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To be with you

카페인의노예 2016-11-06 3

"저기, 지금 뭐라고?"

유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디선가 G 타워를 향해 날아든 바람이 살랑거리며 뺨을 간지럽히는 평화로운 오후였지만, 심장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고른다면 널 고를래. 걔네 둘 보다는 그나마 니가 말이 더 잘 통하니까. 그 둘 보다는 니가 더 좋아."
"아... 그래? 그...렇구나...아, 아하하.....나, 나 잠깐 볼 일이 좀 생각나서! 먼저 가볼께!"

그렇게 말하며 유리는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일단은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좀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걸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그냥 친구로서 건넨 말일 뿐이야. 분명 그럴거야. 어차피 게임밖에 모르는 바보같은 녀석인걸. 그런 녀석인걸,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어쩌다가 좋아하게 된 걸까.'

유리는 잠시 멍하니 제자리에 멈춰서 신서울의 저 편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랗게 물들어 있었고, 사그락 거리며 부서져 내리는 햇빛 조각들이 뺨에 부드럽게 뿌려지고 있었다.
첨엔 그저 몸만 큰 어린아이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받기 싫어서 남에게 일부러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 겁은 많지만 성격이 나쁘지는 않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도 가끔씩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사소하지만 작은 배려들이 좋았다. 조금 더, 너에 대해서 알고 싶었어. 지금보다 조금 더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되고 싶었어. 단지 그 뿐이었는데.......

누구보다 더 널 많이 생각하고 있어. 이런 내 마음을 너에게 전하고 싶어. 
세하가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용기를 낼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세하가 알아주길 바랬고, 한편으로는 세하보다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

세하는 잠시 유리가 뛰어간 곳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방금 전에 뭔가 이상한 실수를 하지는 않았겠지? 자연스러웠어, 그렇지? 제발 누가 그렇다고 말 좀 해줘!

'나...... 설마 들키진 않았겠지?'

유리는 그닥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니까, 분명 모를거야. 아니, 제발 몰랐으면!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돌려서라도 '좋아한다' 라는 말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아니, 애초에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한 적이 대체 언제였던가?

늘 인간 관계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과도한 기대와 부담, 그리고 자신을 마치 괴물 보듯이 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맞춰주는 것은 도저히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멀어져갔고, 친구도 석봉이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어쩌면 게임 말고도 인간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툴다는 공통점이 그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된 걸지도 모른다.

노력을 하는 만큼의 보상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게임과 달리 인간 관계는 너무나 불안했고 어려웠다. 그런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거는 도박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유리는 달랐다. 처음부터 순수한 얼굴로 찾아와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포용할 줄 아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타고난 천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점이 다른 여자애들과 다른 특별함으로 다가왔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일부러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하려고 먼저 다가가게 됐다.
그렇게, 그녀는 세하의 하루 중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버렸다.

비록 모두가 널 떠나서, 너의 우주가 비좁아져도 나만큼은 너의 곁에 남아줄게.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 가고 싶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넌 모르겠지. 내가 이렇게 널 좋아하는 걸.'

언제 다시 정식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 유리가 받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만약에, 언젠가 정말 꾹꾹 눌러 담았다가 터지게 된다면, 그땐 입이 아니라 눈에서 흘러나올 것 같았기 때문에.

***

복구가 끝난 후 오랫만에 등교하는 학교는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아이들과 정상 수업을 하는 것에 아쉬움을 토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왔다. 차원종이 학교에서 나타났던 일은 마치 거짓말같이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세하는 그저 멍 하니 창가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자신을 향해 살짝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젠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광경이었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건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풍경 어딘가, 유리가 있을텐데. 별 일 아닌척 사소한 핑계를 만들어서 얼굴이라도 보러 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게임이나 하던 자신이 시간을 만들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게 뭔가 어색하기도 했고, 괜히 남들이 눈치챌까 조마조마 했다.

'그래도 역시......'

슬쩍 지나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매점이라도 간다고 하면서 둘러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유리의 반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쯤, 다른 반 애들이 유리네 반 문 앞에 잔뜩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창문 너머로 유리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고, 한 남학생이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넓고 단단해 보이는 어깨, 한 눈에 봐도 운동을 많이 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대체 저 사람은 유리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는걸까?

