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클로저스 - The BEAST 1/3 ~ 2/3
layer21 2014-12-10 1
클로저스 – The BEAST
1/3
미 네브레스카 주, 장소 불명
데이빗은 그의 맞은 편에 일렬로 늘어선 책상 위를 눈으로 흝었다. 실내는 어두컴컴했고 그와 그들간의 거리는 멀었다. 구별할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어느 자리가 차고 비었는지 정도였다. 데이빗의 호출에 응한 이들은 ‘그들’ 중 채 절반이 되지 않았다.
보고한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날 우습게 여기는 거겠지. 데이빗은 안경코를 들어올리며 그 아래로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현재 신서울의 상황입니다.”
데이빗은 자신 앞에 놓인 영상 패널을 조작했다. 화면에는 검은 바탕에 흰 선으로 그려진 신서울의 지도가 나타났다. 이윽고, 그 곳곳에 반작이는 점들과 그 점들에서 뻗어나온 참조정보들이 빼곡히 신서울 위를 덮었다.
“근 일주일 사이, 총 227문의 차원문이 서울 전역에 걸쳐 열렸습니다.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체 클로저 요원의 19퍼센트가 손실되었습니다.”
책상 너머의 누군가가 특유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로 반문해왔다. 그 음성은, 데이빗이 한쪽 귀에 착용한 이어셋을 타고 흘렀을 뿐, 실내의 공기를 흔들진 못했다. ‘그들’과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다.
“메, 그렇습니다. 클로저의 손실은 늘상 있는 일이고 감수할만할 일입니다. 단지 그 때문에 직접 뵙길 청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을 봐주시죠. 시간대별로 차원문의 분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화면을 채웠던 대부분으 점들이 사라지고, 종로구를 가르는 구획 내에만 몇 개의 점들이 남아 반짝였다. 곧, 광점들이 사라졌다가 종로구와 맞닿은 구획들 이곳 저곳에 다시 나타났다.
그 숫자는 조금 더 많았다. 그리고 또 사라지고, 더 넓게 퍼져나간 구획에 더 많은 광점들이 이리저리 흩뿌려졌다. 이러한 확산의 흐름이 몇 차례 반복되고서야 화면이 멎었다.
“한 점을 중심으로 차원문들이 동심원을 이루며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 중심점에 해당하는 청계광장 일대를 조사한 결과, 강력한 위상력이 응집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직 열리지 않은 거대한 차원문이며, 그 힘에 떠밀려 서울 전역에 작은 차원문들이 열리고 있다 생각합니다. 마치 수면에 이는 파문처럼 말이죠.”
데이빗은 그들의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어떠한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지만, 데이빗은 분명히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이 질문할때까지 잠자코 침묵을 즐겼다.
“네. 물론 대책은 수립해 두았습니다.”
이제 회의의 주도권은 데이빗의 것이었다. 화면에 새로운 영상이 떠올랐다. 여러 개의 색을 달리한 동심원과 긴 숫자열, 가파르게 꺾인 곡선 그래프들이었다.
“문제는 거대 차원문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채로 힘을 키워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열리지 않았으니 클로저Closer라도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쪽에서 먼저 열고자 합니다. 선수를 쳐서, 강제로 문을 열고 다시 닫는다, 이게 제 작전안입니다.”
다시금 침묵이 술렁거렸다. 이번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몰아칠 때였다.
“이 일엔 강력한 힘이 필요합니다. 전 ‘발뭉’의 사용허가를 원합니다.”
아까와 달리 반문이 즉각 돌아왔다.
“사용자로는 그 소년을 쓰고 싶습니다만.”
당신들이 나몰래 관심을 보이던 그 아이 말이지. 데이빗이 어둠속에서 활짝 웃음지었다.
신서울 청량리역 인근, PM 11:00
유정은 피곤한 기색으로 전술지휘차량의 문을 열었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차원문들의 습격(?)에 며칠째 현장과 본부를 오가며 철야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바로 문 앞에 앉은 슬비가 지친 기색도 없이 평소같은 똑 부러지는 음성으로 인사했다.
슬비는 한 손에 펜을 들고, 무릎과 차량 내부의 전술 장비들 위로 책과 노트들을 잔뜩 올려둔 채 공부중이었다.
아차차. 시험기간이라고 했었지. 유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클로저라고 해도 아직 아이들이고 학생이야. 넌 어른이고. 피곤을 투덜댈 게제가 아니었다.
“미안해! 시험공부하기도 바쁠 때인데 이런데다 기약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게만 하고.”
유정은 손바닥을 덥썩 모아 용서를 빌었다.
