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20-2. 비극의 종결 -
Articulus 2017-02-08 4
※ 위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 20-3
몇 번이고 부딪치는 검날이 드디어 교차했다.
나와 소름돋을 만큼 똑같이 생긴 녀석과 나는 검날 사이로 매서운 시선만 교환하면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꼴에 제법인데, 이세하."
놈은 나를 비웃었다. 나는 놈의 장난감이 아닌데, 이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다.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서 소리를 지르며 나는 있는 힘껏 밀어쳤다.
끼잉하는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놈과 나의 사이에 거리가 생겼고, 나는 곧바로 공격을 이어갔다. 놈의 바로 앞까지 빠른 속도로 접근하여 놈의 멱살을 낚아챈 뒤 들어올리고, 놈을 향해 장전된 두 발의 탄환을 쏜다.
쾅쾅 하는 소리는 일반적인 총탄이 발사되는 소리라기보다는 마치 포탄이 연이어 발사되는 소리와 더 유사했다. 어지간한 차원종들은 이렇게 근거리에서 발사된 총탄에 곧바로 스러졌고, 놈 역시 그러할 것이다. 총탄들이 쏘아지면서 만들어낸 반동은 나를 힘껏 뒤로 밀었고, 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끝이다.
연기가 자욱한 포격의 끝에서 놈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긴 것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끄아아악!"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나는 비명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내 공격에 당하지 않은 걸까, 대신 놈은 무방비한 상태로 있는 내 등을 크게 그어버린듯 했다. 등 쪽에서 시작된 베인 상처의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간다. 숨을 헐떡이며 나는 곧바로 일어나 놈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내 검날은 허공을 베었고, 놈은 저만큼 뒤에서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이래서야 누가 진품이고 모조품인지 모르겠는데?"
"닥 쳐, 닥 쳐, 닥 치라고!"
분노가 폭발한다는 느낌은 아마도 이런 느낌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느껴지던 통증이 일순간 사라졌고, 나는 어느새인가 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접전이다.
캉, 까앙, 키깅, 카아앙!
몇 번이고 나와 놈은 서로의 검격을 받아내며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어차피 이곳은 의식세계, 체력의 한계 따윈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저 둘 중 누군가의 의지가 더 큰지에 따라 이 싸움의 결말은 정해질 것이다.
공격은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해나가고 있다. 놈은 이따금씩 내 공격을 흘려내고 공격해 들어올 뿐, 대체적으로는 방어만 해내고 있다. 너무나도 놈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지는게 분하다. 분해서 더 빠르게, 미 친듯이 놈을 향해 검격을 쏟아놓는다.
"헛수고야, 이세하. 너도 알잖아, 이미 이 몸은 내거고, 너는 들러붙어있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내가 기생충? 누가 할 소리.
이 몸은 내거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죽을 때까지 이 몸의 주인은 나다. 기생충은 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벌레와 같은 녀석, 정말로 혐오스럽다.
"기생충은 기생충답게 행동하라고!"
"윽!"
놈에게 공격하느라 미처 방어는 신경쓰지도 못할 때, 놈은 나를 발로차서 넘어뜨렸다. 그리고 곧바로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려찍었다. 다행히도 알아채고 옆으로 굴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 검날에 나는 두동강이 나고 말았으리라. 물론 이곳 의식세계에서 생각으로서 존재하는 그대로 소멸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등 뒤의 통증은 이곳과 현실이 그다지 다른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의 죽음은, 정말로 이세하가 완전히 죽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대로 놈에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나의 이성이 소리치고 있다.
"죽기싫으면 더 발버둥쳐봐! 이래선 재미없잖아!"
공세의 주도권은 이미 놈이 가져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쏟아놓고 놈이 방어만 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뒤바뀌어 놈은 공격을 하고 나는 방어만 해야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놈의 공격은 내가 쏟아놓았던 공격과는 달리 강하고 섬세했다. 검사로서 갖추어야할 섬세함의 측면이 결여된 채 있는 힘을 모두 쏟아넣는 식의 공격만 퍼부었던 나와는 분명히 다른 공격이다. 이 정도의 공격을 할 수 있으면서도 방어만 하고 있었던 건, 나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해서였던 것일까.
"딴 생각하지마!"
까앙!
손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을 담은 일격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내 무기를 저멀리 날려버렸다. 내 뒤의 어딘가에 푹 하고 무언가가 꽂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완전히 비무장상태가 되었고, 공격을 못하는 것은 물론 놈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 외에 방어할 수단이 없어졌다.
나는 놈에게 눈빛으로나마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놈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듯 하다. 놈은 나를 패배자로 인식하고 잔뜩 기고만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무척이나 거만한 표정이라, 나의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역겹다.
"게임 오버."
게임에서 승리한 후에나 하던 내가 읊던 말을, 톤까지 완벽하게 흉내내어 놈이 말한다. 그리고 검 끝을 나에게 겨누며 놈은 천천히 나를 향해 거리를 좁혀온다.
나는 그저 뒤로 조금씩 물러나며 놈과의 거리만 유지해나가는 게 고작이다. 이대로 무기가 떨어진 곳까지 쭉 물러나서 다시 무기를 집어들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싸움을 이어갈 수 있겠지만, 그 때까지 놈이 나를 가만둘지가 의문이다.
"그래. 검을 잡기 전에, 내가 널 죽인다."
생각이 완벽히 읽혔다. 역시나 녀석은 나의 생각을 읽고 있는게 틀림없다.
