정을 지으며 둘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야 서유리. 적당히 하지
않으면 슬슬 위험… 어어? 자 잠깐! 야! 이슬비!”
슬슬 떼어놓을까 하고 유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순간, 세하는 주머니에
있어야 할 게임기가 눈 앞에 떠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도 슬비 특유의 분홍빛 위상력이 휘감긴 채로…
“우히히히! 상냥하게 해준다니까!”
유리는 자신의 머리 위에 뭐가 떠다니는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세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슬비를 보며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아쉽게도 슬비에게 그걸 눈치챌 만한 여력은
없어 보였다.
“서유리 너어… 적당히… 좀!!”
-쾅!!-
“으갹!”
“안돼!”
좁은 방 안에, 둔탁한 타격음과, 아픔으로
인한 비명, 그리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파괴당한 소년의 절규가 동시에 울렸다.
-
“자. 뭘 잘못했죠? 서유리 양?”
슬비는 머리에 혹이 난 채로 무릎을 꿇은 채 베실베실 웃고 있는 유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세하까지 덩달아 무릎을 꿇은 채 억울하단 표정으로 슬비를 보고 있었다.
“애초에 난 말리려고 했다구.. 근데
어째서 나까지…”
세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리는 곧바로 손을 들며 저요 저요
하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넵! 리더에게 애정 표현을
너무 격하게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슬비가 되묻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리는 말을 이어나갔다.
“다음부터는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곳부터 천천히 진도를 나가야겠다고.. 아코!”
“야… 야! 좀 조심해서 다뤄!”
여전히 세하의 게임기는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고, 지금 서유리의 머리에
두 번째 혹을 낸 참이다. 슬비는 한숨을 쉬며 미간을 잡았다.
“친구…로 대해주는 건
나도 좋지만… 유리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나도 리더로서 위엄이 안 선단 말야… 조금 유의해주지 않을래?”
“응! 그러지 뭐!”
말이 끝나고 대답하기까지 딜레이가 없었다. 슬비는 고심했으나 답이
나오질 않으니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보다! 끝났으면 밥
먹으러 가자! 벌써 1시야!
뱃 속이 텅텅 비었다구.”
“유리 너… 내말 듣긴
한거니?”
“응 물론이지! 그래서
슬비는 뭐 먹고 싶어? 아, 세하 넌 또 라면이지?”
유리는 헤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슬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면서도 슬비의 기분은 마냥 나빠 보이지만은 않았다. 세하는 못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포기해. 유리를 타이르려
하다니 백 만년은 이르니까.”
“그런 모양이네… 그보다, 밥 먹는 건 좋은데 J씨랑 테인이는?”
슬비의 질문에 유리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하더니,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J 아저씨는 숙취로
오늘 쉰대! 테인이는 학교에서 현장학습이라 못 오고.”
“…허, 아무리 그래도
숙취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는 걸…”
잔소리에 대한 열정을 홀로 태우고 있는 슬비의 뒤에서 세하가 나오며 문을 닫았다.
“결국 오늘은 우리 셋 뿐 이란거지?”
“그런 모양이야. 열쇠는?”
“여기. 줄까?”
방문을 잠근 뒤 세하가 열쇠를 보이자, 슬비는 고개를 젓곤 말했다.
“네가 갖고 있어. 가자.”
“얼른 가자구! 뱃가죽에
등에 달라붙겠어!”
“예이 예이.. 간다. 가.”
재촉하는 유리에게 끌려가는 슬비, 그 뒤를 여유로이 따라가는 세하. 검은 양 팀은 오늘도 평화롭다.
-
“소영 언니~! 저희 왔어요!”
“아, 어서와. 너희들이구나? 오늘은 언제 오나 했어.”
유리는 붙임성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옆으로 나란히
슬비와 세하가 앉는다. 강남의 말렉 사태 이후로 사실상 검은양의 두 번째 아지트로 굳어진 이곳은 포장마차
여우네. 현역 공대 아름이의 솜씨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맛과, 가게
주인인 소영의 뛰어난 비주얼 덕분에 장사는 그럭저럭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오늘은 조용하네요?”
세하가 주변을 살펴보며 넌지시 물었다. 평소라면 송은이 경정이 이끄는
특경대 대원들로 인해 붐빌 포장마차건만, 오늘은 검은양 팀 외엔 별다른 손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은이 언니나 채민우 경감님이 안보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슬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야. 휴우, 송 경정님이 안 계시니 생각보다 수입이 안 나오더라구. 아직 등록금
채우려면 멀었는데… 아, 늘 먹던 걸로 주문할거지?”
“네. 부탁드려요.”
소영이 김밥이나 순대, 컵라면 등을 준비하는 동안 세하는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그만두고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슬비는 화면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언제 철들래?”
“남이사. 알바냐?”