검은양팀은 두 조로 나뉘어 차원문이 열리고 있는 파문의 바깥쪽 원 지역에 배치되었다. 임무는 레귤러 클로저의 결손인원 발생시 백업. 바깥쪽 원둘레는 비교적 작고 덜 위험한 차원문들이 발생했지만, 문제는 계속되는 출동으로 인한 피로누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련한 성인 클로저들도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공부도 임무 중 대기도 다 해야할 일인걸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 …”
슬비는 말을 흐렸다. 그리고, 김유정 요원님이 어찌할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유정의 진심어린 표정에, 굳이 그런 말을 더할 필욘 없었다.
“… …그리고, 저 바보는 시험공부하곤 담을 쌓았으니까 더더욱 미안해하실거 없어요.”
슬비는 들고있던 펜 끝으로 안쪽의 세하를 가리켰다. 세하는 양쪽 귀에 이어폰을 곶고 휴대용 게임기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연신 버튼을 눌러대고 있었다.
“다 들리거든? 이 판만 끝내고 공부할거야.”
세하가 고개도 들지않고 대꾸했다.
“너, 두 시간 전에도 그렇게 말했아.”
“벌써 그렇게 됐다고?”
게임기의 배터리가 절반도 남지않은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세하는 기지개를 폈다.
“정말이네. 어쩐지 좀 피곤하더라. 야, 서유리. 일어나. 아홉시에 깨워달라며. 지금 열한시래.”
세하는 그의 옆에서 엎드려 자고있던 유리를 흔들었다.
“하아아암. 벌써어어?”
유리가 눈을 부비며 웅얼거렸다. 유정은 긴장이 풀려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세하는 바람을 쐬러 차량 밖으로 나왔다. 역 앞 광장과 도로는 길목을 막아선 장갑차량들로 즐비했다. 그 중 한 차량 아래에 보호구를 착용한 남자들 몇이 모여 두런거리는게 보였다. 차림새를 보건대, 클로저 요원은 아니고 경찰이나 유니온의 전투요원인듯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저기!”
“네?”
이십대 중반이나 됐을까. 그 차림에도 잔뜩 멋을 부린 머리 모양새가 가벼워 보이는남자였다.
“있잖아. 네가 혹시 검은양팀의 이세하?”
“네. 그런데요?”
세하는 반사적으로 날카롭게 되물었다.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맞나해서.”
남자는 그러게 말하곤 다시 자신의 무리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감탄과 익숙한 이름이 오가는걸 얼핏 들을수 있었다.
역시나.
무슨 이야기인지는 뻔했다. 다들 그렇게 떠들었으니까. 저 애가 글쎄, 그 사람의 아들이래. 그래. 맞아. 차원전쟁의 영웅이라는 그 여자.
“칫.”
세하가 발길에 닿은 쓰레기 뭉치를 아무렇게나 걷어찼다.
너도 어머니처럼 훌륭한… … 그 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 네 어머니만큼만… … 어머니. 어머니. 모두가 날 보며 엄마 얘길해.
어릴적부터, 그에게 클로저의 가능성이 엿보였을 때부터 줄곧 그래왔다. 자랑스러움이 부담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가 기대에 못 미칠 때 마다 사람들이 채 감추지 못하는 실망스런 표정이면 충분했다.
불쑥 바지춤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슬비였다.
“야, 이세하! 작전 지역 내에선 장비랑 이어셋 빼놓지 말랬지!?”
슬비가 세하에게 자주 그렇듯 빽 소리질렀다.
“아, 그래. 그랬지. 알았어. 그래서, 무슨 일이야?”
“어휴, 정말. 아무튼, 마무리 작업에 지원이 필요하다니까 네가 가봐.”
“싫은데. 너나 유리가 가면 되잖아.”
“유리는 아예 이불갈고 누워버렸어. 난 서류 작업할게 생겼고. 그럼 니가 이걸 할래?”
“하아, 그런걸 내가 할 수 있겠냐. 알았어. 내가 갈께.”
“여기서 뭘 하면 되요?”
세하가 이어셋에 대고 말했다. 현장은 차원종과 싸웠던 흔적들로 너덜너덜했고, 그 한 가운데의 허공엔 차원문의 잔상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 세하군. 별건 아니야. 게이트가 닫힌거 보이지? 처리한 팀이 너무 피곤하다고 잔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기다리지 않고 가버렸어.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니까 세하군이 평형 상태가 될 때까지 지켜봐줘.”
차원문의 잔상은, 이를테면 문짝의 틈새라고 할 수 있다.