반면 나는 놈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다. 몸의 의식의 주도권이 놈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너무나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분전한 것일까.
놈은 나를 향해서 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 눌려 나도 모르게 더 빨리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몇 발자국 그렇게 걸어가더니 나는 결국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진 나를 보며 놈은 웃었다.
"아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그게 너야, 너라고 이세하! 언제나 자기 때문에 스스로 실패하고 말지! 너란 미물은 그것밖에 안되는 거야. 알겠어?"
미물. 하찮은 존재.
그게 나라고?
"그래. 넌 미물이야. 그러니 더 고등한 나에게 패배해서 죽는게 이치에 맞아."
놈의 말을 듣자마자 약육강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자연의 법칙은 약육강식이다. 인간은 약육강식을 두려워했기에 법을 만들었고, 법에 의해 약자를 보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은 본성과 같은 것이어서 상호동의된 일개 문장 따위가 사람의 본능에 끌린 행동을 규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좋든싫든 인간 사회에는 여전히 약육강식이 남아 있다.
나는 이런 약육강식이 싫다.
차원종의 침공으로 인해 힘없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갔음을 엄마로부터 듣고 자랐던 나는 약육강식이란 절대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야만적인 법칙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원하지 않았던 위상력을 물려받은 나였지만, 무고한 인명(人命)을 지키는 숭고한 사명이 클로저에게 있음은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놈의 생각은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녀석에게 나의 몸을 넘기는 것은 죽어도 싫다.
"싫으면 어쩔건대? 너 따위에게 막을 힘이 있어? 인정하고 받아들여, 이게 진실이야."
진실. 그래, 이게 진실이다.
받아들이기 싫은 진실. 그것은 나는 놈에게 패배해서 죽음을 맞이하고, 놈에게 영원히 몸을 넘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죽는게 두려우니까….
"네 녀석을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걸' 보여주겠어. 더욱 고통에 잠긴 채로 죽어가는 네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거든."
악취미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걸까?
곧 내 눈 앞에는 환상을 보는 것처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풍경이 펼쳐졌다. 눈에 너무나도 익숙한 애쉬와 더스트의 영지의 어느 곳, 그곳의 차가운 바닥에는 곳곳이 찢기고 불탄 옷을 입은 채로 몸 곳곳에 상처를 입은 슬비가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슬비야!"
"어때? 물론 네가 잠깐 방해해서 한 방에 숨을 끊어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로 피해를 줬어. 특수요원으로 승급해도 고작해야 이 정도지."
부르르 몸이 떨린다.
저렇게 크게 상처를 입히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지 못하면 어쩔건데?"
놈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넘어진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광경에는 놈에게 의식을 지배받는 내 몸이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상입은 슬비에게 천천히 검 끝을 겨누고 다가가고 있다.
"오히려 네가 방해해서 더 잘됬어. 이렇게 너의 얼굴을 찡그리게 할 수 있는 장난감이 저렇게 만들어졌으니까. 너의 무능함에 죽어가는 여자친구의 모습이 어때?"
"슬비를 가만히 놔둬!"
"아, 그 말을 들으니 더 고통스럽게 죽여주고 싶은데… 하지만 내가 몸을 준 너를 그렇게 하자니, 나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으니 참 어렵네? 그러니까,"
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놈의 얼굴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속삭였다.
"저 녀석을, 나처럼 만들어줄게."
"너…!"
"물론 너는 없겠지만, 저 녀석은 나 - 이세하 - 와 함께할 수 있어! 그러면 된거 아냐?"
슬비를 차원종으로 만들겠다고?
이 어둠 속에서 영원히 빛도 보 지 못한채 살아가게 한다고?
싫다. 내가 죽더라도, 슬비만큼은 살려야 한다. 슬비만큼은 살아야 해. 저 녀석은, 나 때문에 저렇게 되었는데, 나 때문에 차원종이 되게 할 수는 없어!
"무기도 없고, 위상력조차 쓸 수 없는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잘 보도록 해, 내가 녀석을 군단으로 만드는 걸. 넌 그 후에 죽일거야."
내 눈에 비치는 광경은 슬비의 바로 옆에 다가간 내 몸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는 모습이다. 아마도 내 몸 안에 있는 애쉬와 더스트의 위상력을 슬비에게 역으로 주입하려는 건가보다.
절대 안돼, 안돼, 안돼. 제발!
"끝이다, 이세하!"
"안돼!"
더이상 내 생명은 아깝지 않다. 놈을 막아야 한다.
그 생각만으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놈을 향해 있는 힘껏 몸을 박았다.
"크악! 이, 미 친 새 끼가!"
놈은 내가 무능하게 바라만 볼줄 알고 잠깐 방심한 모양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그때 놈을 공격할 수 있었고, 덕분에 놈은 들고 있던 건블레이드조차 놓치고 나와 같이 땅에 나자빠져 버렸다.
놈의 무기는 저멀리 날아가 땅 위에 눕혀져 있었고, 나와 놈과 완벽히 같은 거리에 놓여있다. 놈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아주 잠깐 교차했고, 곧바로 나는 무기를 집기 위해 뛰어들었다. 놈 역시 무기를 집기 위해 뛰어들었다.
거의 동시에 출발한 나와 놈은 팔을 쭉 뻗어 먼저 집어들기 위해 몸을 날린다.
그리고 그 결과, 무기를 더 먼저 집은 것은 내 쪽이었다. 무기를 집어들자마자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놈에게 검 끝을 겨누었다.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야, 이세하! 말로 해, 말로 하자고."
