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20-1. 비극의 종결 -

Articulus 2017-02-08 2


국제공항부터의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국제공항 에피소드까지 클리어하지 않으신 분들 중 스포일러를 보기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이 내용은 기본적으로 클로저스의 기존 설정에 기반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매우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국제공항 이후의 스토리는 완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근거하므로, 본작의 에피소드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BGM을 들으시면서 감상하시려면 작가의 블로그나 UNION 카페의 게시글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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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 

 

  수적 우세함을 가지고서도 싸움은 어렵게만 흘러갔다.
  이능원이라는 정부기관에 소속된 위상력을 사용하는 요원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이들이 보통 상대가 아님을 맞부딪칠수록 깨달아 갔다. 이전에 티아매트 대책실을 급습했던 소수의 인원들은 특히나 그것을 절실히 느껴갔는데, 당시 그들이 상대했던 검은양 팀 클로저들에 비해 훨씬 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바로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늑대개 팀 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유니온의 클로저로 활동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너무나도 뛰어났다.

  늑대개 팀은 트레이너 의해 계속해서 다듬어지고 훈련받은 실력을 뽐내며 적들을 유린했다. 특히 나타와 하피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나타와 하피의 기동력을 이용한 사방공격은 매우 적들에게 효과가 컸다. 그들은 지상은 물론 공중, 그리고 양 옆과 앞 뒤를 번갈아가며 쉴틈을 주지도 않으며 공격을 퍼부었는데, 그 공격이 하나같이 치명타를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들인지라 방어자의 입장으로서는 막지 않을 수 없다. 이능원의 요원들이 아무리 훌륭한 위상능력자라고 할지라도,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지(死地)에 있다가 돌아온 늑대개 팀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그만큼 그동안 성장했고 강해진 것이다.

  "헹, 등 뒤가 비었군!"

  나타의 쿠크리가 크게 방심하는 적의 등을 베었다.
  피는 터져나오지 않았지만 크게 벤 느낌이 분명히 그의 손을 타고 흘렀기에, 상처를 입혔다고 그는 자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공격을 당한 적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앞으로 쓰러져버렸다. 한 명을 가뿐히 리타이어시킨 그는 다음 사냥감을 찾는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바로 다음 사냥감이 포착되었다.
 
  그의 옆에서 아주 어설픈 속도로 공격해들어오는 또 다른 사냥감은 자신의 위상병기로 보이는 창을 그를 향해 내질렀다. 하지만 창이 미처 그에게 닿기도 전에, 이미 나타의 손으로부터 던져져 뻗어간 쿠크리가 쇠사슬과 함께 창의 끝을 휘감아버렸다. 그 결과 자신의 의지대로 창을 움직일 수 없게된 여성은 뒷걸음질치더니, 이내 창을 내버리고 다른 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녀는 맨 손으로 공격하려는 모양이다. 그런 적의 모습을 보고서 나타는 비웃음을 흘리며 무척이나 편한 자세로 적의 공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적은 그에게 맨손으로 공격할 마음따윈 없었다. 그녀는 등 뒤의 허리춤에 있는 보조무장인 권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적을 공격할 궁리를 하고 있다. 그녀가 가진 50구경의 권총은 위상력을 실어서 탄환을 발사하기만 하면 막아내는 것도 힘들 뿐더러 계속되는 총탄세례는 눈으로 쫓을 수도 없기에 필살의 무기와 다름없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권총을 뽑아들려고 한다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도 못한 나타는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쿠크리의 끝을 적에게 향한채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권총의 명중률은 높아진다. 적은 자신이 생각하는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음에 기뻐했지만, 그 기쁨을 얼굴에 표정으로 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와의 거리가 불과 10발자국 사이로 줄어들자, 곧바로 손을 뻗어 권총집에서 바로 총을 뽑아든다.

  "잘 가라!"

  그리고 매우 능숙한 솜씨로 권총을 뽑아들고선 격발준비과정을 매우 짧은 시간에 끝내고 곧바로 총탄을 발사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권총 특유의 딱딱한 느낌과 차가운 강화 플라스틱의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느낌 역시 들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권총의 해머(공이치기)를 내리는 감각조차 없었고, 격발될 때의 시끄러운 총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근사한 물건이로군요?"
  "에…?"

  바로 그녀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녀의 동료가 아닌 낯선 여성의 목소리.
  도대체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뒤로 몸을 돌려 또 다른 이의 정체를 눈에 담는다.

  거기에는 금발의 긴 생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는 무척이나 아리따운 여성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자신의 권총으로 보이는 그것을 들고서. 그리고 매우 능숙한 솜씨로 권총을 겨누어보기도 하며 말하기를,

  "멋진 총인데요? 마음에 들어요."
  "이리 내놔!"
  "뒤부터 보시죠."

  여성의 말에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자신의 뒷머리에 가해진 매우 큰 충격에 그대로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타가 쿠크리의 뭉툭한 부분으로 세차게 내려진 것이다.
  그냥 내려친게 아니라 위상력을 실어서 공격했기에, 충분히 사람을 기절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공격이었을 것이다.

