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와 슬비가 세하를 부려먹을뿐인 이야기

사일로시빈 2015-02-03 11

"이세하, 절조라는 말 알고있니?"

"이젠 하다하다 국어교육이냐?"

"절조란 절개와 지조를 합친 말이야. 신념이라고 풀어쓸 수도 있어."

"오, 그럼 난 절조있는 남자네. 한결같이 게임을 하고있잖아."


 아니나다를까 게임기에 싸한 위상력이 감돈다.

푸른 기운을 무시하며 있는 힘껏 잡아**만 무형의 힘에 이끌려 팔근육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른다.


"빨리 놓지 않으면 키패드를 하나하나 또각또각 부러뜨릴 거야."

"너 오늘 왜 그렇게 심술이야? 그 날이야?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마법의 날이야?"

".....게임기 대신 죽고싶니?"

"그래! 차라리 날 죽여라!"


 이게 얼마짜린데! 용돈 꼬박꼬박 모아서 손에 얻은 꿈과 희망인데!

라고 생각한 순간 게임기가 코앞으로 돌진했다. 초속으로 콧등이 짜부라지고, 눈물방울이 허공에 은하수를 그린다.

뒤쪽에서 뒹굴면서 게임기가 무사함을 확인했다. 하나님조상님부처님부모님 감사합니다하고 두서없는 인사를 올렸다.

바닥에 누운 상태로 세이브를 하고있자니 슬비가 다시 의자째로 일으켜세운다.


 염동력이란 여러모로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소파에서 리모컨을 가져올 때라던가, 집 앞에서 잊어버린 열쇠를 챙길 때라던가, 침대에 누운 상태로 불을 끈다던가.

어쩐지 위상력으로 매일매일 사소한 생활의 발견을 하고있을 고매한 리더님을 생각하니 바람빠진 풍선마냥 비웃음이 흐른다.


"이젠 실성했니?"

"야,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말로 하라고."

"말로 하는데 네가 듣지를 않잖아."

"지구의 언어로 말해야 알....알았어, 알았으니까 의자 내려놔라."


 염동력으로 의자를 뺄 줄 알았는데 평범하게 등받이를 잡아끌어 앉는다.

앞에 놓인 서류뭉치들로 봐선 여느때처럼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앞으로에 대비해 자료조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매일 글뭉치나 팔랑이기에 영락없이 좋아하는 일인줄 알았는데, 역시 드라마를 ** 않을 때는 예리해지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뭘 사왔냐?"

"밀크티라고 하는거야. 게임에는 나오지 않는 물건인가봐?"

"그거 홍차에 우유 섞은 거잖아. 이상하지 않냐?"

"커피에 우유 섞는 것도 이상하겠네?"


 또 턱을 괴고 후후하고 간지럽게 웃는다. 유리도 그렇지만 이 녀석은 가끔 이쪽을 애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누굴 애 취급하는건지...


 이슬비는 버려진 고양이라면 고지식하게 상자에 틀어박혀서 소리도 안 내고 웅크리고 있을게 뻔하다.

주인이 얌전히 있으라고 했으니까 충실히 말을 잘 듣는 것이다. 그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들오들 떨고 있겠지.

늘 잘난 척하지만 혼자서는 늘 힘들어하고, 자존심은 쓸데없이 쎄서 힘들단 말도 안 한다. 아주 귀찮은 녀석이다.

결국 팀원인 내가 뒤에서 받쳐주는 수밖에 없겠지.


"생각을 해봐라."

"뭐가?"

"녹차에 우유를 섞는다고 생각해봐."

"그린티라떼라고들 하잖아."

"음...그럼 물에 우유를 탄다."

"그건 좀 무리수 아니니?"

"지금 고도의 아저씨 개그 한 거야?"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입을 뾰족히 세우고 또 귀를 만지작거린다. 슬비는 곤란할 때 살짝 도끼날을 세운 눈으로 옆을 노려보곤 한다.


"아무튼 중요한건 궁합이라는 거야."

"넌 그 당연한 소리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헛소리를 소모해야하는거니?"

"저번에 차원종 하나 잡는다고 인공위성 소모한 애한테 듣고싶지 않은데."

"다, 다행히 버려진 거라서 잘 해결됐잖아!"


 또 틱틱거리면서 책상 밑으로 정강이를 툭 찬다. 이게 요즘 연약한 부위를 막 차네.