"수작부리지마…"
"아 참, 말로 하자니까."
놈을 죽이고 싶다. 슬비를 저렇게 만든 놈이 너무나도 밉다. 엄마만큼이나 소중한 그녀를, 저렇게 만들어버린 놈이 너무나도 죽이고 싶다.
놈의 생명을 끊어놓겠다는 의지만 가지고 나는 천천히 검 끝을 겨누었다.
그 때,
"바보같은 녀석!"
놈의 손에는 어느새인가 또 다른 건블레이드가 쥐어져있었다. 그리고 잠시 당황하고 있는 나를 찌르기 위해 있는 힘껏 팔을 내뻗었다.
"…!"
아주 잠깐, 검의 궤적이 읽혔다. 놈이 공격해들어오는 방향을 내가 읽어낸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내 의지가 놈보다 강해진 것일까. 하지만 궤적을 읽어낸 이상 공격은 무의미한 움직임에 불과하다. 나는 몸을 그저 빼는 것으로 놈의 공격을 흘렸고, 놈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과 함께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곤 재빨리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렇지만 이미 나의 공격은 그보다 앞서고 있었다.
푹.
무언가를 찌르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이 내 손 끝을 통해 팔로 전해졌다. 내 검이 놈의 몸을 관통한 것이다.
몸이 검에 찔린 놈은 피와 같은 것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의식 속인데도 이렇게 리얼할까.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는 절대 지지 않을거라고."
무언가를 관통하는 느낌은 무척이나 오랜만이다. 다시는 느끼기 싫은 감각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너무나도 상쾌했다.
나는 이 녀석에게 처음에 놈에게 했던 말대로 지지 않았다. 그리고 슬비를 저렇게 만들어버린 놈에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래서 뭐가 달라지는데!"
놈은 나를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달라지는거?
없을 거다. 유니온도, 데이비드도, 모두 마찬가지로 달라지는게 없을 것이다.
"내가 바꿔줄게, 너는 그저 보기만 하면 되잖아! 내가 손을 더럽혀주는데도, 그게 싫은 거야?"
"아니, 너도 바꿀 수 없어."
이제서야 깨달은 거지만, 힘을 얻는다고 해서 달라지는건 없는 것 같다.
상황은 강한 힘이 바꾸는게 아니라, 약해보이는 희망이 바꾸는 거였다.
바보같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슬비의 충고도 무시하고 이런 길을 걸었지.
"아니! 그건 네 착각이야!"
그래. 놈의 말대로 착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바보처럼 살 것이다, 이전처럼 일상에서 슬비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도대체 왜 이러는건데, 이세하! 복수도 변혁도 원하지 않는 이유가 뭔데!"
이유?
너무 간단해.
"넌 슬비를 아프게 했어."
그러니 이제 사라져버려, 차원종.
타앙.
나는 방아쇠를 그대로 남겼고, 곧바로 발사된 탄환이 놈의 몸 속에서 폭발한다.
그리고 놈은 완전히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본래 형체가 없는 허상의 녀석이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하는게 더 맞을까?
***
놈이 사라지자, 눈으로 보이는 환상은 어느새인가 환각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검은 공간에 갇혀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슬비의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다쳐서 꼼짝도 못하는 이 바보같은 녀석, 그렇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여기까지 찾아온 바보 녀석, 내 말은 절대로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너가 눈 앞에 있다.
"이세하…"
"응, 슬비야…"
나를 부르는 말에 나는 대답했고, 그녀는 무척이나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추측컨대 방금 전까지 그녀와 싸우던 놈의 인격 대신 본래의 '나'가 나타났기 때문이겠지. 나와 놈의 차이를 모를 그녀가 아니기에, 그녀는 분명히 나를 알아차린게 틀림없다.
"너, 세하 맞지?"
"응. 나야, 이세하."
"흑… 너, 돌아가면 가만 안 둘거야, 정말이니까. 흑…"
울고 있다.
내가 이렇게 되어버린 후론, 단 한 번도 내 눈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보여주지 않던 네가 울고 있다.
그래, 참아왔겠지. 나한테 약한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나 때문에 자기가 힘들어하고 있다는걸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이유로 울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제 울어도 돼, 내가 잘못했으니까. 모든게 내 잘못이니까, 이젠 마음껏 울어도 돼.
"그전에."
"흐흑… 응?"
"슬비, 네가 하려던 걸 해야겠지?"
"…"
슬비는 말했다, 자신의 위상력을 주입하여 나를 차원종의 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고.
나를 휘감은 '놈'의 인격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애쉬와 더스트의 힘은 남아있다. 이 힘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는 방법을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그것을 위해 이곳까지 단신으로 찾아왔을테고.
이제는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더 이상 너의 마음과 몸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복수를 하긴 싫어. 나도 지쳤으니까….
.
.
.
이세하는 이슬비의 바로 옆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움직이지 못하는 슬비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슬비가 못다한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게 끝나면, 그와 그녀는 마침내 비일상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거칠었던 두 사람의 호흡도 이제는 진정되었고, 이제는 헤어진 후로는 단 한 번도 가져보 지 못한 단 둘 만의 시간이 되었다. 적이 된 후로는 언제나 서로 마주보아야만 했지만, 마침내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하늘은 별조차 찾아볼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하였고, 그들이 있는 이 공간은 너무나도 고요하다.
"이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도 오랜만이지, 우리."
이세하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이다. 정말로 오랜만이다.
"이젠 정신좀 들어?"
"어… 미안해."