  "어때요, 나타. 나에게 빚을 진 느낌은?" 
  "주정뱅이 여자, 누가 구해달랬어? 녀석이 총을 쏘려고 하던 것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고!"
  "그렇다고 해두죠. 지금같은 상황에서 당신과 말싸움을 해봤자, 이득은 없으니까요."

  두 사람은 쓸데없는 기싸움은 여기까지 하기로 무언의 합의를 하고,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적이 있었지만 미처 덤비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누구부터 처리해줄까 잠시 생각한 후, 그들의 오른쪽에 있는 이에게 달려들었다.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남자는 웃음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귀에 차고 있는 소형 무전기를 통해 어딘가로 송신했다.
  "나현 씨, 아직도 멀었어?"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의 무전대상은 아직 트레일러 안에 있는 서나현 요원이었다.
  그녀는 트레일러 안에서 컴퓨터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입력하며 조작하고 있었는데, 모니터에 보이는 화면은 무척이나 빨리 사라지기도 하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면서 몇 번이나 그러한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무전을 수신한 지 약 2분 정도가 지나서, 그녀의 화면에는 CERTIFICATION SUCCESSS라는 문구가 나왔다. 모니터의 문구를 확인한 여성은 자신의 귀에 차고 있는 소형 무전기를 통해 상관에게 송신했다.

  "관리관 님, 성공했습니다."
  "좋아."

  남성은 저멀리 보이는 플레인게이트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굳게 닫혀있던 자동문은 어느새인가 열려있었다. 인증된 대상만 출입할 수 있도록 자동인식센서가 부착된 최첨단 기술의 보안문이었지만, 해킹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문이 열린 것은 그만이 눈치챈 것인지, 검은양 팀의 클로저들이나 늑대개 팀의 그 누구도 아직까지는 눈치채지 못한듯 계속해서 전투만 속행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한 남자는 곧바로 또 다시 무전을 송신했다.

  "관리관으로부터 현망에 알린다. 임종현 반장이 지휘하는 반원들은 지금부터 서나현 요원의 지휘를 받는다. 그리고 서나현 요원은 반원들을 데리고서 플레인게이트 로비로 들어가, 플레인게이트를 파괴한다. 플레인게이트만 파괴하면, 이 작전은 성공이다. 실수 없도록. 이상."
  "서나현, 입감 양호.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현망에서 수신하고 있는 지정된 반원들은 플레인게이트 근처로 집합한다. 그리고 나를 따라 플레인게이트 안으로 돌입할 수 있도록 한다. 이상."
  "알겠습니다!"

  무전 상의 빠른 대화가 끝나고, 늑대개 팀을 상대하던 이들 중 3명의 인원이 슬금슬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움직임으로 뒤로 빠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그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없었다.
  곧 트레일러 안에서 나온 은발의 긴 머리를 휘날리며 짙은 양복을 입은 한 여성이 아주 빠른 속도로 자신의 적들 사이를 돌파해나갔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챈 트레이너가 그녀의 움직이는 방향을 쫓자, 그 끝에는 문이 열려있는 플레인게이트의 입구가 있었다.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과 함께 그는 근처에서 적을 막고 있는 미스틸테인에게 소리쳤다.

  "미스틸테인! 놈들이 플레인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자신을 둘러싼 적들을 상대하느라 미처 다른 상황을 살피지 못했던 그는 바로 자신의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여성과 아주 잠깐동안 시선을 마주쳤을 뿐, 결국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움직임은 그 어떤 이능원의 요원들보다 재빨랐다.
  은발의 여성은 소년에게 차가운 웃음만을 남기고서 사라졌고, 그녀의 뒤를 따라 입구 근처로 빠져있던 세 명의 요원들이 문 안으로 들어간다. 급히 문 안으로 들어간 이들을 막기 위해 미스틸을 포함한 바이올렛과 하이드가 향했지만, 그들이 문 앞으로 다가가자 닫혀버리고선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자동인식센서가 그들의 신원을 분명히 파악하고 문을 열어야하는게 당연한데,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바이올렛은 분한듯 입술을 잘근 깨물으며 바로 자신의 옆에 있는 하이드에게 물었다.
 
  "하이드,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해킹인가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아가씨. 어떻게 하죠?"
  "저 문을 파괴하고서라도 안으로 들어가야해요. 놈들은 플레인게이트를 파괴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아가씨, 저 문은 위상력에 대한 방호효과가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당장은 뚫을 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빌어먹을… 이를 어쩌면 좋…"

  타아아앙!
  그녀가 분노를 터뜨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온 총탄의 발사음과 함께 까앙 하고 세차게 무언가가 철을 때리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 새로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러한 소리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눈 앞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위상력에 대한 방호효과가 있는 문이 무언가에 맞아 계속해서 안으로 조금씩 휘어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저 멀리에서 위상력을 흘려보내지 않은채로 대구경 저격소총을 계속해서 쏘아대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자유롭게 사격을 하는 것을 보아, 분명히 그녀를 향해서 달려들었던 적들은 제압되었을 것이다.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레비아까지 그곳으로 향했으니, 적들은 분명히 소탕되었으리라.
  그녀의 총격이 문을 완전히 으스러뜨릴 때까지, 그저 그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웃음이 잘 어울리는 남자는 다시 얼굴에 미소가 번져오르고 있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음에 환호하며, 남자는 싸움을 다시 지켜보기 시작했다.