문이 닫히며, 일그러졌던 공간에 남은 자국같은 것이다. 위상력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흩어지게 되고, 0, 그러니까 평형 상태가 되면 구겨진 주름이 평평해지듯 잔상도 사라진다.
유정의 말처럼 별 것 아닌 일이었다.
멍하니 잔상을 바라보는 건, 금새 지루해졌다. 세하는 슬비 몰래 갖고나온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잔상은 알아서 사라질테고, 철수할 때가 되면 슬비가 또 부르겠지.
위상력의 변화를 눈치챈 건, 게임 속 보스와의 싸움이 한창인 때였다. 세하가 고개를 들자 다시 뚜렷해진 차원문이 불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어?”
상황을 이해하는데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걸렸다.
차원문 근처의 바닥에 작은 차원종 하나가 몸을 숨기고 문을 열고 있었다. 세하는 급히 건블레이드를 집어들고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발톱과 칼날을 맞부딪치면서도 세하는 곁눈질로 차원문을 살폈다. 문은, 당장 차원종이 넘어온다해도 이상할게 없을만큼 충분히 벌어진 것 같았다. 이 바보 멍청이, 대체 얼마나 게임을 한거야? 그리고 다든 사람들은 뭘 하고있는거지?
엉뚱한 원망이 세하를 더 화나게 했다. 그 때였다. 섬광이 번쩍이더니 차원문이 폭발해버렸다.
누구? 먼지가 흩날렸다. 유리? 슬비? 아냐. 검은양의 누구도 차원문을 먼저 부숴버릴 만한 힘은 없을텐데.
문을 연 차원종을 해치우고 나서야 차원문의 파괴가 가능하다.
그 역행은 어지간한 상급 클로저라도 손사레를 칠 만큼, 압도적인 위상력 차이가 나지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런 최상급 클로저가 바깥 원 지역에 왜… …
먼지가 걷히고, 붕, 하고 검을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났다. 세하와 비슷한 체격의 소년은 짙은 코발트 빛의 제복차림에 한쪽 어깨엔 거대한 대검을 맨 채, 세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본 적 없는 옷차림. 유니온 소속이 아닌가?
대검의 소년이 고갤 옆으로 까닥였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검을 고쳐잡고 그 끝을 세하에게 겨누었다. 어어어? 노골적인 적의를 느끼고 할 것도 없었다. 소년이 거대한 대검을 앞세워 세하에게 육박해 들어왔다. 다행히 세하의 몸은 머리보다 빨랐다.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갖췄다.
그러나, 소년은 더 빨랐다.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의 옷차림처럼, 그의 한쪽 눈동자도 짙은 푸른색임을 그제서야 세하는 알아차렸다.소년이 거리낌없이 경멸스런 눈빛을 내비쳤다.
“전투 중엔 한눈 파는게 아니야. 이세하.”
소년이 손목을 비틀자, 세하의 등 뒤편에서 차원종이 금속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청량리역 인근 유니온 전술지휘차량 내
“설명해 보시죠. 이 애가 누구길래 멋대로 현장에 침입해 날뛰었는지요.”
유정이 팔짱을 끼고는 눈 앞에 선 소년고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년의 독특한 검푸른 제복은, 그녀가 기억하는 한, 세계 어느 곳의 유니온 복장도 아니었다. 대신, 소년 옆의, 큰 키의 늘씬한 자태를 뽐내는 여성에게선 출신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옷깃에 달린 브로치는 분명 베를린 유니온의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특이한 구석은 있었다. 얼굴의 절반을 덮는 바이저를 끼고있는 것도 그렇고, 길고 흰 목에 선명한, 금속 재질의 검은 넥밴드도 눈길을 끌었다.
“나는 안나 크루거라고 해요. 당신과 같은 관리요원이죠. 그리고, 이쪽은 특무요원인 비스트. 코드네임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기밀사항이라 말해줄 수 없어요.”
유정의 뒤편에서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외모를 언급하는 유리의 목소린 두사람에게도 다 를릴 만큼 컸다. 얘들아, 제발 좀.
“나와 비스트는 현 시간부로 검은양팀에 합류합니다.”
“합류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검은양팀의 관리자인 제겐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요?”
“이제 듣게 될거에요. 당분간 만이에요. 우린 서울 중심부에 나타난 ‘감춰진 차원문’의 공략을 위해 파견된거니까요. 작전 직전까지만 함께 할 겁니다.”
안나 크루거는 품에서 신분증을 내보였다. 유정은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관리요원이라기엔 터무니없이 높은 직위였다.
