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ER :: 게이트 - 1화
파란트렁크 2016-11-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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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서 조금씩 벌어지는 차원의 균열. 작은 차원종을 뱉어내고는 사라지는 그 틈 사이로,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이질적인 붉은, 푸른, 검은색이 뒤섞인 형용할 수 없는 색을 한 하늘을. 그리고 타오르는 태양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 저들의 세상이 있고, 문을 열어 이쪽 세상으로 넘어올 수 있다면, 우리 역시도 문을 열어 저들의 세상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1
차원의 균열이 언제부터, 왜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의 이해 범주를 벗어난 이 기현상에 대해 인간이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균열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 틈을 비집고 기어 나온 정체불명의 생물들이 인간을 적대시한다는 것뿐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내 기분이 더 **은 것이 아닌가 싶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한 것들이 평범하지만 소중했던 일상을 박살 내놨으니.
차원 전쟁 발발 1년 후. 놈들의 손톱에 모두의 일상은 찢겼고, 이상은 바스러졌으며, 세상은 지옥이 되었다.
2
"오랜만에 지붕 밑에서 자는구먼."
딱딱한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작은 십자가를 품에 안고 쉼 없이 무어라 중얼거리는 사람. ** 듯이 총구를 쑤시고 있는 사람. 흐릿한 미소를 띠며 잠들어있는 사람. 모두 각자의 세계에 빠져 대답을 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항상 봐왔던 광경이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모습이다. 쓴웃음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고 인간은 많은 것을 잃었다. 편히 쉴 수 있었던 집과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이미 기억 저 너머로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은 생존,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들은 잠시라도 두려움을 잊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종교나 무기, 꿈과 같은 것들을.
"형, 이 그만 갈아요. 그러다 깨지겠어요."
자리를 잡고 누웠던 제이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이를 갈았나 보다.
"내 이는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마라 꼬맹아. 잠이나 자."
"꼬맹이 아니라고!"
일부러 놀리듯이 말하자 바로 미끼를 물고 펄쩍 뛰는 녀석을 보니 끓던 가슴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씩씩거리며 날 째려보는 제이가 이상하게 귀엽다 느껴져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하다 꼬마야. 내가 실수했네."
어른인척하기 좋아하는 제이에게는 이런 장난이 딱 맞아서, 한번 시작하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여느 때처럼 길길이 날뛰는 제이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있던 눈빛도 생기를 되찾은 것 같다. 이런 순간들이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지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힘을 주는 게 아닐까.
"그래 제이. 알겠으니까 적당히 하고 자. 피곤할 텐데."
계속해서 자신이 꼬마가 아닌 이유를 늘어놓는 제이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분이 안 풀렸는지 입을 비죽이면서도 순순히 자리로 돌아가 눕는 제이를 보니 기특하다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어리고 착한 녀석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화가 난다.
"자기는 항상 마지막까지 깨 있으면서.. 형도 빨리 자요."
제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말했다. 걱정 어린 녀석의 말에 괜히 코 끝이 찡해졌다.
"오냐.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네."
제이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몸만 뒤척이다가 이내 잠이 든 듯 조용해졌다. 최대한 기척을 줄인 채로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다 잠든 것을 확인하고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밤을 맞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3
불현듯 눈이 떠졌다. 창밖은 아직 검었고, 제이의 코 고는 소리 외에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실내에서 잠을 자는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으려던 순간, 심장이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1년간 수없이 느껴온 고통이다. 조여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차원의 균열이다! 모두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급하게 일어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특별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이들 역시 1년간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슴의 격통을 참으며 최대한 조용히 내 짐들을 정리했다.
"형. 괜찮아요? 또 가슴?"
어느샌가 짐을 다 정리한 제이가 내 옆으로 기어와 속삭였다. 손에는 조악한 너클을 끼고있는 것을 보니 전투준비 역시 끝마친 듯하다.
"괜찮아. 나보다는 우리 상황이 문제다. 큰놈은 없는데 작은놈들이 많아."
"형…. 형은 형부터 먼저…."
제이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기미가 보여 손을 들어 제이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생각해둔게 있어. 부탁 하나만 하자."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방에서 빈 유리병을 꺼내 열려있던 창밖으로 세게 던졌다. 조용한 거리에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차원종들의 기척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숨어있는 건물 바로 밑으로 그 기척들이 움직인 것을 확인하고, 옆에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던 제이에게 말했다.
"큰 거 한 방 제대로. 부탁할게."
"…잘 숨어있어요."
표정관리가 잘 안 되어서인지 불만 가득한 제이의 입에서 걱정 가득한 말이 튀어나왔다. 항상 녀석에게, 일행 모두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주변의 다른 일행들도 각자 무기를 잡으면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이런 순간에도 ** 듯이 뛰는 심장은 진정될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각성한 능력은 차원의 균열이 벌어지는 것과 거기서 튀어나온 차원종들의 기척을 탐지하는 능력이다. 전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능력이지만 약간의 은신 능력도 갖추고 있어 이때까지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리를 이룬 후로는 일행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안전한 곳에 숨어서 전투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지만, 균열이 벌어질 때마다 조여오는 심장 탓에 항상 그들의 도움만 받을 뿐 별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조심해요 형. 다녀올게요!"
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쓸데없는 자괴감에 빠져 시간을 지체하다니, 실격이다. 제이는 지금 당장에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나갈 기세로 양손에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든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 부탁한다."
최대한 웃는 표정을 하며 제이에게 말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제이가 준비를 마친 것을 보고 잔뜩 긴장한 채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이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순간 스쳐 지나가는 제이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내 가슴을 찔렀다. 심장을 옥죄는 것과는 다른 괴로움이 느껴졌다.
창밖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버린 차원종들의 기척을 느끼며, 또 동료들의 고함과 차원종들의 비명을 들으며 조용히 건물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파져 오는 심장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도 없어서 기어가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나는, 항상 숨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
차원종들의 목 긁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느껴지는 기척 역시 없었다. 전투가 끝난 것일까. 지형적으로 몸을 숨길 장소가 많은 덕분인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친 사람은 없을까? 사상자는? 순간 여러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지만,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