.
.
.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쿠궁 하는 철소리와 함께 멈추어선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있던 4명의 위상능력자들은 플레인게이트 앞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
  낯선 자의 방문에 안에서 바깥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는 유니온의 연구원들은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인다. 그 중에서 직급이 높은 축에 속하는 연구원인 민성진 박사가 이들의 정체를 물었다.

  "당신들, 누구입니까."
  "그건 알것 없고, 여기 최고책임자가 누구야?"

  정체불명의 남녀 중 한 명이 다짜고짜 이곳의 최고책임자를 찾는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연구원들은 이세하의 구출을 위해 검은양 팀을 지원할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모였기에, 최고책임자 따위가 있을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직급이 가장 높은 것은 외부차원 탐사팀장을 역임했던 최보나 연구원 정도였다.

  "최고책임자, 없나?"
 
  다시 한 번 묻는 그 말에, 한참이나 뒤에 있던 몸집 큰 남성이 답했다.
  "유니온의 최고책임자는 모르지만, 이 플레인게이트 폐쇄를 담당하는 최고책임자는 나요."

  앞으로 나서는 붉은 갈색빛 머리의 남성.
  언제나 가면으로 얼굴을 반 정도는 가리고 있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않고 완전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남녀는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는 모양인지, 매우 쉽게 남자가 소속되어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우연이군. 그런 일을 유니온은 벌처스에게 맡기나?
  "벌처스는 엄연히 유니온의 스폰서 기업이니, 이런 일을 하청받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남자는 네 명의 남녀 중 낯익은 얼굴의 여성을 점찍어 말했다.
  "당신, 처음 플레인게이트의 폐쇄를 위해 찾아와서 저를 협박했던 정부측 요원들 중의 하나로군요."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이슬비가 플레인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이세하를 찾겠다고 그에게 말한 후 외부차원으로 향했을 때, 낯선 세 명의 남녀가 찾아와 이곳 플레인게이트에 이슬비가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자신의 행방에 대해 비밀로 해달라는 말에 알겠다고 약속했던 그는 그들에게 완강히 이슬비가 이곳에 왔음을 부정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답을 얻지 못하였다고 철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곳을 폐쇄하러 왔다며 공문까지 들어보이면서 이곳을 폐쇄할테니 그에게 떠나라고 하였다.
 
  다행히도 당시의 사건은 검은양 팀이 재빨리 찾아오면서 마무리되었지만, 또 다시 이런 악연과 조우하게 되리라고는 그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아주 정확하게 당시의 세 명의 남녀 중에 유일하게 여성이었던 그 사람을 기억했고, 자신 앞에 서 있는 저 은발 머리의 여성이 바로 그 여성이라는 것까지 정확히 짚어냈다.

  "게다가 당신들, 얼마 전에는 이슬비 요원님의 승급심사 중에 티아매트 대책실을 급습해서 모두를 죽이려고 했었죠."
 
  더욱 정확히 남자가 설명을 하자, 유니온의 연구원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눈 앞의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그 말로만 들었던 특수요원의 승급심사 과정 중에 급습했던 정체불명의 세력이라는 것과 그들이 정부측 요원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도대체 어떤 정체의 사람들인지에 대한 의문이 모두에게 똑같이 늘어졌다.
  그러나 여성은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당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할 뿐이니까. 그것보다도 벌처스의 사장님, 왜 플레인게이트의 폐쇄를 이렇게 미루고 계신거지?"
  "그야 물론 저 안에 이세하 요원님을 구하러 이슬비 요원님과 서유리 요원님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저 플레인게이트는 폐쇄되지 않을 겁니다. 유니온이 우리에게 기한으로 준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까요!"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는 저 플레인게이트를 파괴해야해. 그리고 외부차원과 내부차원을 단절시켜야하지. 그러니 협력해주었으면 하는데."
  "소용없을 겁니다. 플레인게이트는 아무리 폐쇄하려고 해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폐쇄할 수 없을테니까요."
  "시간을 끌려는 생각이라면 소용없어, 사장님. 당신의 속셈은 다 알고 있으니까."
  "정말입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플레인게이트가 닫히길 원하신다면, 우리가 완전히 폐쇄를 끝낼 때까지 가만히 놔두시는게 좋을 겁니다."