“말도 안돼… … 아니, 근데 왜, 왜죠? 특수작전을 위해 왔으면서 왜 굳이 검은양팀에… …”
“그건, 내가 저녀석한테 흥미가 있거든요.”
잠자코 있던 비스트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가 가리킨 손끝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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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신서울 유니온 본부 51층
“두 사람 다 반가워. 이게 몇 년 만이지?”
데이빗은 유리로 덮인 빌딩 외벽을 등지고 서서 비스트와 안나를 맞았다. 유달리 화창한 날씨 덕에 햇빛으로 가득찬 그의 사무실은 제법 아늑해보였다.
비스트의 짙푸른 제복은 여전히 그가 정식 클로저가 아닌 연구소 소속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이제는 키가 거의 안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물론, 하이힐을 신은 안나는 여전히 비스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변한게 없었다. 여전히 아름답고… …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걸. 안나의 바이저에 데이빗의 얼굴이 반사돼 비쳤다.
“하, 데이빗. 연구소를 언제 떠났는지도 잊어버린거야?”
비스트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방 한 가운데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미리 두 사람이 온다고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직접 마중이라도 나갔을거야.”
데이빗은 비스트를 무시한 채 안나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 내 정신 좀 봐. 비스트, 어젯밤에 우리쪽이 네 도움을 받았다지? 이거 책임자로서 정식으로 감사인사라도 해야겠는걸.”
“그럼 해보시지.”
“뭐?”
“정식으로 해보시라고. 서울 유니온의 데이빗 씨.”
비스트가 고갤 옆으로 까딱이며 웃음을 흘렸다.
“우릴 떠난 뒤에 당신이 뭘하고 지내나 궁금했는데, 고작 이런데서 대장 놀이나 하고있다니. 좀 실망스럽네.”
데이빗이 안경을 천천히 치켜올렸다.
“서울은 차원전쟁의 격전지 중 하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현장을 원했던 내겐 만족스러운 곳이야.”
“현장… … 하긴. 당신에겐 최고의 실험실일지도 모르겠네. 뭐, 좋아. 그 ‘감춰진 차원문’이란건 어딨어? 당장 부숴버리겠어.”
“아니. 지금은 안돼. 준비가 덜 끝났어. 내가 명령할 때 까지 대기하도록 해.”
“명령? 지금도 당신이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비스트가 으르렁거렸다.
“준. 잊지마. 난 여기, 서울의 총책임자야. 여기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이상, 너도 안나도 내 지시에 따라야만 해. 명령에 따르는 법은 연구소 시절에 충분히 가르쳤던거 같은데?”
비스트가 일어나 데이빗을 향해 마주 섰다.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지껄일수 있나 볼까?”
비스트가 오른팔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대검이 투명한 장막을 거어내듯 드러났다.
“준. 그만둬.”
안나가 그를 제지했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날 그렇게 부르지 마!!”
비스트가 소리질렀다.
방을 둘러싼 유리벽이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사선들이 이리저리 엇갈렸다. 비스트의 위상력은 과거보다 훨신 더 강력해졌어. 연구소 놈들이 그의 잠재력을 어디까지 끌어낸거지? 데이빗은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비스트.”
안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금 그를 불렀다.
“날 봐. 비스트. 그만하면 됐어. 진정해.”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데이빗과는 내가 얘기할께. 그러니, 나가서 기다려줄래?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잠시 머뭇거리던 비스트는 성난 얼굴로 대꾸도 않고 안나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는 예전보다 더 감정 상태가 불안해 보이는군.”
“네가 일부러 그를 자극했으니까. 평상시엔 그렇지 않아.”
“평상시는 중요치 않아. 우리가 그에게 원한 건 그런게 아니었잖아, 안그래?”
데이빗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랑 말장난할 여유는 없어. 확실히 해두자. 내 직위는 너와 같고, 난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 독립 작전권을 갖고 있어. 작전 개시 후의 현장 지휘엔 따를게. 하지만, 다른 일들은 귀찮게 굴지마.”
데이빗이 안나에게 다가가 흘러내린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안나. 솔직히 물을께. ‘그들’이 ‘발뭉’의 주인으로 그를 선택한건가? 내 예상에 그들은 분명… …”
안나가 바이저를 벗어내렸다. 데이빗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의, 묘하게 슬퍼보이는 녹빛 눈동자가 깜빡였다.
“솔직히라니. 데이빗, 너답지 않은 말이네.”
한동안 두 사람의 눈빛만이 말없이 오갔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등을 돌렸다.
“하나만 더. 왜 검은양이지? 이세하에게 관심이 있어?”