"할 말이 고작 그것 뿐이야?"
"그러면 내가 뭐라고 더 말해줄까?"
"… 애인한테 해줄 말이, 고작 그거야?"
"…"
가장 달콤한 말.
그녀는 그에게서 무엇보다도 이 말을 듣고 싶었다.
"사랑해."
"한 번 더."
"사랑해."
"영혼 없어."
그녀의 반응에 짧게 웃은 그는, 이마에 올려져있는 그녀의 손을 잠시 한 손으로 잡아 얼굴로 가져온 뒤, 그녀의 손등에 짧게 키스했다. 그리고 누운채로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사랑해."
싱긋 웃으며 하는 그의 말에, 그녀 역시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그들은 비극의 끝에 도달했고, 이제 자신들 앞에 펼쳐질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로 고집하다가 마침내 갈라져야만 했던 그들은 어느새인가 한 갈래 길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그들이었지만, 실상은 아직도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연약한 연애초보 소년소녀가 바로 그들이다. 잘못한게 있다면 어느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둘 다 서로에게 잘못한 것이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미안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은 사과가 아닌 사랑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나도 사랑해."
그의 말에 그녀 역시 같은 말로 대답해주었다.
더이상 그들은 적대적인 시선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들이 나누는 이 눈빛은 서로를 향한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안에서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 길어졌네?"
"어? 아, 이거? 위상력 리미터가 해제되면서 이렇게 되어버렸지 뭐야."
"잘, 어울려."
"정말?"
"응.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어, 더 추해진 나랑은 다르게."
"아니, 너도 정말 늠름해졌어, 세하야."
비록 2주 정도의 짧은 기간이라고 할지라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검은양 팀 모두를 바꿔놓았듯 그들을 바꿔놓았다. 외모는 물론, 그들의 성격과 생각까지도. 두 사람은 이 시련을 견뎌내면서 한결 더 성숙해졌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성장했음을 서로를 보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좋기에,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에, 그들은 이렇게 웃을 수 있다.
한참을 말없이 웃음만 짓고 있던 세하가 슬비의 손을 다시 자신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이 행동의 의미는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다. 이대로 자신이 남겨놓은 마지막 일을 완수하라는 것이다. 그의 뜻대로,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자신의 온몸을 돌고 이는 생명력이 그녀의 오른팔로 흐르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따스한 기운이 그녀의 손으로 뻗어나갔고, 맞닿은 그의 피부를 통해 그의 위상력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끅…"
고통스러운걸까, 그는 아주 작게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이를 물고서 아픔을 참아낸 그는 더이상의 고통을 밖으로 표출해내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걱정할까봐, 그것이 걱정되서였다. 아무리 그가 숨겨도 그녀는 그가 아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이기에, 그래야만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기에, 그녀는 마음으로 그를 응원했다.
계속되는 위상력의 주입은 이세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한 사람의 위상력이란 곧 그 사람의 영혼과 같다. 그래서 영혼 속에 담긴 여러 기억들이 저절로 스며 들어온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지나가는 그녀의 기억들을 찬찬히 담았다.
아카데미에서 자라나며 남 몰래 울었던 일.
누구보다도 더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우등생으로 성장해나가던 일.
검은양 팀에 처음으로 배속받은 후, 동료들과 만나 기뻐하던 일.
강남 거리를 걷다가 자신과 다투어 결국 펭귄인형을 사지 못했던 일.
아스타로트의 강남 침공으로 인해 충격에 빠졌던 일.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힘들어했던 일.
그리고 자신 때문에 울어야했던 일…
말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담겼다.
그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알아차렸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자신을 생각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애절하게 자신 밖에 모르는지를. 그녀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와닿아서,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을 통해서 그의 몸 한가득 주입되는 이 따스한 생명력에는 마치 엄마의 품 속과 같이 따뜻하게 다가와 얼음장처럼 시린 그를 포근히 감싸주는 그녀의 배려가 그대로 묻어난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쿨럭."
기침이 나왔다. 그리고 그는 무척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위상력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컬러가 다르며 서로 반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몸으로 들어온 슬비의 위상력과 자신의 위상력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고, 이러한 이유로 그의 몸은 저절로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기침이 나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
하지만 왜일까, 그녀의 위상력은 놀라우리만큼 자신의 몸 속에 주입된 재와 먼지 - 차원종 - 의 힘만을 찾아내어 몸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무척이나 뛰어나게 위상력을 컨트롤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은, 아마도 특수요원으로 승급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특히나 위상력의 농도와 양은 과거의 그녀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짙어지고 늘어났기에,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유니온에는 도저히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아마도 이렇게 그녀처럼 특수요원으로 승급한 동료들과 함께라면 데이비드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고 느껴질 정도다. 그 정도로 그녀의 위상력은 놀라웠다.
충분히 자신의 힘을 능가할 정도의 위상력이 주입되자, 그녀의 힘은 그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차원종의 힘을 감쌌고, 곧바로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흐억…! 하아, 하아!"