"야, 저거 검도부 주장 아냐?"
세하는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은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너 몰랐냐? 검도부 주장이 예전부터 유리 좋아한다는 소문 있었잖아."
"헐, 대박이네. 그럼 설마 오늘 고백이라도 하려고 온 건가?"
"그럴껄? 그 전부터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 할거라고 말했다고 하니까. 게다가 저 선배 얼굴도 잘 생겨서 은근히 인기도 많은데. 하, 좋겠네, 좋겠어. 결국 커플도 될 놈만 되고 안 될놈은 안 되는 건가."

세하는 다시 뒤돌아서 자신의 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가 어떤 결정을 한다 해도 그걸 자신이 막을 방도는 없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만약 유리가 고백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봐 버리면 그땐 정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것 같았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좀 더 준비를 단단하게 해야 돼. 니가 그 사람과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어도, 내 앞에서 무엇을 했다고 자랑을 하더라도 그냥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잘 됐다, 라는 말 한마디를 건낼 수 있도록.

가슴 한 켠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공허함은 뭘까. 분명 여지껏 겪어본 적이 없는 이 느낌은 어떻게 해야 채울 수 있을까. 역시 게임을 하면 좀 나아질까.
 누군가에게 털어놓을까, 싶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석봉이나 제이 아저씨에게 연애 경험이 있을리가 없고, 슬비에게 물어봤자 왠지 드라마에서 본 걸 토대로 말해줄게 뻔했다. 유정 누나에게 물어보기도 뭐했고, 미스틸은 아직 어리고.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해보면 그 주장이라는 사람은 누가 봐도 남자답고 멋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나와 비교가 될까? 왜 TV에서 나오는 사랑 이야기들은 대부분 예쁘고 아름답게 비춰지는데 난 이렇게나 초라할까. 지금껏 노력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후회와 원망이 밀려왔다.

세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무심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지금 뭘 하고 있냐고. 어서 지금이라도 마음을 전하라고 재촉이듯.
과연 내게 그럴 용기가 있을까.
세하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죄송해요, 선배. 저 아직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게다가 지금도 충분히 남들의 이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러니.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역시 어쩔 수 없는 건가."
검도부 주장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친구들의 부추김으로 큰 맘 먹고 용기를 내서 유리에게 말 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오히려 그게 역효과가 일어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저기, 정말 죄송해요, 선배. 선배가 싫은건 아니지만, 아직은... 그러니까... 그게......."
"아니, 괜찮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일방적으로 행동한건데."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듭 미안하다고 말한 뒤 바깥으로 나갔다.
교실 안을 맴도는 공기를 참을 수 없었다. 원치 않게 받게된 이목과 좋을대로 내뱉은 타인의 생각들이 떠도는 그 공간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왜 하필 나일까. 물론 그 선배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검도 연습에 열정적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어쩌면 연인으로서 이상적일 수 있는 사람이겠지만, 유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서 자리잡은 누군가를 억지로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게 가능했다면 혼자 끙끙 앓지도 않았을 것 이다.

'왜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이럴때 어떻게 해야할지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검도부도, 책도, TV도 그 무엇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복도로 나와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생각해보면 여기서 세하와 슬비랑 같이 점심을 먹고는 했는데. 그 때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웃으면서 지낼 수 있었는데.

세하는 지금쯤 게임이나 하고 있겠지. 눈치 없는 놈. 
근데 그런 눈치없는 놈을 좋아하는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유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흠...... 그렇단 말이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제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사뭇 진지한 느낌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평소에는 실없는 농담을 자주 해도 이럴때는 진지한 분이었지.
세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핸드폰을 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제이에게 자신의 상황을 쏟아내고 있었다. 
굳이 전화를 선택한 건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기가 쑥쓰러워서 그랬던 것도 있었다.
물론 자신의 짝사랑 상대가 유리라는 것은 아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좋아하는 아이가 있고, 오늘 학교에서 그 애가 선배에게 고백을 받는 광경을 봤다. 그렇지, 동생?]
"네, 맞아요......."
[그런데 말야, 그 애가 고백을 받아들였어?]
"네?"

머리에 뭔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때 상황이 어땠지? 유리가 받아들이려 했었나? 적어도 그런 분위기였나? 유리의 표정은 어땠었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단지 그 상황만 보고 도망치듯 나와버렸으니.