“내가 아니야. 난 가급적 그러고 싶지 않았어. 비스트가 원한거지.”
안나의 하이힐이 또각또각, 소리내며 움직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좋는 데이빗의 눈은 알수없는 빛으로 반짝였다.
신강고등학교 검은양 임시본부실
신강고 내에 자리잡은 검은양의 임시본부실이 오늘따라 조용하기 그지없다. 유니온 본부 내에 당장 여유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의 빈 부활동실이 그들의 거처가 된지도 벌써 몇 달 째, 그 사이 처음보는 풍경이었다.
조용한 건 좋은데.
슬비는 책에서 눈을 떼며, 쥐고있던 펜을 뱅그르르, 돌렸다.
이건 조용하다기 보단 냉랭하다고 해야할 것 같단 말이지.
눈치에 약한 슬비마저도 부실 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원인도 알 것 같고.
슬비의 시선이 창가 쪽에 거만하게 한쪽 다리를 꼬고앉은 비스트를 향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줄곧 세하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반면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비스듬히 자리한 세하는, 분위기따윈 싱경쓰지않고 여느 때처럼 게임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평소 같은 걸로야 따지면, 유리나 제이도 비슷해 보였지만, 행동에 미묘하게 긴장감이 엿보였다. 예를 들면, 유리가 아주 조용히 컵라면을 먹는다던가, 한 입만 달라며 얼굴을 들이밀 제이가 묵묵히 이미 본 신문을 또 펼쳐든다던가 하는.
저 둘, 도대체 무슨 사이인건지.
슬비는 비스트와 세하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 응. 나 알아요.”
“진짜?”
테인의 태연한 대답에, 정작 물어본 슬비보다 먼저 유리가 소리질렀다. 비스트가 자릴 떠나고서야 부실의 분위기는 좀 자연스러워졌다. 일단, 유리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안나라는 여자가 베를린 유니온 사람이랬으니까. 테인은 알 것 같았어.”
슬비가 말했다. 비스트와 가장 가까이 앉고서도 가장 평소같던 테인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누군데? 어떤 사람인데!?”
유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독일에선 유명한 오빠에요. 어릴때부터 위상력이 엄청 강해서. 클로저 학교에서도 늘 탑이었고. 아홉살 땐 가, 처음 차원문을 닫았대요.”
“오빠가 아니라 형이겠지.”
어느새 들고있던 신문을 은근슬쩍 내리고 테인의 얘길 듣던 제이가 끼어들었다. 테인은 한국어가 서툴렀다.
“우와, 끝내주네. 그 나이에 차원문을 연 차원종을 해치웠단 말야? 초 앨리트야!”
유리의 반응이 재밌는지 테인이 해맑게 방긋거렸다.
“학교에서 오빠… … 형? 을 부르는 별명도 있었어요! 뭐냐면… … 음, 그게…. …”
테인이 곤란한 얼굴로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안되겠는지 벌떡 일어나 쪼르르 슬비에게 달려가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한국어로 모르겠대. 음, 어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준비된… … 준비된 자 라고 하면 될거 같아.”
테인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준비된 자? 무슨 준비?”
유리의 질문에 테인은 생글거리며 힘차게 고갤 도리질했다. 모르겠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아! 이를테면 세상을 구할 준비같은거? 꺄아~ 무슨 백마탄 와아님같네.”
유리는 농담처럼 이야기하곤 깔깔거렸다.
감춰진 차워문 작전에 투입될 정도라면, 어쩌면 적어도 앞의 이야긴 사실일지도. 슬비가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데. 갑자기 세하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안돼에에!”
동시에 세하의 손가락들이 엄청난 소릴내며 게임기의 버튼을 연타했다. 그러고보니, 테인이 얘기하는 동안 세하의 버튼 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다. 관심없는 척 굴더니 저 바보도 역시 신경쓰이는건가.
누구보다 눈치 빠른 유리도 금새 상황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유리가 양손을 치켜들고 음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귀에 걸고는, 번쩍이는 눈으로 세하의 등에 달라붙었다. 슬비는 비스트가 앉아있던 자리로 눈길을 돌렸다.
준비된 자, 비스트Beast라.
신강고등학교 옥상
세하가 옥상문을 열고 나와 난간에 섰다. 유리의 놀림에 못이겨 도망쳐 나온 길이었다. 그치? 그치? 역시 너도 궁금한거지? 암, 몰래 귀를 쫑긋 세울만 하지. ‘난 너에게 흥미가 있어’ 라니 꺄아~ 무슨 의밀까? 응? 응? 세하야, 말해봐~
“하아아아. 누가 귀를 쫑긋이야. 쫑긋은. 하아아아.”