마음같아서는 반격하고싶지만, 21세기는 남녀차별이 만연하니까 관뒀다.

이슬비가 입만 다물면 미인이란 저번에 발언은 전언철회한다. 이 녀석은 아무 것도 안할 때 비로소 미인이 된다.

뭐야, 껴안는 베개같은 인간성인 거야?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가서..."

"처음? 제이 아저씨랑 유정이 누나를 어떻게하면 맺어지게 할 수있나 하는 기획이었나?"

"그, 그건 고려 중이야...."


 고려 안해도 진도 충분히 잘 나가고 있지 않나... 오늘도 그렇고.


"그러고보니 너 부쩍 말이 많아졌다?"

"네가 자꾸 귀찮게해서 좀 집중을 덜해도 되는 게임을 하고있어."

"역시 하긴 하는구나..."


 게임기를 위협하니 스마트폰으로 대체한다. 요즘은 모바일게임도 많으니까 여차할 때는 좋은 여가가 된다.

슬비가 어쩐지 측은하단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과감히 무시했다.


"이번엔 말 끊지말고 잘 들어."

"네이네이."
"네는 한번만 해."

"네에에에에-."


 또 걷어차였다. 저 녀석이 화나면 짓는 표정이 고슴도치같아 귀여우니까 무심코 놀리게 된다.


"유리랑 어디 갔다왔어?"

"유리가 말했잖아. 고기 사러갔지."

"둘이서 고기도 구워먹고 그러니?"

"야, 당연히 아니지. 다 유리가 가져갔지. 난 들러리였다고."


 어쩐지 '당연히'까지 말했을 때 눈에 띄게 가라앉고 '아니지'하고 말했을 때 생기가 돌아온다.

감정의 기복이 분수처럼 찾아오기라도 하는걸까. 역시 사춘기 여자애들은 알 수 없다.

게임처럼 공략본이라도 있으면 편할텐데.


"근데 왜 사진을 찍어서 굳이 나한테 보냈어?"

"유리한테 물어봐라."

"난 고기반찬도 없고 서류작업이나 하니까 질투 좀 해보란거 아니었어?"

"그래서 지금 질투하는 거냐?"

"너, 너따위를 질투할리가 없잖아."


 왜 그 부분에서 더듬는 거야. 유리랑 같이 쇼핑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른다.

여자애들은 같이 쇼핑하는걸 대단한 여가로 여기니까.

이 녀석 얼마나 유리를 좋아하는 거야. 그보다 친구 없나? 쇼핑이 같이 하고 싶으면 정미도 있을텐데.


"음.... 그럼 다음엔 네가 먼저 유리랑 가자고 권해봐, 쇼핑."

"......하아?"

 어째선지 기막혀 하고있다. 설마했던 헛다리?


"요즘 너무 태만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뭐 임무 끝나고 쉬는건데 리더님이 뭐라고 하실 부분은 아니지. 너도 전에 나랑 영화 봤잖아."


 말해놓고 좀 부끄러워졌다. 슬비가 팔짱을 끼고 다시 입을 삐죽이고 있다.


"그, 그건 남는 재원을 효율적으로 소모하기 위해서 시도한 방편 중 하나였어. 내가 오해와 기탄없이 착각하지 말라고 말했을텐데?"

".......음. 너말야, 역시 빨리 말하기 대회라던가 나가봐라. 분명 우승이야."


 격려해줬는데 어쩐지 또 겉어차였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네...

슬비가 다시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문이 벌컥 열린다.

두 개의 부푼 꿈과 희망의 언덕이 시야각에 쏙 들어와 공간을 튕겨냈다.


"안녕-!! 좋은 점심!"

"아, 안녕..."

"굿애프터눈."


 간단한 영어로 받았더니 유리가 또 깔깔 웃는다.


"야, 세하야. 고등학생이 되서 영어도 몰라?"

"엉...?"

"점심은 런치야!"

"........"

"........?"


 대체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까....


"너 나랑 같은 고등학교 맞냐?"

"에?! 런치 아냐!?"

"아니... 맞는데.... 나도 맞아...."


 유리가 손뼉을 치며 명랑하게 웃는다.


"아, 알아! 좋은게 좋은 거란 뜻이지! 이 언니에게 맡겨!"

"....뭘 맡겨 바보야... 역시 넌 바보다."