순간 그의 정신이 아찔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충격이 찰나의 시간동안 그의 온 몸을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그는 눈을 뜨고 그의 위를 바라보았다.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분홍색 빛이 무언가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몽글몽글 모여있었다. 슬비의 머리색과 매우 흡사한 색을 가진 빛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곧 흩어져버렸고, 대신 그것이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나타났다. 무척이나 뿌옇게 흐린 구름과 같은 잿빛의 색을 가진 무언가였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저것은 그의 몸에 주입된 애쉬와 더스트의 위상력이다. 그를 지금껏 좀먹고 지배해오던 바로 그것이다. 숙주와 같이 그의 몸 깊에 뿌리내려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빼낼 수 없었던 그것이 이렇게 눈 앞에 있는게 참으로 그에겐 신기했다. 그것은 이내 형체를 잃어버리고 흩어져버리더니,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주 오랜만에 순수한 이세하의 위상력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퍼스널 컬러로 물들여진 그의 영혼의 힘이 온 몸을 휘감아 돈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완전히 차원종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되찾은 이 느낌이 이렇게나 소중한 것인줄을 너무나도 늦게 깨달았다고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기쁨과 흥분에 들떴다. 그리고 자신을 해방시켜준 그의 연인과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그는 슬비를 향해 눈을 돌리고 말했다.
"슬비야, 나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 것 같ㅇ…"
말을 더이상 이을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슬비는, 숨만 가쁘게 쉬고 있을 뿐 의식조차 잃은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몸을 흔들면서 그녀를 불렀다.
"슬비야! 야, 이슬비! 정신 차려!"
그녀의 이름을 목이 터지도록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보다도 이대로 놔두었다간 그녀가 큰 일을 당하고 말 것이라고 직감한 그는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심한 듯,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무리 힘의 일부분이었다고는 하지만, 설마 인간의 힘으로 우리의 힘을 몰아낼 줄이야."
"역시 방심하면 이렇게 된다니까?"
그의 뒤에서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원흉 중의 하나인, 차원종의 최고위급 간부이다. 그는 그녀를 안아든 채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바로 그 자리에는 분신이 아닌 본체인 그들이 있었다.
"애쉬와, 더스트!"
"이세하, 왜 우리의 힘을 버린거지? 데이비드를 향한 너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텐데?"
"맞아. 잠자코 있으면 우리가 녀석을 네 손으로 해치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을텐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우리를 거부하니 조금 실망이야."
남매는 돌아가며 한마디씩 그를 향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기에 그는 대답하지 않기로 생각하고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그의 날선 시선을 받고 있던 애쉬가 식은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슬비를 바라보며 무척이나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멍청할 정도로 위상력을 쏟아부었군. 하긴, 그 정도로 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힘을 네 녀석에게서 몰아낼 수 없었겠지. 그래도 이슬비 양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건, 나도 참 보기 힘든데 말이야."
"닥 쳐, 애쉬. 너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그러는 너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이슬비 양이 누구의 선택 때문에 이런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는지는 네 녀석이 더 잘 알고 있을텐데."
애쉬의 말에는 그를 멸시하는 태도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세하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말이 전부 옳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다.
"으음…"
이슬비가 짧게 신음을 흘리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위상력이라는 것은 최소한 몸 안에 비축해두어야할 양이 있어서, 그 이상을 사용하게 되면 꽤나 위험해진다. 위상력을 많이 소비하여 이런 증상이 나타난 거라면, 일시적으로나마 그녀의 몸이 위상력을 다시 생성해낼 떄까지만 몸 안에 같은 성질의 위상력을 주입하였다가 빼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같은 성질의 위상력을 가진 이는 바로 그 뿐이다. 즉, 그만이 그녀를 지금의 상황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다 위상력의 주입과정이라는 것은 꽤나 집중을 요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적을 눈 앞에 둔 상황이라면 실행에 옮길 수 없다. 이대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그는 놈들에게 뒤를 잡히고 말 것이기에 도주조차도 불가능하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만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이세하, 이슬비 양을 우리에게 넘겨. 이슬비 양을 우리가 살려줄테니까."
"내가 겪었던 그걸 슬비도 겪게한다고? 웃기지마!"
"그렇다면 그대로 죽게 놔둘건가? 설마 네 녀석이 위상력을 그녀에게 주입하도록 우리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슬비는 너희에게 못 넘겨. 슬비를 데려가려거든, 나부터 넘어야 할거다."
그는 땅 위에 안아 들었던 그녀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근처에 떨어져있던 검을 들어 애쉬와 더스트를 향해 겨누었다.
그의 저항을 보면서 그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 차올랐고, 저마다 한 마디씩 돌아가며 그를 조롱한다.
"고작 네 녀석의 힘으로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우리의 힘을 사용해 본 너라면 우리와 맞서 싸운다는게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도 잘 알텐데?"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또 다시 헤어지기는 싫었다. 죽는 것보다도 더 싫었다. 서로를 향해 칼날을 들이대며 싸움을 강요받았던 그들의 과거를 다시는 반복하기 싫었다.
너무나도 무모하다는 것을 알지만, 절대 이슬비를 놈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만으로 그는 검을 잡았다. 그리고 어리석기 짝이없는 도전을 감행했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앗!"
크게 기합을 넣으며 그는 애쉬와 더스트에게 달려들었다. 높이 치켜들린 검이 다시 내려쳐지며 그들의 육체를 대각선으로 크게 벤다.
그러나 검이 그들의 머리 근처로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차게 부딪혔다.
"고작 그 따위 힘으로…,"
"윽!"
"군단의 최고위 간부인 우리를 상대하려해애애앳!!"
애쉬의 손이 이세하의 몸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나간 붉은 광선이 그의 옆구리를 스쳐지나가며 베었다. 마치 날붙이에 베인 것처럼 깊게 상처가 났고, 그가 입고 있는 갑주의 한 구석에는 녹은 것처럼 구멍이 생겼다.