아직도 귓가에 유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한숨 뒤에 또 한숨이 나왔다.
“애당초 이건 다, 그녀석이 멋대로 떠들었기 때문이잖아, 왜 내가!”
“그거, 내 얘기야?”
꽤 낯익은 목소리. 뒤돌아보자, 세하가 나온 옥탑 출입구 위에 비스트가 앉아있었다.
“너, 너가 왜 여기있어? 돌아간 거 아니었어?”
“말했잖아. 작전 전까진 너희랑 함께 한다고. 다른 돌아갈 덴 없어. 너야말로 여길 왜 올라온거지?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여긴 학생 출입금지일텐데?”
옥상문 앞에 학생주임이 붙인 경고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작년 무렵 1학년의 누군가가 옥상에서 말썽을 피웠다던가.
“그야… … 그, 그건 너도 해당되거든? 우리학교 학생이 아니어도… …”
“그러니까.”
비스트가 훌쩍 뛰어내렸다.
“해당사항 없다고. 그보다 내가 널 어떻게 아는지 궁금해?”
그가 세하를 향해 몇 발짝 걸어왔다.
“그 사람의 아들. 이세하.”
결국 또 그 얘기인가. 세하는 급격히 짜증스러워졌다.
“난 아주 어릴적부터 그 이름을 들어왔어. 연구소의 닥터란 인간들은,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뒤떨어지면 이세하를 들먹였거든. 차원전쟁을 승리로 이끈 여자의 아들이 한국에 있다, 네 또래의 그 아이가 어쩌면 너보다 더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비스트가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위상력이 확장되며 일순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 아이가 너의 자릴 빼앗을수도 있다. 그래서, 난 본 적도 없는 널 두려워하고 미워했어.”
비스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내, 압박감이 사라졌다.
“핏줄에 기댄 가능성이라니. 참 한심하고 느긋한 소리야. 그렇지? 널 직접 보니 확실히 알겠어. 맥이 바질만큼 말야.”
힘의 차이. 분하지만 가진 힘의 격차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세하는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노려보는 것 말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위상력의 격차때문이라 생각하는 얼굴이네? 그게 아닌데.”
비스트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세하. 넌 정신상태가 글러먹었어. 나약하고 느슨해 바졌어. 그따위 생각으로 왜 유니온에 남아있는거지? 사람들이 네 엄마의 이름으로 치켜세워주는게 좋아서?”
“뭐야!?”
세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따라 그의 위상력도 펼쳐졌다. 비스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붙어볼래? 뭐가 문제인지 확실히 보여줄수도 있는데.”
“이게 정말!”
세하가 막 달려들려는 참에, 벌컥 옥상문이 열렸다.
안나였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세하와 비스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이저를 끼고있어 시선이 정확히 어딜 향하고 있는진 알 수 없었다.
“검은양팀 호출이에요. 두 사람 다.”
신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 인근
“저, 유정 누나는요?”
세하는 난감한 시선으로 안나에게 말했다.
“김유정 요원도 갑작스레 다른 호출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쪽의 관리를 내게 맡겼고요.”
검은양팀은 최근의 임무들에서 그랬듯이, 또 뿔뿔이 흩어졌다. 제이와 테인, 유리와 슬비가 조를 이뤘고, 하필이면 세하는 비스트와 한조였다.
“작전 상황은 이래요. 레귤러 팀이 차원문을 중심으로 경게를 설정했고 현재 그 외곽에서 중심으로 하급 차원종들을 섬멸하며 진입중이에요. 검은양팀은 이를 지원, 경계외 지역에 빠져나간 차원종이 있는지 수색하는게 임무입니다.”
“시시해.”
비스트가 투덜거렸다.
“여긴 파문의 안쪽 원에 해당되요. 두 사람 다 각별히 주의해주기 바래요.”
비스트가 안나의 손에 들린 서류철을 낚아채 훌훌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었다.
“상급 차원문인거 말곤 평범하네. 외곽부터 어쩌고 저쩌고. 어렵게 돌아갈 거 있어? 최단 경로로 중심부로 들어가 문을 연 놈만 잡으면 그만이잖아. 내가 할께. 그렇게 작전 변경해줘.”
“차원문의 등급이 문제가 아니야. 파문에 의해 저절로 열렸기 때문에, 우두머리급이 최소 둘 이상이란 정찰 팀의 보고가 있었어. 이건 힘의 크기가 아니라 숫자의 문제야. 혼자선 아무리 너라도 위험해.”