  남자는 경고했다. 그러나 이곳에 쳐들어온 네 명의 남녀는 그 말에 비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두 개의 원형 구조물이 맞물려 회전하고 있는 기계장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니온의 연구원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들, 저걸 파괴하려는거지!"
  "안돼! 저게 파괴되면 요원님들이 돌아올 수 없게된다고!"
 
  정황 상, 저 정부측 요원들은 위상능력자일 것이다.
  그에 반해 그들의 앞을 막아선 이들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상대가 될리 없는데도, 연구원들은 필사의 각오로 지키려는듯 눈 앞의 불청객들을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은발의 여성은 그들에게 경고했다.

  "다치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 우리의 일만 끝나면, 당신들에게는 손대지 않을테니까."
  "우리에겐, 우리만큼이나 요원님들이 소중하다고!"
  "당신들이 저걸 파괴하도록 놔두지 않겠어!"
 
  막아서던 이들 중 가장 앞에서 이 말들을 외쳤던 2명의 연구원들의 앞에 어느샌가 정부측 요원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손쓰지도 못하고, 그들은 그대로 멱살이 잡힌채 저 뒤로 강제로 집어던져졌다.
  너무나도 무자비한 손길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 주눅든 연구원들은 하나둘씩 비켜나기 시작했고, 거의 모든 연구원들이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그러나 단 두 명만은 길을 내주지 않았는데, 그들의 신분증에는 최보나와 민성진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이슬비와 서유리가 돌아오기 전까진, 절대 못비켜."
  "유니온의 요원들과 직원들을 공격하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텐데! 이런 짓을 하고도 너희가 무사할 수 있을것 같아!?"

  그들의 말 역시 낯선 불청객들에겐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에 파견된 정부측 요원들을 통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은발의 여성이 답한다.
  "법? 아직도 그런 이상을 쫓아?"
 
  여성은 짧게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쉽지만 여기에서는 법이 없어.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를 처벌할 수 없으니까."

  여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뒤에 있던 세 명의 남녀 중 두 명의 남성들이 앞으로 나서더니, 두 사람을 향해서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두 연구원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건…"
  "위상력! 일반인, 한테…"

  아마도 그들은 강제로 무언가의 힘에 의해 강제로 무릎이 꿇려진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을 무릎꿇린 힘은 바로 저 두 남성의 위상력일테고. 그들은 손을 거두었고, 무릎 꿇은 두 사람을 보면서 조롱을 보낸다.

  "힘도 없는 녀석들이 어딜 나대."
  "싸움도 힘이 있어야 하는거야, 이 멍청이들아."

  그리고 은발의 여성은 두 연구원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고, 그뒤를 따라 세 명의 남녀가 따른다.
  이제 그들을 막아서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에게 저항할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안에는 위상능력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그들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저항이 헛된 저항이라는 것을 유니온의 연구원이기에 절실히 알고 있는 그들은 누구하나 나서지 못했다.

  플레인게이트 바로 앞에 다가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벌처스의 사장은 경고했다.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큰 후회를 하지 않으려거든, 플레인게이트를 강제로 파괴하지 마세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마도 저들은 코웃음만 쳤을 것이다.
  어째서 이 남성은 그들의 앞을 막아서지 않을까, 그리고 그저 이렇게 경고만 하는 것일까.
  연구원들과 벌처스의 몇몇 직원들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불의에 굴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과 검은양 팀의 요원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에게 어떠한 꿍꿍이가 있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저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볼 뿐이다.

  은발의 여성은 등 뒤에서 기다란 검을 꺼내들었다.
  바스타드 소드와 비슷하게 생긴 양손검이었는데, 아마도 위상병기일 것이다.

  여성은 기합을 넣으며 자신의 위상력을 검에 주입했고, 검은 그녀의 위상력의 색에 따라 은색의 빛으로 휘감겼다. 그리고 여성은 천천히 두 손으로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 검은양 팀!"
 
  들어올릴 수 있는 최고임계점까지 검을 들어올린 여성은 힘차게 내려치며 위상력을 플레인게이트를 향해 쏘았다. 은빛의 위상력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세찬 바람이 되어 몰아쳤고, 그것의 끝은 플레인게이트를 겨냥하고 있었다. 실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무도 겪지 못한 풍압을 가진 거센 바람이 기계들을 때리자, 곧바로 완전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차원의 간격을 생성하던 두 개의 원형구조물들도 바람에 찢어발겨져서 땅으로 주저앉았다.

  아마도 저 은발의 여성은 바람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서 무엇하나, 이미 플레인게이트는 제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파괴되어 버린 것을. 여성과 그녀가 이끄는 이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거센 바람소리가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이 웃음소리는 분명히 악마의 웃음과 다를바가 없다고 모든 이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악마가 있는 이 끔찍한 지옥에서 살아나가기만을 간절히 빌며, 이 참상을 목격해야만 했다.