이슬비의 근접 공격에도 절대 뚫리지 않던 갑주가 단 한 번의 가벼운 공격에 뚫리는 것을 보고, 이세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의 온 몸은 당장이라도 놈들에게서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분명히 그들과 맞설 것을 요구했다, 이슬비를 지키기 위해서.
이성으로 억지로 몸을 억누르며, 그는 고통을 견뎌내면서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위상력을 더욱 실은 공격을 그들에게 가했지만, 그 역시 그들의 근처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너도 참 어쩔 수가 없네, 이세하."
그의 무모한 공격을 보면서 더스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이내 손을 한 번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곧바로 검은 빛을 머금은 회오리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더니, 그대로 그를 잡아 높이 날려버린다. 허공에 강제로 부유하게 된 그의 몸은 잠시 후 바람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땅에 박을 때의 충격이 꽤나 컸던 모양인지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추락한 자리는 바로 이슬비의 옆자리이다. 다행히도 정신은 잃지 않은 그는 눈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곤 땅에 검을 박고서 그것에 지탱하여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은채 상체를 일으켰다.
낙하의 충격으로 쉬이 다음 공격을 이을 수 없는 그는, 그저 고개만 들어 자신과 슬비를 삼키려고 하는 절대악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승리에 취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들의 기분나쁜 웃음 끝에는 그들의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넌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네 녀석의 엄마, 그 년의 모습이 너에게서 보이거든."
"그러니 기분은 나쁘지만 이슬비만 데려가도록 하겠어. 너의 역할은 여기까지야, 이세하."
애쉬와 더스트가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곤 맞잡은 서로의 손의 검지를 치켜세워, 그 끝을 이세하를 향했다. 마치 무언가를 쏘려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세하에겐 그들의 공격을 막을만한 힘이 없다.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 공격을 받게 되면 남은 건 죽음 뿐이라는 것 역시 저절로 깨달아졌다.
애쉬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
그러나 이세하는 마지막의 여유를 즐기듯, 그들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을 본 애쉬와 더스트는 일제히 얼굴을 찡그렸다.
"역겨워. 아스타로트 녀석을 쓰러뜨렸을 때 지었던 그 때의 그 얼굴이잖아?"
"그 때 네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말겠다고 맹세했지만, 이제는 끝이다. 죽어서, 용서를 빌어라, 이세하!"
애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매의 손에서 광선 하나가 쏘아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빠르게 다가왔고,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그의 목을 관통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테지.
더 이상 사는 것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미련 따위 이 남매와 계약할 때 이미 버린지 오래다. 다만 계속해서 마음에 남는 것은, 그들의 손에 넘어가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불쌍한 이슬비다.
데이비드가 그들을 공격했을 때처럼,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인을 지킬 힘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녀를 또 다시 지키지 못하고 그녀의 곁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 아팠다. 예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영원히 그녀와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너무나도 힘들었다.
죽음이 바로 눈 앞까지 다가오니, 정신이 흐려지는 것 같다. 눈 앞의 시야도, 그리고 모든 사고도 흐려져만 간다. 죽음 앞에서 자신이 이렇게나 나약한 존재였음을 깨달으며, 이세하는 담담히 죽음을 기다렸다. 흐릿한 감각 끝에 무언가 찌릿한 게 느껴졌다. 그 감각은 왠지 익숙해서 감았던 그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콰앙!
낙뢰가 떨어질 때의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푸르다 못해 묵색에 가까운 번갯불이었다. 이세하와 이슬비 그리고 애쉬와 더스트 사이를 갈라놓은 낙뢰는 이세하의 숨을 끊어놓기 위해 다가오는 광선을 깨끗이 잘라내어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했다.
청색과 묵색이 공존하는 위상력,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리고 이 찌릿한 느낌도.
익숙한 인영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용케 살아남았네, 아들?"
세하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그리운 한 단어가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마?"
"당신은…"
슬비의 목소리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아주 약간이라도 회복되어 의식을 되찾은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구원자의 충만한 위상력이 주위로 흩뿌려졌기에, 그 느낌에 활력을 얻어서 일어난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들 앞에 나타난 구원자가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다. 낙뢰의 빛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단 하나 뚜렷하게 보이는 영롱한 금색의 눈이 빛나고 있다.
구원자는 입을 열어 말했다.
"슬비야. 우리 세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설마?"
"설마?"
슬비는 단 한 번 이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분명히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이 목소리와 이 눈색은 기억의 대상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당당히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구원자의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세등등하게 그들을 비극으로 몰아가던 남매가 남기는 비명과 같은 증오의 외침이 눈 앞의 여자의 이름을 알렸다.
"서지수우우우우우우우우! 너 이 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곧 매우 큰 낙뢰가 모든 것을 삼켰다. 남매는 물론 구원자와 이세하와 이슬비까지, 모두를.
그 광경을 마지막으로, 또 다시 이슬비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던 건 정말로 우연의 일치였던 모양이다.
◆ 20-4
처음 보였던 것은 따돌림 받고 있던 어떤 남자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남자아이는 울고 있었다.
