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Coucha(紅茶)
루이벨라 2017-02-01 10
"다녀올게요~!!"
활기차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나를 보고 엄마는 '몸조심해!' 라는 말을 하신다. 내가 아직 어린 아이인가. 나갈 때마다 몸조심하라는 말을 하시게...나는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나아갔다.
벚꽃이 만연한 지금은, 봄이었다.
봄.
아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아닐까, 싶다. 아주 솔직한 이유로는 봄인 5월에 내 생일이 껴있다는 것 때문에 좋아하지만, 대외적인 이유를 들자면 만연한 벚꽃을 보는 즐거움이 있어서라고 말한다. 평소보다 가볍게 굴러지는 자전거 페달은 마냥 벚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집에서 10분 거리인 한 차(茶)를 파는 카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를 많이 보아 이제는 얼굴이 익숙해진 주인아저씨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오셨군요?”
“아아, 안녕하세요~”
“오늘도 똑같은 차, 맞으시죠?”
“네, 부탁드릴게요.”
주인아저씨께 차를 주문하고 나는 언제나 앉는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로 향했다. 주인아저씨가 말하는 대로 난 이 카페를 매일 매일 찾아온다. 집과도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주인아저씨가 나하고 음악적 취향이 같으신지 라디오에는 매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산하고 조용한 이 카페를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매일 찾아와 이제는 주인아저씨와는 얼굴이 구면인 상태가 되었을 정도였다.
“여기, 옅은 홍차요.”
“감사합니다.”
홍차를 한 모금 음미하면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평화로웠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시기에는 이 카페를 찾아와서 홍차를 마시며 이렇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노라면 복잡했던 마음도 점점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심은 원래부터 작았던 것처럼 점점...찻잔 안으로 소용돌이를 치며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유리야...!”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슬비였다. 유니온의 특수 요원복 위에 밝은 색의 코트를 걸치고 온 슬비를 보자 기분이 미묘했다. 나도 한때는 슬비의 저 하얀 요원복을 입고 유니온에서 클로저로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 잠시 생각이 나서...
...지금의 난 클로저를 은퇴한 상태였다.
슬비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더니 내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으응...잘 지냈어...미안해...연락은 하고 지내야했는데...”
“아니야, 나도 먼저 안 했던 잘못이 컸어...일단 앉자.”
클로저를 은퇴한 이후, 예전 팀 동료에게 먼저 연락을 거는 건 꺼려졌다. 전화 너머로 왜 그만두었냐는 말을 필두로, 나에 대한 원망이 들릴 거 같아서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용기가 나온 건 최근의 일이었다.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조금, 그 조그만 용기도 부족해서 한동안 동고동락했던 이들을 외면했다는 게 또 가슴에 찔렸다.
이런 나의 불안과는 달리 슬비는 반가운 얼굴이었다. 밖이 추운지 슬비의 두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일단 차부터 시킬까? 아, 이미 시켰네.”
“응. 이 집은 홍차 옅게 해서, 우유 살짝 붓는 게 제일 맛있어.”
“그래? 그럼 나도 한번...”
홍차는 옅게, 그리고 우유는 살짝 부어서. 이 공식을 지킨 지는 꽤나 되었다. 이 공식을 지키고 있는 내가 꽤나 고집스럽게도 느껴졌다. 난 그렇게 차(茶)매니아가 아니어서, 이런 나만의 공식을 지킬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난 생각 외로 이 공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건 옅게 한 홍차에, 우유를 살짝 부어 마시는 거야...
아...이 카페에 올 때마다 애써 외면했던 ‘그 목소리’ 가 살짝 들렸다. 상냥하면서도 부드러운, 또렷하지는 않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듯 형태로만 들리는...하지만 그 희미한 형태여도 나한테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목소리가 다시금 안 들리게끔 했다.
난 아직도 겁쟁이인가보다.
슬비의 차까지 나오자, 우리 둘은 이야기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만나지 못해서 나눌 수 없었던 서로의 근황, 옛날에 같이 지냈던 일, 앞으로의 계획 등등...나누고 싶은 말은 많았고, 시간은 짧았다. 불과 1분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였다. 슬비가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그러고 보니 뉴욕에서 편지가 왔어.”
“...”