  "미안해, 서유리, 이슬비, 이세하…"
  "이, 씨… 제엔장…"
 
  몇몇 이들은 플레인게이트가 무너지는 참상을 바라보 지도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아버리기도 했고, 이 지경까지 상황이 오는 것을 막지 못한 자신들을 탓하며 가슴을 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눈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큰 죄책감을 느끼고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일 뿐이었다.
 
  그러나,
  "뭐, 뭐야, 이게!"
  "말도 안돼…"
 
  연구원들을 위협하던 정부측 요원들의 목소리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졌다.
 
  모든 이들은 눈을 뜨거나 고개를 들어 눈 앞에 벌어진 이해하지 못할 일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들어온 현상은, 충분히 저들과 같은 반응이 나오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차원의 균열이 발생할 때 생기는 특유의 미량의 소음과 함께, 눈부시게 빛나는 자색 섬광이 이 안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일반 차원종들이 나타날 때 생겨나는 차원의 균열과는 달리 매우 커다란 차원종이 출현할 때에나 발생할 정도의 차원의 균열이 플레인게이트가 무너져내린 바로 그 자리에 발생하였다. 이렇게나 커다란 차원의 균열은 지난 강남 사태 때 강남 상공에 출현한 초거대 차원문 이래로 본적이 없을 정도이다.

  "으아아악, 도망쳐! 차원의 균열이다!"
  "으아아아아아! 죽기 싫어!"
  "위상관통탄! 위상관통무기는 어딨어!"

  연구원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정부측 요원들은 자기들이 가진 위상병기를 꺼내어들고 차원의 균열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그들이 적대관계라고 할지라도 인간이다. 인간은 차원종과의 적대관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기에, 그들의 공통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차원의 균열은 인류 공통의 적인 차원종이 출현하는 통로이기에, 모두가 이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듯 하다.
  현재의 상황을 은발의 여성이 무전기를 통해 그녀의 상관에게 보고한다.

  "여기는 서나현, 관리관 님께 보고합니다!"
  『말씀하세요, 나현 씨.』
  "플레인게이트를 파괴했습니다. 그런데…"
  『뭐죠?』
  "차원의 균열이 그 자리에서 발생한 채로, 닫히지 않습니다…"
  『……』

  모두가 균열 사이에서 나타날 차원종들을 걱정하였지만, 이미 벌어진 균열 사이로 차원종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단 한 마리의 차원종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지금의 상황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상황이다. 차원의 균열은 보통 차원종들이 나타날 때나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단 한 명 뿐이었다. 바로 벌처스의 현 사장, 김가면으로 알려진 남자이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플레인게이트가 닫히기 원한다면, 우리가 폐쇄하도록 놔두라고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플레인게이트를 파괴한 은발의 여성이 곧바로 뒤를 돌아보고 날선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당신, 무슨 짓을 한거야!"
  "저는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저는 플레인게이트의 원리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죠."
  "뭐라고…"
  "우리 벌처스는 지난 강남 사태동안 차원종들과 내통하면서, 플레인게이트의 좌표 설정과 설치, 해제에 관한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사장이 바뀌면서도 여전히 우리 벌처스에는 그 기술이 남아있죠.
  저는 또 다시 플레인게이트가 열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열린 플레인게이트를 완전히 닫을 궁리만 하고 있었죠. 그 때 마침 유니온이 우리 벌처스에게 플레인게이트의 폐쇄를 지시했고, 저는 기회를 잡아 폐쇄를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요건만 말해!"
  "그러죠. 플레인게이트는 그저 구조물을 파괴한다고 해서 닫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파괴한 그 구조물은 데미플레인(외부차원)과 이어진 바로 저 차원의 균열이 더욱 뚜렷해지도록 도와주는 보조기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이미 발생한 차원의 균열부터 어떻게 하지 않는한, 플레인게이트는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겁니다."
  "아, 아아아… 이럴 순 없어… 이래서는 안돼!"

  그 때였다. 저 멀리서 매우 빠르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그들의 뒤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매우 익숙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꼼짝마! 너희를 체포하겠다!"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제 창이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바이올렛과 미스틸테인이다.
  위의 전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에 트레이너는 두 사람에게 안으로 진입하여 적들을 체포할 것을 지시했고, 그들은 티나의 총격으로 플레인게이트 입구의 문이 뜯겨져나감과 동시에 안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지하까지 도착한 것이다.

  여전히 수적으로는 유리한 4대 2의 입장이지만, 정부의 요원들은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밖의 상황이 이미 충분히 안좋게 흘러가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데다가 두 명의 위상능력자들이 자신들을 잡으러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을 보면서, 그들은 아마도 밖의 상황이 얼추 정리된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들의 참패일 것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전기에서 상급자의 지시는 내려오지 않는다. 아마도 그 역시 이미 체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리석게 덤벼드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이미 유니온은 그들을 버렸고, 유니온 상급자들은 자신들의 어두운 모습을 가리기 위해 그들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곧 유니온의 정예 클로저들이 속속들이 이곳에 도착하겠지.

