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필연 - 02
비랄 2017-02-11 2
신뢰받는 다는 것은 가장 큰 힘을 가짐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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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종 출현 이후의 강남. 도로는 갈라지고 구멍이 뚫렸으며, 건물들은 철거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무참히 박살났다.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평소의 강남과는 명백히 다르다고 말이다.
평화의 도시 강남. 강남 담당의 어느 특경대 일원의 말이다. 차원종 출현에 대응하는 경찰이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강남은 안정적이었다. 왜냐하면 강남은 E급 차원종도 거의 출현하지 않을 정도로 위상 변곡률이 낮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 차원종 출현 상황은 빠르게 진압되고,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상이다. 보통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달랐다. 차원종들은 E급을 넘어서 D급, 그에 이어서 일반인은 대항하지 못하는 C급마저 출현했다. 거기에 그 상위 개체인 B급까지 출현하니 피해는 확대. 강남을 담당하는 신규 클로저 팀이 활약하지 않았다면 도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지니 세간에선 강남 사태에 대해서 뜨겁게 이야기 중이다. 요컨데..
-강남에 C급 차원종 출현! 이제 강남도 위험하다!
-강남 사태에서 활약한 클로저 팀 '검은양'은 구로에 임무 수행을 위해 파견. 대신 강남을 담당하는 클로저는 A급 클로저....
-강남 사태의 진상 규명 시급. 유니온은 아직 대답이 없어...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앞으로 1시간이면 대한민국 전역에 퍼져나가리라. 그리고 이 일은 반드시 해외에도 알려질 것이다.
그 이유는 유니온을 노리는 언론이다. 비록 UN산하 단체라고는 하지만, 유니온은 클로저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그 영향력은 세계 최고 레벨이며, 당연히 언론에선 유니온을 주목하고 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유니온에 관련된다면 최고의 화제거리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유니온에 있어서 심각한 일이다. 강남 사태에서 일어난 차원종 출현 사태는 유니온이 측정한 위상 변곡률의에 의문을 가지게 했으며, 나아가서 그 사태를 해결한 클로저 팀은 미성년자로 구성된 것이다.
앞으로는 더 심각한 일이 있겠지만 지금 언론에선 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거리다. 아직 외국으로 이 일이 퍼져나가지 않은게 행운이리라. 그랬다면 유니온의 위상은 급락할게 분명하니 말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면 아직 유니온도 이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다. 신서울에서 제대로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이 이유라면 이유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유니온 총본부에서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 그냥 한국에서 좀 일이 일어났고, 신서울 지부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 이게 총본부의 생각이다.
총본부가 이런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결국 그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은 자신들의 이권이다. 그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거의 이런 분위기로 넘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류의 수호자인 유니온이 이런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뭐라고 할까? 어차피 그들이 저렇게 살고 있는 한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것이 안다면 문제는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클론 개발 현황은...
-양산 플랜트에 대해서 의견을...
-최근 진행 중인 드레인 프로젝트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가 어느 스마트폰의 액정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 화면에 나온 사람들은 전부 유니온 총본부의 간부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전부 특급 기밀이다. 당연히 평범한 스마트폰에서 이런 내용이 비춰질리는 만무하다.
"크크큭... 잘도 떠드는 구만."
정정. 평범한 사람의 스마트폰에서 비춰질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 폰의 주인은 평범하지도 않으며, 하물며 인간도 아니다. 게다가 더욱 이상한 것은...
"그럼 이번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음? 이제 끝났나?"
그가 이 내용을 바로 눈앞에서 찍고 있다는 것이다. 유료 어플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면서 말이다.
"수고하세요~"
회의실 문이 열리고 촬영자를 제외한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다. 능글맞게 인사를 던지지만 대답은 없다. 마치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양 그를 지나간다. 이윽고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회의실의 문은 굳게 걸어 잠겼다.
"햐~ 뿌리고 싶다!"
쵤영자 안노운은 웃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그는 회의실에 처음부터 존재했다. 단지 아무도 그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을 뿐. 이렇게 그가 이런 회의를 촬영한 영상 숫자만 못해도 수백은 넘는다.
유니온은 물론이고, 미국의 백악관이나 펜타곤, UN, 거기에 몇몇 기업들에 관한 자료도 있다. 그가 전부 발품해서 수집한 것들이고, 저 숫자도 단지 영상만 세어본 것이다.
문서나 다른 기밀 데이터를 세어본다면 도데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하나같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안노운의 신변이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되는 기밀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하지만 안노운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확신하고, 또한 그럴 것이다. 안노운이란 사람은 지금 한국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는 사람 중에서 하나일 뿐. 미국에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도 마찬가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을 뿐.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는 단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안하고 싶은 것은 안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매일 바뀐다. 이런 그를 알 수 있는 방법따윈 없다.
"어떤 세상인지 확인했으니까.. 이제 슬슬 일을 벌여볼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흉악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봤다. 액정에 비춰진 것은 그가 시작하고 싶은 '일'의 중심 역할을 할 사람들이다.
검은 머리의 불꽃은 다루는 남성, 공중을 날아다니는 아담한 핑크 머리의 소녀,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기를 휘두르는 소녀, 그리고 저 셋과 어울리지 않는 연상의 백발남과 연하의 창술사도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를 몸에 뒤집어 쓴 파란 청년, 알에서 깨어난 소녀, 가면을 쓴 여성, 죽어가는 은발의 소녀와 그 옆에서 울고있는 남성까지.
계속 이어진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말이다.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히고,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정밀하다. 만약 그가 보는 것을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으리라.
운명이라고.
"춥겠지만 이때가 좋겠군.. 그럼 여기서 부터 꼬아볼까?"
운명을 보는 자는 단지 원할 뿐이다. 이야기에 발을 들이는 것을. 그리고 즐거워 한다. 그렇게 이야기가 자아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