“그러니까, 더더욱 가겠다고. 안나. 난 증명해보이기 위해 여기 온거야. 잊었어?”
증명. 유독 그 말이 세하의 귀에 묘한 울림을 남겼다.
“그건 알아. 그래도, 본 작전 전에 벌써부터 무리할 필욘 없어.”
“당신도 날 못믿겠단거야?”
비스트가 낮아진 목소리로 안나를 몰아붙였다. 그러다, 세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금새 그런 기운은 사라졌다.
“그렇게 해줘. 나가서 준비하고 있을께.”
비스트가 전술지휘차량을 빠져나갔다.
“저.”
세하는 비스트의 뒷모습을 향한 안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녀석이 말한 증명이란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뭘 증명한다는거죠?”
“자기 자신. 그는, 자신이 준비된 자가 맞다는 걸, 모두에게 증명해보이고 싶어해.”
안나의 새카만 바이저가 그를 돌아보았다.
“무모하고 오만해 보이죠? 하지만 그게 어떤 마음에서 비롯됐는지, 세하 군은 아마 짐작도 못할거에요.”
신서울 유니온 본부 지하 19층
“본부 내에 이런 층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유정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금속 재질로 된 통로 바닥이 걸을 때마다 차가운 소릴냈다.
“그야 서울에서 거길 내려갈 수 있는 건 몇 안되거든.”
이어셋 너머로 대답이 돌아왔다. 데이빗이었다.
“대단한 영광이네요. 그런데 진심이세요? 유니온의 메인컴퓨터를 해킹하라니.”
유정은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복도를 비추었다. 복도는 그 자체로서 거대한 서랍장같았다. 양쪽 벽면엔 각양각색의, 모양과 크기가 다른 문들이 달려있었고, 그 손잡이마다 어김없이 모두 전자 잠금장치가 접근불가의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안들리세요?”
긴 침묵에 유정이 다시 말했다.
“들리네. 잡음이 심해지는군. 이제 슬슬 자네가 금단의 구역에 가까이 갔단 소리지. 근데 뭐라고 했지?”
그의 말처럼, 유정의 귀에도 지글거리는 잡음이 섞여 들렸다.
“이게 정말 그 비스트란 아이에 대해 알기위해 하는 일인지, 돌려 물었어요. 근데, 지금 상황을 봐선 더 돌려 말할 여윤 없겠네요.”
데이빗이 또 말이 없었지만, 이번엔 어쩐지 그가 소리없이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 그래도 여전히 무슨 의민지 모르겠는데?”
맞나 보네. 데이빗이 일부러 모르는 척 되묻는 것임을 유정은 직감했다. 대학 선배이자 상관이기도 한 그의 그 고약한 성미는 이제 나름 익숙해진 터였다.
“저야 그 애의 코드네임말곤 아무 것도 모르니 궁금해 하지만, 선배는 다르잖아요? 짐작컨컨대, 이미 알만큼 아실거 같고. 뭘 더 궁금해 하시냔거죠. 굳이 제게 해킹까지 시켜가면지요.”
“무슨 소리야. 난 시킨적 없어.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을 뿐이지.”
데이빗이 너스레를 떨었다.
“뭐든지간에요. 일이 잘못되면, 전 무조건 상관이 시킨 일이라고 할거에요.”
그의 웃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겨 들렸다. 잡음도 훨씬 더 심해졌다.
“준 HH. 마이어. 그는, 과거 내가 잠시 몸담았던 극비 프로젝트의 대상자야. 그에 관한 모든 정보가 기밀사항인건 그 때문이지. 자네 말처럼 난 그의 과거를 잘 알아. 서로 안면도 좀 있고. 뭐, 그런 과거야 이제 곧 자네도 전부 보게 될거고. 기밀정보와 자네의 해킹실력을 맞바꾸면서까지 내가 알고싶은 건 하나야. 그가 정말 준비된 자가 맞느냐는거지.”
“준비된 자요?”
“어, 그건… …”
유정의 반문에 데이빗이 뭐라 말했지만, 잡음 때문에 더 이상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정은 이어셋을 벗어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 앞엔 벽에 박힌 작은 모니터와 그 아래 케이블을 연결할 수 있는 단자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였다. 메인컴퓨터와 외부기기를 물리적으로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유정은 등에 멘 가방에서 그녀의 노트북을 꺼내 케이블과 연결했다. 그녀는 한쪽 벽에 편히기대어 앉아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러길 한 시간 여, 비로소 그녀는 비밀의 문 앞에 섰다.