또래아이들은 남자아이를 괴물이라고 놀리며 남자아이가 만들고 있던 모래성을 부수고 도망쳐버렸고, 놀이터 한 가운데 홀로 남은 아이는 계속 엄마를 찾으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이슬비는 그 아이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다가갔다. 놀이터 모래 위에 그녀가 발을 들여놓자, 갑자기 드라마의 화면이 바뀌는 것처럼 또 다른 환상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이번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어두운 연구실의 안이었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아이는 연구실 안의 어떤 의자에 앉아서 머리에 무언가를 쓴채 눈을 감고 있었고, 그 주위로 여러 명의 연구원들이 각자 들고 있는 차트에 무언가를 쓰거나 체크하고 있었다. 이곳이 어딘가를 알아보기 위해 둘러보던 슬비의 눈에 들어온 커다랗게 쓰여진 다섯 개의 알파벳, 그것은 UNION이었다. 아마도 이곳은 유니온 소속의 연구소인 모양이고, 그렇다면 저 남자아이는 일종의 위상력 테스트와 같은 시험을 받고있는 모양이다. 그녀에겐 어릴 적에 이런 시험을 받은 기억이 어렴풋이 머릿 속에 남아있었기에, 이 아이가 위상능력자라는 것을 간단히 추론해낼 수 있었다.
물끄러미 남자아이를 쳐다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어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정말로 그 남자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아이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놀이터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바뀌었다.
"이것 밖에 안 되나?"
"하지만 위상잠재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위상력이라니…"
방금 전까지 아이의 위상력을 체크하던 연구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무척이나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이는 그 앞에서 고개만 푹 숙인채 우물쭈물 하던 중 겨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저…"
하지만 연구원들의 그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은채 자기들끼리 나누던 이야기에 결론을 짓고서 아이의 머리에 측정용 기어를 다시 씌웠다. 아이는 무척이나 싫어하는듯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아이의 감정에는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아이가 싫어하잖…"
그녀가 말을 꺼내자, 또 다시 광경이 전환되었다. 이번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어느 학교의 교실의 모습이었다.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시끄럽게 저마다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교실은 여느 학교의 모습과도 다를 것이 없었는데, 그중 그녀의 눈에 유독히 들어온게 있었다.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자리 주위에 모여들어서 한 아이를 둘러싸고 있다.
"눈 색도 우리랑 달라!"
"엄마한테 들었는데, 쟤는 위상능력자라 우리랑 다르대. 으으, 무서워."
남자와 여자가 섞인 아이들은 누군가를 가리키며 저마다 말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사이로 보인 한 남자아이는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던 그 아이였다. 그는 애써 잠자는 척 하며 책상 위에 엎드러져 얼굴을 박고 있었는데, 초등학생 치고는 약간 덩치가 커보이는 아이가 다가와서는 큰 소리로 말했다.
"무섭긴 뭐가 무섭냐! 잘봐, 이 녀석 예전부터 내 앞에서는 쫄아서 아무 말도 못했다? 보여줄게.
야, 괴물, 일어나! 내 말 안들려? 일어나라니까!"
그러자 갑자기 누워있던 아이는 자신에게 소리친 그 남자아이의 멱살을 잡더니, 그대로 힘껏 밀쳐버렸다. 그 힘은 보통 어린아이의 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여서, 꽤나 커다란 아이가 교실 맨 뒤까지 날아가 사물함에 등을 부딪힌 후에서야 바닥에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면서 날아간 아이는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절해버렸고, 이 모습을 지켜본 다른 아이들도 비명을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며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슬비도 지켜보고만 말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그 아이를 혼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선을 옮겨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위상능력자는 위상력을 일반인을 상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규정이 있음에도, 그것을 어겼다는 것은 꽤나 큰 잘못이기에 클로저로서 이슬비는 훈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아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이야기를 감히 꺼낼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자신이 한 행동이 무척이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떨고 있는게 분명했다. 금색으로 초롱초롱 빛나던 아이의 눈은 어느새인가 눈물에 잠겨 있었다.
아이의 눈이 참 예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들 것 같이 매혹하는 금안을 눈에 담고 있던 그녀는 또 다시 주위가 바뀌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눈치챘다. 이번에 그녀가 있는 곳은 강남에 있는 유니온 소속의 어느 건물, 그 금안을 하고 있던 남자아이는 어느새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눈색도 금색에서 평범한 흑색으로 바뀌었다. 다만 지금과 같이 성숙한 모습은 아닌 것을 보니, 지금보다는 더 어릴 때의 모습인 듯 했다. 그녀는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세하…"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아닌 다른 이들의 말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쟤가, 그 서지수 님의 아들…"
"알파퀸의 아들이라면 엘리트 과정만 밟아왔겠지? 정식 클로저 요원이 되는 것도 금방이겠다."
"차원전쟁의 영웅의 아드님이니,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을까. 참 부럽다."
"어휴, 쟤랑 우리는 어차피 다르니, 우리는 더 열심히 해야겠어."
아니다. 저 사람들의 말은 틀렸다.
그녀가 알기로 이 남자는 정말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자신의 어머니의 후광을 누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노력은 알아주지 않고, 그를 생애를 오해했다.
그녀가 처음 이세하를 만나던 날, 그 때 그녀 역시 그를 오해했었다.
그 때 그녀를 붙잡고 쏘아붙였던 그의 말은, 아직도 그녀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난 이딴 힘, 달라고 한 적 없어. 날 좀 내버려 둬…"
그녀는 그 이후로는 그 정도로 분노에 찬 목소리를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세하에 대해 그녀는 모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던 것이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때의 그녀처럼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그것을 도저히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세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한심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녀의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또 다시 주위가 뒤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눈에 너무나도 익은 곳이었다. 이곳은 남산 타워, 게다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와 그가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지금 이 때는 분명히 그와 마지막으로 연인으로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던 그 날 밤이다. 그녀에겐 후회로 남았던 이 때의 기억, 그녀는 반드시 이 날 그를 붙잡았어야 했다. 그녀가 그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그는 고통과 슬픔에 빠져 오랜 나날을 보내어야만 했었다. 이 날 이후 그녀는 세하가 이렇게 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탓했었다.