뉴욕에서 편지가 왔어, 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나뉘어 있었다. 슬비가 승진해서 총본부로 오라는 말이라던가, 슬비가 교류전에서 유니온 뉴욕 총본부 소속의 클로저와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다던가...
하지만 나한테 ‘뉴욕에서 편지가 왔다’ 라는 말은 딱 한 가지 의미로만 통했다. 뉴욕 소인이 찍힌 편지를 슬비가 내 앞에 내밀었을 때, 난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라는 걸 알았다.
편지 봉투에 깔끔하게 적힌 수신인의 이름. S.Lee.
슬비와는 너무도 오랜만에 만나서 차마 이 이야기까지 나오기 전에 시간이 다 가버릴 줄 알았는데...슬비는 나에게 편지를 읽어보라고 권유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짧게 이 말을 할 뿐.
“잘 지내고 있대.”
“...”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아니...다행인가?
난 솔직히 그 아이가 잘 지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적어도, 나하고 같이 있을 때보다는 덜 행복했으면 좋겠어...이것도 나의 이상한 고집 중 하나였다.
“유리야...?”
“아, 미안. 잠시 딴 생각 하느라고.”
“...미안.”
우리 둘은 미안하다는 말을 꺼냈다. 도대체 뭐가 서로에게 미안한 걸까. 모처럼 오랜만에 만났는데, 미안하다라는 말만 하는, 이건 도대체 뭘까. 좋은 기분으로 만난 건데, 갑자기 착잡해지다니.
“이렇게 편지를 보내더라고. 한 달에 한번 정도?”
“그렇구나...”
“...미안.”
또, 슬비가 미안하다라는 말을 꺼냈다. 왜 그래? 슬비 잘못인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잘못인건 괜히 꿍해 있는 나와, 그리고...‘그 아이’.
분위기는 몇 시간동안의 해우를 다 없애버린 듯,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그 어색함을 견디다 못한 슬비가 얼른 시간을 확인하더니 옆에 있던 코트를 집었다. 갈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보내기는 아쉬웠는데, 이상하게 말이며 팔이며 가지 말라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나도 오랜만에 슬비 만나서 즐거웠어!”
...진짜 즐거웠을까.
“가끔씩 연락하자.”
“응.”
가끔씩, 이런 주관적인 시간 개념은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개인마다 가끔씩의 차이는 있으니까. 슬비 같은 경우는 가끔씩이 한 달에 한번, 길어야 몇 달에 한번, 이라는 표현으로 쓰겠지만 ‘지금의’ 나한테 ‘가끔씩’ 이란...
...평생 연락을 안 할 수도 있었다.
저 멀리 가버리는 슬비를 배웅하면서 난 다시 카페에 들어왔다. 내 앞에는 슬비가 마시던 찻잔과, 뉴욕 소인의 편지 봉투...
아? 슬비가 급하게 나가더니 두고 갔나 보다. 이걸 돌려주어야하는데, 그렇다고 방금 전의 그 분위기에 바로 가서 손에 쥐어주기는 좀 그랬다. 오늘 슬비를 만나는데도 아주 조금의 용기가 필요했다. 또 그만큼의 용기를 가져야만 슬비와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 난 그 조금의 용기도 쉽게 얻지 못하는...한심한 겁쟁이였다.
봉투에 써 있는 수신인의 이름을 다시 보았다. S.Lee. 깔끔한 필체였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의외로 글씨체가 참 동글동글하니 이쁜 편이었는데. 악필인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아아, 안 돼...또 그 생각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서유리!
비죽, 튀어나온 편지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읽을까? 안 돼! 읽으면 더 이상 돌아올지도 몰라. 지금 이렇게 간신히 살고 있는 것도,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내 마음 속의 이성적인 서유리는 계속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본래의 호기심 많은 서유리는 그걸 참지 못하고...편지지를 꺼냈다.
편지지에는, 뉴욕에서의 생활이 이러하고 저러하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냐, 조만간 또 편지를 보내겠다, 라는 식의 형식적인 편지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친한 사람에 보내는 편지라기보다는, 그냥 정기적으로 내는 보고서 형식의 편지였다. 그런데...이런 편지라도 받은 슬비가...
...너무 부러워...
편지를 보낸 수신인의 이름은 S.Lee. Seha Lee. 이세하. 우리 <검은양> 팀 소속 클로저였다.