[블루로즈 프로젝트]
신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 인근
마지막으로 준은 대검을 곧게 그어 차원문을 파괴했다. 잔상을 확인하고는 대검을 어깨에 얹었다. 그는 뒤쪽의 이세하를 돌아보았다. 이세하는 납작하게 부서진 차량에 기대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다릴 뻗고 널브러져 있었다.
용케 여기까지 따라오긴 했네.
이세하가 함께 가겠다고 나섰을 때, 준은 그가 도중에 도망칠거라 생각했다. 이세하의 실력으론 그게 옳은 판단이었어.
그가 과욕을 부린 것이다. 세하의 한쪽 소매자락은 검붉은 빛으로 젖어있었고, 유니폼의 군데군데가 찢어지거나 그을려 있었다.
뭐, 짐이 되진 않았으니까. 과욕을 부린 것치곤, 이세하는 앞서 나가는 법 없이 준의 뒤편을 커버하는 서포트 역할에 충실했다. 덕분에 준은 우두머리를 상대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자기 실력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준은 세하에게 다가가 그의 다릴 툭툭 걷어 찼다.
“야, 일어나.”
준은 이세하와 함께 경계구역 안으로 돌아오자, 주변의 시선들이 모두 그들에게 쏟아졌다.
놀라움과 경탄어린 눈길들. 몇몇은 박수를 보내오기도 했다. 우쭐한 마음도 없지 않지만, 준의 마음은 금새 싸늘해졌다. 저들은 조금이라도 실망하면 언제든 돌변해 비난해 오겠지. 사람의 기대란 그런 것이다.
지휘차량이 있는 쪽이 소란스러워 지더니, 여성 하나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김유정이라는 검은양팀의 관리요원이었다. 그녀는 이세하를 붙잡고 다친 곳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구급차량이 도착할 때 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이세하에게 연신 괜찮은지를 물어댔다.
어느새 뒤에서 안나가 다가와 준에게 말했다.
“잘했어.”
“응.”
그런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철썩.
구급요원들이 막 이세하를 차량에 실던 순간이었다. 안나를 본 김유정이 크게크게 걸어와 안나의 뺨을 때린 것이다. 손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안나의 바이저가 날아갔을 지경이었다.
“당신 뭐야!?”
준이 소리질렀다. 하지만, 안나가 준에게 물러나 있으라 손짓했다.
“미쳤어요? 어떻게 애들한테 상급 차원문을 처리하라고 시킬 수가 있죠? 자칫하다 큰 부상을 입거나 죽기라도 했음 어쩔 뻔 했냐고요.”
“유정 누나, 그게 아니라 제가 가겠다고 해서… …”
“세하 군은 가만히 있어! 네 책임은 따로 물을거야. 지금은 가서 치료부터 받아. 빨리 이송해주세요.”
유정은 세하의 말을 자르곤, 구급요원들에게 지시했다.
“역량과 효율성, 위험부담을 고려해 최선의 방법을 택하는게 관리자의 할일이고 채임이에요. 하고싶다고 해서 그냥 다 들어주는게 아니라고요.”
안나는 붉어진 뺨이 아무렇지 않은듯 무심히 바이저를 주워들었다.
“지금 말한 요소들을 다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었어요. 작전은 성공했고, 세하 군의 부상도 경미한 수준이에요. 그 정도 부상가능성은 작전 전에 이미 세하 군에게 주지시켰던 사항이고요. 그럼에도 본인이 선택한거죠. 미성년이라곤 해도, 엄연한 클로저 요원이에요. 그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어요. 김유정 요원.”
안나가 바이저를 착용하고는 말을 이었다.
“감정적으로 군 건 이해해요. 하지만, 뭐가 더 우선되야 하는지 재고해보기 바래요.”
“뭐에요!?”
안나는 유정을 내버려두고 준에게 말했다.
“여기 일은 끝났으니까. 돌아가자.”
“당신네 연구소에선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도 있겠죠. 특히, 그 준이란 아이한테는요.”
김유정이 힐난이 담긴 말을 던졌다.
“차원전쟁 발발 직후, 인류 멸절까지 이야기되던 절망스런 상황에서 급조된 계획이 하나 있었어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강력한 위상 잠재력을 가진 인간을 만들자는 극비 프로젝트였죠.”
안나가 제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준은 공허한 눈으로 유정을 보았다.
“안나 크루거. 당신을 비롯한 연구소의 닥터들은 그렇게 만든 아이에게 온갖 실험과 훈련을 가해 극한의 잠재력을 끌어냈어요. 오로지 차원종과의 전투를 위해서만 길러진거죠. 그게 바로, 블루로즈 프로젝트. 세상에 없는 장미를 만드는 건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