  궁지에 몰린 이들은 초조해하며 자신의 상급자인 은발의 여성에게 물었다.
  "서나현 팀장님, 어떻게 하죠?"
  "팀장님, 이거 저 녀석들과 싸워도 답이 없을 겁니다."
  "…"

  도망치건 아니면 이렇게 대치하건, 결국 그들은 체포된다.
  체포된 후에 정부의 개입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까지는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서나현이라고 이름불린 은발의 여성은 자신의 무기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행동을 본 다른 세 명의 정부측 요원들도 역시 자신들이 가진 위상병기를 천천히 땅으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모두는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것은 항복의 뜻을 표하는 무언의 신호이다.

  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머리에 손을 올린채 땅에 무릎을 꿇는다. 그들이 항복하기 위해 저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린 미스틸테인과 바이올렛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위상병기를 거두어 그들과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일일히 그들의 몸을 수색하며 그들의 무장이 완전히 해제된 것을 확인하고서야, 두 사람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꺼림직한 마음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저 플레인게이트가 있던 자리에 열린 커다란 차원의 균열 때문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저 보라색 섬광은 그들로서는 굳이 직접 보고싶지 않을 것이다.
  저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저렇게 계속해서 차원종도 나오지 않은채로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그들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밖에 있는 이들이 어서 합류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바이올렛은 귀에 차고 있는 무전기를 통해 트레이너를 향해 현재 상황을 송신했다.
  "여기는 바이올렛, 트레이너 대장님께 교전 결과를 보고합니다."


  ◆ 20-2


  슬비다.
  이 따뜻한 느낌, 그리고 이 위상력, 분명히 슬비의 것이다.
  주위는 여전히 어둡지만 알 수 있다, 그녀를 향한 내 직감은 절대 틀림이 없으니까.

  손을 내뻗어보았다.
  나 외에는 색이 없는 칠흑의 어둠에 있지만, 적어도 내가 손을 뻗었다는 감각은 분명히 있었다.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서 나는 손을 내뻗었다. 그건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감촉을 놓치고싶지 않은 발버둥과 같았다.

  그러다 문득 눈에 환상처럼 보이는게 있었다.
  그것은 내가 슬비를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나는 슬비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공격하고 있고, 슬비는 상처를 입은 채로 내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다니고 있다.
  말로 할 수 없는 이 이상한 환각, 도대체 이게 뭐지?

  설마 나를 좀먹은 차원종의 의식이 슬비를 공격하고 있는걸까?
  안돼. 절대로 안돼. 이대로 슬비가 공격당하게 놔둘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표면으로 드러난 의식을 끌어내려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방법을 모른다.
  어떻게 해야 내가 이 어둠 속을 탈출하여 표면으로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너무나도 무능한 내가 밉다. 그리고 나 대신 나인척 하는 그 녀석도 싫다.

  당장 사라져!
  슬비를 가만히 놔둬!
  내 몸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란 말이야!
 
  "웃기지마, 이세하."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이다. 나의 의식을 좀먹어가면서 마침내 나를 차지한 녀석, 차원종의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이세하이다.

  "이슬비는 방해꾼이야. 네가 원하는 건 복수잖아?"
  "그래, 난 데이비드를 쓰러뜨리길 원해. 그건 지금도 여전히.
  놈을 쓰러뜨리고 슬비의 앞에서 무릎꿇고 빌게 만들거야."
  "그렇다면 가만히 있어. 네가 원하는 복수, 내가 이뤄줄테니까."

  미쳤어? 
  너 따위의 도움 필요없어.
  너의 의지는 내 의지가 아니야. 이대로면 나는 그저 방관자에 지나지 않아. 절대로 너 따위에게 이 몸을 넘겨줄 생각도 없고, 네게 복수를 의탁할 생각도 없으니까.
  
  "당장 사라져."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대신 나를 향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놈은 내 바로 옆에 있었다.

  소름끼칠만큼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다. 놈과 나는 똑같았다, 생김새도, 입고 있는 옷도. 다만 다른 하나는 눈의 색이었다. 놈은 여느 차원종과 마찬가지로 붉은 눈을 하고 있었고, 아마 나는 렌즈를 벗은채로 있을테니 금색일테지.
  놈과 나는 분명히 차이가 있고, 놈이 아무리 나를 모방하려 하더라도, 놈과 나는 다르다.

  "아니, '너'는 '나'야."
 
  내 생각을 읽은걸까? 하지만 난 너와 다르다.
  너는 이세하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아.

  "하! 모조품?"

  놈은 나를 향해 웃고 있다.
  보란듯이 그리고 무척이나 한심한듯이 나를 보면서 폭소하고 있다.
  기분 나빠.

  "진품 - 이세하 - 이 사라지면, 모조품 - 나 - 이 진품이지."

  놈이 일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녀석은 어느새인가 나를 향해 건블레이드를 휘두른다.
  몸을 날려서 겨우 피했지만, 놈은 나를 죽이려는 건가?