그리고...나의 첫 연인이었다.
* * *
우리 둘은 사귀었던 사이였다. 내 인생에 있어서 세하는 첫 남자친구였고, 아마도 세하에게도 내가 첫 여자친구였던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시작하는 일은, 늘 설레고 그와 동시에 서투르기만 하다. 우리도 딱 그러했다. 그리고...철도 없었다.
헤어지고 난 이후에 겨우 깨달았다. 영원한 건, 없다고. 영원을 약속했던 그런 것들, 다 없다고.
헤어진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는지 말을 꺼낸 사람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둘은 우리 사이가 곧 끝나리라는 건 알았다. 우리가 헤어진 직후, 세하는 뉴욕 총본부로 떠났고 나는 클로저를 그만두었다. 슬비가 내 앞에서 조심스러웠던 이유와, 내가 슬비에게 먼저 연락하기를 꺼렸던 이유...그 이유 때문이었다.
처음 시작은 벚꽃이 만개하기 직전의 봄. 어느 지하철 역에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것도 똑같은 봄에, 그 지하철 역에서였다. 얼마 전에 헤어진 이후로는 처음으로 그 지하철 역을 지나치게 되었다. 오랜만에 간 그 지하철 역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벚꽃나무도 똑같고, 간판도, 근처에 있는 빵집도...변한 것은 없었다.
변한 건 내가 혼자, 라는 사실 뿐이었다.
사귄 기간보다 헤어진 이후의 기간이 더 김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상처가 남아있음을 느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홍차. 이 카페도 사실은 세하와 한겨울에 거리 투어를 하면서 알아낸 곳이었다. 그때 세하가 나에게 했던 말이,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건 옅게 한 홍차에, 우유를 살짝 부어 마시는 거야.
였다. 그리고 난 그걸 지금까지도 꾸준히 지키고 있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참 고집스러웠다.
그 때, 세하와 나란히 앉아서 마신 홍차의 맛은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맛을 느끼고 싶어서 매일같이 찾아오는데도 그 홍차의 맛은...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 홍차 자체가 맛이 없어졌다라는 말은 아니었다. 세하와 마셨을 때에 비해, 덜 포근하고 덜 따뜻하다라는...그냥 주관적인 느낌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 때의 나는 순수했다. 어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너의 순수함에 떼가 묻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하셔서 지금의 내가 그 때의 비해 순수하지 못하다고 해서 막 아쉽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깨끗할수록 더 더러워지기는 쉬운 법이니까. 하지만 그 순수했던 때로 가끔씩 돌아가고 싶기는 했다.
자전거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그 때, 정말로 ‘유성’ 에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진다는 믿을 가졌던 그 때. 그 때의 난 참으로 순수했다.
같이 유성을 보러 간 날, 난 거의 울면서 부탁했다.
-정말...떠나면 안 된다? 알았지?
그 때 세하는 뭐라고 했더라. 긍정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 위로 손을 턱, 올렸다. 그게 세하 나름의 긍정의 표시였다.
유성을 보러 간 건 나의 작은 욕심, 내가 지금과도 같은 겁쟁이여서였다. 모월 모일에, 유성이 어디어디에서 떨어진다, 라는 뉴스를 본 난 세하의 손을 붙잡고 보러 가자고, 소원을 빌러 가자고 **댔었다.
-유성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
-그걸 아직도 믿는 거야?
-에에, 믿을 수도 있지!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유성이 떨어지는 걸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잖아!
결국 나의 반쯤은 애걸, 반쯤은 권유로 해서 세하도 같이 유성을 보러 갔었다. 그리고 그 가는 동안, 내가 세하에게 꼭 소원을 빌어**다고 거의 최면 같이 말했던 게 기억난다. 그것도 꼭...우리 잘 되게 해달라고.
그 날은 유성이 정말로 떨어졌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여러 번. 마치 비(雨)같이 쏟아져 내렸다. 그걸 별똥비라고 하던가? 그렇게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우 속에서 나는 소원을 빌었다.
늘, 이대로 세하와 같이 있게 해주세요.
유성우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여운이 남아 한동안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여름밤 공기는 제법 쌀쌀해서 우리 둘은 붙어 있었다.
-...예뻤다, 그치?