그 때 헬리콥터의 로터가 회전하는 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려왔고, 곧 이 안을 여러 대의 헬기들이 서치라이트를 켜서 비추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녀와 그가 헤어질 때의 시간이다.
곧 눈부신 보랏빛 섬광과 함께 공간이 갈라지며, 그 틈으로 그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미련을 남긴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안 돼! 가면 안 돼! 세하야, 가지마!"
***
"안돼…!"
이슬비는 눈을 떴다. 얼굴에 느껴지는 감각은 그녀의 눈가로부터 얼굴을 타고 무언가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여 그 따스한 무언가를 닦아내었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잊히지 않는다.
꿈의 내용인데도, 금방 사라져버리는 꿈일 뿐인데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기억인양 머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렇다. 꿈처럼 느껴졌던 그것들은, 사실은 누군가의 기억이다.
그녀는 이 기억들이 누구의 소유인지도 분명히 알고 있다. 이 기억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기억이다. 너무나도 슬프고 마음이 답답할 뿐인 기억,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이세하라는 남자는 꿋꿋이 자라났고 어느 남자보다도 더 훌륭하고 멋지게 성장했다.
깨어난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익숙한 어느 방의 천장의 모습. 그녀의 옆으로는 바이탈 수치를 체크하는 의료용 기계가 삑삑 하는 소리와 함께 작동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곳은 어딘가의 병실인 모양이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지 창문에는 커텐이 쳐져있지 않았음에도 방은 어두웠다.
아까 눈물을 닦아낼 때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던걸 보면, 이제 몸을 어느 정도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몸에 가득하던 통증들도 많이 가라앉았으니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보았다.
"아얏! 역시 좀 더 누워있을 걸, 그랬나…?"
이제와서 후회한들 뭐하리, 이미 일어나버렸는데. 자신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서, 슬비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하던 중 그녀의 시선이 아직 닿지 않은 곳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좀 살만해?"
"…"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이세하가 있었다.
눈물을 닦아낸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났다. 처음의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었지만, 지금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다. 기뻐서 운다는게 이런 거구나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를 향해 사랑하는 사람이 다가왔다.
"바보같이 왜 울어."
그리고는 손을 들어 그는 찬찬히 그녀의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무척이나 가깝게 다시 보는 그의 얼굴, 너무나도 이 때가 그리웠다. 이 세상에서 다시 그와 이렇게 가깝게 있을 수 있게 됬다는 것, 너무나도 그게 기뻤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녀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이전의 평범한 검은색이 아니었다. 그녀가 꿈에서 보았던 그의 본래의 금색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챈 그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처음 보 지, 내 원래 눈색은? 사실 원래의 검은색은 렌즈색이었어. 머리는 염색했으니까 백색에서 원래대로 돌아와도 흑갈색이더라구."
"…"
"좀, 이상해? 이상하면 원래대로 렌즈 낄…"
"예뻐."
"응?"
"네 눈, 정말 예뻐, 세하야."
그녀의 말에 살짝 쑥스러운 듯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슬비도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저기, 세하야."
"응?"
"이거, 꿈 아니지?"
"꿈 아니야."
"정말, 꿈 아니지?"
"확인시켜줄까?"
더욱 가깝게 그가 다가온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녀를 안았다.
목이 서로 교차하고 서로의 가슴이 맞닿는다. 두 사람이 품고있던 따스한 체온이 서로에게 건너갔고, 코로 느껴지는 서로의 향기는 너무나도 감미로웠다. 그리고 느껴지는 상대방의 심장박동소리는 서로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2주라는 시간은 그들을 어른으로 성장시켰지만, 서로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의 마음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이다.
그녀는 지금이 꿈이라고 의심했던 바보같은 자신을 속으로 꾸짖었다. 그리고 지금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이 행복을 누리기로 했다.
서로의 목에 팔을 감고서 한참이나 서로의 따스함을 나누던 그들은 천천히 서로의 어깨에서 목을 떼었고, 다시금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거리를 좁혔고, 서로 입술을 포갰다.
처음의 입맞춤은 이별의 키스였다면, 지금은 영원히 서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맹세였다. 피부로 와닿는 서로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며, 욕망 따윈 없는 사랑어린 재회의 입맞춤을 이어갔다.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두 사람은 또 다른 날을 맞이했다.
.
.
.
어둠이 내린 재와 먼지의 영지.
이곳의 주인인 남매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다.
"쳇. 서지수 녀석,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강하군."
"기분나빠, 그 녀석 때문에 우리의 장난감을 모두 다 놓치고 말았어."
"자, 이제 어쩌면 좋겠어, 누나?"
"글쎄."
둘은 잠시동안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곧 애쉬가 입을 열었다.
"칼바크 턱스, 놈을 다시 데려오는거야."
"그래, 놈이라면 다시 우리의 장난감이 되어주겠지."
"지금 놈은 동토의 땅에 가 있어. 이제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하긴, 녀석을 찾으러 가야지~"
남매는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가지고 놀았던 과거의 장난감이 있을 동토(凍土)의 나라로.
20화 완결..
처음에 썼다,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내용 추가하고 보충하고 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하하... 그래도 늦게 찾아뵌 감이 없잖아 있어 죄송할 뿐이네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결말이 이루어졌나요?
부디 그러하기를 바라며...
마지막 화로 곧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