[그 반응을 보니, 끝까지 안 보고 그냥 나온 것 같은데.]
"윽... 네, 맞아요."
[어찌 됐든 그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도 안 됐고, 용기가 없었으니까 눈 앞에서 도망친 것 처럼 보이는군.]
"......."
[일단은 말이야, 결과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게 어때?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야. 지금 이대로는 아무것도 바뀌는것도 없잖아?]

사실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유리가 고백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걸 보게 된다면, 정말 그땐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세상에 나를 받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지금보다 더 높고 단단한 벽을 둘러싼 채 살아갈 것 같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저 살짝 떨어진 채 나와는 상관 없다며 손 안의 작은 게임기 만이 나의 세상이라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정말, 나는 행복했을까? 절대 아니었다.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웠다.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며 다독이는 손길이 좋았다.
그리고 그 모든것을 알게 해준것이 유리였으니까. 그러니까, 이 감정은 유리가 아니면, 유리를 대신할 수 있는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생각이 좀 정리 됐어요."
[고맙긴. 그러니 다음부터는 혼자 앓지 말라고, 동생.]

창 밖을 바라보니 부드럽게 노을을 카펫삼아 태양이 산 너머로 퇴장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장 봐야 하는데. 조금 있으면 엄마도 도착할 시간이고.
그때까지 다시 생각이나 좀 정리해두자.
그렇게 생각하며 세하는 몸을 일으켰다. 동네 놀이터라도 잠깐 들려서 바람이나 쐬자고 생각하며.

***

유리는 휘두르기가 110번을 넘어간 이후로는 세는 것을 포기했다.
이미 온 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클로저가 된 이후로 정말 오래간만에 잡은 죽도였다.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였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때마침 놀이터에는 사람도 없어서 다른 사람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역시 몸을 움직이기를 잘 했어. 아무생각 없이 땀을 흘리니 복잡했던 머리 속이 말끔히 정리되었다.
그때였다.

"응? 여긴 왠일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세하가 서 있었다. 아니, 어째서?

"세, 세하야? 여, 여긴 왠일이야?"
"우리 집이 이 근처라서... 넌?"
"나도 집이 근방인데? 하하, 굉장한 우연이네?"

뭐, 뭐야? 왜 하필 지금이야? 방금 휘두르기를 한 참이라 땀도 많이 났는데! 대체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이냐고! 하늘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이왕이면 좀 꾸미고 나왔을때 마주치면 얼마나 좋아?

세하는 그저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다며 털썩 벤치에 앉아 버렸다.
아아, 어쩌지? 괜히 의식해서 행동하면 이상한 오해나 받을텐데? 자, 침착하자, 침착해, 서유리.
넌 아무렇지 않아. 넌 그냥 운동을 하러 나온 것 뿐이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행동해.

"왜 그래? 안절부절 못 하고. 혹시 어디 아파?"
"응? 아,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유리는 세하와 살짝 떨어져서 앉은 채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차마 세하를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다. 얼굴을 닦는다는 핑계로 수건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세하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면 사복 차림의 유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저 간편한 흰색 티셔츠에 트레이닝 복 바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묘하게 새롭게 보이는 것은 기분탓일까. 예전에는 둘이 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분명, 내가 변해버린 탓이겠지. 정확히는 널 대하는 나의 마음이, 예전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변해서 그런 것이겠지.

"오늘 고백 받았다며?"
세하는 일부러 넌지시 던지듯 물어보았다. 이 다음에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그리고 그 대답을 마주했을 때, 난 너에게 어떤 얼굴을 해야할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멍하니 있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남자답게 보란듯이 찔러보고 그에 맞게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 그건 왜? 아니, 그것보다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아, 그게...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었어."
"그래? 음... 거절했어."

정말 무신경하기 짝이 없어. 
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하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물어볼 수 있겠지. 그게 어찌보면 가장 너다운 구석이구나.
그런데도 은근히 남을 챙겨주기는 또 잘해서 대놓고 미워할래야 미워할수가 없었다.

세하는 유리가 볼 수 없게 몰래 주먹을 쥐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일단 한 고비는 넘긴 셈이야.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는건 안 돼. 유리 성격이라면 지금 그냥 연애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일 가능성이 크니까.