 건방지게도 이쪽을 제멋대로 쓰다듬으면서 우쭈쭈하고 소리내어 달래고 있다.

그 높이에선 그 기세가 내 목과 뒤통수와 귀를 압박하니까 그만둬줬으면 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뿌리치질 못하고 있자니 어쩐지 슬비가 밀크티를 따고 벌컥벌컥 마시고 있다.

......사람은 갑자기 목이 엄청 마를 때도 있으니까, 이해한다. 조바심 내지 말았으면 하는데.

그보단 그냥 우유를 마시라고. 역시 떫었는지 마시고나서 켁켁거리고 있다.


"오오, 오늘은 다른 게임 하고 있네?"

"이건 너라도 해볼만하지 않을까."

"뭔데뭔데? 가르쳐줘!"


 또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달라붙으니까 이쪽은 곤혹스럽다.


"간단해. 점프를 해서 도로를 넘어가는 거야."

"끝에 뭐가 있는데?"

"나도 끝까지 못 가봐서 몰라."

"음.....에! 죽었다!"

"차에 치이면 당연히 죽지."

"어쩐지 불타오르네."

"참고로 난 54단계까지 갔어."


 아.... 또 콧대가 높아진다... 몹쓸 버릇이다. 석봉이에게 시시한 게임 취급 받아서 가슴이 좀 아팠지만서도.

요즘 석봉이가 온 힘을 다해서 날 이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는데, 가끔은 좀 봐줘도 되지 않나.

유리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눈을 빛낸다.


"오오! 그래! 이걸로 내기하자!"

"음?"

"음료수 내기야!"

"진 사람이 사오는 거야?"

"진 사람이 저 홍차를 마시는 거야."


 슬비가 팔짱을 끼고 따진다.


"자, 잠깐! 왜 이게 벌칙게임이 되는 거야! 그렇게 못 먹을 맛은 아니, 아니야."

"음, 그럼 보상을 다른 걸로 하자."

"예를 들어?"


 이슬비 저거 또 알게 모르게 휘말리고 있다. 역시 유리에겐 묘한 마력이 있는게 틀림없다.


"음료수 사러 세하랑 같이 다녀오기!"


 ............응?


"야, 왜 나야? 나도 같이 해야지."


 유리가 이쪽의 볼을 쿡쿡 찌르면서 뭘 모르네, 하고 손가락을 흔든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꼭 승냥이같다.


"세하는 너무 잘 하니까 페널티야."

"불합리해."

"그러니까 이번에는 열외! 다음에 다른 게임으로 승부하자!"

"젠가는 좀 봐주라..."


 슬비가 볼을 부풀리고 있다.


"그, 그치만... 왜 세하랑..."

"한 명이 가서 세 개를 사오면 손이 모자라잖아!"

"기적의 수학자라는 말 혹시 알고 있니?"

"왜, 설마 질까봐 그래?"


 어쩐지 유리가 이쪽에 기대온다. 밤하늘처럼 쏟아진 머리카락이오자락 끝 주머니에 걸렸다.

슬비의 얼음색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 얼어붙는 것처럼 보였다.

어, 왜 공기가 갑자기 답답해졌지? 산소님?

찰나의 순간 동안의 시선 교환 후 슬비가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기분이 나기 시작했어."

"뭐, 나도 처음이니까! 일단은 너도 한번 연습해봐."

"툭툭 누르기만 하면 되니?"

"응!"


 아니 그걸 왜 내 걸로 하고있어.... 내 귀중한 배터리를 빨아먹는 흡혈귀들이신가.


"서로 비교해서 앞서기만 하면 이기는 거니?"

"음....세 번 해서 가장 높은 수를 내밀기로 하자!"

"이세하, 기록해."


 켁.


"내가?"

"그럼 거기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야? 심판이라도 해."

"그 정도 숫자는 알아서 좀 기억해라."

"네 폰이 누구 손에 있는지 잊었니?"

"너 특기에 쓴 바이올린 연주 지워라. 협박이라고 다시 써."


 투덜투덜 종이를 챙기고 있자니 유리가 슬비에게 주먹을 내민다.


"가위바위보!"

"보, 보.....?"

"으... 졌네."


 정작 이기니 슬비가 어쩐지 으스대고 있다. 하여간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은 알아줘야 한달까....


"그럼, 먼저 할께."