  "그래, 널 죽일거야. 너를 죽이고 내가 진짜가 되겠어."

  죽어? 내가?
  아니, 죽을 수 없어.

  "죽는 건 너야, 차원종."

  어느새인가 내 오른손에도 놈과 같은 무기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놈은 나와 마주보며 대치하고 있다.
 
  "그래. 덤벼봐, 이세하."
 
  놈을 반드시 쓰러뜨린다.
  난 절대 지지 않을테니까, 각오해 차원종.

.
.
.


  "하하하, 쫄래쫄래 피하는게 우습구나!"

  이세하의 공격은 엄청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그는 지금까지 이슬비와의 접전 때마다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차원종의 인격이 지배하기 시작한 지금, 더이상은 그런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
 
  지근거리에서 공격에는 그녀가 대항하기 힘들다는 것을 눈치챈 세하는 그녀를 향해 쉴새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과거 그의 공격이 위상병기를 사용하여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위상병기를 활용하여 위상력의 방출을 십분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의 타격 후에는 반드시 후폭풍처럼 그의 위상력에 의한 또 다른 공격이 연달아 오기 때문에, 그런 스타일의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슬비는 방어 대신 회피로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다.
  
  푹.
  갑자기 그가 슬비와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땅을 향해 힘껏 검을 박아넣었다.
  그녀는 그의 행동이 결코 허투로 행해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어떤 공격이 이어질지 고민하며 일단 그와의 거리를 벌리기로 하였다. 그가 저렇게 한 자리에 고정된 채로 있는 지금이야말로, 지금까지 계속하여 이어오던 근접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이며 반격을 틈탈 수 있는 기회이다. 

  도약하기 위해 위상력을 다리로 흘려보내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발에 와닿는 열기를 느꼈다. 그건 분명히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열이었고, 그 열의 온도는 계속해서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그녀의 뒤를 땅을 가르며 솟구친 검푸른 불꽃들이 쫓는다.

  "큭!"
 
  1초라도 늦었으면 분명히 그녀는 저 불꽃에 삼켜졌을 것이다.
  오싹한 느낌이 그녀의 전신을 타고 흘렀고, 차가운 땀방울이 이마에 맺혔다. 다행히도 그녀는 모든 불꽃들을 회피하는데 성공했고, 공기 중으로 스러져가는 화염들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렇지만 파괴자는 절대로 그녀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우우웅, 철과 같은 물질이 공명(共鳴)하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는 바로 그녀의 뒤, 그녀는 이것이 분명히 이어지는 공격이라 직감했고 급히 자켓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초소형 웜홀 캡슐을 꺼내 아래를 향해 떨어뜨렸다. 캡슐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를 빨아들이는 공간의 구멍을 발생시켰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10미터 쯤 아래로 떨어진 곳에 그녀를 다시 내뱉었다.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녀는 똑똑히 파괴자의 살육행위를 지켜보았다. 바로 자신이 방금 전까지 있던 그 자리의 뒤에 나타난 이세하가 검 끝으로 화염을 일제히 방출하여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이 아래쪽에 있는 그녀를 향했고 시선이 맞닿았다. 적색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그녀는 몸을 떨었다.

  검은색의 갑주 근처로 빛이 휘감겼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향해 노리고 들어올 저 공격의 정체를 알고 있다. 몸 주위로 휘감긴 위상력을 폭발시킴으로써 온몸에 엄청난 스피드를 부여하여 그대로 검을 내찌르는게 바로 저 공격이다. 이 때 폭발하는 위상력이 만들어내는 빛이 마치 별빛과 흡사한데, 이 빛이 지상을 향해 떨어지기 때문에 저러한 부류의 공격에 세하가 붙인 이름은 유성검.
  이세하의 육체를 지배할 뿐 완전히 그와는 다른 의식인 저 차원종은 그의 공격마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것일까. 슬비는 그의 공격을 보면서도 회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위상력의 폭발하며 만들어지는 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검푸른 빛이 감도는 그는 마치, 쉬이 형용할 수 없는 검은 별과 같이 아름다웠다.

  "이 빛에,"

  정신을 뒤늦게서야 그의 말을 듣고 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이 정도의 거리를 우습게 좁힐 것이다. 그녀에겐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잠겨라."

  10미터의 거리는 그녀의 예상대로 우스울정도로 짧았다.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 그는 그녀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내질렀고, 그녀는 급히 소환한 비트들로 검을 맞받아쳤다. 그러나 워낙에 빠른 스피드에 비트들은 모두 튕겨나갔고, 검 끝은 그녀를 꿰뚫기위해 매섭게 치고들어왔다. 완벽히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 것을 그녀는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대로 저 검에 관통당하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일 뿐.

  "윽!"

  갑자기 스며나온 그의 짧은 신음과 함께 검 끝이 그녀의 바로 옆을 스쳐지나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검에 몸이 관통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이 그녀와 그대로 충돌하여 지상에 처박혔다.

  "끄아!"
  