"그렇구나."
"응."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둘 사이의 대화도 노을과 함께 지워지고, 입 안에 맴도는 말들을 끄집어내 둘 사이의 거리에 자리잡은 텅 빈 공백을 채우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너에게 아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 뿐인데.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들을 함께 할 수 있다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너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은데. 
왜 그것이 나에겐 이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저기, 나 이만 가볼께!"
유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더 이상은 참기가 힘들었다. 당황하는 세하의 얼굴을 뒤로 하고 유리는 연습용 죽도를 손에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용기가 없는 자신이 싫었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수도 있는데! 이렇게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난 이렇게도 용기가 없을까?
정미한테는 좋아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왜 세하한테는 그럴 수 없는거지?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그렇게 말하며 세하는 유리를 세웠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지금 말하지 못하면, 난 분명 후회할 거야. 계속 저기 멀어지는 뒷모습만 보면서 그저 한숨만 쉬게 될 거야.
그런건 싫어. 절대로 그렇게 되지는 않을거야!

"저기 말이야...그게... 그, 그러니까......."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 돼, 이런건 좋지 않다고! 도대체 난 왜 이러는 거야? 왜 중요한 순간에 말 하지 못하냐고?
유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부드럽게 쏟아지는 머리칼과 맑은 눈, 그리고 입을 벌릴 때 살짝 도드라져 보이는 덧니.

"내가 고백해도, 그때도 거절할거야?"
"......어?"

한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떨어지던 벛꽃잎도, 어디선가 불어오던 바람도, 저 멀리서 들려오던 새들의 지저귐도. 아스라이 멀어져 이제는 마치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거야? 고백? 세하가? 나한테? 정말로?

"저기,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뭐, 들은 그대로야. 너 좋아한다고, 서유리. 친구가 아니라, 너라는 여자애를 말야."

유리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하긴, 놀랄만도 할거야. 나라도 이런 상황엔 놀랄 수 밖에.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미안해. 그래도 꼭 말하고 싶었어. 언제부터 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널 진심으로 계속 좋아하고 있었어. 놀랐다면 미안해. 하지만 정말이야. 정말로 널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세하는 뒤로 돌아섰다. 그래, 이제 된거야. 결과가 어찌됐든,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한걸로 충분해.
미움받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렇게 된다고 해도 널 원망하거나 하지 않아.
그런건 익숙하니까. 
그때였다.

"야, 잠깐 기다려!"
세하가 뒤를 돌아보니 유리가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 왜 그러지? 화 났나? 내가 고백해서?

"너 정말...! 무심한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하잖아!"
"어? 어...그게... 미, 미안."
내가 고백한게 그렇게 잘못이었나? 잘은 모르겠지만 세하는 일단은 사과를 했다.
유리를 화나게 하려고 한 게 아닌데. 내가 너무 일방적이어서? 그래서 화가 난 건가?

유리는 그런 세하를 보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아, 나도 참. 원래 이런 애인걸 왜 자꾸 잊어버릴까.

"대답은 듣고 가야지. 너 좋을대로 혼자 고백하고 가는게 어딨어?"
"응?"
"나도 너 좋아한다고, 바보야."
"어....?"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오고, 벚꽃잎이 다시 살며시 땅의 품으로 안기고, 바람이 부드럽게 볼을 감싸 안았다. 앞으로는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둘을 위한 시간들.
세하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말을 건넸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

유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숙인 고개로 내리앉은 홍조가 엿보였다.
고마워. 받아줘서 고마워. 나와 함께 해주겠다고 해서 고마워.
이제 앞으로 늘 웃게 해줄게.
그 말에 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늘, 함께야.

-fin.

원래는 나타와 레비아 이야기를 한편 더 쓰려고 했는데 갑자기 급 세하 유리가 떠올랐네요
다만 아쉬운건 분량 조절 실패가 되서....원래 구상한 내용보다 더 늘어나버렸... ㅇ<-<

그치만 개인적으로 세하 유리도 참 좋아하는 커플이라 쓰면서 나름 재밌었던 것 같아요 :D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썼던 것 중에 제대로 커플이 된건 이번이 처음이군요...하하... -_-;;;)

귀중한 시간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다음번엔 예정대로 나타와 레비아 이야기를 들고 올게요~
2024-10-24 23:12:0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