 곧바로 결판이 났다.


"4, 4라니.... 이건 착오가 있는 거야."

"그럼 이제 내 차례네?"


 유리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민다. 물론 유리도 별반 많이 가진 못했지만, 어쩐지 어깨를 으쓱이고 있다.


"7이다! 이기고 있네?"

"하, 합산하는 걸로 경쟁하면 어떨까?"

"으응-, 싫어."


 딱 잘라 거절하는 서유리씨. 너무 단호해서 단호박인줄 알았다. 분명 웃고 있지만 어쩐지 눈매가 날카로운 기분이 든다.

슬비가 살짝 웃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잘 알았어."


 폰을 건네받은 슬비가 묻는다.


"그런데, 같이 마실 거만 사러 나가는 걸로 괜찮아?"
"뭐가아?"

"그걸로 만족해?"

"그걸로 좋으면 안되는 거야?"

"안된다고는 하지 않았어."

"슬비는 어쩌고 싶은데?"

"난 지금 이 상태라도 상관없어."

"그럼 져줄 수 있지 않을까?"


 니들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라, 몰래 게임기를 꺼냈지만 슬비는 눈치를 못 챈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어디가 좋아서?"

"몰라."

"몰라?"

"그냥 좋을 수도 있잖아."

"난 이해 못 하겠어."

"슬비는 너무 머리를 쓰려고 해."

"넌 너무 감정적이야."

"그야 복잡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잖아?"

"어째서 복잡하지 않아?"


 .......응? 뭐야? 설마 싸우는 거 아니지? 살살 해라, 살살.

어느덧 2회전이 끝났다. 슬비가 열심히 눈을 부릅뜬 덕에 성적이 좋아졌다.

이제 유리가 23, 슬비가 21이다.


"야, 니들 엄청 잘하게 된 거 아니냐. 이제 니들 폰으로 해라."


 슬비가 생긋 웃는다.


"네 기록을 깨버릴 생각인데."

"....농담이지? 빨리 농담이라고 말해줘..."


 대망의 3회전도 게임 특성상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둘이 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달까, 콘크리트마냥 굳는 기분이 들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니들 의외로 게임 좋아하는 거 아니냐. 이제야 게임의 위대함을 안 거야? 이러다가 게임 중독되는 거 아냐?


".....2, 25라니...."


 유리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이번엔 내가 이기겠네!"

"이번에라니? 언제나 이기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넌 그런 점이...."


 슬비가 말을 하다 입술을 깨문다. 둘이 한참을 노려보고 있길래 재촉해준다.


"야야, 이러다가 유정 누나 쳐들어와서 일거리 주면 어쩌려고 그래. 빨리 끝내고 내 폰이나 돌려줘."

"아이 참, 걱정하지 마! 안 잡아먹어!"

"그야 이건 차원종도 못 먹는 식품이거든요."

"마, 말시키지 말아봐, 지금 중요하니까!"


 힐끗 들여다본다.


"아, 깜빡하고 말 안 해준게 있는데."

"에?"
"그거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화면이 다가오잖아. 그럼 게임 오버야."

"에...? 에...?"


 아, 아까웠다. 대망의 동점이다. 25 : 25의 스코어라니. 설마 이렇게 깔끔한 점수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이, 이건 좀 비겁하지 않아? 다시 해!"


 유리가 주먹으로 콩콩 테이블을 두드리자 슬비가 쿡쿡 웃는다.


"운도 실력 아니야?"

"으으.... 야, 세하야."

"그래, 이세하."


 폰을 돌려받아서 발열 상태를 확인해보는데 당연하다는듯이 화살이 날아든다.

아 왜, 동점이니까 내기는 없던 걸로 치면 어디가 덧나냐.


"그래서, 누구야?"

"어, 엉?"

"심판이 판정승을 해줘야지. 누구랑 같이 갈래?"


 슬비가 묻자마자 유리가 지원사격을 한다.


"그래! 세하 네가 정해!"

"........어?"


 두 명이 어쩐지 무서운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누구랑 가고싶어?"

"누구랑 갈 거야?!"





*


세하와 유리가 쇼핑할뿐한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유리vs슬비로 승부를 겨룬 게임은 모든 짐작했다시피 길 건너 친구들


점심때 하는 인사는 절대로 굿 런치가 아닙니다

2024-10-24 22:22:4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