  강하게 지상과 충돌하기가 무섭게 튕겨져나온 그녀는 온몸을 달리는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머리와 등 부분을 강하게 부딪혀서 정신마저 얼얼했다. 그런데 공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지상과 충돌한 세하의 검에서 검푸른 위상력이 한껏 쏟아져나와 그녀가 튕겨져나가고 있는 방향을 향해 흩어진다. 그리고 방출된 위상력은 그대로 그녀의 남은 위상력 안정기를 박살내고, 무방비상태의 온몸을 유린했다. 방출과 가열에 특화된 그의 위상력이 품은 열은 슬비가 입고 있는 요원복의 위상섬유를 태우고 찢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남은 하나의 위상력 안정기가 그의 공격을 흡수하면서 목 위로는 대부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 아래로는 꽤나 큰 부상을 입어야만 했다. 위상섬유를 태우고 들어온 열은 그녀의 몸에 화상을 입힌 데다가, 위상력이 실린 공격으로부터 보호작용을 하는 그녀의 요원복의 곳곳을 찢어놓아 더이상 방호력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까의 충돌의 충격으로 어깨가 탈골된 것인지 그녀는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었고, 타박상과 찰과상이 한꺼번에 발생하여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방어는 물론 회피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무방비상태에 처한 이슬비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눈에 담았다.

  "운이 좋았어. 설마 그 덜떨어진 녀석이 방해를 할 줄이야."

  그가 말한 그 덜떨어진 녀석이란 본래의 이세하를 말함이 틀림없다. 하지만 슬비는 그가 방해를 했다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행운은 한 번으로 족해. 이제 너도 나처럼 되는거야, 이슬비."

  그는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을만한 정도임에도, 그녀의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꼼짝없이 세하와 마찬가지로 차원종이 되는 것일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비록 자신의 의지는 아닐지라도 차원종이 되는 것 역시 나쁜 결말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도저히 정상적인 그녀의 사고는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몸도 움직일 수 없는데, 그를 쓰러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이었는지도 몰랐다고.
  불완전하지만 지금의 이세하는 제3위상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특수요원이 된 그녀의 힘이라고 할지라도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할 수 있으리라 믿었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은 현실의 벽에 그녀는 결국 부딪히고 말았다.

  결국 슬비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절대로 그의 앞에서만큼은 눈물 흘리지 않으려고 했던 그녀였지만, 결국 울어버렸다. 너무나도 약한 자신이 미워서, 그리고 냉정한 현실이 싫어서, 그런 이유로 그녀는 울어야만 했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서 그는 웃음지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달라보일거야."

  바로 그녀의 옆까지 다가온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오른손을 올렸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이대로 그녀는 그의 위상력에 잠식당하게 되리라.
  그녀는 그렇게 되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세하…"

.
.
.

  "슬비는 어디로 갔니?"
  "저, 앞으로…"
 
  서유리는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물어오는 여성의 질문에 자신의 착각은 부정당하고 말았다.
  그 많은 차원종이 낯선 여성의 공격에 전멸했다. 수적 우위에 압도당하던 그녀로서는 어디선가 나타난 이 도움이 감사하기만 했다.

  처음보는 여성이다.
  날리는 머릿칼은 한땀으로 묶고 있었고, 한 손에는 검으로 보이는 위상병기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저 여성의 실력이라면 저런 것 없이도 능히 적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여성이 보여준 공격은 경이로울 정도로 짙은 위상력의 질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클로저인 서유리는 분명히 추측할 수 있었다.

  푸른색과 백색이 섞인 전류를 머금은 위상력은 마치 그녀가 알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와는 다르게 금안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는 아주 평범한 눈을 하고 있었기에, 이 여성이 그 남자와 딱히 관계가 있다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는 육감은 이상하게도 이 여성에게서 그 남자의 느낌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말 못할 직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여성에게 이름을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여성이 말하기를,
  "플레인게이트가 외부 세력에 의해 공격 받고 있어. 그러니 너는 이대로 복귀해서 내부차원으로 되돌아가렴."
  "아… 네."

  클로저로 보이는 이 여성은, 대답만 듣고서 재와 먼지의 영지로 더욱 깊숙히 들어갔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여성의 잔상을 바라보면서, 유리는 혼잣말을 내었다.
 
  "이름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여성이 전해준 말은, 플레인게이트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나쁜 소식이었다. 최대한 빨리 그녀는 플레인게이트로 복귀해야만 했다.

  분명히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앎에도 그녀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저 안으로 먼저 들어간 슬비를 놔두고 먼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 때문이겠지.
  하지만 자신보다 더 강한 의문의 여성이 슬비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으니 안심하기로 하고, 그녀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 앞에서 수많은 차원종들을 일격으로 도살했던 그 여성,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왜 그녀에게서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 - 이세하 - 의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내용이 너무 많아 한 화에 올릴 수 없어 나누어 씁니다.
   20-2화에서 이어집니다.



2024-10-24 23:13:4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