-유리 넌 소원을 비느라 제대로 감상도 못 한 거 같던데.
-그래도 볼 건 다 보았다고! 예뻤어!
쭉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를 꼭 끌어안아주던 그 날의 세하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떠나지 않는다던 그 말은 나에게 부적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변하지 않는다고, 떠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 말이 ‘영원’ 할 거라고 믿었던 그 시절의 나는...
순수했다.
아마 세하도 나와 같았지 않았을까.
쓸쓸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큰 거짓말이었다. 헤어진 뒤로 오는 쓸쓸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그렇지 않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같이 정한 선택인 이상, 후회해서는 안 되었다. 서로에게 더 좋은 길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작게 축복해주는 게 예의였다.
내가 스스로 한 선택인 이상, 후회는 해서는 안 되는 금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울고 싶어졌던 건 뭘까. 우리가 헤어진 날, 나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펑펑 울었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로. 세하는...어땠는지 모른다. 이미 그 이후부터 우리는 별로 상관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걸. 세하가 어떤 심경인지 먼발치에서 쳐다볼 시간도 없었다. 그 직후 세하는 뉴욕으로 떠났으니까. 그리고 세하가 뉴욕으로 떠난 지 일주일 후, 나는 유정이 언니에게 ‘사직서’ 봉투를 건넸다.
나는 세하가 마지막 가는 길에도 세하의 앞날의 축복을 빌어주지 못했다. 난, 참으로 이기적이었다. 그건 지금도 그랬다.
* * *
“그럼 전 가볼게요.”
“네, 손님. 또 오세요~”
슬비가 간 뒤로도 1시간동안 남아서 홍차를 한 잔 더 시켜서 마셨다. 기분이 울적해지는 거 같아서 평소에는 안 먹는 각설탕도 하나 풀어서 같이 마셨다. 커다란 윈도우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서는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서야 시간이 저녁때에 가까워졌음을 안 나는 이제는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 주인아저씨께 인사를 하고 카페를 떠났다.
자전거를 타고 갈까 하다가 그냥 끌고 가기로 했다. 지금 기분에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들어갈 기분은 아니었다. 그냥 천천히 걸으며 생각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夏至)를 향해 가는 날짜 때문에 해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겨울에는 이 시간 때보다 1시간 먼저 집으로 돌아갔었다. 카페에서 혼자 차를 마시며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지는 게...좋은 의미일까, 나쁜 의미일까.
헤어진 이후로 내가 방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찾은 곳은 저 카페였다. 이상하게도 그 때 딱 한 번 마셨던 그 홍차가 다시 마시고 싶어졌다. 그 따뜻함이라도 있어야 이런 저런 감정이 떠오르는 걸 임시적으로라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매일 그 카페로 출퇴근을 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나름 천천히 걸었는데 벌써 집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내가 걸음이 좀 빠른 편이란 말이야...라고 혼자 중얼거리는데 집 대문 앞에 누군가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본래의 호기심 많은 서유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름 이성적인 서유리는 계속 외쳤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말라고!
...그 가지 말라는 목소리를 왜 무시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하얀 특수 요원 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성. 눈은 보석이라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영롱한 금안. 머리는 좀 더 차분하게 내려가 있고 눈 색도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언젠가 ‘이거 컬러 렌즈 한거야.’ 라는 말이 떠올라 본래의 눈 색이구나, 라고 바로 알아채버렸다.
쑥쓰러운 듯 내 앞에 멋쩍게 서 있던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고개를 살짝 숙이는데 손에 무언가를 쥔 것이 보였다. 편지 봉투? 지금 나한테 말을 걸고 있는 사람 역시도 긴장을 하고 있는 건지 손에 쥔 그 봉투가 다 꾸깃꾸깃해지고 있었다.
...나만 힘들어하는 거 아니구나, 그렇지?
세하가, 내게 다시 말했다.
“오랜만이야.”
“응...”
지금 이 순간만이야말로 아주 작은, 조금의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난 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잘 지냈어, 세하야?”
[작가의 말]
사카모토 마아야의 홍차를 듣고 끄적여보았습니다. 가사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새벽녘에 졸음을 참아가며 썼어요.
가사는 밑을 참조.
(+) 조만간 그동안 쓴 단편 모아 묶어서 떡제본으로 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