아무래도 좋다는 듯 게임에 집중하는 세하를 내버려두고, 슬비는 아까부터
조용한 유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니, 이상하다 싶어서. 은이 언니는 그렇다 쳐도 채민우 경감님도 안 계시다니 별일이네.”
“그건 그래. 채민우 경감님은
땡땡이 치실 분이 아니니까.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의 이야기에 끼어들며 소영은 주문 받은 메뉴들을 내려놓았다.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언니?”
슬비가 묻자, 소영은 미묘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송 경정님이 이 근처를 지나가는 걸 보긴 봤었어. 근데…”
“그런데?”
슬비와 유리가 반응을 보이자, 소영은 더 미묘한 표정을 짓고는 대답했다.
“처음엔 송 경정님이 아닌 줄 알았거든. 왜냐면, 그 때 송 경정님. 치마
입고 화장도 했었으니.”
“….”
잠시의 정적이 돌았다. 게임에 집중하고 있던 그 이세하 조차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신호로 셋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에에에에???”
-
“연애야! 드디어 은이
언니가 남자를!”
“아서라. 순대 튀잖아.”
씹고 있던걸 채 삼키기도 전에 유리는 흥분에 차서 눈을 반짝이며 자신있게 외쳤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세하는 라면을 후루룩거리다 미간을 찌푸리며 유리를 노려보았고, 물론 유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연애라니… 그 은이 언니가?”
슬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세하는 입에 있던 면을 마저
삼키곤 대꾸했다.
“그럴 리 없잖아. 소영
누나가 잘못 봤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은이 누난데.”
“하.하.하. 이세하군. 옛 말에
땐 굴뚝에 산타 나온다는 말도 있다구?”
“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겠지…”
“그거나 그거나!”
유리는 이미 완전히 흥분해서 폭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말려서 들을
상황이 아니라 판단한 세하는 슬비에게 넌지시 말했다.
“어이, 리더. 저 녀석 좀 말려봐.”
슬비의 대꾸가 없자, 세하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컵라면 컵을 내려놓고
슬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하는 보고 말았다. 슬비의 눈동자
너머로 수 많은 드라마의 장면들이 겹쳐지고 있는 것을… 그리고 숨길 수 없이 얼굴에 드러나는 여고생
특유의 남의 연애사에 대한 흥미를…
“너도냐! 너도 관심 있는거냐!”
“과과과과관심이라니! 그런
거 아냐! 나는 다, 단지 그냥 그 뭐냐, 검은 양 팀의 리더로서 말이지, 어, 그래! 우리와 협력 관계인 특경대의 대장님이 혹시 지나친 그쪽으로의
치우침 때문에 일에 소홀히 하지 않을까 걱정되서 그런 것 뿐이야!”
“안되겠군… 이 녀석들은
틀려먹었어…”
세하는 피로감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송은이 경정이 치마를
입고 화장한 사건에 대해 망상을 펼쳐나가는 두 여고생을 지켜보던 세하는 직감적으로 일이 귀찮아질 것을 느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사를 하든 말든 맘대로 해. 난
게임이나 하련다.”
“그렇다는데요! 리더. 이 놈을 어떻게 할까요!”
유리가 재빠르게 세하의 앞을 가로막으며 웃었다. 세하는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어야 할 휴대폰은…
“멈춰, 이세하. 검은양 팀은 지금부터, 작전명 ‘송은이
경정의 은밀한 사생활’을 수행하게 들어갈 거니까.”
슬비의 옆에 처량하게 떠서 살려달라는 눈빛을 주인에게 보내고 있었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항복했다는 듯 두 손을 들고서 이세하는 눈물을 삼켰다. 버닝타임 이벤트가 곧 시작이건만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어찌 하지도 못한 채로 슬퍼할 뿐이었다.
“근데… 왜 작전 이름이
저 모양이야?”
세하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슬비를 보았다. 슬비는 그제서야
얼굴을 다소 붉히며 시선을 외면하고 대꾸했다.
“요즘 보는 드라마 이름에서 따온 것 뿐이야!”
“거 참 별게 다 있네… 이상한
드라마 아냐?”
“이상하다니! ‘여교사의
은밀한 사생활’은 너한테 무시당할만한 드라마가 아니거든!”
말하는 본인도 귀까지 빨개져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주장해대니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었다.
“자 자! 얼른 가자구! 은이 언니의 농밀한 사생활을 밝히러!”
시시한 말다툼을 이어가고 있던 둘의 등을 떠밀며 유리가 말했다.
“은밀한 사생활이야!”
“그거나 그거나!”
그렇게 급조된 탐정단 검은양은 사건 조사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된 것이다. 딱
한 사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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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1한 거 기대하고 들어오셨으면 진겁니다.
슬비한테 은밀한 사생활이라는 말을 시켜보고 싶어서 쓴 건데 길어졌네요.
이미 다 썼지만 스크롤 긴거 안 좋아 하시는것 같길래 끊어서 올립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올려야겠다 생각나면 올리겠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